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33화
869화
“흐음.”
이드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정신을 놓은 듯한 케마란. 처음엔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무아지경에 빠지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내공의 흐름이 너무 없었다. 보통 무아지경에 깊이 빠지면 육신은 잠든 듯해도, 정신과 연결된 내공은 천리마처럼 운행이 빨라지는데 케마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 신안으로 보아도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보면 딱히 몸에 이상이 있거나, 마약 같은 것에 당한 것도 아니다.
“마스터. 케마란은 괜찮을까요?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네리베르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너무 걱정 마라. 일단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으니까.”
“그럼 왜 이러는 걸까요?”
“그걸 잘 모르겠어. 한 가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이드는 대답과 함께 케마란이 꼭 쥐고 있는 링스피어를 바라보았다. 고요하다 못해 잠잠한 내력의 흐름. 그중 일부가 진하게 링스피어와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무인의 본능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넘기기에는 링스피어에는 특별한 사건 사고가 얽혀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이드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네리베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케마란의 상태도 이상한데.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네리베르는 말과 함께 떨리는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는 온갖 몬스터가 가득했다. 광기에 눈에 불을 켜고 토벌대와 싸우던 놈들이 가만히 서 있는 이드와 두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은가. 놈들은 마치 토끼를 노리는 늑대처럼 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어떤 놈도 이드들에게 손을 대기는커녕. 이십 미터 안으로 발도 들이지 못하고 애꿎은 땅만 박박 긁고 있었다.
바로 무진장한 내력을 자랑하는 이드의 호신강기가 놈들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강에도 깨지지 않는 호신강기다.
고작 몬스터가 휘두르는 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쿠어어!”
터엉!
터터터텅!
호신강기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 반탄력에 곤죽이 되어 튕겨 나가는 놈만 생길 뿐이다.
벌써 저렇게 죽어 나간 몬스터만 수십 마리. 가만히 서서 호신강기만으로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잡고 있으니. 애써 검을 휘둘러 몬스터를 잡고 있는 기사들이 알면 기운 빠질 일이다.
하지만 분명 놀랍고 대단한 일이긴 했지만, 네리베르는 조금 불안했다. 이드의 실력은 믿지만 케마란의 상태를 생각하면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옳다 싶었던 것.
“걱정은 알겠지만, 바로 옮기는 것도 좋지는 않아. 그리고 말했지? 짐작 가는 게 있다고.”
“그럼 케마란은 괜찮은 겁니까?”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네리베르가 놀라 돌아보고는 소리쳤다.
“산드라 경께서 어떻게?”
“기사단의 귀염둥이들이 갑자기 낙오했는데, 그냥 둘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말과 함께 슬쩍 비켜서는 산드라의 뒤로 호신강기의 한쪽에 바짝 붙어 서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는 은색 기사단의 여기사들이 보였다. 호신강기도 그 부분만 동그랗게 뚫려 있었다. 딱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산드라도 그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보다 동료를 위해 몸을 던지던 모습은 멋있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좀 더 앞을 보고 행동하는 게 좋겠지?”
“죄송합니다.”
산드라가 고개를 숙인 네리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은색 기사단에서 두 사람을 잘 챙기고 있는 것 같아서다.
산드라가 별거 아니라고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실제 두 사람에게 이상이 생긴 순간 산드라와 여기사들의 행동은 매우 빠르고 즉각적이었다. ‘아마 산드라 경과 이들의 진짜 임무는 토벌이 아니라, 두 사람의 호위일 터.’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빠르게 행동할 수가 없다.
이드의 이런 짐작은 사실이었다.
명령을 내린 주체는 당연히 쉴라다. 그녀의 특별 명령이었다.
은색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부터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쉴라에게 각별하기는 했지만, 이드가 나타난 후 두 사람의 존재는 더욱 특별해졌다.
당장 이드가 두 사람을 특별히 부탁한 공적인 부분도 있고, 일리나 아래서 함께 난화십이식을 배우고 있는 사형제 간이라는 사적인 관계도 생겼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떠나 만에 하나. 두 사람이 잘못해서 적의 손에 사로잡히기라도 한다면 난화십이식이 적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검후의 상징과 같은 난화십이식의 유출이라니.
은색 기사단장의 입장에서는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 그래서 미리미리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준비한 것이 산드라들이었던 것이다.
“산드라 경. 일단 내 짐작대로라면 오히려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이드는 말과 함께 라미아를 불렀다.
파아앗.
“무슨 일이에요?”
희미한 마나광이 반짝이고 후방에 있던 라미아가 나타났다.
“케마란의 상태가 이상한데, 아무래도 링스피어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나보다는 라미아가 보는 게 정확할 것 같아서.”
“어머나. 드디어 깨어나는 건가요?”
이드의 말에 손뼉을 친 라미아가 반가운 걸음으로 케마란에게 다가갔다.
주변엔 여전히 몬스터가 바글거리고, 피가 튀는 전투가 한창인데. 라미아의 분위기는 이쁜 조카를 보러 가는 소녀 같다.
그리고 케마란과 링스피어를 한참 살피던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를 돌아보았다.
“맞아?”
“네. 지금 각성 중이에요. 거기에 주종 계약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진행되고 있어요.”
“그럼 케마란은?”
“케마란의 정신은 저번처럼 링스피어에 빨려 들어간 상태에요. 각성과 계약이 끝나는 시점까지는 정신을 차리진 못할 거에요.”
“역시.”
“휴우~ 다행이에요.”
