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15화
951화
철연영은 철황권의 초식들 중 가장 음유한 초식이다. 천강의 무리를 핵심으로 한 다른 초식들과 달리 화유의 무리를 핵심에 담은 초식이다. 그러다 보니 가장 유하면서도 적의 내부를 곤죽으로 만드는 침투경의 무서운 경력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철연영이 꼭 음유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음유하기 때문에 다른 철황권 천강의 무리를 유연하게 담아내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천강 중심의 철황권에 담기지 못했을 터.
덕분에 이드는 철연영을 철황쌍두에 담아 때려 낼 수 있었다. 그것도 두 개 머리에 각각 음양의 상극을 담아서.
이드의 주먹에서 뿜어진 두 기운은 건물의 철근처럼 흙덩이를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는 초인력을 갈기갈기 찢어 냈다. 그리고 중심으로 달렸다. 흙덩이의 중심.
흙덩이를 움직이는 초인력의 핵, 음양의 철황쌍두는 핵을 중심에 두고 상극의 힘을 폭발시켰다.
쩡!
상극이 부딪히자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세 힘이 서로를 잡아먹고 소멸하면서 흙덩이 중심에는 순간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압력이 생겨났다.
콰드드득!
수백 톤에 이르는 압력에 흙덩이가 쪼그라들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범고래를 시켜 쪼그라드는 흙덩이의 형태를 변형시켰다.
아직 많이 남은 흙덩이를 처리하기 좋은 모양으로,
“저게・・・・・・ 가능해?”
그 순간 근본 없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기사들이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저택 크기의 흙덩이가 쪼그라들어 긴 막대 형태로 변하고, 그것이 적당한 크기로 저절로 부러져 거인이나 쓸 것 같은 커다란 창으로 변하는 광경이었다.
그 변화의 이유에는 당연히 막대 위에 올라선 이드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야~! 너무하잖아, 이 새끼야!”
순간 치밀어 오른 짜증에 고함을 치는 기사다.
아무리 상대가 다르다지만 자신들이 두드릴 땐 강철 같던 놈이 이드 앞에서는 밀가루 반죽처럼 변한 모습에 기이한 배신감이 든 것.
“젠장~ 약한 게 죄다. 죄야.”
“알면 움직여! 우리처럼 허약한 놈들은 빨리 도망이나 쳐야지.”
검기는 기본으로 다루는 기사들이 약하다니.
일반 백성이나 평범한 기사들이 들었다면 미친 소리라고 할 법한 신세 한탄을 하며 속도를 붙이는 기사들이다.
그러면서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과연 이후 이드가 무얼 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중 발터의 눈빛은 유독 깊고 날카로웠다.
그런 관중의 시선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는 이드는 기둥인지 창인지 분간하기 힘든 막대 위에 올라 범고래를 칭찬하고 있었다. 길고, 두껍고, 단단하기가 강철 같다.
“딱 원하던 형태야. 잘했어.”
‘응, 응, 열심히 했어.’
방글방글 웃는 범고래에 마주 미소 지은 이드가 전방을 향했다.
구르르르르-
그곳에는 선두의 흙덩이가 부서지자 속도를 올리는 다른 흙덩이들이 있었다. 크기도 커서 한번 굴러 이동하는 거리가 장난이 아니다.
아무래도 조금 실력을 보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툭.
범고래를 어깨 위로 올린 이드가 밟고 있던 창의 끄트머리를 무심히 찼다. 그러자 격렬한 진동과 함께 땅에 박혔던 창날 부분이 땅을 뚫고 튕겨 나왔다.
빙글.
이드의 발끝을 중심으로 한 바퀴 회전한 창. 그리고 창끝이 구르고 있는 흙덩이를 향하는 순간.
쩌억!
방금 전까지 이드가 밟고 있던 창끝에 마각철황격의 족적이 깊게 찍히고, 창이 쏘아졌다.
쿠쿵!
쏘아진 순간 음속의 벽을 돌파하며 폭음을 만들어 낸 창은 어, 하고 정신을 차린 순간 가장 앞서 구르는 흙덩이의 중심을 꿰뚫고 있었다.
“명중, 꼬치 경단 같고 보기 좋네.”
그게 시작이었다. 이드는 돌다리 건너듯 뛰어다니며 창을 쏘아 냈고, 창에 맞은 흙덩이는 흐물흐물 허물어지며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마치 바람 빠진 커다란 풍선 같았다.
그리고 이드가 모든 창을 차올리고 땅을 디뎠을 때, 더 이상 구르는 흙덩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처리 완료.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하겠지.”
이드가 찬 창은 단순히 흙덩이를 관통한 것이 아니다. 흙덩이 속에 있는 초인력의 핵을 관통해 부숴 버렸다. 흙덩이가 물먹은 식빵처럼 흐물흐물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거의 동시에 핵이 부서졌으니, 당장 숲의 나무와 흙덩이를 조종하던 마탑에도 상당한 충격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 정도의 충격은 아니니,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터.
“이 여유는 잠깐입니다. 방해가 없는 지금, 속도를 최고로 올려요.”
이드는 흙덩이가 몽땅 멈추자 자동으로 느려진 토벌대를 향해 달리며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검기를 뿜어 토벌대의 앞길을 막고 있는 나무들을 베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가 막히는군.”
검은 숲을 움직여 토벌대를 몰아넣는 일을 맡은 마탑의 중견 마법사 마이노는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리는 인공 초인들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랬다. 토벌대의 기사들이 무서운 것은 직접 마주했을 때지, 지금처럼 안전한 곳에서 엄청난
질력으로 공격을 가할 때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드가 나서며 이 예상이 뒤집어졌다.
