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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93화


929화

그에 퀼른이 시무룩한 얼굴로 답했다.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정원을 건너는 걸 도저히 볼 수 없었습니다.”

“오호라, 거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인 게로군. 켈켈.”

노인 특유의 가래 끊는 불편한 기침 소리.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노파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공포에 떨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인공 초인들이 있었다.

노파에게 그들은 거름이었던 것이다. 인간조차 아닌 거름.

“장로님 허락도 없이 소모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건 상관없다. 거름이야 또 만들면 되니까.”

그래서일까. 노파는 부책임자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말이다. 네가 탑주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야. 켈켈,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 다른 명령이라도 떨어졌느냐?”

“…….”

탑주가 직접 방문해서 지시를 내리고 갔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탑주의 명령을 가장 먼저 받는 것은 장로다. 그녀가 모르는 명령이 있을 턱이 있나.

대답 대신 퀼른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노파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쯧,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그 급한 성질이 언젠가 일을 낼 거라고.”

“장로님께는 면목이 없습니다. 곧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예?”

사고를 치고 정리하고. 그의 급한 성격 때문에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가 다른 장로 아래 있었다면, 그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되기 전에 조치가 취해졌겠지만, 노파는 진짜 할머니처럼 이런 실수에 대해 꽤나 관대했다.

그래서 평소처럼 정리하겠다 말한 것인데. 필요 없다니?

생각지 못한 답변에 고개를 들던 쾰른은 곧 노파의 눈을 마주하고는 몸이 굳었다.

고위 마법사임에도 나이 때문인지 흐릿하던 노파의 눈이 범의 그것처럼 노랗게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퀼른을 비롯해 노파 아래 있는 마법사들은 그런 눈을 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안다. 그녀가 다른 장로에 비해 인자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그것이 사고를 친 입장에서는 특히 더하다. 불안한 예감에 퀼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자, 장로님?”

“쯧쯧. 다른 것도 아니고 탑주의 명령을 어겼으니 어쩌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를………… 으어어억!”

“켈켈켈.”

아예 바닥에 엎드려 비는 퀼른이었지만, 노파는 이미 귀를 닫은 후다. 가래 끓는 기침과 함께 노파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퀼른의 몸이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그의 몸이 미끄러져 가는 곳은 생기가 빨리고 있는 마법진의 중앙. 그러나 초인에게만 반응하는 마법진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싶은 순간. 타탁.

노파가 지팡이를 찍었다.

쩌어어억!

“끄아아악!”

그렇지 않아도 생기를 빨리고 있던 인공 초인들의 등이 수술칼로 가른 듯 쩍 하고 갈라지며 그 안에 든 아티팩트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튀어나왔다. 

“아, 안 돼! 장로님! 장로님! 제발 용서를, 제발 이번 한 번만・・・・・・ 으, 으아아악!”

그에 퀼른이 공포에 질려 노파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모아 빌었다.

그러나 그를 향한 노파의 눈은 이미 부하 마법사를 보는 눈에서 거름을 보는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시 한번 지팡이가 바닥을 찍자 공중에 떠올라 있던 아티팩트들이 쾰른의 온몸에 달라붙었다.

순간 퀼른은 써클과 영혼을 쥐어짜이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티팩트가 생살을 녹이고 파고드는 것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초인력을 쥐어짜는 고통이 이렇게 큰 것이었나? 이렇게 강하지 않을 텐데?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순간일 뿐이었다. 고통은 그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생각도 빼앗아 갔다. 그저 고통에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를 뿐이다.

그 모습에 인공 초인을 정육점 고기처럼 해체하던 다른 마법사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반대로 노파는 고개를 갸웃하며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저렇게 소모가 격렬했던가?”

동시에 다수의 아티팩트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퀼른의 말라 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 하지만 아무리 노파라 해도 어떻게 알겠는가. 바로 그 시점이 범고래의 출력이 10배 올라간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쾰른의 발작은 5분간 이어졌다. 그리고는 움직임도 호흡도 멈췄다.

부책임자는 상사의 끔찍한 마지막에 소름이 돋은 팔을 몰래 문지르고는 고개를 숙여 말했다.

•바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클클클. 그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

“어차피 떠날 곳이란 말이다. 그러니 정리가 무슨 소용이냐. 연구 결과만 따로 정리하고 연구실은 폐쇄하도록 해라. 그리고 오늘부터 정원사들의 책임자는 너다.”

“예? ・・・・・・옛! 감사합니다.”

순간 자신도 퀼른 꼴이 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떨던 부책임자는 뜻밖의 승진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부책임자 타모다는 평소 그가 싫어하던 퀼른의 행실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퀼른 같은 행동만은 피하자고. 그렇게만 하면 노파 아래서 오랫동안 무탈하게 정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노파는 연구실을 나가며 마법사들을 향해 외쳤다.

“저 거름은 해체하고, 마법진을 닫아라!”


이드는 어느 순간 앞을 막고 있던 줄이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로 범고래를 통해서.

‘어? 이제 흙에서 냄새 안 나.’

콰르르릉!

그 말과 함께 이드 앞에 있던 풀숲이 뒤집어졌다. 땅이 폭풍우에 침몰하는 배처럼 솟아올랐다 뒤집어졌다.

대응하던 힘이 갑자기 끊어지며 강력한 힘이 갈 곳을 잃고 쏟아졌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로 인해 초록의 풀숲이 순식간에 갈색 흙무더기로 변했다.