라미아의 설명에 이드와 네리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산드라는 눈만 끔뻑거리다 링스피어와 케마란을 번갈아 보고 물었다.
“혹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설마 링스피어에 깃든 에고가 각성하고 있다는 건가요?”
은색 기사단에 입단한 후.
케마란은 링스피어에 에고가 있다며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은색 기사단 중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마법은커녕 에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으니까.
그저 케마란을 좀 특이하고 재미있는 막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그게 진짜라고?
“정확합니다.”
“세상에 그 거짓말이 진짜였어!”
케마란은 묘한 꿈을 꾸고 있었다.
스스로 꿈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보통의 꿈처럼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꿈꾸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 일상의 한 토막처럼, 맑은 햇살 아래 앉아 링스피어를 닦고 있었다.
우웅. 우웅.
[히히히. 기분 좋아.]
링스피어가 꺄르르 웃으며 몸을 떨었다. 케마란은 그 반응이 좋아 마주 웃었다.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녀의 꿈속에서 링스피어는 언제나 말하고 있었다. “어디. 요기가 간지러워? 아니면 요기? 여기? 저기?”
[꺄하하하하하!]
그 모습이 마치 남매 같기도 하고, 조카와 나이 어린 이모 같기도 했다.
한창 그렇게 장난을 치고 난 후였다. 링스피어가 평소의 꿈과 다른 말을 꺼냈다.
[있잖아. 케마란은 내가 어떤 에고였으면 좋겠어?]
“착하고 아프지 않고, 씩씩한 아이!”
망설임 없이 말하는 내용은 에고라기보다는 진짜 아이에게 하는 말 같다.
[아니, 그거 말고. 에고 무기로서 어떤 능력을 가졌으면 좋겠냔 말이야. 가령 자동 회복되거나, 길이가 늘어나거나, 불을 쏜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내가 원하면 들어 주는 거야?”
보통은 에고가 깨어난 시점에 그런 기능들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응. 들어 주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이상한 것만 제외하면, 마침 능력을 가져올 곳과도 가깝고. 지금이 딱 좋아.]
능력을 가져온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꿈. 케마란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음. 그렇다면…… 가장 먼저 있으면 좋은 건 네가 말했던 자동 회복이겠지? 부서지면 안 되니까.”
에고가 깃들기는 했지만, 링스피어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재질로 된 무기는 아니다.
[접수 완료. 그리고 다음은?]
“다음은 단단하고 튼튼해야지. 자동 회복도 좋지만, 우선 부서지지 않아야 하니까. 그리고 단단하면서도 탄성은 있어야 하고. 하는 김에 크기나 무게도 변할 수 있으면 좋고 또………….”
주절주절.
한번 말문이 열린 케마란은 끝없이 희망 사항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 케마란의 희망 사항의 스케일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모두 가능해진다면 라미아는 대륙 제일의 아티팩트라는 자리를 링스피어에 내어줘야 할지도 몰랐다.
부르르.
“왜 그래?”
이드가 갑자기 어깨를 떠는 라미아에 놀라 물었다. 아직 인간의 몸을 가지지 못한 그녀가 떨다니?
혹시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묘한 위기감이 들면서 소름이 돋았어요.”
“…..”
“호오. 이건 또 생각지 못한 일이로군.”
한창 몬스터와 토벌대 간의 전투를 구경하던 탑주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 앞에는 천천히 회전하는 바이트 타블렛이 있었다. 그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바이트 타블렛이 갑자기 깨어나 회전을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지만, 알 수 없는 신기한 현상에 호기심이 먼저 발동했다.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이미 뒷전이다.
탑주는 마스터키를 통해 바이트 타블렛에 접속해, 갑자기 작동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곧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건 생명의 관에 있던 바이트 타블렛의 통제용 자아의 접속 코드인데. 분명 차단했거늘 그걸 뚫고 접속하다니. 단순 자아가 에고로 각성한 것인가?”
바이트 타블렛의 제작자답게, 접속된 코드의 형태를 통해 링스피어에서 각성한 에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 내는 탑주였다.
“일전에 본 마법사의 솜씨인가. 그도 토벌대에 함께 온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는 생각지 못한 에고의 발전 형태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흥미는 흥미일 뿐. 단순 호기심으로 소중한 바이트 타블렛에 새겨둔 진언(眞言)이 유출되는 것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이번 기회에 완전히 잘라 내야겠군.”
탑주는 마스터키의 접속 코드를 발동해서 링스피어의 에고가 사용하는 접속 코드를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단순 차단이 아닌 유출된 진언을 회수하는 동시에 각성한 에고를 파괴하거나 회수할 작정이었다.
이때 인간과 다른 에고를 비롯한 인공 지능의 대단한 점이 나타났다.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한 번 실수했던 일은 다시 실수하지 않았다. 인간을 실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 욕망과 욕심, 그리고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링스피어는 마스터키의 코드를 감지하는 즉시,
정신의 관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으로부터 진언을 가져오던 접속을 끊어 버렸다. 아예 복구할 수 없도록 삭제시켜 버렸다.
에고 주제에 아주 철저했다.
[아깝다. 대륙 최강의 에고가 될 수 있었는데.]
“엉?”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고, 지금부터 잘 부탁해. 나의 주인. 케마란.]
스파앗!
“으앗. 눈부셔!”
순간 링스피어에서 뿜어진 빛에 눈을 가리던 케마란은 빛 속에서 나타난 꼬마 아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