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17화
1052화
연극을 보고 신전에 들른 이드는 포션을 사서 케마란과 네리베르에게 쥐여 주었다. 그리고 화려한 병에 담긴 최상급 포션을 사서 일리나도 챙겼다. 멀리서 본 것처럼 신전에서도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었다. 최대한 사람을 모아 신도를 늘릴 기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하는 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탓인지, 외부의 구경거리보다 재미가 떨어진다는 점일까.
그래도 성가대의 성가만은 최고였다. 절로 주머니를 열게 만든달까? 이드도 넉넉히 성금을 내고, 기도도 드렸다.
중원이나 지구와 달리, 신의 존재가 훨씬 가까운 만큼 기도의 진정성에도 차이가 났다. 문제는 신이 이드의 기도를 들어줄 능력이 되냐는 거지만. 신전을 나와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며 자연스레 여러 가지 맛있는 냄새도 넘쳐 나기 시작했다.
이드와 일행들은 그 속에서 주사위도 굴려 보고, 단검도 던지고, 여러 가지 음식도 맛봤다. 당장 여성진의 손에 하나씩 군것질거리가 들려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으면 으레 있을 만한 방해꾼이나 문제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인.
그것도 쉽게 만나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고, 각자 개성이 분명한 미인이 셋이나 모여 있으면 수컷의 본능에 이끌려서라도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말이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저 정도 미인이 호위도 없이 남자 하나와 돌아다닐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짜 맛좋은 먹잇감인 경우다.
하지만 그런 행운을 기대했다가 틀렸을 경우의 결과가 어디 보통 끔찍해야 말이지. 조금만 살피면 가벼운 차림으로 나온 귀족가 영애에게
찝쩍거렸다가 팔이나 목이 날아간 이야기는 흔할 정도다. 그건 징역도 운이 좋은 거다.
그런 면에서 이드와 일행의 위험성을 알아본 놈들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었다. 사건 사고가 많은 안티로스의 특수성을 잘 파악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놈들은 나쁜 짓을 해도 오래 할 놈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금방 저녁이 되었다.
거리 곳곳에 등이 밝혀졌다. 색종이를 붙인 갓을 씌운 등은 갖가지 색깔로 화려하게 수도를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본 이드가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저녁 시간인데, 슬슬 돌아가야지?”
“아직 절반도 못 봤는데요? 조금 더 놀다 가면 안 돼요?”
두 손을 맞잡은 케마란이 어디의 고양이처럼 눈을 그렁그렁하게 뜬다. 옆에 선 네리베르도 차마 케마란처럼은 못 해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더 돌아볼 수는 있지만, 괜찮겠어?”
“뭐가요?”
“지금도 우리끼리만 나온 건데. 여기서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면 선배들이 잘 놀다 왔다고 하겠냐는 거지. 내일 수련도 같이 받아야 할 텐데.”
“아…… 그러네요.”
“쯧쯧, 바보야. 당장 너희들만 놀러 나왔다는 것만 들켜도 뒷감당이 쉽지 않을 텐데, 그걸 몰라?”
아무리 귀여운 막내들을 사랑하는 선배들이라고 해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니까. 갈굼을 가장한 장난이 더 심해질 건 뻔한 일이다.
“거짓말이잖아요. 돌아가겠다는 걸 이드 님이 억지로 끌고 나오셨잖아요.”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이드의 딴청에 입에 있던 고기를 뿜을 뻔한 케마란은 곧 일리나의 팔을 껴안으며 달라붙었다.
“흥, 상관없어요. 이드 님이 없어도 일리나 님은 저희 편을 들어 주실 거거든요. 그죠? 일리나 님.’
“푸후훗.”
눈을 동그랗게 만들어 자길 올려다보는 케마란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일리나다. 한편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네리베르가 케마란의 머리를 두드렸다.
“일리나 님 귀찮게 하지 말고 당장 떨어지세요. 제발 기사의 품격을 지키라고요.”
과연 저 말이 한 손에 꼬치를 든 사람이 할 소리인가 싶지만.
“품격은 나중에 찾고, 너도 부탁해! 걸리면 나만 당하냐?”
“당하긴 왜 당하나요? 이 정도 문제는 진작 예상해 두는 거라고요.”
“네리베르는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나 보네?”
이드가 묻자 네리베르가 거리의 한쪽, 특히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가게들을 가리켜 보였다. 모두 이드와 일행들이 들러 맛을 본 곳들이었다.
“아까 저기에 들렀을 때, 저택에 남아 있는 분들이 드실 만큼 음식을 주문했어요. 저걸 가지고 돌아가면 뭐라고 하시는 분은 없을 거예요.”
“도대체 언제 그런 꼼수를!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당연해요. 이런 일까지 시시콜콜 케마란 양에게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섭섭해하는 케마란을 오히려 한심하게 바라보는 네리베르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네르베르의 센스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여러 가게를 들렀지만 주문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데, 언제 그런 조치를 했을까. 한편으로는 축제에 정신없는 중에 그런 부분까지 생각을 한 것이 대단하다 싶을 정도였다.
확실히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신 음식이라도 가져다 주면 환영받을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갈굼 대신 오히려 칭찬을 받을지도. 이드는 네리베르의 센스 있는 행동을 칭찬하고는 말했다.
