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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03화


939화

이드는 그 모습에 내심 웃고 말았다. 자리만 만들어 주면 당장이라도 탑주의 전지전능함을 찬양할 기세가 아닌가.

그렇다고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노릇. 이번 공략에 토벌대가 입은 피해가 얼마던가. 작은 정보 하나에 기사 수십을 살릴 수 있다. 록마틴 후작은 다양한 방법으로 추궁했다. 그러나 베일록은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던전 안의 변화는 모르겠고,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전에 내놓은 것이 전부요.”

“하지만 이제 쓸모없어진 정보다.”

“그건 탑주가 던전을 변형시킨 때문이지, 내 탓이 아니잖소.”

중간에 던전이 변해서 그렇지, 분명 베일록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난 거래에 충실했으니, 후작께서도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 주길 바라오.”

그게 끝이었다. 날 선 표정으로 할 말을 마친 베일록이 더 할 말 없다는 듯 입을 닫았다. 옆에 후작을 호위하는 기사가 있었으면 벌써 나서서 베일록에게 예의를 가르쳤을 모습이다.

그러나 록마틴 후작은 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기사가 있어도 쉽게 나서진 못했을 것이다. 베일록이 어디 평범한 포로던가. 무려 고위 마법사다. 실력으로만 따지면 백작급이다. 제약으로 초인 마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밖에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것이 마법사다. 그게 아니라도 가진 정보를 대가로 거래를 한 것도 있고 말이다.


무거운 철문이 쿵 하고 닫혔다.

“명예 후작이 보기엔 저자의 말이 어떤 것 같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묻는 록마틴 후작의 물음에 이드가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후작님 표정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해 주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소. 조금이라도 정보가 있으면 피해가 그만큼 줄어드니 말이오.”

“그렇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볼 땐 거짓말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후작님도 그리 보셨으니, 더 혹독하게 추궁하지 않으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혹시나 했다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록마틴 후작의 얼굴에는 근심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로써 갑자기 난이도가 미쳐 버린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을 구멍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공략에서 피해가 컸던 만큼, 책임자인 그로서는 신경 쓰이는 일일 것이 당연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지요?”

그래서일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이유 말이다.

“티가 많이 났소?”

“심하진 않았습니다. 첫사랑을 발견한 소년 정도?”

대놓고 티가 났다는 말에 록마틴 후작이 허허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 정신이 없긴 한 모양이오. 잘 보셨소. 명예 후작에게 부탁할 것이 있기는 하다오.”

“부탁입니까?”

“물론 거절해도 상관없는 일이니, 부담은 가지지 마시오.”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꽤나 조심하는 모습이다.

오히려 그 모습에 부탁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이드다.

“일단 들어 본 후 결정하겠습니다.”

“고맙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조에 관한 일이오. 발터 단장의 강력한 요청에 던전을 공략하는 데 허락을 내리긴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오.”

“피로도 같은 부분이겠군요.”

“그렇지, 피해가 작고 체력이 남았다고 해서 피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소.”

그렇게 시작한 록마틴 후작은 이런저런 우려스러운 부분들을 예로 들었다.

특히 그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정신적인 피로였다. 다른 조보다 전투는 적었지만, 가장 오래 던전 안에서 긴장을 유지했다. 던전이 놀이터도 아니고, 긴장감은 다른 조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루 휴식으로 그런 부분들이 모두 회복되었을까?

그것이 의심스러운 록마틴 후작이다.

그렇다고 공략 허가를 다시 취소할 수도 없다. 두 개 조가 진입하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먼저 진입했던 세 조가 획득해 온 정보가 쓸모없어지게 될 수 있으니, 변수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결국 복귀한 세조 중 하나가 다시 들어가야 하고, 이때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오 조였다. 단순히 발터의 요청 때문에 허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록마틴 후작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이 오 조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방법을 궁리하던 중 나온 것이 이드였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전 삼조 조장입니다만?”

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그것은 알고 있소. 내가 바라는 것은 명예 후작이 아니라 부인분들의 도움이오.”

“라미아와 일리나 말씀입니까?”

놀란 이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이 아니라 라미아와 일리나의 도움이라니.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그렇소. 두 분 모두 실력이 매우 뛰어나지 않으시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인원보다는 그런 실력자가 필요하지.”

그 말대로다.

분명 의외긴 하지만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실력이야 이미 토벌대 안에서도 유명했으니까.

일리나의 경우 소드 팰러스 습격 사건부터 소검후로 불리고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라미아도 공략을 시작하며 실력을 증명했다.

그중 절정은 최근 보여 준 스타 로드였다. 수 킬로에 걸쳐 이어진 빛의 길을 보고 숨넘어갈 것 같은 얼굴을 한 마법사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특히 세조가 진입하기 전 스타 로드에 마나석을 박아 불을 밝히는 점등식은 그 절정이었다. 덕분에 그날부터 마법사들이 라미아를 붙들고 늘어지는 강도가 두 배 이상 강해지는 부작용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두 분이 같이 움직여 주시면 가장 좋고, 아니면 한 분이라도 오 조에 함께 해주시면 좋겠소만, 명예 후작의 생각은 어떠시오?”

