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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05화


941화

탑주가 나타났다. 그러면 오 조에 대한 작전도 조만간에 시작한다는 것이겠지.

물론 당장은 아니다. 바이트 타블렛을 둔 거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거기에 이미 작전 시간의 절반이 지나고 있으니, 아마 다음 오 조의 공략 때 모이엔과 존 워스가 움직일 거다.

그러니 지금은 현재의 전투에 집중할 때다. 당장 오 조보다 급한 문제도 많다. 가령 저기서 바람을 다루는 적 초인기에 질식 위험에 처한 기사 같은 경우 말이다.

확인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진 이드가 적 초인의 머리 위에 나타나더니 그를 무 뽑듯 뽑아서는 저 뒤쪽으로 던져 버렸다.

우와아아악~

길게 늘어지는 비명 사이로 겨우 숨통이 트인 기사가 숨을 헐떡였다.

“커헉~ 헉~가, 감사합니다.”

“적이 약해 보인다고 얕보지 마라. 적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모르는 초인임을 명심해라. 알겠나!”

‘어, 어떻게 아셨지?’

이드는 그저 기사와 초인이 마주 서 있던 자세와 그 사이에 남은 잔존 마나의 흔적을 읽어 내고 말한 것뿐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기사는 처음부터 자신의 실수를 지켜 본 것인가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충! 명심하겠습니다!”

그에 더 크게 소리친 순간 이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또 한 명의 초인을 던져 버리며 위기에 처한 다른 기사를 구하는 중이었던 것. 

“명예 후작께 승리의 영광을!”

이드가 그에 감동한 기사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릴 때였다. 메시지 마법이 또다시 탑주의 목소리를 속삭여 왔다.

-당혹스럽구려. 혹시 명예 후작은 지금 날 도발하는 것이오?

말을 걸었는데, 대답은커녕 다른 일을 하는 이드의 모습에 자신을 무시하는 것인지, 도발하는 것인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탑주다.

“나야말로 당혹스럽군. 이 정도로 도발이라니. 한창 바쁜 중에 말을 걸어 오기에 급할 것 없이 대답하면 되는 줄 알았소만?”

이드가 기가 찬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전음도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육성으로 편히 말했다. 이 바쁘고 정신없는 싸움터에서 말을 걸었으면, 듣는 것 정도는 알아서 하라는 듯 말이다.

대놓고 무시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도발 같다.

그리고 도발이 제대로 먹힐 땐 원래 반박이 힘든 법인데, 지금 탑주가 딱 그랬다. 한창 전투 중에 말을 걸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말보다 기사 한둘의 생명을 더 무겁게 여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거야 입장의 차이니까 그가 뭐랄 수 없는 일.

말싸움에서 밀렸음을 안 탑주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날 마무리하지 못한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거래를 마무리하고자 하오.

“지금 나와 라미아를 초대하는 것이오?”

-그렇소. 정중히 두 분을 초대하는 바요.

긍정하는 대답에 헛웃음을 흘렸다. 하필 이 정신없는 전투 중에 초대라니.

“아까 도발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탑주에게 그대로 돌려 줘야 할 것 같소만?”

-전투 중인 것은 알지만, 어쩌겠소. 두 분과 만날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 지금뿐인 것을? 아니면 이 뒤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도 상관은 없소. 대신 언제 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지만 말이오.

“그럼 그렇게 합시다. 나 역시 급할 것은 없으니 말이오.”

바이트 타블렛에 미련이 뚝뚝인 것을 아는데 쓸데없는 배짱이 아닐 수 없다. 그래 봤자 아쉬운 사람이 지게 되어 있는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팩 돌아서려는 이드를 탑주의 목소리가 급히 잡아 세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서둘러 처리해 두는 것이 서로 좋지 않겠소. 그러지 말고 후작 부인만 거래에 나서는 것은 어떻겠소? 어차피 바이트 타블렛을 가진 것은 후작 부인이 아니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속으로 요것 봐라 싶었다. 탑주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읽어 낸 것이다.

‘나는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라미아만 오라는 거겠지.’

이전 입탑 권유를 거절할 때 탑주의 눈에 어리던 살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이드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지금 탑주의 말도 항상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떨어트린 후 바이트 타블렛을 거래한 다음 라미아를 죽이겠다는 의미로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드는 이 해석이 크게 틀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차라리 조금만 기다리시지 그러오. 어차피 승패가 기울어 가는 전투인데 말이오.”

-아, 그건 아니라오.

공격!

와와와와!

순간 고함 소리와 함께 검은 통로에서 적의 지원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많은 병력은 아니었다. 딱 지금까지 삼 조가 쓰러트린 정도의 인원이 보충되었다.

그러나 아군의 후방에서 나타난 적은 기울어 가는 전세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그 이상의 병력이면 오히려 전세가 반대로 기울었겠지만, 그래서는 거래할 기회가 날아간다. 그 때문에 병력을 일부러 조정한 것이 분명했다. 말 그대로 바이트 타블렛과 라미아를 목적으로 부하들의 목숨을 내어 놓은 것이다.

-우리 마탑은 그리 쉬운 곳이 아니라서 말이오.

“그런 것 같군.”

-어떻소. 아무래도 명예 후작께선 쉽게 몸을 뺄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이오. 거래에는 후작 부인께서만 나선다 해도 기분 나빠 하지 않으리다. 

“아니, 탑주같이 귀한 분에게 신경 쓰이는 일을 만들 수는 없지요. 라미아와 나 둘이 같이 초대에 응하겠소.”

