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7화 – 태극검황의 하야

태극검황의 하야

옥화무제는 요즘 들어 하루하루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교주를 죽이려던 계책은 실패해 버렸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무리수를 뒀던 모든 것 들이 들통 나 버렸다. 교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이번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을 지금쯤이면 몽땅 다 파악해 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옥화무제에게 총관이 조언을 건넸다.

“지금이라도 그분께 사죄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총관의 말에 그녀는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너무 늦었어요. 이제는 최소한의 이용가치도 없는데, 그가 이쪽의 사과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껏 묵향과 오랜 세월 부대껴 온 만큼, 옥화무제처럼 묵향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묵향은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중간에 그만둘 거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다.

사실, 무영문 같은 잡초처럼 끈질긴 문파를 대충 건드려 놓고 그냥 놔둔다면 그 뒤끝이 무한할 거라는 것을 교주도 잘 알 테니 말이다.

옥화무제는 고개를 들어 총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교 쪽의 동태는 어떤가요? 뭔가 변화가 있던가요?”

그녀가 요즘 들어 마교 쪽의 동태를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보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마교 쪽에서 본격적인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 다. 묵향의 성격으로 봤을 때, 가만히 참고 넘어갈 리가 만무한데 말이다.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요?”

그게 아니라는 듯 총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분께서 복수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뭘 아시는 게 있어야 공격을 해 오든 할 게 아닙니까. 새로운 정보는 태상문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 그분께서 이번에 결혼식을 올리신답니다.”

“겨, 결혼식이라고요?”

옥화무제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껏 고자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여색을 멀리하던 묵향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결혼식이라니. 옥화무제는 교주의 속셈이 빤히 보이는 듯해서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결혼식을 빌미로 자신을 꾀어내자는 속셈이 아니겠는가. “그래, 상대는 누구라고 하던가요?”

“그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결혼식을 올린다면서 마교와 인연이 있는 모든 문파들에 초청장을 돌리고 있답니다.”

“당연히 본문에도 초청장이 왔겠죠?”

옥화무제의 물음에 총관은 침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천지문에는요?”

“천지문에는 초청장이 갔답니다. 문주가 받자마자 발기발기 찢어서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만………….”

옥화무제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나를 밖으로 꾀어내기 위한 함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함정이라면 자신에게도 초청장이 와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 초청장이 오지 않았다는 말은 함정이 아닌 진짜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었다.

“뜬금없이 결혼식이라니,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가 없군요.”

“그래서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려뒀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입수된 것이 없습니다.”

“흠, 마교에 심어둔 끄나풀들을 통해서도 알아낼 수 없던가요?”

“안타깝게도 포섭한 자들 중에서 십만대산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지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번에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했었습니다만, 외부 지단에서 성장한 자들은 중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기본법규는 바뀌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정보가 있어야 그것에 맞는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는데 전혀 없으니 답답했던 것이다.

옥화무제가 뭔가 골돌히 생각하는 듯하자, 총관은 조용히 서서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경과된 후에야 옥화무제가 말문을 다시 열었다.

“현 단계에서는 미끼를 던져 보는 수밖에 없을 듯하네요.”

“미끼를…, 말씀이십니까?”

“일단 지단 1개를 노출시켜 보도록 하죠. 물론, 총단처럼 위장해서 말이에요. 그 후에 교주가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살펴보자구요.”

“총단처럼 위장하려면 아주 큰 희생을 치러야만 할 겁니다.”

근심스런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오히려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총관의 말에서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대한 그럴듯하게 만들라고 하세요. 모두가 그곳이 본문의 총단이라고 착각하도록 말이에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유는 많죠. 첫째, 총단을 공격할 때 마교 쪽에서 어떤 전술을 쓰는지 관찰할 수 있어요. 총단에 대한 방어는 완벽하다고 본녀는 자신하고 있지만, 의외로 그들이 허점을 찾아낼지도 모르죠. 교주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내는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그가 찾아낸 허점을 이쪽에서 보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총관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상관은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인물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너무 많은 피해가………….”

“둘째, 총단을 박살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어 교주의 방심을 유도해 낼 수 있어요. 원래 우리 무영문의 전력이 그렇게 강한 것이 아닌 이상, 총단이 괴멸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 이상 본문을 공격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화무제의 입에 살짝 교활한 웃음이 걸린다.

