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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28화


865화

“내일인가.”

빛이 꺼진 통신구를 보던 페시딘이 화려한 술병들 중 유독 수수해서 오히려 눈에 띄는 술병 하나를 꺼냈다. 달그락.

입안을 텁텁하게 하는 떫은맛과 강렬한 산미를 가진 술. 그는 항상 흥분되는 일을 앞두고 이 술을 마셨다.

하루를 남겨 둔 토벌전에 대한 보고. 그리고 이어질 전투.

그것이 그를 흥분시켰다. 싸움만큼 기사를 흥분시키는 일이 있을까. 무엇보다 이 토벌전에는 그도 한 발과 한 손을 담그고 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 기분을 혼자 즐길 수는 없지.”

혼자 마시는 술도 좋지만, 그에게는 이 기분을 나눌 동지들이 있었다. 때로는 형제보다 가깝고, 때로는 적보다 좋은 경쟁자인 친구들.

페시딘은 기사를 불러 마르텔과 존 워스를 부르게 했다.

“마르텔 님께서 준비 후 오겠다 하십니다. 한데 존 워스님은 뵐 수 없었습니다. 하인들의 말로는 수련실에서 며칠째 나오지 않고 계신다는데, 이번에도 수련실 앞에서 방문을 알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합니다. 마치 슬쩍 눈치를 보는 기사에 페시딘은 이어질 말을 알 것 같았다.

“수련실에 계시지 않은 듯하다고………….”

“이 친구가 설마.”

번뜩 스치는 예감에 페시딘은 황급히 방을 나섰다. 경공을 사용한 그의 움직임은 바람 같았다. 겉보기엔 천천히 걷는 듯한데 어느새 호위 기사들을 저 멀리 따돌리고 있다.

호위 기사들로서는 죽을 맛이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호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젠장, 내일부터 경공 수련 시간을 두 배로 늘린다!”

선두에 선 기사의 말에 다른 기사들이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존 워스의 저택에 다다른 페시딘은 단숨에 수련실까지 밀고 들어갔다. 보통 수련실은 가장 엄중하게 출입이 통제되는 구역이지만, 같은 삼검왕들끼리는 예외였다.

“자네 있는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대답은 없다. 활짝 열린 수련실도 텅 비었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바람에 어디선가 날아온 종이 한 장이 팔랑거리자 페시딘이 그것을 내공으로 끌어당겼다.

잠시 다녀오지.

종이에 적힌 짧은 글에 페시딘이 질끈 눈을 감았다. 아니길 바랐는데, 예감 적중이다.

“이 친구야. 자네가 마르텔도 아니고……………”

“끌끌. 거기서 왜 날 찾아 가만 보면 사고를 가장 많이 치는 건 이 녀석인데 말이지. 저기 저렇게 증거들이 가득하잖아.”

어느새 이야기를 들었는지, 나타난 마르텔이 어깨 너머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고는 껄껄 웃는다.

그의 말처럼 수련실 한쪽 벽에는 종이에 적힌 것과 비슷한 내용들이 날짜별로 빽빽이 쓰여 있었다. 이번에 종이에 적은 것도 적을 곳이 없어서인듯했다.

“그런데 다녀오겠다면, 거기, 토벌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겠지? 어떻게 지금이라도 잡으러 가려는가?”

“그러고 싶지만…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은 늦었어. 토벌전이 내일부터야.”

“쯧쯧. 그러게 그 친구 앞에서 초인에 대한 이야기는 가능한 자제했어야지.”

아무리 싫어도 대계를 위해서는 참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후회 중이니, 비꼬는 말은 그만하게.”

“알았네. 그래도 너무 걱정 말라고. 그 친구 성격 알잖나. 자네 계획을 크게 그르치지는 않을 거야.”

페시딘은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안다. 그런 점마저 없었다면 존 워스는 삼검왕으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삼검왕 이전에 초인에 대한 혐오로 대륙을 떨게 만드는 초인 살육자가 되었을 테니까.

“휴~ 일단 돌아가세. 진한 걸로 한잔해야겠어. 모이엔에게도 알려 두어야 할 것 같고.”

