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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50화


886화

갑자기 나타난 정령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정령사셨습니까?”

“오오! 전 정령은 처음 봅니다. 라스갈이면 중급의 정령이지요?”

“설마 명예 후작께서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였을 줄이야. 과연, 이제 이해가 됩니다. 불의 정령이라면 분명 불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요. 하하하.”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얼굴을 들이민다. 말로만 들었지. 대부분 정령은 처음 보는 것이라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 중 가장 큰 호기심을 보인 것은 황녀지만 말이다.

“어머나. 어머나. 어마나~ 귀엽기도 해라!”

라스갈은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후다닥 팔을 타고 올라 이드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하하하. 정령이 부끄러운 모양입니다. 자자, 다들 좀 물러납시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기사들이 헤실헤실 웃는다. 평소엔 근엄한 표정을 하고 살벌하게 검을 휘두르지만, 아름답고 귀여운 것을 좋아할 줄 아는 기사들이었다. 그게 아니면 작은 소년의 모습을 한 라스갈에서 아들이나 딸의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처음부터 명예 후작님께서 불의 정령을 소환하셨다면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공을 독식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드가 세운 공이 한둘인가.

이드는 금방 수긍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3층 입구에 섰다.

“라스갈, 불로부터 날 보호해 주렴.”

끄덕.

이드의 말에 라스갈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주먹을 쥐고 힘을 썼다. 그러자 이드를 중심으로 희미한 붉은색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정령사들이 말하는 정령의 보호라는 정령 마법이다.

이드는 그 상태로 3층에 발을 들였다.

콰르르르륵!

그러자 사방에 가득하던 불길이 폭포수처럼 이드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운지 밖에서 지켜보던 몇몇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은 괜한 것이란 사실이 금방 밝혀졌다.

“과연 이런 느낌인가.”

섬뜩한 불길 속에서 이드는 태연했던 것. 사실 이드도 정령의 보호를 사용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무공의 수준이 높아 대부분의 상황은 무공으로 해결이 가능했고, 그게 아니라도 만능에 가까운 라미아가 있어 굳이 정령을 불러 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하잖아.”

아무래도 정령의 힘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불에 불이 더해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더라도 물에 물을 더하는 건 본 적이 있으리라. 지금 이드가 보는 광경이 딱 그랬다.

무공을 사용하건, 마법을 사용하건 이 불길을 막으려 하면 아무래도 저항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다.

위에서 쏟아지는 불길은 정령의 보호를 거쳐 아래로 빠지고, 앞에서 쏘아지는 불길은 정령의 보호를 거쳐 뒤로 흘러간다.

저항감이 하나도 없다. 물 위에 떠 가는 기름 같았다. 메이슨을 먼지처럼 굴린 압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라스갈, 너 대단하잖아.”

이드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칭찬을 날리자 어깨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라스갈이 이제 알았냐는 듯 뻔뻔한 얼굴이 되어 가슴을 펴 보인다. 새삼 땅을 파거나 물이 필요할 때만 정령을 부리던 자신의 단순함을 반성해 본다.

남은 돌탑은 열 개.

열 번째 돌탑으로 접근한 이드는 그 뒤편에 손을 얹었다 뗐다.

푸르륵!

돌탑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불길이 강해졌다. 돌탑이 파괴되었다는 의미였다.

돌탑의 일부를 쓰다듬은 그 짧은 순간, 이드가 철사심인의 침투경으로 탑 안의 마법적 장치만 파괴한 것이다.

돌탑 안에 초인이 있고, 돌탑이 파괴되는 순간 초인은 죽어 재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돌탑은 그들의 관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파괴하지 않고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다면 굳이 부술 필요는 없으니까.

그 하나를 시작으로 이드는 차례차례 돌탑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시작했다.

우선은 입구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각이라면 사각에 있는 돌탑이 먼저였다. 그렇게 이드가 열아홉 개의 탑 중 네 개를 남겨 두었을 시점. 점점 커지고 강력해진 불은 빈틈없이 3층을 가득 채웠다. 사방이 붉고 푸르렀다. 입구는커녕 돌탑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구구구구!

사방에 가득한 불의 소리는 마치 지진의 울림처럼 크고 묵직했다. 또 무섭고 섬뜩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용광로처럼 쇠도 녹일 것 같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일 뿐. 그 외의 공격이 없었다.

“어쩌면 프리실라가 말했던, 5층까지는 맛보기라는 기본 테마는 바뀌지 않은 것이려나.”

화력이 강하고, 골렘의 숫자도 늘었지만, 생각해 보면 골렘에 마법 기능을 더하고, 곳곳에 무기를 숨기기만 해도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탑주가 토벌대 앞에서 공언한 것처럼, 5층까지를 초인 마법의 시연장쯤으로 정해 만든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 시연장에서 많은 사상자를 만든 모이엔의 능력도 새삼 재조명할 필요가 있지만,

“뭐, 일단 그건 뒤로 두고. 도대체 어떻게 불을 만드는 돌탑을 파괴하는데도 불이 강해지는 건지 모르겠네.”

전자 제품에서 시작해 인간에 이르기까지.

에너지가 줄어들면 힘이 약해지기 마련인데, 이 불길은 정반대로 돌탑의 수가 줄어들수록 화력이 강해진다. 무한동력도 아니고, 마법 장치에 회광반조가 있을 리도 없고 여간 이상한 게 아니다.

“잠깐만 어쩌면…….”

고개를 갸웃하던 이드는 순간 떠오른 이미지에 눈을 반짝였다.

