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29화
866화
토벌대의 진군 속도는 빨랐다. 하루의 휴식 덕분이다.
바로 싸우러 가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싸움꾼들도 좋아진 컨디션에 뒤늦게 만족해서는 힘을 냈다.
정신의 관은 치털링 영지에서 한나절을 꼬박 가야 나온다. 그것도 빠른 걸음으로,
하지만 그건 일반 성인 기준.
하루 잘 쉰 기사들과 잘 훈련받은 병사들은 그 거리를 반나절 조금 넘는 시간에 주파해 버렸다. 보통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라면 두려움에 걸음이 느려질 테지만, 전투를 기다리는 토벌대는 반대로 흥분한 망아지처럼 바쁘게 발을 놀린 때문이다.
“허허. 이거 대단하군.”
정신의 관 영역에 발을 들인 후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이동하던 토벌대는 하얗게 얼어 버린 숲을 앞에 두고 크게 놀랐다.
“숲이…… 몽땅 얼어붙었는데?”
“흑마법사 놈들의 함정인가!”
“정신 차려. 이 친구야. 흑마법사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저렇게 티 나는 함정이 어딨어! 봐봐. 그냥 단순히 얼었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함정이 아니고서야, 멀쩡한 숲이 왜 얼어있겠냐고!”
처음엔 놀라 경계하던 기사들은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고드름과 얼음처럼 부서지는 풀잎을 만져 보고는 눈앞의 기현상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이드와 감시조를 통해 자세한 사정을 보고받은 록마틴 후작과 지휘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할 뿐이었다.
“보고는 받았지만, 직접 보니 장관이군. 특히 저 수종은 어지간한 맹추위에도 끄떡하지 않는 놈인데. 토리빈 대마법사가 보기에 어떻습니까.” “분명 8클래스 프로즌 템페스트의 흔적이 분명합니다. 온전한 마법도 아니고, 유사 마법으로 이와 같은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 놀랍군요.”
록마틴 후작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던 노마법사가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는 토벌대의 마법사들을 이끄는 자로. 백작의 작위를 받은 황실 마법사였다.
경험도 많고 지혜도 깊지만, 나이가 많아 여간한 일에는 직접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정신의 관에서 연구한다는 초인 마법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직접 노구를 끌고 나선 참이었다.
그런데 아직 정신의 관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무려 8클래스의 마법을 모방한 흔적을 목격하게 될 줄이야.
‘헐헐헐. 재밌구나. 재미있어.’
정말이지 오길 잘했다 싶었다. 동시에 정신의 관에 있는 또 어떤 것들이 자신을 놀라게 해 줄지 기대감이 높아져 갔다.
“적의 마법도 놀랍지만, 이런 마법을 뚫고 적을 생포한 명예 후작 역시 대단하다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말이 절대 과하지 않다 싶어요.”
노마법사의 감탄에 근처에 있던 귀족 하나가 말을 하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는 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숲을 몽땅 얼려 버리는 마법이라니. 저런 마법이 자신들에게 덮칠 상상을 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전공 욕심에 달이 있던 몸이 싸늘히 식는 것 같았다.
“아무튼 벌목하는 수고를 덜었으니, 진군이 쉬워지겠습니다.”
이 숲은 정신의 관을 가려 주는 동시에, 토벌대와 같은 대군의 이동을 막는 천연의 성벽과 같았다.
토벌대가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힘들게 나무를 베어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얼어 버린 숲이라면 따로 벨 필요도 없다.
“진군로 정리를 부탁하겠습니다. 토리빈 대마법사.”
록마틴 후작의 말에 노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짓에 따라 우르르 몰려나온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자, 얼어붙은 숲이 얼음 알갱이가 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큼큼, 괜찮아요?”
이드는 공터로 변해 가는 숲을 보며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일리나의 눈치를 봤다.
이걸 섬세하다고 해야 할지, 소심하다고 해야 할지. 일리나는 이 강대한 힘을 가진 사내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우스워 짓궂게 입을 열었다.
