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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16화


952화

처음엔 던전이 통째로 흔들리는 진동이 생겼다.

“지진은 아니고.”

여기 발을 들이고 지진처럼 던전이 흔들린 게 어디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기사들은 이제 더 이상 매장될까 무서워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용감해진 것이고, 어떻게 보면 만성이 되어 위험에 둔감해진 것이다.

일종의 안전 불감증이랄까.

물론 이러다 진짜 무너지면 한 방에 몰살이지만 말이다.

뒤이어 땅이 늘어나며 일, 삼 조와 오 조의 거리가 벌어졌다.

“던전이 움직인다. 오 조를 갈라놓으려는 것 같습니다!”

“벽이 생기고 있습니다!”

꾸드드득.

기사들의 외침과 동시에 중간 위치에서 던전이 고양이 똥구멍처럼 오므라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바닥과 벽이 불길한 기운을 품고 가시처럼 솟아올랐다. 가까이 오면 좋은 꼴 못 볼 거라는 경고 같았다. 

“슬슬 시작하려나 봅니다.”

이드는 작게 소곤거리는 스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아니라도 오 조를 분리하는 걸 보면, 존 워스와 모이엔이 움직일 때가 됐다는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던전까지 움직여 오 조를 갈라놓을 이유가 없다.

사실 이미 예정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기사들은 이만저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전력이 분산되는 것은 위험했다. 적을 공격하기 전 그들의 전력을 흩어 놓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즉, 오 조와의 분리는 기사들에게 있어서 적의 공격이 받아들여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예민하고 까칠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가까이 있어. 분명해!”

“일단 저 길 막히는 것부터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장 오조를 구해야 합니다.”

“조장님!”

조원들이 이드와 쉴라를 바라보며 외쳤다. 보통은 잘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여러 기사단들이 토벌을 위해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광경이었다.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평소 기사단을 이끌며 지시를 내리던 경험 많은 단장들이 수십 명이니까.

그들은 두 사람의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화살처럼 뜨거워진 상태였다.

평소 초인과 기사라고 소 닭 보듯 하거나 까칠하게 굴던 모습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적을 앞에 두면 같은 제국의 기사라는 것일까.

그에 이드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삼 조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명령과 동시였다. 중구난방이던 입들이 조개처럼 딱 닫혔다.

급한 상황에 기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의견을 내기는 했지만, 전투 중 조장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 이드가 손으로 개구멍처럼 좁아진 구멍을 가리켰다.

“오 조를 생각하는 마음은 좋지만, 적의 노림수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움직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실 애매한 상황일 때마다 혼자 뛰쳐나가는 이드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 조가 공격당한다는 계획에 맞춰 주려면 지금 오 조를 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을.

그런 속사정을 모르더라도, 이드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기사들도 많았다. 당장 장미 가시처럼 솟아오른 가시를 봐도 그렇다. 그러나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들도 없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위험하다고 동료를 버리라는 명령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당장 오 조를 구해야 합니다.”

그중 젊은 기사 하나가 목소리를 쥐어짜 외쳤다.

순간 주변의 같은 기사단 소속으로 보이는 기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 미친놈이 무슨 짓이야!”

“그 헛소리 당장 멈춰!”

그들은 젊은 기사를 죽일 듯 노려보며 이드의 눈치를 봤다. 냉정한 말이지만 이드의 판단 자체는 옳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분에 취한 미친놈이 앞뒤 분간 못하고 명예 후작 면전에 대고 ‘동료를 버렸다’고 말하다니. 동료를 버린다는 것은 기사에게 있어서 최악의 수치다. 그걸 이드에 가져다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분노한 이드가 나선다면 젊은 기사가 소속된 기사단은 무사하기 힘들다.

‘끝이다. 저 미친놈 덕분에 우리 기사단은 끝났어.’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이드는 전혀 분노하고 있지 않았다.

상황 판단이 조금 말랑하지만, 상관 앞에서 당당히 외치는 패기는 마음에 들었다. 사실 뜨끔한 면도 없잖아 있다.

함부로 나서서 위험한 것은 어디까지나 조원들일 뿐, 이드가 나서면 충분히 저 벽을 부수고 오 조와 합류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장으로서 조원들을 이끌자면 젊은 기사의 말을 바로 잡아 줄 필요는 있다.

그에 이드가 말을 고르는 사이 쉴라가 삼엄한 기세를 흘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덕분에 이드만으로도 버거워 파랗게 질린 기사들이 이제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지만 말이다.