독초는커녕 초록의 풀 쪼가리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이야, 우리 범고래의 일 처리는 역시 최고라니까.”

‘응, 나 최고, 히히.’

“자, 그럼 다시 앞으로 가 볼까요?”

그렇게 이드가 범고래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수천 평 밭으로 변해 버린 이전의 풀숲 몇 곳의 흙이 들썩이는 것이 아닌가. 이드가 설마 하며 흙을 걷어 내자 땅에 묻혔던 독초가 삐죽이 머리를 내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짜 독하다. 독해.”

“이대로 땅을 굳혀 버릴까요?”

라미아가 말했다. 독초가 흙을 뚫고 나오긴 하지만, 땅을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만들면 아무리 이 독초라도 힘들 테니까.

“아니, 그런다고 죽을 것 같지가 않아. 완전히 죽이는 쪽으로 가자고.”

“베어도 안 죽고, 태우면 독연이 나는데요?”

그래서 땅을 갈아엎은 것이 아니던가.

“나도 쉽게 생각한 거지. 그보다 아공간에 있지? 원유.”

“있기야 하지만, 그걸 뿌리게요?”

“그래. 아무리 독한 놈들이라도, 지구 환경 파괴 원인의 최고봉을 뒤집어쓴 후에는 설마 살아 움직이지 못하겠지.”

“……대신 땅이 죽을 것 같은데요.”

‘나 죽어?’

범고래가 라미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애처롭게 올려다본다. 이 부근의 땅이 죽음의 땅이 되어도 범고래가 죽는 일은 없지만, 대지의 정령 입장에서는 자신의 죽음과 같이 느껴진 듯하다.

그에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일 없어. 너도 아마 본 적이 있을 거야. 땅속 깊은 곳에 있는 검고, 끈적이면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물 말이야.”

쿵.

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공간에서 드럼통을 꺼내놓는 라미아다. 이드가 드럼통의 뚜껑을 열자 역한 냄새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웁.”

특히 일리나가 그 냄새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긴 원유와 숲의 종족이라니.

상극으로 보이긴 한다. 이드가 드럼통에 내력을 덮어 냄새가 새어 나오지 않게 막고는 범고래에 원유를 보여 주었다.

‘응, 이 아래에도 많이 있어.’

“……그것참 지구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아할 소리네.”

유전을 깔고 앉은 던전이라니. 하지만 그래 봤자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그레센이다. 그레센에 유전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아니었으면, 나쁜 놈들이 유전까지 확보했을 것이 아닌가.

기가 막힌 우연에 혀를 찬 이드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흙을 들썩이던 독초 하나가 뽑혀 나왔고, 이드는 곧장 독초를 드럼통 속에 넣었다가 땅 위에 던졌다.

그 무거운 흙더미를 뚫고 나오던 놈이 움직임이 없다. 죽은 것이다.

“역시 원유. 무섭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독약인 줄 알겠어요.”

“충분히 독약이지.”

맛도, 색깔도, 향도 지독해서 먹는 사람은 없겠지만, 먹으면 백이면 백 죽을 테니까. 독약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독이 달리 독인가. 먹고 죽으면 독이지.

이드는 즉시 허공섭물을 이용해 원유를 골고루 뿌렸다. 한 통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스무 통이나 부어야 했다.

그래도 아직 아공간에 남은 원유는 넉넉하다. 정 필요하면 범고래에 부탁해서 던전 아래 있는 원유를 떠 와도 되는 일이고.

이드는 곧 범고개를 시켜 뿌려 둔 원유를 독초들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냥 두어서는 원유가 땅에 스며드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긴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십 분. 그 정도가 흐르자 더 이상 흙이 들썩이는 곳이 없어졌다.

확인 삼아 캐 본 몇몇 독초들도 확실히 죽어 있다.

“좋아. 이걸로 풀숲은 완전히 해결됐네. 역시 제초에는 약을 쓰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

“냄새가 독한 것만 빼면요.”

코를 틀어막은 일리나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독초를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냄새가 적응이 되지 않나 보다.

이드는 그 목소리가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마스크를 꺼내 귀에 걸어 주었다.

“자, 풀숲도 해결했으니, 다시 전진하지.”

“충!”

이드의 말에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후에도 풀숲처럼 어둠의 효과를 극대화한 함정들이 더 나타났다. 독충을 이용하거나, 마법사와 어울리지 않게 철질려 같은 암기가 달린 함정도 있었다.

그리고 인공 초인들의 기습도 받았다.

하지만 그 모든 함정과 기습에도 지원조에는 사망자는커녕 부상자 하나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함정은 작동도 하기 전에 라미아와 일리나, 그리고 이드의 손에 걸려 분해·파괴되었고, 인공 초인의 기습도 바짝 긴장한 기사들을 상하게 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인공 초인의 습격을 기사들이 반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미 이드들을 지키겠다는 희망은 포기했지만, 그래도 기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었던 그들 입장에선 이드들의 뒤만 따라가는 상황에 점점 회의감을 느끼던 찰나 나타난 인공 초인들이 마치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았으리라.

그때 기사들은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을 정도다.

해서 그 감사를 담아 단 하나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 과정 끝에 결국 이드들은 그 층의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기가 끝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벽이었다. 마치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틈도 보이지 않는 검은 벽,

얼마나 검은지 어둠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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