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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18화


954화

피잉-

거미줄처럼 가는 은색 선이 허공을 갈랐다. 가늘고 투명한 은색의 금속이었다. 벽에서 튀어나온 선은 그대로 다른 벽을 뚫고 들어갔다. 얼마나 날카로운 건지 단단한 석벽을 푸딩처럼 쉽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였다.

“크헝. 크허허헝!”

쇠를 긁는 듯 거친 울음과 함께 요란한 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몬스터들이 몰려왔다. 그레센 여성 표준인 162.6에 살짝 못 미치는 작은 키에,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 그리고 멧돼지를 닮아 삐죽 솟아 오른 엄니가 위협적인 놈들은 고블린의 변종인 팡고블린.

놈들은 던전 주인의 명령에 따라 토벌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그런 놈들의 머리 높이에 있는 금속 선, 놈들은 그 금속 선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팡고블린이 머리가 나쁘거나 눈이 안 좋은 것은 아니지만, 허공에 거미줄보다 가늘게 이어진 금속 선을 볼 정도로 눈이 좋은 것도. 그리고 기감이 예민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불행은 놈들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천천히 이동 중이었다면 이상함을 느끼고 멈췄겠지만.

비이잉-

선두에서 달리던 팡고블린은 희미한 이명과 함께 코가 뜨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크헝?”

혹시 전날 밤의 짝짓기에 체력을 너무 쏟아서 코피가 났나? 확인을 위해 코를 만지려는데, 이상하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열심히 달리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땅이 자신을 향해 달려든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철퍼덕.

팡고블린이 쓰러졌다. 동시에 금속 선에 잘린 머리 반쪽이 달리던 속도에 따라 그대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직 죽지 않은 눈이 껌뻑거렸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전날 밤 열심히 짝짓기에 힘을 기울인 팡고블린 한 마리가 죽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와르르르-

쓰러진 팡고블린 뒤로 다른 고블린들이 썩은 짚단처럼 엎어지기 시작했다. 앞의 녀석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꼈지만 팡고블린들은 멈추지 못했다. 그전까지 달리던 속도 때문이다.

그렇게 선두부터 마지막까지 110마리의 팡고블린이 몇 초 사이에 몰살당했다. 모두 이마에서 코 부위가 잘려 죽었다. 당구 선수가 공을 모은 듯 잘려진 머리가 바닥을 굴러 한데 모였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모두 허공을 가로지른 금속 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정작 그 투명한 은색 금속 선에는 여전히 핏방울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다시 고요해진 공간. 진한 피비린내에 음산함이 더해진 공간에 황당한 감정을 담은 예쁜 목소리가 울렸다.

“알아서 죽어 주니 고맙긴 한데. 괜히 찝찝하잖아. 그러게 왜 부르지도 않았는데 달려온 거니?”

팡고블린 중 누군가를 과부로 만든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데서 비롯된 찝찝함인가! 그래 봤자 대답해 줄 팡고블린은 이제 없다.

“그래도 공짜 사냥했으니, 잘 먹었습니다?”

의문이 담긴 짧은 말과 함께 허공을 가로지르던 금속 선이 휘리릭 하고 사라졌다.


허공에서 뭉쳐진 금속 선이 늘어나며 인간의 형태로 변했다. 동시에 그 옆의 공간이 출렁이며 이드가 나타났다.

“잘 먹었습니다는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로브를 꺼내 뒤집어쓰는 라미아에 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바로 포기하고는 주변을 살폈다. 특별할 것 없는 던전 안 통로였다. 한쪽으로는 깊은 어둠이, 또 반대쪽으로는 희미한 빛이 아른거렸다. 마치 이쪽으로 오라는 것 같다. 

“저쪽?”

이드가 빛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허리를 폈다.

이 조의 움직임을 확인 한 후, 이드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고는 자리를 비우고 이곳으로 왔다. 물론 이동에는 라미아가 힘을 좀 썼다. 던전의 길을

이용하기에는 길도 모르지만, 너무 멀리 돌아가야 했다. 거기에 라미아가 잘 막고 있지만, 마탑의 눈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해서 라미아가 가늘게 변해 수십의 벽을 아무도 모르게 뚫어 낸 후 이드를 불렀다. 서로가 이정표가 된 공간 이동은 그 어떤 것보다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에 이드는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네. 오 조예요. 이 조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 중이네요.”

라미아가 꺼내 든 두 개의 거울. 오조의 파란 점은 멈춰 있고, 이 조의 붉은색은 서쪽 방향에서 빠르게 접근 중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서 기다리자. 저번처럼 새로 괜찮지?”

이드는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형태를 익숙한 새의 형태로 바꿨다. 동시에 뻣뻣하게 굳은 골렘이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라미아를 머리에 올린 이드가 빛을 향해 나갔다.

스스스스-

몇 걸음 사이에 이드의 모습이 허공중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라미아의 투명화 마법과 부운귀령보의 은신의 공력 때문이다.

마법과 무공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며 완벽하게 사라진 이드는 귀신도 찾기 어려운 상태였다.

유령처럼 허공을 차오른 이드가 빠르게 빛 속으로 나갔다.

그곳은 거대한 석실이었다. 사방에 통로가 가득해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대신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오 조는 그 많은 통로 중 하나 앞에 서 있었다. 그 통로를 통해 석실에 들어선 모양이었는데, 몇몇 초인이 앞으로 나선 것이 그들을 통해 석실을 조사 중인 것 같았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가 높은 천장 가까이 튀어나온 돌 위에 올라섰다.

