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40화
876화
보지 않아도 쉴라가 토벌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얼마니 애를 썼을지 짐작이 갔다.
카린을 구출할 때도 그랬고, 숲에서 초인파와 싸울 때도 그랬다.
이드는 그녀가 얼마나 부하들을 아끼는지 봐서 안다. 그렇다고 그녀가 겁이 많고, 냉정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여리기만 해서야 오색 기사단의 단장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인재를 아낄 줄 알았다.
그런 성격이 토벌대에서라고 달라질까!
아니다. 그건 이어지는 보고를 봐도 안다.
쉴라는 정신의 관이라는 던전을 얼마나 깊이, 또 많이 공략했는지에 대한 성과는 가볍게 넘겼다. 그보다는 던전에 숨은 적과 함정 등 던전 자체에 대한 설명과 정보의 전달에만 신경을 썼다.
실로 록마틴 후작이 가장 듣고자 했던 내용들이었다.
“진정 귀중한 정보들이오. 쉴라 단장이 고생이 많았소.”
록마틴 후작은 그녀의 수고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퍼스트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석을 보여 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던전 공략에 있어 쉴라 단장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을 수 있겠소?”
자신에 대한 존중을 담은 록마틴 후작의 질문에 쉴라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많다. 적에 대한 정찰 정보 수집 분석, 경계 등. 수십, 수백 번을 강조해도 부족한 싸움의 기본이자 핵심.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알아도 가끔 망각해서 큰일을 내는 기초지만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록마틴 후작을 비롯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에 쉴라는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해 말했다.
“저는 저 던전이 마법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성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마법사의 던전은 마법사에게 있어 최후의 안식처이자 성과 같은 것인데 그게 아니란다.
“그럼 무엇이오?”
“토벌대를 반기던 탑주. 던전 안에 빈틈없이 자리 잡은 함정. 저는 저 안에서 공략해야 할 성이 아니라 기사가 피 흘려 싸우는 전장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장이라.’
이드는 쉴라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던전 안에 들어가진 못했어도, 감시조로 먼저 와 싸워 보았으니까.
“쉴라 단장의 의견은 염두에 두겠소. 이만 쉬도록 하시오.”
“충.”
쉴라가 자리를 비우고, 지휘부는 그녀가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던전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대체적으로 가볍다.
첫째 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날의 전투를 생각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는데 말이다.
“얕보고 있네, 얕보고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근심 없이 웃을 수는 없다.
위험하다고, 조심하라는 뜻을 담아 그렇게 열심히 설명했는데, 애써 설명한 노력이 아깝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드가 쯧쯧 혀를 찼다.
분명 쉴라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흘렸으리라. 어디나 꼭 있다. 도움이 되라고 충고를 하면 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인간들. 아마 당장 저기서 웃고 있는 자들의 머릿속에는 쉴라의 말은 없고, 예상보다 적은 사상자에 토벌이 쉽겠다는 생각뿐이리라.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리라. 이드가 슬쩍 옆에 앉은 황녀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녀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막상 직접 지휘를 해 보면 쉴라 경을 따라 하지도 못할 자들이 그 노력을 가볍게 보고 있으니. 우습지 않은가요?”
“본래 말이 가장 쉬운 법이죠.”
이드가 답하면서 보니 황녀는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자세히 눈에 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그녀의 눈에 담긴 사람들은 차후 알게 모르게 출세에 많은 어려움을 당할 것 같다.
‘하지만 제국으로서는 참 올바른 자세지.’
황녀가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도 엄연히 황실의 일원.
제국의 운영에 크든 작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이런 지배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용인술이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건
황제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을 배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기본이 바로 가까이할 사람과 멀리해야 할 사람을 구분하는 것인데, 다행히도 황녀는 벌써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
하지만 무서운 감별사의 눈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그나저나 쉴라 단장의 일 조가 이 정도면 모이엔 단장의 이 조는 사상자가 더 적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렴 여기사가 모인 은색 기사단보다 강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개중에는 그들의 헛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 자들도 있었다. 검기가 원숙해지는 소드 마스터에만 올라도 남녀로 실력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이 정설인데 저런 소리를 하다니.
무엇보다 저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그간 은색 기사단이 활약한 것이 얼마인데.
‘아니, 그 전에 검후님을 두고 여기사가 약하다는 소리가 나오나?’
그러나 자고로 입이 가벼운 자들은 머리도 가볍기 마련.
시원하게 웃으며 동조하는 자들은 검후는 물론 은색 기사단의 활약과 토벌대 내의 서열까지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망각은 무식한 용기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흐음. 이럴 게 아니라 몸도 근질근질한데, 우리도 기사들과 같이 던전을 공략해 보는 것이 어떻소?”
“아무렴.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실력만큼은 젊은 기사들에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적이 만만해 보이자, 공이 탐난 듯하다.
그런 그들의 눈이 슬쩍슬쩍 이드와 황녀를 향했다.
이왕이면 황녀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
가까이 있으면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어 볼 요량인 것이지만,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는 이드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골칫덩이들이 어딜 엉겨 붙으려고!”
이드는 급히 록마틴 후작을 찾았다. 저 바보들을 통제하고 올바른 회의를 끌어가야 할 사람이 이렇게 될 때까지 사태를 방관하다니. 직무 유기다.
