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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26화


863화

“제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 자들이라・・・”

록마틴 후작은 포로에 대한 이드의 말이 떠올랐다.

“네? 잘 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혼잣말이다.”

“아, 네. 이쪽입니다.”

후작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던 기사는 혼잣말이라는 말에 안내를 계속했다. 어둡고 좁은 계단을 지나자 마법으로 불을 밝혔음에도 퀴퀴한 어둠이 구석구석 숨어 있는 지하 감옥이 나타났다.

“충! 주군을 뵙습니다.”

록마틴 후작의 등장에 프랑 기사단의 용기사가 가슴을 두드려 예를 표했다.

“고생이 많았다.”

수일간 고생 중인 기사의 수고를 치하한 록마틴 후작은 반질반질 빛이 나는 창살 너머를 바라보았다.

감옥 안에서는 마침 프리실라와 베일록이 후작의 방문을 알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용기사의 주군이라면 제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록마틴 후작님이시겠군요.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 프리실라가 인사드립니다.”

“우리끼리는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적당한 조건만 제시한다면 제국에 협조하겠습니다.”

“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 할 말을 알고 있다는 듯 던져 오는 말에 재활용하지 말라는 이드의 말이 생각난 록마틴 후작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대화를 마치고 방을 나서던 이드는 록마틴 후작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명예 후작의 의견은 소중히 받아 두도록 하지.’

정신의 관에서 잡은 포로의 처분에 대한 이야기의 답이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받아 두겠다고 표현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쯧. 결국 벌써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다른 의도가 없다면 얻을 정보가 없는 포로를 살려 둘 이유가 없다. 그것도 그냥 일반 포로가 아니라 지탄받아 마땅한 인체 실험을 자행한 위험한 포로를 말이다.

“애초에 별로 가망성 없는 이야기였다고요.”

순간 유령처럼 스르르륵 나타난 라미아가 이드의 말을 받았다. 이드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생각을 읽고 나타난 것이다.

이드는 갑자기 나타난 라미아에 전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는 있지. 개인도 아니고 제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초인에 대한 연구를 그냥 버려둘 리가 없다는 거. 하지만 개인적으로 싫은 건 싫은 거니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있었던 인체 실험에 대한 자료도 강대국에서 알뜰살뜰 챙겨서 써먹었다는 걸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이드다.

그레센 대륙의 제국이라고 해서. 아나크렌 제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2차 대전 중의 실험은, 끔찍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사람을 살리는 일에도 쓰일 수 있는 것이었던 반면,

이번 인체 실험은 초인에 대한, 그들의 힘에 관한 것이었다. 가지고 있으면 쓰고 싶고, 쓰면 쓸수록 더 취하게 되는 힘 말이다.

아나크렌 제국이 프리실라와 베일록을 통해 초인기를 이용하는 마법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 힘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황제의 생각과 결정에 달린 문제긴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 제국이 힘이 필요한 시기가 온다면 그걸 그냥 봉인해 두고 있을 수 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가서 협조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릴까요?”

감옥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들었다면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라미아다.

“아니, 네가 그럴 필요는 없어. 말했잖아. 개인적으로 싫은 거라고. 이미 공은 제국으로 넘어갔어. 복이 되든 화가 되든 이후의 일은 제국이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과 제국에 대해 확실히 선을 긋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이드를 포섭해 보려고 명예 후작의 작위를 내린 황제가 들었다면 섭섭해할 소리지만, 그게 이드의 진심이었다.

사실 이게 정상이었다. 몇 년이나 살았다고 아나크렌에 애정이 있을까. 시르피의 나라이며, 그저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이 아나크렌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일 뿐이다.

“황녀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어요.”

“이 이상 바라면 그거야말로 욕심이지. 그래도 검후를 구출한 후면 제국의 태도도, 제국에 대한 내 맘도 좀 달라질지 누가 알겠어.”

“흥, 잘도 그러겠네요.”

이드가 그레센 대륙에서 집으로 생각하고 있는 곳이 있다면 단 한 곳. 시온 숲의 엘프 마을뿐이라는 것을 아는 라미아가 코웃음을 쳤다. 거기다 아무리 검후가 제국의 어른이라고 해도. 그녀의 한마디에 황제가 바로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국이 두 사람을 몰래 빼돌리더라도 바로 딴생각은 못 할 거라는 거지.”

“그렇죠. 미완의 마탑과 달리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니까.”

제국은 미완의 마탑처럼 탑주의 결정만 있으면 바로바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당장 황권을 견제하는 귀족의 눈도 피해야 하고, 제국의 행적에 예민한 왕국과 타 제국의 눈도 피해야 한다.

거기에 인체 실험과 같은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털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공중에 떠다니는 고양이 털을 감지하는 것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전도 조심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 토벌대까지 조직해 미완의 마탑을 공격한 제국에서 토벌의 이유가 되었던 초인에 대한 인체 실험을 한다? 그 후폭풍은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흑마법의 제약이 있는 이상. 제국이 초인 마법에 대해 많은 것을 얻어 내지는 못할 거야.”

그 때문에 이드도 초인 마법과 미완의 마탑. 그리고 탑주에 대한 깊은 정보는 얻지 못하지 않았던가.

무려 드래곤 로드 급의 마법적 지식을 가진 라미아를 데리고 있는 이드가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제국도 꽤 골머리를 썩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도 절대 좋은 결과는 얻을 수 없을 테니. 속 좀 태워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토벌에서는 연구 흔적 같은 걸 꼼꼼하게 처리해야겠어.”