“이럴 것 같아서. 내 찌~ 인한 걸로 미리 한 병 챙겨왔지. 하하하.”

페시딘이 곤란해하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마르텔이 껄껄 웃으며 들고 있던 술병을 자랑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끙!”

페시딘은 형제, 경쟁자라는 단어 외에 동지들을 부르는 또 다른 말 하나를 뒤늦게 떠올렸다.

사고뭉치 골칫덩이. 쳤다 하면 대형 사고.


토벌대는 록마틴 후작의 명령에 하루를 쉬었다.

일부에서는 당장 달려가 흑마법사를 도륙해야 한다며 불만을 말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달려온 대부분이 하루의 휴식을 반겼다. 기사들은 기사단별로 각자 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휴식도 좋지만 토벌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전투를 대비해 정비는 필수다. 기사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휴식과 정비를 함께했다.

그중에는 단 하루의 휴식도 아깝다는 듯 쉼 없이 훈련에 임하는 기사단과 기사들도 있었다.

대부분 토벌대 안에서 서열이 뒤쪽에 밀려 있는 기사단들이 그랬다.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었을 때도 기사단이 속한 가문과 전력에 따라 대략적인 우위가 매겨지고 있었지만. 토벌대라는 명목으로 각지의 기사단이 한데 모이자 서열 문제가 예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토벌을 앞두고 직접적인 힘자랑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기사들은 그간 소문으로 알려진 정보와 눈치, 그리고 가벼운 신경전을 통해 빠르게 서열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 서열에는 특이점이 있었다. 실력뿐 아니라, 황녀의 방문과 재방문 횟수에 따라 특별 점수가 더해져 서열이 매겨진 것.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유치하게 그게 뭐야!’라고 할 만하지만.

기사란 본래 주인, 또 궁극적으로는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이므로 황녀의 방문은 모든 기사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넬 기사단은 그런 기사단 서열에서 논외로 빠져 있었다. 황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황녀와 함께 다닌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러니 황녀 방문에 대한 특별 점수를 측정할 수 없었던 것. 거기다 임시지만 충성의 대상 또한 황녀다. 거기에 기사단장은 무려 명예 후작이다. 그것도 제국에서 가장 관심도가 높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이런 이유들로 인해 아이넬 기사단은 실력 이전의 문제들로 인해 기사단 간의 서열 정리에서 빠졌다.

그렇다고 기사단의 전력이 약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나름 정예만을 골라 뽑아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력의 다양성 면에서는 타 기사단보다 우위에 있었다.

또한 임무의 특성에 따라 기사단에 포함된 기사의 수도 많다.

이번 토벌에 참가한 기사단이 워낙 많은 만큼,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제국에서 각 기사단의 출전 기사 수에 제한을 둔 반면, 아이넬 기사단에는 그런 제한이 없다. 숫자의 우위에 관한 문제라 비겁할 수도 있지만.

일단 그런 부분을 무시하고 나온 아이넬 기사단의 토벌대 내 서열은 대략 11위.

토벌대에 참가한 수많은 기사단의 숫자를 생각하면 급조된 기사단으로서는 굉장한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상위권의 전력을 가진 아이넬 기사단은 휴식을 명령받은 날, 아침 일찍부터 하위 서열의 기사단처럼 수련장으로 모여야 했다. 바로 기사단장인 이드가 그들을 소집한 것이다.

숙소로 배정받은 저택이 좋은 곳이라서인지 수련장도 마침 잘 정비되어 있었다.

“모두 얼굴빛이 좋은 걸 보니. 하룻밤 잘 잔 것 같아 본 단장의 기분이 좋다. 내가 장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아무런 동요 없이 훈련에 힘쓴 제군들의 노고를 우선 칭찬한다.”

도열한 기사들 앞에 선 이드의 말에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좋다. 오늘 쉬어야 할 제군들을 모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제군들이 내일 있을 토벌전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다. 준비는 완벽한가?”

“완벽합니다!”

“언제든 가장 앞에서 적을 베어 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직 단장님의 등만을 보고 따르겠습니다!”

