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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39화


875화

‘아무렴. 열심히 준비해서 나쁠 것이 없지.’

나쁜 점이라면 좀 더 귀찮고,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는 것 정도인데. 토벌대는 시간도 많고, 황제가 선포한 토벌전이라 자금 지원도 빵빵하다. 전혀 급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겨우 그런 것으로 사상자가 줄어들 수 있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 힘이 얼마인데……….”

하지만 어디에나 불만을 가진 자는 있기 마련. 사람이 모두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모두 똑똑할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토벌대의 힘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며 스스로 약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일단 네놈들은 가장 마지막에 들어간다.’

그에 대한 록마틴 후작의 처리 방법은 간단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실제로 경험하게 하면 된다.

어차피 삼천이라는 인원이 모두 정신의 관에 진입할 수는 없는 것. 그래서 토벌대를 넷으로 나누어 번갈아 가며 진입시킬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이렇게 하면 적 마탑에 대한 공략도 쉬지 않고 이어 갈 수 있다.

록마틴 후작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놈들을 그 순서의 제일 마지막으로 돌렸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앞선 결과를 보면 알아서 처신할 것이다. 그래도 죽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두통거리에서 눈을 돌려 쉴라를 바라보았다. 오늘 전투의 일등 공신. 그게 아니라도 우선 저 후덥지근한 인간들보다 눈이 즐겁다. 본인은 싫어하지만, 싫다고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하실 말씀이라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후작에 쉴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색 기사단의 오늘 활약을 생각하니 흐뭇하고, 든든해서 그러오. 오늘의 전공은 바로 황제 폐하께 고할 것이오.”

“하하하. 부럽습니다.”

“확실히 은색 기사단이 가장 빛났지!”

부러워하지만 질투는 없다. 그 공이 워낙 확실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은색 기사단이 제국 기사들의 로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 이 시간에도 은색 기사단 숙소 앞은 토벌대의 기사들이 하도 기웃거려 땅이 반질반질할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은색 기사단이 내일 정신의 관 진입의 선두에 서 주실 수 있겠소?”

“아!”

선두에 세운 일반 병사는 칼받이, 화살받이지만, 기사단 중 선두에 서는 것은 그 자체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며, 명예로운 일이었다. 때문에 쉴라는 그 제의를 냉큼 받았다.

“은색 기사단이 기쁘게 선두에 서겠습니다.”

쉴라의 즉답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던 황녀가 말했다.

“저희 아이넬 기사단도 용감했답니다. 록마틴 후작님.”

“압니다. 황녀 전하. 하지만 황녀 전하를 선두에 서게 했다가는 제가 황제 폐하께 무사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인가요?”

“세 번째입니다. 황녀 전하.”

“칫.”

세 번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황녀가 이드를 본다. 더 열심히 싸우겠다더니 말뿐이 아닌 모양이다.

그에 이드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그에 대한 결정권은 록마틴 후작이 가진 것. 대다수가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이드도 내심 세 번째 정도가 좋다 생각하던 중이니까.

“세 번째로 진입해도 활약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루 이틀에 끝날 토벌도 아니니까요.”

깊이도 깊이지만, 진입이 얼마나 힘들지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쳇, 명예 후작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황녀가 입술을 삐죽인다. 그녀의 어린 모습을 기억하는 노귀족들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본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드의 말에 두말없이 납득하는

황녀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황녀의 기사단 방문도 그렇지만, 생각 이상으로 이드와 황녀가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이 남녀 관계로 가까워 보이진 않았다.

‘황녀가 명예 후작에게 검법을 배운다 하더니.’

‘사제 관계인가. 명예 후작과 황실의 관계는 확실하겠구나.’

내일 있을 전투보다 더 많은 생각들이 오고가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이 기사이며 정치가였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드는 그런 복잡한 눈빛을 무시하고는 힐끗 모이엔을 살피며 말했다.

“하면 다른 적색 기사단과 청색 기사단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 공에 따라 다르오. 청색 기사단은 두 번째, 그린든 기사단은 세 번째, 마지막으로 적색 기사단은 네 번째로 진입하게 될 거요.”

전공을 이유로 강력한 기사단을 골고루 나누어 놓았다. 물론 전공을 정확하게 따지고 들면 이드와 아이넬 기사단이 최선두에 서야 하지만 이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황녀도 있는데 그럴 이유가 없지. 4교대로 돌아가는데 굳이 선두에 서야할 이유도 없고.’

이드가 기다려야 할 것은 미끼를 물고 올라올 물고기지. 싸움이 아니니까.

이드는 록마틴 후작의 말을 듣고 모이엔의 표정을 살폈다. 밝은 마법등 불빛에 드러난 그의 표정은 좋지도 나쁘지도 못했다.

‘애매하겠지. 토벌대가 넷으로 나뉘었으니까.’

하지만 적의 슬픔은 나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이드는 그 표정이 실로 마음에 들었다.

평소의 간사한 미소보다는 백배 나은 표정이니까.

잠시 후 회의를 마치고 돌아 갈 때까지. 이드는 그런 모이엔의 표정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밤사이 적의 기습은 없었다.

붉은 해가 떠오르자 토벌대 안에는 흥분과 긴장이 떠올랐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첫 번째로 진입할 병력이 정신의 관 입구 앞에 모여 섰다.