•괜찮겠소?

대번에 껄쩍지근해지는 목소리.

그런데 왜 그렇게 듣기에 좋은지 말이다. 이드는 히죽 웃으며 라미아를 부르고 일리나에게는 전음을 보냈다.

소검후로 나서 달라고.

순간 멀리 보이던 일리나의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직후 그녀의 허리에서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콰콰콰콱!

“끄아아악!”

비릿한 피 냄새를 밀어내는 꽃향기와 함께 적 병력의 일부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그 광경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일순간이나마 모든 싸움이 그대로 멈추기까지 했다. 동시에 때를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싸움의 고삐를 당기는 스폴까지.

탑주가 황녀의 보호와 삼조의 지휘관으로서의 위치를 들어 이드를 배제하려던 것을 두 사람이 완전히 메꾸고 있다.

“탑주가 보기에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을 것 같소?”

-새를 따라오시오. 알스트로메리아를 준비하고 기다리겠소.

탑주가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하긴 이 광경을 보고도 억지로 이드에게 남으라 한다면, 그건 속에 있는 뜻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에 이드의 입가에 뿌듯한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치열한 전투에서 이기는 것도 좋지만, 똑똑하다 자부하는 인간과의 기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쾌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동시에 록마틴 후작의 부탁을 거절하고 일리나를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일리나를 두고 왔으면 어쩔 뻔했는가.

“어쩌긴 뭘 어째요? 저 혼자 가서 다 뒤집어 놓고 오는 거지.”

블링크로 나타난 라미아가 말했다.

“내 선견지명일 수도 있잖아?”

“절 설득하고 싶으면 이드의 양심부터 속여 봐요.”

영혼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다. 즉, 서로를 속이려면 스스로의 정신은 물론 영혼까지 속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에 영혼이라니. 그게 제정신으로 가능한 일인가.

말 그대로 정신병을 앓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드는 얌전히 입을 닫고 메시지 마법의 잔존 마나를 건드렸다.

화르륵!

그러자 흩어지지 않고 남아 있던 마나가 뭉치며 하얀 새로 변했다. 녀석은 이드와 라미아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적 진형 뒤쪽에 있는 검은 통로 안으로 날아갔다.

그에 이드와 라미아도 망설이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하얀 새? 그 뒤를 명예 후작 부부가 따라가고 있어?’

정신없이 주변을 살피던 사무엘 백작이 마침 그 모습을 보았다. 그에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감지한 그는 지금이 이드와의 친분을 내세울 때라는 것을 알고 소리쳤다.

“명예 후작님.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엇? 명예 후작과 후작 부인이 움직이신다.”

“어딜 가는 거지?”

“앞에 하얀 무언가를 추적하는 것 같은데, 우리도 갑시다!”

“우리가 무슨 수로 저분들을 쫓아간단 말이오?”

사무엘 백작의 외침에 반응한 외교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는 중에 부르는 소리를 들은 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무엘 백작이 뿌듯한 얼굴로 두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드는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저 빙긋 웃으며, 기다리라는 손짓을 해 보일 뿐이다.

“아쉽지만, 이 정도도 충분하지.”

사무엘 백작은 아쉬웠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데려가 준다면 최고였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이 급박한 전투 속에서 자신을 신경 써 준 것이 어딘가.

“명예 후작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닌가 보오.”

“오늘 전투가 끝나면 막사에 방문해도 되겠소이까.”

“본인도 방문을…….”

덕분에 그 주변으로 사무엘과 이드의 관계가 궁금한 외교관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니 말이다. 사무엘은 그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손은 왜 흔들어 준 거예요?”

라미아가 물었다. 그녀는 자신과 이드에게 플라이 마법을 걸어 허공을 비행하는 중이었다.

“곧 이그렌이 나설 때잖아. 저승 가는 사람에게 미리 인사한 거지. 어차피 죽을 때는 바빠서 인사는 못 해 줄 것 같으니까.”

마음이 넓은 행동이 아니냐는 듯 한 이드의 말.

그런 뜻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환하게 웃는 사무엘이나 그 주변으로 모여든 외교관들의 행동이 참 어리석고 불쌍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라미아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저도 같이 손을 흔들 걸 그랬어요.”

오히려 지극히 이드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과연 원래 그녀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영혼을 나누어 그런 것인지, 그도 아니면 부부라서 서로 닮아 버린 것인지 궁금증이 드는 순간이다.


새가 날아든 통로는 복잡했다.

두 갈래 길을 지나니, 그 뒤에 다시 두 갈래 길이 또 나온다. 지금 전투가 한창인 공터와 똑같은 공터가 또 나오기도 하고, 갈림길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공터에 도착한 순간.

퍼억.

하얀 새가 전구가 터지는 것처럼 터지며 사라졌다.

대신 넓은 공터 한중간에 10층에 있던 것과 비슷한 형태를 한 하얀 정자에 앉아 있던 탑주가 일어나 인사를 건네 온다.

“두 분, 준비한 차가 식기 전에 어서 와 앉으시오.”

플라이 마법을 해지하고 땅에 내려선 이드는 주변을 한눈에 담고는 라미아와 함께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처럼 행동에 거침이 없다. 이미 주변에 아무것도 없음을 짧은 순간 파악해 냈기 때문이다.

뭐, 있더라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거래할 준비는 잘 해 오셨소?”

찻잔을 단숨에 비운 이드가 탑주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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