“그럼 주문한 음식만 찾아서 바로 돌아가자. 더 늦으면 진짜 미움 받을 거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네리베르가 남은 꼬치를 한입에 삼켜 버리고는 앞서 걸었다.
저택에 머무는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식당에 주문된 음식의 양도 엄청났다. 들르는 식당마다 음식들이 두 테이블 이상씩 가득 쌓여 있어서, 아공간에 집어넣는 것도 일일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식당을 들른 그들은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중심가를 벗어났을 때는 일행도 한 명 늘어 있었다. 에린이었다. 은색 기사단과 달리 검은 달과 이드의 연결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비교적 편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지금도 수도에 있는 검은 달의 본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케마란은 그녀에게 들고 있던 꼬치 하나를 건네주며 물었다.
“토벌대는 잘 오고 있대요?”
“고마워요. 토벌대는 예정대로 도착할 거예요. 추가로 부상자들도 치료를 잘 받고 있다고 해요.”
“다행이다.”
케마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토벌전에서 함께 싸우며 알게 된 기사들을 내심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에린은 꼬치를 하나 빼 먹고는 이드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미확인 정보로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한 일입니다만.
“괜찮으니 말해 봐.”
“존 워스가 소드 팰러스에 나타난 것 같다고 합니다.”
그 말에 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메르시오가 죽어 차원의 인에 흡수된 지금, 가장 강력하게 또 하나의 혼돈의 파편으로 의심되는 자가 존 워스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도 그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내심 걱정하고 있던 이드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소드 팰러스에 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네. 어떻게 얻은 정보지?”
“검왕의 저택을 관리하는 자들에게서 흘러나온 말인데, 아직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워낙 그런 헛소문이 많아서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존 워스에 대한 일이다 보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잘했어. 아, 그리고 이 정보에 대한 확인은 최대한 안전하게 해 줘.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아예 포기해도 좋으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혼돈의 파편이다. 아니, 혼돈의 파편을 제외하고도 무려 소드 팰러스에 있는 삼검왕의 뒤를 캐는 일이다. 그런 일이 쉬울 리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 정보를 찾다 발각되었을 때는 더 큰 문제가 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 움직이는 말단은 검은 돌의 존재 자체를 모릅니다. 들켜도 검은 돌은 물론, 이드 님에 대한 정보가 밖으로 새는 일은 없을 겁니다.”
냉혹한 말이지만 저쪽 세계에선 저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드는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그들이 아니라도 곧 소드 팰러스를 방문해야 하니, 직접 확인하면 된다.
“정보가 새지 않아도, 경계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최대한 조심히.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즉시 중지. 알겠습니까?”
“……네.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굳이 검은 돌이 아니라도 삼검왕의 정보를 찾는 세력은 많다. 삼검왕 정도면 각국의 주요 인사급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당연히 삼검왕과 친하기 위해서든, 견제하기 위해서든 삼검왕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이드는 조심하길 원했고, 에린은 그 이상의 설명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 다른 정보는 더 없습니까?”
“존 워스에 대한 정보는 그뿐입니다. 대신 그가 목격된 당일, 블러디 혼 마르켈이 일검왕의 저택을 방문했습니다.”
세 검왕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말이다. 이러면 존 워스에 대한 미확인 정보의 신뢰도가 조금 더 높아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에린이 가져온 정보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만. 이 또한 확인되지 않은 일이긴 하나, 삼검왕 중 일인이 토벌대가 도착하는 것에 맞춰 수도를 방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짜 그렇게 되면 황궁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겠군요.”
“네. 특히 이번에 거론될 문제는 존 워스와 소드 팰러스의 명예에 치명타가 될 엄청난 스캔들이니까요. 소드 팰러스에서도 이번 사건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최대한 막아 내고 싶을 겁니다. 초인파와 소드 팰러스의 역대급 정면 충돌이 되겠죠.’
이드도 그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역대급은 역대급일 것이다. 아무리 대립 각을 세우고 있다고 해도, 황제가 적으로 선포한 마탑에 붙어 아군을 공격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일이 커지면 소드 팰러스도 정신이 없겠지.’
그리고 그 틈을 타 소드 팰러스를 방문할 생각인 이드였다. 당연히 우선 순위는 세레니아가 남겼다는 물건의 확인이 먼저다.
존 워스에 대해서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가지고 있지만, 존 워스에서 이어지는 다른 혼돈의 파편에 대한 단서가 아직 아무것도 없다. 소드 팰러스에 존 워스가 있다고 무턱대고 소멸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랬다가는 또 하염없이 대륙을 뒤지면서 혼돈의 파편이 튀어나오길 기다려야 할 테니까. 그러고 보면 생각할수록 메르시오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 겹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드를 선두로 한 일행들이 저택의 정문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때.
번뜩.
생각에 빠진 듯 하던 이드의 눈이 번뜩이더니,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쏘아져 나갔다.
마치 공간 이동을 보는 듯한 극한의 분뢰보.
그런 이드가 향하는 곳에는 두 남자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신경질적인 눈매의 남자와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남자.
하지만 이드는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울어진 모자 아래로 보이는 황금색 눈동자가 너무 인상적이지 않은가.
“쳇!”
이드도 빨랐지만, 상대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제엔장!”
촤르르륵.
이드보다 반응은 느렸지만, 초인기의 발동은 빨랐다. 황금빛 바퀴가 그들을 둘러싼다 싶은 순간.
찌이익.
이드의 손이 닿는 것과 함께 두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