“괜찮지 않아요.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아요.”
앞선 말에 살짝 긴장하던 이드는 이어진 말에 푸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게 뭐예요.”
“이미 죽어 버린 나무에는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이드가 나 때문에 숲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러지 말아요. 난 숲보다 이드가 다치는 게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으니까요.”
아무리 숲을 아끼는 엘프라도. 이미 죽어 버린 나무까지 아끼지는 않는다.
“험험.’
애정 가득한 일리나의 말에 헛기침을 하던 이드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황녀와 쉴라를 보고는 움찔했다.
“최근에 애인을 잃은 제가 보기엔 좀 부럽지만, 괴로운 모습이네요.”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후작 부인께서 아끼는 숲까지 신경 쓰는 명예 후작님이 참 대단하지요.”
“자, 자! 앞에 봅시다. 다시 진군하지 않습니까!”
민망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드였지만 이미 황녀와 쉴라의 대화에 말려 버린 그의 모습에선 티끌만큼의 위엄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숲을 밀어 버린 토벌대는 파도치는 바다처럼 뒤집어진 대지에 다신 한 번 놀라 멈춰 섰다.
하지만 앞서 보았던 얼어붙은 숲의 모습 때문인가. 그 놀람은 앞서보다는 작았다. 하지만 보는 눈 있는 자들은 숲에서보다 더 진하게 남은 힘의 크기를 읽어 내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드를 힐끗거렸다.
‘앞의 마법은 막아 낼 수라도 있지만, 이건……..’
그렇게 풀죽처럼 엉망이 된 땅을 지나 마지막으로 토벌대를 놀라게 만든 것은 정신의 관 앞에 도열한 몬스터의 대군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이드는 대군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삼색으로 표시된 그레이트 오크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 대군에는 오크 외에도 다양한 육상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이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준비한 병력인 듯 했다.
“전군 정렬하라.”
그에 록마틴 후작이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단단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드의 명령으로 자리를 지키던 용기사들에게 미리 보고를 받은 것. 록마틴 후작의 명령에 토벌대가 대열을 형성했다. 이미 이동하는 중에 훈련과 계획을 마쳤기 때문에 토벌대의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정확했다.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노린내가 코를 찌르는 몬스터를 향해 돌진할 것 같은 기세가 토벌대에서 뿜어졌다.
최소가 소드 마스터인 기사가 삼천이다. 오천의 몬스터라도 순식간에 몰살시킬 수 있는 전력이다.
“문제는 저것들이 그냥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거지.”
“평범한 몬스터가 갑옷을 입고 있지는 않지요.”
이드의 말에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살핀 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오크와 같이 인간의 형태를 한 몬스터들의 몸에는 묵직한 갑옷이 입혀져 있었고, 손에는 나무 몽둥이가 아니라 번뜩이는 철제 무기가 쥐여져 있었다.
그런 몬스터의 뒤, 우뚝 솟은 정신의 관 앞에 일단의 마법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자들이었다.
“무슨 생각일까요. 평지에서의 전투는 저들에게 불리할 텐데. 던전 안에서 싸우는 것이 오히려 유리할 텐데요.”
황녀가 검을 잡고 있던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말했다. 잘 숨기고 있지만, 첫 실전을 앞두고 제법 긴장한 모습이다.
굳이 그녀의 말이 아니라도, 아군의 본진 바로 앞에서 전투를 벌이는 건 보통 상식에 맞지 않은 행동이다. 저런 병력이 있었다면, 차라리 정신의 관의 영역 입구를 지키든가, 아니면 숨어 있다 토벌대의 후방을 기습하는 것이 옳다.
그래도 토벌대에 큰 피해를 줄 가능성이 적은데, 저렇게 당당히 서 있다니.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전략 전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황녀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어떤 성격 급한 자들은 싸움을 모르는 마법사들의 멍청한 짓거리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드는 그에 고개를 저었다.