처음 이드가 흙덩이에 주먹을 꽂을 때는 가소로웠고, 흙덩이의 핵이 소멸하며 인공 초인이 쓰러질 땐 놀랐다. 그리고 연이어 창을 쏘아 흙덩이의 핵을 연달아 파괴하는 모습에는 섬뜩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현장과 떨어진 안전지대에 있음에도 말이다.
이것도 검은 숲을 조종하는 초인을 통해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모습이다. 오히려 인공 초인 시술에 무슨 오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할 뻔했다.
하지만 이드의 등장도 심각하긴 마찬가지.
“우연인가? 어떻게 정확히 핵을 노린 거지?”
마이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핵의 존재를 알고 핵을 노린 것이라면 흙덩이로는 더 이상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검은 숲에 배치된 인공 초인에게 부여된 능력은 이것이 한계다.
“변형이 어렵다면 물량으로라도 밀어붙여야지. 다시 공격한다. 준비하도록.”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반동이 심해서 당장 공격하긴 어렵습니다.”
“……5분 준다. 그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은 폐기한다.”
으으으,
냉혹하기보다는 무심한 마이노의 말. 그 말에 바닥을 구르던 인공 초인들이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참으며 바닥을 기었다.
일어나기 위해, 폐기당하지 않기 위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이노의 눈이 자연스럽게 옆을 향했다. 그곳에 나머지 절반의 검은 숲을 조종하고 있는 초인들이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쪽은 안정적으로 운영 중이니 다행인가.”
“숲이 끝나는 것 같은데?”
이드는 짙은 안개 너머로 검게 비치는 벽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그러자 황녀와 나란히 달리고 있던 라미아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뒤에 흙덩이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이 속도가 유지되면 여유 있게 끝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속도가 유지되게 만들어야지.”
이드는 다시 꿈틀대기 시작하는 나무를 보며 수라삼검의 강사를 뿜어냈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을 잘게 잘라 내기에는 거미줄 같은 강사만큼 효과 좋은 수법이 없다.
그렇게 이드가 나무를 잘라 놓으면 기사들이 바닥을 찔러 뿌리를 자른 뒤 들어내고, 마법사들이 불을 붙여 태운다.
그 행동을 반복한 토벌대는 저 멀리서 점점 가까워져 오는 흙덩이 구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동굴 같은 입구 앞에 설 수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동굴 입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
비스듬하게 길게 뻗은 벽을 따라 토굴처럼 뚫린 구멍이 수십 개였다.
“우리를 흩어 놓을 계획이었군요.”
쉴라가 몇 개의 입구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혹시나 싶어 살폈지만, 안쪽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던 것.
“확실히 등 뒤에 저런 물건이 구르고 있으면 가까운 곳으로 뛰어들어 갈 수밖에 없지.”
“거기다 뛰어들어 간 후에는 흙덩이가 입구를 막아 버리겠죠.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니까.”
“뭐, 마탑도 그럴듯한 계획은 있었던 거지. 흙덩이가 부서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럼 어디로 들어갈까요?”
모조리 흩어질 일은 없겠지만, 지금도 가까워지는 흙덩이가 있으니, 느긋하게 고민할 시간도 많지는 않다.
“음. 가장 멀리 있는 입구로 가는 게 어떨까요?”
엄지손가락을 깨물던 황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실력이 좋은 사람은 빠르게 앞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고, 비교적 실력이 떨어져 느리게 도착한 사람은 더 뒤에 있는 입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탑에서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전력을 뒤에 배치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황녀의 분석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석을 정리해 내놓으려는 순간.
이드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 입구로 진입하지요.”
“선택의 이유는 듣지 않으시고요?”
이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의견이 믿을 만한 것일까. 신뢰를 얻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 그 감동을 깨부수는 이드의 말이 들려왔다.
“그보다는 어느 입구를 선택해도 끝은 같을 것 같아서입니다.”
“아…….”
“자, 이동하지요.”
이드의 재촉에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실망으로 고개를 숙인 황녀는 라미아가 책임졌다. 마지막 입구가 좀 멀리 있었지만, 괜찮았다. 흙덩이가 도착하기 전까지 세 조의 기사들은 모두 입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퍼서석.
그리고 한발 늦게 도착한 흙덩이가 기사들이 들어선 입구에 박혀 무너지며 입구를 막았다.
안전하게 입구에 들어선 이들은 우선 잠시 그 자리를 지키며 휴식을 가졌다.
숨을 돌리고 주변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당장은 적의 공격이 없을 것 같아 안심이었다.
“그래도 이곳에 오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일 조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황녀 전하의 안전을 위해 오 조가 후미를 맡겠습니다.”
적절한 배치였다.
휴식을 마친 기사들이 다시 움직였다.
황녀의 생각이 옳았는지, 아니면 대규모 병력의 진입에 놀랐는지, 당장 적의 공격은 없었다.
하지만 적진에서 안심할 수는 없는 일.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 조금 공간이 넓어진다 싶은 순간.
번쩍!
갑작스러운 빛과 함께 마탑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실 한정된 공간에서 강력한 공격은 무서운 것이지만, 토벌대의 방어 역시 단단했다.
적의 공격을 막을 방어력만 된다면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오히려 방어에 용이한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세 개 조에는 은색 기사단도 있고, 청색 깃털 기사단도 있다.
그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적의 공격을 얼마든지 뚫고 나갈 수 있는 용자들이었다.
그렇게 마탑의 공격을 몇 번 무위로 돌리며 뚫고 나가던 중이었다.
다시 시작된 마탑의 공격에 오 조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쿠르르릉.
던전이 움직이며 일, 삼조와 오 조를 분리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