“이 검으로 가장 많은 적의 목을 베어 낼 것입니다!”

이드의 말에 기사들은 가슴에 담은 자신감을 힘차게 뿜어냈다. 그 열기가 순식간에 수련장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제 심장을 걸고 최선을 다해 황녀 전하를 수호하겠습니다!”

다른 기사들과는 분위기부터 다른 다짐 하나가 귓가에 정확히 들려왔다. 비록 이드가 물방울 소리의 음정을 파악하는 절대 음감은 없어도,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력은 있었다.

“자네는 이리 나오도록.”

이드는 해당 기사를 콕 찍어 뒤로 뺐다. 우연인지 누군가에 의한 필연인지. 해당 기사는 은색 기사단 소속의 기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임무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군들의 각오는 잘 들었다. 동시에 나는 매우 아쉽고, 안타깝다. 귀관들의 열의가 향해야 할 방향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탓일 터이다. 즉, 내 탓이겠지. 이에 나는 오늘 하루를 들여, 귀관들을 훈련시키고자 한다.”

스르르릉!

기사들은 화사한 일라이져의 모습과 달리 검이 뽑히는 소리가 음산하다고 느꼈다. 그건 본능이 울리는 경고였다. 그리고 본능이 아니라도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든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했다.

“지금부터 실전과 같은 훈련이다. 부디 귀관들이 누구를 향해 검을 들어야 할지 깨닫기를 바란다.”

“다, 단장님?”

부웅!

누군가 급히 이 상황을 막기 위해 이드를 불렀지만, 이미 늦었다. 그 자리에서 날 듯 점프한 이드가 기사단 한가운데로 떨어지며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런 일라이져에는 은백색 무형검강이 마치 몽둥이처럼 뭉툭하게 솟아 있었고, 그것은 인정사정없이 당황한 어느 기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빠아악!

“아아아악!”

검에서 뽑힌 곤기(榥氣)로 머리를 맞아 본 일이 있나? 없으면 말을 말아라.

끔찍하게 아프다. 그 감정이 그대로 든 비명이 시작이었다.

“아악!”

“무, 물러서・・・・・・ 커억!”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비명이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갑자기 수련장에서 울려 퍼진 비명에 영지를 가득 채운 기사들이 하나둘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황녀가 있고, 은색 기사단이 있으며, 이드와 소검후가 머물고 있는 곳이라 알게 모르게 관심이 모여 있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참, 뭐야. 명예 후작님과 아이넬 기사단이 훈련하는 거야?”

“거기다 이 비명을 들어 보라고. 이런 목청이면 보통 훈련이 아니라 실전 같은 훈련일 거야.”

“스읍…… 이거 어째 편히 쉬었다가는 아이넬 기사단에 공을 다 뺏길 거 같지 않은가?”

“그래도 쉴 땐 쉬어야지. 쉬는 것도 일이라고.”

“아니, 그래도……분위기가 말이야.”

편히 앉아 있던 기사들의 엉덩이가 불안하게 들썩거렸다.

무려 11위의 기사단이 쉬지도 않고 훈련을 하는데, 자신들이 쉬어도 되는 것일까? 슬슬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어느새 슬금슬금 검을 뽑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저 본래 목적을 잊은 기사들에게 황녀의 보호라는 가장 큰 목적을 재각인 시키려는 이드의 작업이 본의 아니게 휴식하는 기사들의 등을 떠밀어 버린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갑자기 높아진 기합 소리에 창문을 열었던 록마틴 후작은.

“하하하. 모두 열의들이 대단하군. 좋아. 아주 좋아.”

그저 열성적인 기사들의 모습에 흐뭇하기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토벌대의 분위기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어느 방 안.

쌔근쌔근.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스폴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귀에는 예쁜 빨간색 귀마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시, 시정하겠습니다악!”

“다시 생각하니 저는 황녀 전하를 지키는 방패가・・・・・・ 케엑!”

“좋다. 그 마음을 더욱 마음에 새기도록!”

창밖에서 들리는 비명을 철저히 막기 위해서 말이다.


휴식 같지 않은 휴식을 마친 다음 날,

토벌대가 정신의 관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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