“좀 특이한 자들이긴 하지만,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신중하고 음흉한 자들이었다.
“자기 마법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가 이만한 힘을 가졌다는 자랑을 겸한 전초전일 수도 있습니다.”
이드가 조금은 심드렁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쉴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어서 들어오라고 유인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법사들은 그들의 영지 안에서 진짜 무서운 법이니까요.”
마법사에 대한 여러 가지 격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마법사란 항상 준비하는 자라는 말이다.
이는 시동어와 동시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고위 마법사들과 달리, 대부분의 마법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마법사들이 순간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었다.
바로 뽑아 휘두르는 검과 달리 마법은 가장 기본인 스펠조차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마법 아티팩트도 이 준비의 연장선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이 할 수 있는 준비에는 한계가 있다. 들고 다닐 수 있는 무게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장소라면 어떨까?
특히 마법사가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그들의 연구실, 장소가 넓은 만큼 준비할 수 있는 마법의 범위가 넓고, 다양해진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며 다양해지고, 깊어지면 흔히 말하는 던전이 된다.
말이 길었지만 내부에 적의 침입을 허락하는 순간 힘과 기세가 꺾이는 기사와 달리 마법사는 자신의 영역 안에 적을 끌어들였을 때야말로 진짜 힘이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유인이 필요할까.
목적이 정신의 관 토벌인 이상. 토벌대는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이드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어서 오시오. 제국의 이름 높은 기사 여러분.]
산 정상에서 소리친 것 같은,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와 함께 몬스터 대군의 뒤, 정신의 관 지붕에서 거대한 인영이 솟아올랐다. 마법 영상이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금장이 박힌 로브를 걸친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
[미완의 마탑. 정신의 관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는 바이오.]
“이름 모를 마법사는 정체를 밝혀라!”
내력이 담긴 록마틴 후작의 사자후가 웅장하게 뿜어졌다.
[그대는 유명한 용기사의 주인. 록마틴 후작이겠구려. 나는 키릴 베이몬.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미완의 마탑의 탑주요.]
웅성웅성.
순간 토벌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저자가 탑주…….”
갑자기 나타난 영상에 랜달과 같은 부관주로 짐작했던 이드는 탑주라는 자기소개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머리에 담았다. “와 있다고는 들었지만, 직접 얼굴을 내밀지는 몰랐는데.”
얼굴이 알려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크다. 당장 외부로 자유롭게 다니는 데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길 테니까.
그런데도 얼굴을 공개한 것은 그만큼 이번 토벌전에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를 잡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한 번에 풀릴 수도 있겠어요.’
살그머니 다가온 라미아의 속삭임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검왕의 관계에서부터 검후, 그리고 생명의 관에 있던 메르시오에 대한 일까지.
“꼭 잡았으면 좋겠는데. 쉽지가 않다는 말이지.”
마법사만큼 도망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알고 있는 자도 드물다.
하지만 잡을 기회만 있다면 모가지를 분질러서라도 잡고야 만다.
“그대는 제국의 땅에서 인체 실험이라는 금지된 죄를 저질렀다. 이는 저주받아 마땅한 대죄다. 이에 황제 폐하께서는 그대와 그대를 따르는 자들의 죄를 물어 토벌대를 보내셨으니, 그대는 순순히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항복하라.”
록마틴 후작이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탑주가 그에 응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범죄라. 그러나 아시오 후작? 후작이 말하는 인체 실험을 한 마탑은 많소. 하지만 대륙 역사에 그런 마탑에 죄를 물은 경우는 없다오. 모두 마법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에 찬사를 받았을 뿐.]
“그것은 과거의 것이나 그대의 죄는 현재의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는 이어진 것이 아니겠소.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미완의 마탑을 완성할 것이오. 이 몬스터들은 그 맛보기를 겸한 인사라오 부디 받아 주시오.]
“명예 후작님의 말이 맞았네요.”
“쩝. 그러게요.”
이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황녀의 모습에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