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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23화


1058화

발터의 기척이 황궁 밖을 향해 멀어져 간다.

황제의 안전을 위해 최강의 결계가 설치된 황궁이지만 기척을 감지하는 것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직 미숙하군.’

그에 페시딘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입을 가린 와인 잔이 아니었다면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선명한 웃음이었다. 초인파와 소드 팰러스의 충돌이 예고된 이 시기에, 황궁을 방문한 페시딘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다시 한번 지지세력을 공고히 하고, 새로운 아군을 만들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다.

당연히 발터는 이런 페시딘의 행동을 막아서거나,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꼴 보기 싫다는 듯 자리를 떠나 버렸다.

페시딘이 미숙하다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발터 옆에 있는 기척에 대해서는 일체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터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린든 후작님. 이번 토벌에서 그린든 기사단이 큰 공을 세웠다지요. 축하드립니다.”

그가 가장 먼저 공략에 나선 이는 토벌에 직접 참가했거나 가문의 기사단을 참가시킨 귀족들이었다.

그들과는 토벌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나눌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소드 팰러스는 그들이 자랑하는 오색 기사단 중 청색 기사단이 전멸된 상황이 아니던가.

물론 그건 페시딘 개인이 봤을 때도, 소드 팰러스라는 단체로 봤을 때도 큰 손해였다.

하나 무엇 하나 동정의 요소가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용하자는 것이 페시딘의 생각이었다.


한편, 발터는 시사이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서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저택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내가 자릴 비운 사이에 저택을 차지하고 있었던 건가? 집사는 별말이 없었는데.”

할 일이 많았던 발터는 광장의 행사를 마친 후에도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황궁에서 일을 봐야 했다.

그에 집사를 시켜 파티에 참석할 옷과 장신구 등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때 집사는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된 건가?”

“그게, 안티로스에 도착하고서 조금 문제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희를 추적할 위험이 있어서 집사의 동의를 얻어 라울 님이 금제를 걸었습니다. 황궁이 어디 보통 위험한 곳이라야 말이죠.”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기에 발터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돌아오셨습니까.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집사에 발터는 그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곧장 라울이 머물고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벌컥.

노크도 없었다. 왈칵 문을 열고 들어선 발터는 곧 인상을 썼다. 방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뒤따르던 시사이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통 방에 없으실 땐 서재에서 책을 보십니다. 읽을 만한 책이 제법 된다고 하시던데요.”

“빌어먹을 놈. 남의 집을 어지간히 들쑤시고 다녔군.”

“아하…… 하하하.”

아무렴 아무리 친해도 경우가 있지. 자신의 집에 멋대로 머무는 것도 모자라, 허락 없이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다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뿌드득 이를 가는 발터에 시사이판이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내뱉은 말이 꼭 자신을 향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재에 있을 거라는 시사이판의 말은 맞았다.

라울은 몇 권의 쌓아 둔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맥주잔처럼 커다란 잔에 각성 효과를 가진 차를 담아 홀짝이면서 말이다.

“잘 다녀왔나? 기다리기 지루했다고.”

라울은 기가 막힌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발터를 향해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기다린 건 너지, 난 기다리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책상에서 다리 내려.”

“아하하. 아이언 마스크의 얼굴이 구겨진 걸 보니, 토벌이 힘들었나 봐?”

“토벌이 아니라 네가 싫은 거다. 그보다 무슨 일로 기다린 거냐?”

“뭐가 그렇게 바빠? 일단 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그런데 칸은 같이 안 왔나?”

라울은 마치 자신의 집인 듯 자리를 권하며 소파로 옮겨 앉았고, 발터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칸은 서류 작업 중이다. 그러니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용건을 말해, 안티로스에 와서 사고가 있었다는 건 또 뭐고? 큰 문제는 아니길 바란다.”

“큰 문제면?”

“내가 직접 널 잡아넣을 거다. 지금 큰 건을 준비 중이라서 잡음이 있으면 곤란하거든.”

어느새 특유의 무표정이 된 발터의 말에는 진심이 줄줄 흘렀다.

그에 막 집사로부터 다과를 받아 들고 들어오던 시사이판이 이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하지만 라울은 익숙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큰 잔의 차를 홀짝거렸다.

“이야~ 무서워라.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답하기 좀 애매하다. 문제 자체는 심각한데, 이 문제로 인해서 사건이 커진 건 아닌 것 같거든.”

“설명해 봐. 자네도 찻잔 주고, 거기 앉고.”

“예!”

흠칫한 시사이판이 자리에 앉아 얌전히 차를 따랐다.

날카롭게 단련된 거친 인상의 남성이 차를 따르는 모습은 어색했지만, 이 방에서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라울은 토벌을 끝낸 토벌대가 복귀하는 사이, 쉐어 가든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영상까지 보여 주며 핵심만을 간추려 전했다. 자신과 시사이판의 검후 추적 과정, 그리고 마지막 발신지를 쫓아 도착한 저택 앞에서 마주친 이드와의 충돌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어때? 아직도 직접 잡아넣고 싶어?”

“아니, 그 전에 당장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다. 진심으로.”