‘그럼 느긋하게 기다려 볼까’

장소도 적당하고 이쯤에서 전투가 일어날 것 같으니, 적당한 시점에 개입할 생각이다.


그 때 조심조심 석실을 조사하던 초인들이 짧게 의견을 나누고는 굳은 표정으로 발터에게 보고했다.

“예상대로 석실 곳곳에 다양한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석실에 들어온 목표를 가둔 후 몰살할 용도로 보입니다.”

“함정을 해체할 수는 없나?”

“지금 오 조의 힘이면 해체 못 할 함정은 없습니다.”

제국의 난다 긴다 하는 초인들이 모조리 모인 오 조다. 필요한 모든 힘과 다양한 초인기가 있는데, 해체하지 못 할 함정은 없다. 거기에 적색 기사단이라는 강력한 기사 전력도 있고.

“그런데 굳이 아무것도 없는 여기서 함정을 해체하고 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직 함정이 발동되기 전인 것 같은데.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부관인 칸이 자신의 의견을 냈다. 할 수는 있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것. 칸이 보기에는 그랬다. 할 수 있느냐와 할 필요가 있느냐의 차이는 크다. 

“다른 길이 있다면 자네 말대로 했겠지.”

우묵한 눈으로 반대쪽 벽을 노려보는 발터의 말에 칸을 비롯해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번뜩 떠오르는 가능성에 자신들이 들어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혹시 길이 막힌 겁니까?”

“막혔나? 이리저리 굽혀져 나갈 수 없으니 막혔다고 봐야겠군.”

“그럼 우리가 온 걸・・・・・・.”

“당연히 알겠지. 뱃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인이 모르는 것이 말이 되나. 오히려 여기까지 유인당했다고 봐야겠지.”

“뿌득. 역시 마법사 놈들이 가짜 정보를 풀었군요.”

칸이 이를 갈았다.

토벌 전에 마탑이 올린 정보를 토대로 방향을 잡았는데, 설마 함정으로 직행하는 코스였을 줄이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연구 결과와 달리 정신의 관에 대한 정보는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의 안전에 직결된다. 아무리 투자자라고 해도 자신의 집 열쇠를 무방비로 내어 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하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당하니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칸이 분노할 때였다.

“왔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가 오 조의 반대쪽에 있는 통로 중 하나로 눈을 돌렸다. 라미아가 비춰 준 거울에는 오 조와 이 조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노골적으로 기세를 뿜어내는 통로 안 쪽.

그곳에서 한 인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려진 얼굴과 달리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너무나 강렬한 기세.

“기다리고 기다리던 암살 기사가 납셨군.”

오직 이드와 오조, 그리고 마탑만이 그 모습을 확인한 암살 기사의 등장이었다.


“놈! 이쯤에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암살 기사의 등장과 함께 오조에 있던 초인들로부터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특히 발터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칸은 그 모습에 짧은 숨을 삼켰다.

이제 막힌 길을 부수고 돌아간다든가, 다른 통로들 중 출구를 찾는다는 선택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간절히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던 암살 기사가 나타났는데, 발터가 그를 두고 도망이나 다름 없는 선택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나도 그렇지만.’

그리고 그건 칸이나 다른 초인들 역시 마찬가지.

암살 기사의 비겁한 검에 목숨을 잃은 초인 동지들이 한 둘이었던가. 평소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했어도,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들. “제가 탐색자들과 함께 함정을 정리하겠습니다.”

짧게 말을 마친 칸이 석실을 조사하던 초인들과 함께 한 발 물러섰다. 피할 수 없는 전투라면 아군이 이길 수 있도록 아군을 돕고, 위험을 최소로 하는 것이 부관의 역할.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할 줄 아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칸이 뒤로 물러나자 그 자리에 라발이 섰다.

“발터 단장께서 그리도 찾으시던 자인 모양인데, 뒤는 우리 적색 기사단이 맡도록 하지요.”

“감사하오.”

자신의 요청으로 오 조에 소속된 후 적색 기사단이라는 그 쟁쟁한 이름을 한 번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명령에 따라 준 이 묵직한 기사의 말이 발터는 참 고마웠다.

적색 기사단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자 발터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처척.

오 조의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에 반응 하듯 암살 기사가 손을 들어 올렸고, 그가 서 있는 통로와 그 옆의 통로에서 검은 마수들과 몬스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정리할 시간이다.”


“존 워스일까요?”

“아니, 모이엔이야.”

암살 기사를 살피던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두두두두 하는 땅 울림과 함께 오 조와 마수들이 석실의 중앙에서 부딪혔다.

그것은 전투라기보다는 폭발이었다.

특히 암살 기사 쪽의 마수와 몬스터는 위험에 대한 본능이 거세된 상태. 마치 살아 있는 미사일처럼 날아드는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초인기에 몬스터와 마수들이 그대로 폭발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암살 기사를 바라보았다.

“존 워스가 암살 기사인 건 마탑에도 비밀로 했다면서? 그런 상태에서 저렇게 대놓고 나타나진 않겠지.”

“그럼 마탑에서 발터가 암살 기사에 집착하다는 걸 이용하는 걸로 알겠네요.”

“그런 거지. 마탑도 그렇고, 존 워스도 그렇고, 초인파까지. 서로 진짜 속내는 다 감추고 있는 거지. 그나저나 슬슬 게일이 나타날 땐데, 적색 기사단이 더해진 오 조의 힘이면 정리되는 건 금방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쪽 통로에서 구르듯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쿨럭~ 헉헉. 도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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