록마틴 후작이 슬슬 이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그렇지 아내를 위험한 곳에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데,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남편이 세상이 어디 있나. 당장 욕을 들어 먹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분명 후작의 말대로 하면 오 조에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러나 록마틴 후작의 걱정과 달리 이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리나와 라미아. 두 사람에 대한 걱정 같은 것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것이 걱정이었으면 일리나를 소드 팰러스에 남겨 두지도 못했다.

또 그게 아니라도 두 사람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수단이 준비되어 있으니, 꺼리는 마음이 생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승낙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드에게는 록마틴 후작의 부탁을 들어주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

바로 두 사람이 오 조에 합류했을 때 모이엔과 존 워스의 계획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드와 록마틴 후작. 변수를 피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비슷한 입장에 있는 두 사람이다.

그렇기에 대답도 이미 정해진 것과 같다.

록마틴 후작이 위험한 것을 알면서 오 조에 공략을 허락한 것처럼.

“록마틴 후작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만 그 부탁은 들어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거절이었다.

사실 말하지 못하는 그 이유가 아니라도 거절해야 할 이유는 있다. 당장 일리나는 황녀를 호위하고 있었고, 라미아는 삼조 마법 전력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황녀에 대한 호위를 위해 삼 조의 인원을 나누지 않고 유지했는데, 이제 와서 일리나를 황녀 옆에서 떼어 놓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본말전도나 다름이 없다.

“아니오. 명예 후작이 죄송할 것이 무엇이오. 오히려 내가 생각이 짧아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이 문제지. 오히려 거절해 주니 마음이 편하오.”

사실이었다. 근심이 가신 것은 아니지만, 손을 흔드는 록마틴 후작의 표정은 오히려 속 시원해 보였다. 속으로 끙끙 앓던 것을 뱉어 낸 때문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소. 내가 너무 오조 문제에 시야가 좁아져 있었구나 싶다오.”

아마도 이드가 말하지 않은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린 듯하다.

“무엇보다 저토록 아름다운 부인들을 위험한 곳에 보낼 남편이 누가 있겠소. 그런 말을 하는 놈이 있으면 나부터 그 입을 찢어 버렸을 것이오.” 아니면 이드의 거절을 다른 쪽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고.


록마틴 후작이 돌아갔다. 평소 그의 모습대로 질척거리는 기색은 일절 없었다.

오히려 이드의 거절에 오조에 대한 걱정까지 깔끔하게 정리해 버린 느낌이었다. 현재 토벌대의 전력으로는 긴급 사태를 대비한 대기조 이외에 오 조를 특별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듯했다.

이드도 막사로 돌아갔다. 일리나와 라미아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였어요?”

따뜻한 온기에 겉옷을 벗은 이드는 록마틴 후작과의 일을 말했다.

“거절하긴 했지만, 조금 찝찝하긴 해.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오 조와 함께하면 확실히 피해가 줄어들 테니까.”

“대신 나중에 더 큰 문제로 터졌겠죠. 거절 잘 했어요.”

“알아.”

짧게 대답한 이드가 풀썩 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최고급 라텍스가 안정감 있게 몸을 받아 냈다.

그 옆으로 일리나가 다가와 엎드려 턱을 받치고는 말했다.

“내일은 이 조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해요?”

오조, 이조, 삼조가 내일 던전에 진입한다. 전날과 달리 이번엔 이 조에 보는 눈도 끼어 있지 않으니, 움직이기 좋은 타이밍인 것은 확실하다. 거기에 마탑의 협조까지 받는다면 셋으로 나뉜 문을 넘나들 수도 있다. 오 조를 공격하기엔 딱 적당한 상황인 것이다.

“가능성은 있죠. 하지만 아직은 아닐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모이엔과 존 워스가 움직일 때는 마탑에서 신호가 있을 때일 텐데. 아직 그 신호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래요.”

언제 이드와 마탑 사이에 그런 약속이 잡혔던가. 일리나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무슨 신호인데요?”

“탑주요. 어떻게 해서든 바이트 타블렛을 돌려받고 싶은 탑주라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분명 찾아와서 거래를 할 거예요. 그 전에 사건이 벌어지면 거래를 할 시간이 없을 테니까요.”

이드는 중간에 끼인 탑주의 입장을 생각하며 흐릿하게 웃었다.

마탑의 입장에서 토벌대는 실로 복잡한 인간관계의 모음이었다. 거래 대상도 있고, 적도 있고, 동지도 끼어 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탑주가 제일 신경 쓰는 사람은 이드들이다. 다름 아닌 바이트 타블렛이 걸렸기 때문이다.

탑주가 바이트 타블렛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직접 본 이드가 보기에 탑주는 바이트 타블렛만 회수할 수 있다면 나머지 일은 모두 포기할 인물이었다.

그러니 다른 일에 휘말려 바이트 타블렛을 돌려받을 기회를 놓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모이엔과 존 워스 측에서 급하게 서두른다면 어떻게 해서든 내리눌러 줄 것이다.

“어쩌면 내일 진입하면 탑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이 아니라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드는 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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