“경은 발언을 신중히 하라. 그리고 침착하게 상황을 살펴라. 지금 이 자리엔 동료를 버리는 기사도, 그런 명령도 없다. 경은 기사로서 전술 이해를 공부하긴 한 것인가!”

“하지만 지금 오조가…….”

“그만. 경은 오 조의 기사들이 힘없는 병사라도 된다고 여기는 건가. 발터 단장님이 그렇게 약해 보이나. 그렇다면 다시 돌아 보라. 저기서 이쪽을 바라보는 저들이 약자인지, 자랑스러운 제국의 기사인지.”

쉴라의 손끝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이미 사람 하나 지나기도 힘들 만큼 좁아진 구멍 너머로 이쪽으로 향해 건투를 기원하듯 손을 흔드는 오 조의 모습이 있었다. 웃고 있지는 않아도 표정들이 굳건하다. 젊은 기사가 어설프게 걱정할 상대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아…….”

젊은 기사도 느끼는 것이 있는 듯 번쩍 정신이 든 얼굴로 탄성을 터트렸다. 떠올린 것이다. 저들 중 자신보다 약한 기사는 없음을. 자연스레 자신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기사들이 많이 당황한 모양입니다.”

완전히 구멍이 사라지고 나서야 흔들던 손을 내린 칸이 마지막 남은 적을 뭉개고 돌아서는 발터를 보며 말했다.

“의외인 모양이지?”

“뭐, 걱정해 주는데 기분 나쁠 건 없지요. 그보다 정말 따로 공략하실 겁니까?”

“마침 좋은 기회였어. 우리가 가진 정보대로 움직이려면 다른 조가 있어서는 곤란해.”

사실 적과의 전투가 있긴 했으나 기사들과 합류하려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드와 마찬가지로 굳이 합류하지 않았다. 초인 파가 가진 마탑의 정보를 활용하려면 다른 조가 있어서는 곤란하다. 정보의 출처가 문제가 되니까.

‘거기에 전력이 집중되면 암살 기사 놈을 보기 힘들지.’

뿌드득 이를 가는 발터다.

암살 기사를 기다리며 애써 공략을 늦추었던 오 조다. 발터는 아직 암살 기사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흙덩이를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트리고, 부숴 버리는 이드의 힘까지 목격했다.

발터가 예상한 것을 가볍게 뛰어넘는 실력이었다. 힘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 힘의 규모 면에서는 삼검왕 급으로 보였다.

하지만 발터의 심장을 뛰게 한 것은 힘의 활용 방법이었다. 능숙함과 기발함이었다. 과연 대륙에 무공을 알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다운 실력이라고 할까.

절대 암살 기사에 뒤져 보이지 않았다. 발터는 그걸 경계했다.

‘놈의 목은 내 것이다. 딴 사람에게 내어 줄 수는 없지.’

그래서 복귀하려 굳이 애쓰지 않은 것이다.

발터는 완전히 막혀 벽으로 변해 버린 구멍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자, 가자. 미친 마탑 놈들에게 초인의 위대함을 보이러.”

“우아아아!”


하지만 발터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가는 자신들을 바라보며 비웃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흥, 위대한 초인 좋아하시네. 실험체 주제에. 목표의 영상을 확보했습니다.”

수정구를 앞에 두고 비틀린 비웃음을 지우지 못하던 남자가 누군가에게 보고했다.

그가 몸을 돌린 곳에는 넓고 화려한 카펫 위에 앉은 노파가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길고 가는 뜨개질바늘과 실이 들려 있었는데, 뜨개질바늘의 머리에는 작은 상자들이 매달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홀홀홀. 알았다. 그럼 위층으로 보낼까, 아래층으로 보낼까. 너희 생각은 어떠니?”

늘어진 실을 툭툭 털어 펴는 노파는 마법사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할머니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여성 마법사가 바닥을 콕콕 찍으며 말했다.

“당연히 아래층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사냥을 마치죠.”

“요 녀석들. 쉬고 싶은 게로구나.”

“호호호. 토벌대가 오고서는 너무 시끄러웠잖아요, 그랜마.”

그랜마. 일부 지역에서 할머니를 뜻하는 말이다. 보통 마탑의 사제 관계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호칭이지만, 분위기도 그렇고 이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홀홀홀.”

노파가 웃으며 뜨개질바늘을 움직였다.