“어차피 돌탑은 모두 부숴야 하고,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지? 일단은 돌탑부터 마저 해결할까.”

갸웃.

이드가 라스갈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라스갈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머리를 쓰다듬은 이드는 곧장 다음 돌탑으로 향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태지만, 라스갈이 있는 이상 문제될 게 없다.

그것이 아니라도 3층의 구조는 이미 이드의 머릿속에 박혀 있다. 거기에 무인의 공간감과 방향감을 더하면 돌탑의 위치를 짐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파스스, 파스. 스스슷.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돌탑 세 개가 정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3층의 화력은 점점 끓어올라 벽과 천장이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농담이 아니라 검을 던져 넣으면 수 분 안에 쇳물로 변할 온도였다.

당장 정령의 보호를 유지하기 위해 라스갈이 가져가는 마나의 양이 몇 배나 늘어났다. 하지만 이드가 품은 전체 마나를 생각하면 정말 티 나지 않는 양일 뿐이다.

그 마나를 사용해 열기를 피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이다.

다음 순간 이드는 마지막 돌탑 앞에 섰다.

처음에는 다른 돌탑과 같았던 것이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는 붉은 홍옥처럼 변해 있었다.

뿌옇지만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일 정도다. 게다가 직접 불을 뿜는 것은 아니지만 어마어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인데, 한번 확인해 볼까?”

이드는 이 돌탑을 바로 파괴할 생각이 없었다. 아까 떠오른 한 가지 가설. 그걸 확인해 볼 생각이다. 어차피 확인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드가 돌탑에 손을 얹었다.

츠즈즈즉,

순간 기묘한 소리가 났다. 내공과 라스갈이 보호하고 있어 문제는 없었지만, 손과 돌탑의 온도 차로 인해 난 소리였다.

동시에 이드의 내력이 돌탑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화기가 내력을 막아섰지만, 음양의 근원인 무극신기가 고작 이 정도의 화기에 주춤할 이유가 없다.

무극신기는 거침없이 돌탑과 그 안의 마법진, 그리고 그 너머 초인을 단숨에 휘감아 그에서 나온 정보를 이드에게 전달했다.

적지 않은 정보량이었지만, 이드는 그것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분석했다.

그중 마법적인 부분은 라미아의 몫으로 넘겼다. 이드 역시 마법적인 지식은 깊지만 그건 교과서적인 지식일 뿐이다.

변형된 마법에는 약하다. 그렇게 봤을 때 이 돌탑에 적용된 초인 마법은 교과서적인 이드의 지식으로 분석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전문가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전문가가 있는데 괜히 어려운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거릴 필요는 없다.

어려운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은 학생 때로 충분하다. 성인이 된 후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전문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학생 입장에서 보면 치사해 보일 수 있는 어른의 사회랄까?

당장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만 해도 한 과목만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수상한 점이 있는지만 찾으면 되는 거죠?’

‘응. 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깊게 분석할 필요는 없어. 잘 부탁해.’

‘맡겨 주세요. 금방 끝내 버릴 테니까요.’

마법진을 라미아에게 맡긴 이드는 돌탑이 품은 기운의 흐름을 분석했다.

마법은 몰라도 기운의 흐름에 대해서는 라미아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이드다.

이드는 가장 먼저 홍옥처럼 변한 돌탑이 품은 기운, 초인력에 감탄했다. 마법을 치면 8클래스에 이르는 초인력이 돌탑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3층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불길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강력한 힘의 출처 역시 짐작이 갔다.

불길에 가려 보이지 않는 돌탑들. 그 돌탑이 파괴되면서 그 안에 있던 초인의 초인기가 이 돌탑으로 모여든 것일 테다.

“어쩌면 여기 불길을 만들어 내는 초인기를 가진 초인은 이 사람뿐이고, 나머지는 그냥 불길을 유지하는 초인기를 주입하는 배터리 역이었는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손끝에서 느껴지는 초인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순수하지 않은 이종진기가 주입되었을 때 주로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온전한 한 사람의 힘에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이만한 초인력이 있다면 정신의 관에 잡혀 이런 꼴을 당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또 잡혔어도 중히 쓰이지 고작 3층에서 용광로를 만드는 용도로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신의 관의 마법사들도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드는 갈라진 기운을 좀 더 세분화하고 그 심층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희미하게 보이는 것.

기운의 근원과 미세하게 이어진 흐름.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종하는 마력. 그리고 때를 기다리며 단단히 뭉쳐진 초인력.

그리고 때마침 전해지는 라미아의 목소리.

‘찾았어요. 수상한 점. 이드의 생각이 맞았어요. 그거 일종의 폭탄이에요.’

‘역시나. 나도 방금 뭉쳐진 초인력을 확인했어. 껍질만 깨지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압축되어 있었어.’

‘불길만 견디면 쉽게 공략할 수 있다고 방심하게 만든 후에 뒤통수를 치는 방법이네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프리실라도 몰랐던 것 같은데. 토벌대가 오고 새로 추가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녀도 대략적인 내용을 알 뿐. 던전의 제작에 참여한 것은 아니니까.

“일단 처리할까.”

정체를 알았으니. 처리하면 끝이다.

라미아가 있다면 마법적인 방법으로 해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무인의 방법을 선호한다.

“대신 오늘은 무인보다는 정령사로 가 볼까? 라스갈.”

이드의 부름에 라스갈이 통통 튀어 돌탑 위에 올라섰다.

“여기서 나오는 열기만 온전히 조종하면 된다. 알았지?”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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