“이걸 기회로 무림맹에 다시 붙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점이죠. 맹은 우리가 마교와 뒷거래를 했던 것 때문에 의심 어린 시선으로 본문을 바라 보고 있어요. 하지만 마교가 본문의 총단을 파괴하는 등의 커다란 피해를 입혀 흑백이 분명하게 밝혀진 후에도 우리를 경원시 할까요? 그러다가 덜컥 본문이 마교에 흡수라도 되는 날에는 끝장인데 말이에요. 더군다나 본문에는 내가 있어요. 안 그래도 교주를 상대할 수 있는 절대고수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니, 절대로 나를 놓치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그제서야 총관은 겨우 지단 하나를 던져 주고, 얼마나 많은 것을 얻게 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과연, 기가 막힌 계책이십니다.”

총관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곧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맹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군사가 있다면 굳이 이런 피해를 입지 않고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는데, 정말 안타깝군요. 지금 당장 문주 님께 보고하여 제대로 된 미끼를 준비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완벽하게 총단처럼 보여 줘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본문의 생사가 달린 일이에요.”

“제가 직접 가서 철저히 확인토록 하겠습니다.”

복명을 한 총관이 예를 올리고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옥화무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참, 총관!”

“예? 뭔가 하명하실 거라도………….”

“방금 떠오른 생각인데…, 흑풍대는 마기를 흘리지 않잖아요?”

뻔한 얘기를 물었기에,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총관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렇습지요.”

“흑풍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라고 이르세요. 본문을 상대함에 있어서 교주가 사용할 가장 강력한 패는 흑풍대가 될 가능성이 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심려하시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들이 양양성에 있을 때, 그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던 많은 정찰조들에게 노출되지 않았습니 까.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대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거기에다가 십인장급 이상의 경우 몰래 초상화까지 그려 뒀고 말입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가 보도록 하세요.”

“맹주님, 맹주님!”

* **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다급히 외치는 감찰부주의 모습에 맹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무슨 일인고?”

감찰부주는 맹주의 앞에 앉아있는 청호진인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인사했다.

“아, 사형께서도 와 계셨군요. 맹주님,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고?”

“교주가 서녕에서 결혼식을 올린답니다.”

그 말에 청호진인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교주가 결혼식을? 더군다나 십만대산도 아니고 서녕에서?”

“예, 공수개 장로의 말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마교와 친분이 있는 여러 문파들에 벌써 초청장이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개방에서 물어온 정보인 만큼, 결혼식을 올리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십만대산이 아니라 서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게 청호진인은 영 찝찝했 다.

“함정이 아닐까?”

“함정…, 이라구요?”

“구태여 서녕에서 결혼식을 올릴 이유가 없지 않느냐.”

“오히려 십만대산에서 손님을 받는 게 함정일 확률이 더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십만대산 안에는 외부인들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될 수많은 기밀 시설들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본맹에서는 그동안 십만대산에 설치되어 있을 기관진식은 차지하고라도, 내부의 지형조차 알아내지 못했지 않 습니까. 그 정도로 보안에 철두철미한 마교가 아무리 교주의 결혼식이라지만 내부에서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십만대산에서 한다면 우리 쪽 으로서도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지만 말이죠.”

“그건…, 사제의 말이 옳은 것 같군. 하지만 서녕에서 한다고 해서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며 좋아하기에는 힘들 것 같구나.”

“어째서 말입니까?”

“마교 쪽에서 대비를 하고 있을 게 뻔한 것도 있지만, 어느 세월에 장로들을 설득해서 무사들을 불러 모은다는 말이냐. 더군다나 춘릉성 전투 이후 맹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 상황에서 결혼식장에 쳐들어가 피바다를 만들자고 하면 장로들이 잘도 찬성 하겠다.”