사아아아-

뜨개질바늘을 따라 실이 꼬이며 바늘 끝에서 길게 늘어난 마법진도 같이 꼬였다. 이윽고 복잡한 입체 마법진이 생기며, 하나의 공간을 만들었다. 현재 오 조가 있는 곳과 똑같은 형태였다. 그 상태에서 뜨개질바늘이 움직이며 오 조가 향하는 쪽 길에 경사를 만들어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수정구 속의 던전도 같이 움직였다. 오 조가 아래층으로 간 후 마법진이 사라지자 아래로 향해 있던 길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노파는 뜨개질바늘에 걸린 실만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쪽은 준비가 되었다고 연락해 주거라.”

“예. 그랜마.”

“그나저나, 그 똑소리 나서 탑주가 입도 뻥긋 못 했다는 후작 부인한테는 누가 간다고 했지?”

“해더웨이 부관주님과 케닐, 길 장로님께서 가십니다.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지만요.”

“홀홀홀. 다행이구나. 어린 것이라고 방심하다가는 랜달 부관주 꼴밖에 더 나겠니. 그보다 이번엔 구경 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후작 부인이 워낙 꽁꽁 싸매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있어야지.”

아쉬움에 혀를 차는 노파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제자들은 마탑의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던전의 조종 요청을 노파에게 알려 오고 있었다.


길이 막힌 이드들은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경솔한 발언으로 눈총을 받았던 기사는 선두에 세워 많은 적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벌을 대신했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기강을 세우는 일은 필요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는데, 해당 기사와 같은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은 오히려 그 벌에 기뻐했다.

갈림길까지 되돌아간 이드들은 다른 길에 들어섰다.

발길을 돌리게 된 벽 앞에서 부수자는 말도 나왔었지만, 마법사들이 막았다.

“벽을 부수면 던전을 자극하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심하게 변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벽에 마나가 흐르고 있습니다. 부수려 하면 폭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숴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이 벽 뒤에 오 조는 없을 겁니다. 벽을 부숴 간단히 합류할 수 있다면 갈라놓은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하나같이 부정적인 소리였다.

마법에 관해서는 마법사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기사들이 발길을 돌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오조 위치는 계속 확인하고 있는 거지?”

이드가 라미아를 불러 물었다.

그에 라미아가 손바닥만 한 크기의 거울을 꺼내 보였다. 반짝이는 거울의 중앙에는 백색의 화살표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파란색 점이 찍혀 있었다.

“화살표가 현재 위치고, 파란 점이 오조 위치에요. 그리고 파란색이 좀 진하죠? 그게 깊이에요.”

“깊이? 하긴.”

17층짜리 던전에, 당장 이곳도 지하 수백 미터다. 땅 위가 아니라 공중이나, 바다, 우주처럼 입체적으로 탐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색이 진하면 아래쪽?”

고개를 끄덕인 라미아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이 정도면 한 층 아래요.”

“어느새 아래로 갔지? 그나저나 마법사들 말이 옳았네. 그냥 벽을 뚫었으면 못 찾았겠어.”

라미아가 이 거울을 꺼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벽을 뚫는 것과 달리 바닥을 뚫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마법사 말은 일단 듣고 보는 게 제일이죠.”

자부심 가득한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다 조용히 말했다.

“너 정체성 너무 흔들리는 거 아냐? 따져 보면 넌 기사 쪽이잖아. 왜 마법사 편만 그렇게 드는 건데?”

물론 라미아가 기사라는 것은 아니다. 이드에게 배운 것이 있으니 그녀가 실력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본체인 검을 두고 한 말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여자라고 꼭 치마 좋아하라는 법도 없잖아요. 무엇보다 이드를 두고 내가 칼질을 할 것도 아니고. 거기에 전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지금처럼 이드하고 팔짱을 끼고 걷는 쪽이 더 좋거든요.”

달콤한 말과 함께 이드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는 라미아다.

순간 여기저기서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애정 표현에 부러움과 질투가 실린 야유가 났지만,

“방금 소리 낸 사람 손?”

라미아의 말에 쏙 들어가고 말았다.

굳이 명예 후작 때문이 아니라 마법사 그 자체로서도 무시무시한 후작 부인이라는 것을 아는 기사들이다.


“그런데 두 분은 언제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쉴라가 물었다.

오 조가 떨어진 이상, 언제 마탑과 이 조에 공격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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