“…..하면 부상 정도에 따라 신관을 배치하고…………….”
“그리고 사망자의 처리는..”
하지만 고개를 돌려 찾은 록마틴 후작은 말이 통하는 지휘부와 함께 회의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이미 바보들은 포기한 듯, 이쪽의 이야기에 완전히 귀를 닫고 있었다.
“허, 참.”
그 모습에 이드가 허탈해하고 있으려니,
“크흠. 저희가 명예 후작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망설이던 자들이 어느새 다가와 눈치를 보며 입을 연다. “안됩니다.”
이드는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지도 않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희들은 아직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
“말하지 않아도 들은 것이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던전에 들어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저희 실력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길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조건 안 됩니다.”
강경한 이드의 거부에 눈치를 보던 자들의 얼굴에도 불쾌함이 떠올랐다. 토벌대의 지휘부에 속했다는 것은 그들도 귀족이라는 것.
아무리 하위 귀족이라지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법이다.
“그럼 최소한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지요.”
“여기 있으신 황녀 전하를 보시고도 모르십니까? 저와 아이넬 기사단의 최우선 임무는 토벌이 아니라 황녀 전하의 안전입니다. 그 앞에 변수와 장애물이 끼어들어 사고라도 일어나면,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지금 저희들을 변수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절대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 봤자 장애물이나 변수나, 좋지 않은 어감인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이드는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건 기분이 일그러지건 상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변수가 따로 있습니까? 계획에 없는 요소가 모두 변수가 아니겠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황녀 전하께서 전장에 서는 일입니다. 황녀 전하를 보호하는 입장에서 저는 작은 변수라도 허락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
분명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는 말이다. 전장은 고사하고 단순한 행사에도 계획에 없는 일은 일단 막고 보는 것이 호위기사들이다.
그런데 단순한 황궁의 행사도 아니고, 까딱 잘못하면 화살이 박히는 전장에서 황녀를 보호하는 일이다. 조심에 조심 또 조심을 해도 모자라지 않은 상황이다.
‘몇 달 전까지 평민이던 주제에…………’
그런데 듣고 있는 입장에서는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뭐라고 불만을 토하기도 어렵다. 작위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평민이던 자였으나, 지금은 엄연히 자신들보다 높은 작위를 가졌다.
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생각한 자들이 이드에서 황녀로 목표를 바꿨다.
‘지가 아무리 싫어도 황녀가 허락하면 어쩌겠어?’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황녀의 반응은 이드보다 더했다. 황녀는 이들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과연 명예 후작님의 일 처리는 완벽하군요. 하지만 여러분들의 용기도 무시할 수 없으니, 어떠신가요? 바란다면 여러분과 같은 희망자를 받아 다섯 번째 조를 만들자고 록마틴 후작께 건의를 해 보겠어요.”
“그건 좀…….”
핵심 전력이 모두 다른 조에 속해 있는데, 자신들만 모인 다섯 번째 조로 뭘 어쩌라고 하는 말인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던 열기 그대로 열심히 황녀의 제의를 거절하던 차였다.
“던전에서 지금 부상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급히 달려온 기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두 번째 조가 벌써 나온다는 말인가?”
이드가 일어나며 물었다. 두 번째 조에 이어 세 번째로 진입하는 조를 맡고 있는 이드로서는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다.
만약 두 번째 조가 벌써 나온다면, 이드들이 바로 진입해야 하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사상자가 많아 부상자를 먼저 내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일단 나가 보도록 하지.”
보고만 들어서는 확실히 알기 어렵다.
록마틴 후작이 앞서 막사를 나섰다. 그러자 활짝 열린 던전의 입구에서 부상자를 등에 업은 기사들이 줄줄이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언뜻 봐도 하나하나가 가벼운 부상은 아닌 듯 부상자나, 부상자를 업은 기사나 피 칠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부상은 저쪽으로! 중한 부상자는 이쪽으로!”
록마틴 후작이 앞서 호통을 친 효과가 아직 남은 듯 신관과 마법사들의 대처는 빨랐다.
하나, 둘 부상자를 내려놓은 기사들에 록마틴 후작이 다가섰다.
“어찌 된 일인가?”
두 번째 조가 던전 안으로 들어선 지 이제 한 시간이 조금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부상자만 100명이 넘고 있다.
첫 번째 조에서는 겨우 20명이었던 부상자가 말이다.
록마틴 후작의 등장에 중년의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가슴을 두드렸다.
“충! 록마틴 후작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필요 없으니. 대답부터 하도록.”
“……2층으로 넘어가며 나온 부상자들입니다.”
기사가 슬쩍 눈길을 피하며 답했다.
하지만 록마틴 후작은 그 반응을 살필 정신이 없었다.
“2층? 쉴라 단장이 1층을 공략하던 중에 돌아왔는데, 벌써 2층으로 진입했다고?”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속도를 냈단 말인가.
부상자들이 저렇게 쏟아져 나온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록마틴 후작은 혹 치솟아 오르는 열기에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화를 내야 할 대상자는 던전 안에 있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참, 아직도 함께 던전 안으로 진입하고 싶으신 생각이 있습니까?”
“크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