은색 기사단은 가장 앞에 섰다. 전날 쉴라에게서 소식을 듣고 손질한 갑옷과 외모가 유독 반짝거렸다. 

“문이 열립니다!”

문에 걸린 마법을 해제한 마법사가 크게 외치자 정신의 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소리 없이 열렸다. 문을 연 마법사가 재빨리 일 조 가운데 위치한 마법사들과 합류하자 쉴라가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아나크렌 제국에 영광을! 진입한다!”

“제국에 영광을!”

척척. 척.

규칙적인 발소리. 그에 맞춰 토벌대가 정신의 관 안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아무 일 없겠지요?”

어제는 선두에 세워 달라고 말하던 황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제의 당당함은 간데없다.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아끼는 타인이기 때문에 더 걱정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일 없을 수는 없지요. 적진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아무 일 없다면 그거야말로 곤란하다. 적들이 모두 튀었다는 것이 되니까. 무려 삼천의 병력이 사이좋게 닭 쫓던 개 꼴이라니. 대륙 최고의 웃음거리 확정이다.

찌릿,

황녀가 눈을 흘겼다. 그녀가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이드는 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녀의 반대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런 건, 저보다 백배 천배 은색 기사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스폴 경에게 물어보시죠. 뭐, 얼굴을 보면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것 같지만요.”

“제 얼굴이 어때서 그러십니까?”

갑자기 이름이 불린 스폴이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의 흔적이 티끌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다.

느긋하게 하품까지 하는 것이 그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면 평소 은색 기사단 안에서 왕따라도 당한 것이냐고 물을 것 같다.

“확실히 답이 따로 필요 없군요.”

그 모습에 손에 힘을 푼 황녀가 미소를 찾았다.

무심한 듯 따분해 보이는 스폴의 표정에서 단단한 믿음을 본 황녀다. 스폴과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자신의 기사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정신의 관으로 진입한 기사들이 서 있던 자리로 일단의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청색 기사단을 비롯해 두 번째로 정신의 관에 진입할 기사단과 마법사들이다.

혹시라도 먼저 들어간 기사단이 위험하면 즉시 나설 수 있도록. 그게 아니라도 빠른 교대를 위한 것이었다.

“그럼 저희도 돌아가서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하시죠. 황녀 전하.”

세 번째로 이드와 아이넬 기사단이 진입하기까지 앞으로 여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대기하고 있던 두 번째 조가 중간에 진입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세 시간 후.

통신구를 통해 알려온 신호에 따라 두 번째 조가 진입했고 삼십분이 지나 첫 번째 조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복귀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와 하고 박수를 쳤지만.

온몸에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힘겨운 발걸음으로 나오는 기사들의 모습에 이내 조용히 손을 멈춰야했다.


“토벌대 진입 일 조 지금 복귀했습니다.”

“수고했소. 쉴라 단장. 상황 보고는 조금 있다 듣도록 합시다.”

갑옷이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처음 모습 그대로인 쉴라의 보고를 멈춘 록마틴 후작이 뒤를 돌아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엇하고 있나! 고생한 동료를 돕지 않고, 마법사들은 물을 준비하고, 신관은 부상자를 치료하라! 빨리빨리 움직여!”

“예!”

순간 굳었던 토벌대가 불 속의 메뚜기처럼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 속에서, 전날 조심하라는 말에 콧방귀를 뀌다 네 번째 진입조로 소속된 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것을 일견하고는 함께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도 가 보죠.”

“휴~ 다행히도 은색 기사단에서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사이 빠르게 기사단의 면면을 살핀 스폴이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작게 말했다.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요.”

제자라서 그런가. 가장 먼저 두 사람을 확인한 일리나의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드도 가장 먼저 두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지쳐 보이긴 하지만 상처는 없다. 전날처럼 산드라 경이 옆에 붙어 지켜 주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산드라 경도 상처는 없어 보였다.

“무사히 복귀해 다행입니다. 쉴라 경.”

“황녀 전하, 명예 후작님.”

“사상자가 나왔던데. 진입이 쉽지 않았나 봐요. 아, 보고가 먼저겠죠.”

쉴라의 손을 잡던 황녀가 록마틴 후작을 보고는 자신의 실수를 알았다.

아무리 그녀가 쉴라와 친해도 정식 작전에 따른 절차를 따라야했다. 록마틴 후작은 자리를 옮겼다.

상황 보고도 있지만, 처음 적지에 진입한 쉴라에게 들어야 할 것이 많았다. 피곤한 그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사망자 5명, 부상자 20명.

그중 사망자는 모두 기사이고, 부상자 중 13명이 기사. 7명은 초인이다.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초인이 몸을 사린 것은 아니다.

다행히 마법사는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안전했다고.

“흐음. 사상자는 예상보다 적구려.”

록마틴 후작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절대 다섯의 죽음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 중에는 기사를 단순히 숫자로 보는 자도 있기 마련.

“다행히 생각보다 저 안이 어렵지 않은 모양입니다.”

‘쯧쯧.’

이드는 생각 없는 말에 혀를 찼다.

어렵지 않으면 그렇게 지쳐서 나오겠나?

이드는 단단한 표정의 쉴라를 보았다.

‘겨우 다섯 명만 죽은 건 그녀가 잘한 덕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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