과연 이드와 은색 기사단이 검후를 구출했고, 그렇게 구출된 검후가 같은 안티로스 안에 있다는 사실에는 천하의 발터도 무표정을 고수하지는 못했다.

발터는 페시딘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진하게 밀려오는 피로감에 얼굴을 감쌌다.

라울의 예상대로 아직은 검후에 대한 일이 황제까지 닿지 않은 것 같지만, 과연 이 일이 공식화되면 얼마나 큰 문제가 될 것인가를 상상하면 정신이 아득하다.

존 워스의 일 따위, 이 사건이 터지는 순간 흔적도 없이 쓸려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검후와 관련해서 초인파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녀의 납치와 감금은 바벨에서 주도했지만, 초인파와 아예 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과연 황제가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를 동시에 버릴 수 있을까. 어쩌면 덮어 버릴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군.’

제국내의 역학 관계를 떠올려 본 발터는 대충 그려지는 그림들을 뒤로하고 라울을 노려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금 자신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모든 사건이 직간접적으로 라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점은 일단 다 제외하더라도 검후와 이드를 자극시켜 놓고는 자신을 찾아왔다는 점이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지금 눈에 살기가 도는 거 아냐?”

“고민 중이다. 떠오른 생각을 실행할지 말지…….그래서, 날 기다린 이유는? 아, 혹시 만에 하나라도 검후를 빼앗는 일에 힘을 빌려 달라고 할 거면 포기해라. 말하는 순간 정말 던져 버릴 테니까.”

토벌의 마지막 날.

정신의 관을 끝장내 버린 혼돈의 파편과 이드의 전투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발터였다.

그는 절대 그런 괴물을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건 확률이나 용기를 따지기 이전, 그냥 무모한 짓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라울도 그런 사실은 잘 알고 있는지 들고 있던 잔까지 내려놓고 손을 흔들었다.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이냐? 당장 내 어깨에 남은 흔적도 있는데. 무엇보다 안티로스 안에서 싸운다니. 그건 이기고 지고 이전의 일이라고.”

무슨 뒷골목 건달들의 싸움이 아니다.

검후를 다시 빼앗기 위해서는 검후 본인은 물론이고, 그녀를 지키고 있을 이드와 은색 기사단과도 싸워야 한다.

당연히 골목이 조금 소란스러워지고 마는 그런 싸움이 아닐 터.

최소한 안티로스 절반이 쑥대밭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투가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검후를 납치하고 말고를 떠나 황제는 물론, 전 대륙이 알게 될 것인데.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 어쩌자고?”

“조용히 만나서 대화로 풀어보려고 한다.”

“・・・・・・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순간 할 말을 잊은 발터가 이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마치 아픈 사람을 보는 시선으로.

‘역시 저게 당연한 거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시사이판은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확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이상한 취급을 받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라울은 시사이판에게 했던 것과 같은 논리를 발터에게 펼쳐 놓기 시작했다. 물론 부하로서 강하게 반박하지 못한 시사이판과 달리, 발터는 쉽게 납득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길지 않았다.

발터가 황제 앞에서 거론할 존 워스에 대한 문제까지 연결하고 나오자, 발터로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당장 본인부터 검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검후에 대한 문제가 터지는 순간, 존 워스의 문제는 흔적 없이 쓸려 갈 것이라고. 오히려 소드 팰러스와 한데 묶여 매도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내가 나서서 검후와 명예 후작. 두 사람과 조용히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라?”

“그래. 명예 후작과는 토벌에서 함께 싸운 전우고, 검후와는 제국의 신하로서 오랫동안 알아 온 관계잖아. 부담 없이 접근하긴 최고지.”

“정말이지…… 말은 쉽군.”

발터는 한탄하며 라울을 노려봤다.

하지만 내심 그의 말에 긍정하고 있는 바도 있었다.

지난 일 년간 만나 보지 못한 검후는 몰라도, 이드에겐 최근에 도움을 받기도 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시도해서 손해 보지 않는다. 잃을 게 없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더라도 시도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움직이면 되는 건데?”

“급한 일만 없다면 오늘 중으로 가 주는 게 최고지.”

“진심이냐?”

“어쩔 수 없다고.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조율해야 해. 그래야 페시딘이 찾아왔을 때 시원하게 한 방 먹일 수 있지 않겠어?”

발터는 갑자기 튀어나온 페시딘의 이름에 입술을 핥았다.

“놈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당연하지. 마탑이랑 검후와 관련해서, 그쪽과 우리가 손을 잡은 게 있잖아. 그걸 가지고 존 워스에 대한 문제를 묻어 버리려고 할 거야. 그렇게 처리되는 것이 소드 팰러스 입장에서는 베스트일 테니까.”

발터는 그 말을 들으며 파티장에서 마주쳤던 페시딘을 떠올렸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고, 어딘가 자신을 아래로 보는 듯하던 그 기분 더러운 눈빛.

“좋아. 바로 움직이지.”

결정은 신중히. 그러나 행동은 빠르게.

발터는 평소 지론대로 결정과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 너머 저 멀리 카일란의 저택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현재는 검후와 이드, 그리고 은색 기사단이 머무는 바로 그 저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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