“생명의 관처럼 무너트리기라도 하게요?”

“그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긴 하지. 일단 상황을 봐 가면서 하려고, 그보다 별일 없었지?”

“당연하죠. 일리나하고 제가 지키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두 사람이 있는 이상. 어디 드래곤이나 혼돈의 파편이라도 공격해 오지 않는 이상 문제가 있을 수가 없다.

“아니, 그런 쪽 말고. 게일이나, 청색 기사단 말이야.”

“그쪽은 조용해요. 저번에 망신당한 이후로는 근처에도 안 와요. 그 문제로 게일이 청색 기사단장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거든요. 특히 일리나를 보고 검후라고 했다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아주 노발대발하면서 장난 아니었어요.’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청색 기사단장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어렵게 일을 꾸며 검후를 납치한 후, 이제야 힘겹게 검후의 그림자를 지워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후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게일이 제2의 검후를 지명한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칼을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을성이 있다고 칭찬해 줘야 할 것이다.

라미아는 이드가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자신이 몰래 감시하며 알게 된 일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중요하게 분석해야 할 정도의 일은 없었지만, 청색 기사단 안에서 게일의 위치라거나, 기사단 내의 분위기.

특히 기사단장인 모이엔의 성향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히 알게 된 듯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토벌대를 가로질러 아이넬 기사단과 은색 기사단에 배정된 숙소에 도착했다.

특히 이드는 지나오는 중에 토벌대의 기사들과 귀족들에게서 호감과 질투, 존경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섞인 환호를 받았다.

이드의 활약에 대해서는 그들도 모두 들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이드 대신 감시조로 나섰다면 그 전공이 자신의 것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갔다면 백이면 백, 전공 대신 또 한 번 감시조 전멸이라는 소식만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겠지만 말이다. 

“여기에요.”

라미아가 안내한 숙소는 제법 컸다.

본래 남작의 영지인 치털링은 규모가 크지 않아 좋은 건물이 드물었다. 또 숙소로 삼을 건물의 수도 적어서 토벌대 전체에 숙소가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넬 기사단은 황녀를 모시는 특수성 때문에, 그리고 은색 기사단은 여성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록마틴 후작이 신경 써서 제법 좋은 물건으로 내어 준 것이라고 했다.

“은색 기사단에서는 여성이라고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요.”

“쉴라 경이라면 그럴만하지.”

배려를 받는다는 것은 곧 다르다는 말로, 차별이기도 하다.

그 차별을 없애고 당당한 기사단으로서 인정받고자 애쓴 은색 기사단의 입장에서 특별 대우는 별로 반가운 것이 아닐지 몰랐다.

하지만 이번 토벌대에서 은색 기사단에게 내려진 임무 중 황녀에 대한 호위가 포함되어 있어 쉴라도 어쩔 수 없이 특별 대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사실 비밀인데, 쉴라 경을 빼고는 다 좋아했어요.”

남녀를 떠나 따뜻하고 편안한 집에 머무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드는 라미아의 속삭임을 피식 웃어넘기고는 문을 열고 숙소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작은 그림자 하나가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달려왔다.

“마스터! 복귀를 환영해요. 감시조로 가신다고 하시고는 엄청나게 활약하셨잖아요. 정말 대단해요. 제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 알았으니까. 뒤로 좀 물러나라. 아니면 라미아가 가만있지 않을걸?”

이드는 입술이 닿을 듯 얼굴을 들이면 케마란을 밀어냈다.

“단장님의 복귀를 환영합니다!”

그러자 케마란의 뒤를 이어 미리 모여 있던 두 기사단의 기사들이 이드를 환영하며 박수를 쳤다.

특히 그중 아이넬 기사단의 눈빛은 묘했다. 자랑스러움과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

이드가 자신들이 아니라 감시조를 이끌고 활약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곧 이어질 본격적인 토벌전에서 이드를 따르면 큰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드는 기분 좋은 환영에 짧은 말로 대답해 주고는 기사단을 해산시켰다.

그러자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진 몇몇 사람들만이 남았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당연히 일리나였지만, 이드가 먼저 말을 건넨 것은 황녀와 쉴라였다.

“아이넬 기사단장 이드. 지금 복귀했음을 보고 드립니다. 황녀 전하.”

“고생이 많으셨겠지요. 그리고 큰 공을 세우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명예 후작님.”

“쉴라 경께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없는 동안 아이넬 기사단에 많이 신경을 써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황녀 전하의 호위는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자세한 건 자리를 옮긴 후 말씀 나누시죠.”

계속 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직 다 흩어지지 않고 이드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기사들도 많다.

사람들은 숙소로 배정된 저택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이드는 그곳에서 감시조로 출발한 후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라미아와 일리나가 다녀간 일을 제외하고는 굳이 감출 것이 없어. 그 부분을 제외한 후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해 주었다.

검기와 검강에서 쉽게 죽지 않고, 향기로 사람을 조종하는 마수와 마음대로 형태를 바꾸는 마수.

초인기를 이식받고 마법처럼 초인기를 사용하는 마법사.

그리고 수 킬로에 이르는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변형된 함정 마법까지.

어느 하나 가볍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모험담을 듣듯 가벼운 마음으로 모였던 사람들이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생명의 관 이상으로 쉽지 않은 곳이군요.”

미완의 마탑에 대해서 그나마 경험이 있는 쉴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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