지금껏 조용히 듣고 있던 맹주가 침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청호의 말이 옳구나. 남의 잔칫집에 쳐들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혹, 그자가 무림일통의 야욕을 드러내기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명분이 없다는 말이었다. 만약 춘릉성 전투 이후 마교가 무림일통의 야욕을 드러내며 피바람을 일으켰다면 정파의 모든 문파들이 무림맹을 중심으 로 똘똘 뭉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주는 교활하게도 중원을 침공할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역대 마교 교주와는 달리 평화를 원한다는 식의 가증스러운 연극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위기감이 사라지자 이제 남은 것은 맹주에 대한 성토뿐이었다. 맹의 수뇌부들은 처음에는 맹주를 두둔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군소방파들의 반발 이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춘릉 대회전에 참가했던 모든 이들이 맹주가 벌인 추태를 빤히 봤는데, 그게 수습이 되겠는가.

시간이 지나 맹주에 대한 성토가 자신들에게까지 확대되자, 장로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맹주가 퇴진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 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침통한 표정으로 말이 없던 맹주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로회에 전하거라. 노부가 물러나겠다고 말이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맹주님.”

청호장로가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태극검황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느니. 시간만 끈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될 뿐이니라.”

그렇게 말하는 태극검황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그가 맹주의 자리에 집착했던 것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문파의 번영을 위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맹 주직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그리 큰 미련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으로 인해 무당파가 오명을 뒤집어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태극검황이 맹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자, 장로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절대로 맹주직을 내놓지 않겠다며 끝까지 버텼다면, 자칫 무 림맹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했던 것이다. 마교처럼 힘에 의해 통치되는 단체가 아닌 만큼, 대중의 지지를 잃는다는 것은 곧 종말을 의미했다.

무림맹 회의실에 모든 장로들이 집합했다. 평소에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파견지에서 급히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무림 맹의 모든 장로들이 이렇듯 한 자리에 다 모인 것은 아주 드문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인망도 그렇고, 양양성에서 쌓은 전공도 그렇고…………… 수라도제 대협 만한 분이 어디 또 계시겠소? 차기 맹주는 그분으로 합시다.”

한 장로가 수라도제를 추천하자 대부분의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공수개 장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좋기야 하지만, 그분이 과연 맹주직을 제대로 수행하실 수나 있으실 런지…………?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공수개 장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가 뭔지 궁금한 것이리라. 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청 호진인이었다.

“공수개 장로의 어감은.., 혹 그분께서 맹주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제대로 들은 게요?”

청호진인은 무당파가 자랑하는 전대 고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장로직이나 하고 있을 리 없지만, 그는 태극검황을 옆에서 보좌하기 위해 무림맹의 장로가 되었다.

하지만 태극검황이 사임한다고 그도 함께 그만두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 아직까지는 장로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조만간에 그만두게 될 것이 분명했다.

공수개 장로는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말에 모든 장로들이 귀를 기울이며 집중하고 있는 게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게 바로 정보의 힘이었으니까. 그는 주위의 반응을 살펴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수라도제 대협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좀……………”

쾅!

공수개 장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탁자를 내리치며 한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대체 공수개 장로께서는 우리 세가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게요? 평안히 잘 계시는 태상문주님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다니!”

장로들의 시선이 언성을 높인 인물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가 왜 그렇게 노성을 터트린 것인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서문세 가에서 파견한 서문정 장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서문정 장로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내 한 가지만 묻겠소이다. 수라도제 대협께서 오랜 외유를 마치시고, 일주일 전에 세가로 돌아오셨다는 것 은 알고 계시겠지요?”

서문정(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그의 표정만으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장로가

“오랜만에 세가로 돌아오신 대협께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기행들을 일삼고 계시다고 합니다. 어떤 기행들인고 하니, 왜 그 일전에 공공대사께 서 하셨던 것과 유사한 그런 기행들 말이외다.”

공수개 장로의 말을 들은 서문정 장로의 표정이 마치 똥이라도 씹은 듯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다른 장로들의 표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 다.

과거 공공대사는 무림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고수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기행(奇行)을 일삼기 시작했다.

도(道)를 깨달으면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도를 깨달은 게 아니라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그 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만큼 엽기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오죽하면 세인들이 그를 불계불황(不戒佛皇)으로 칭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온갖 사악한 짓 을 다 한다는 뜻의 만사불황(萬邪佛皇)으로까지 불렀을까.

“그, 그렇다면 그분께서도 공공대사처럼 주화입마에 빠지신 게요?”

다급히 묻는 청호진인의 질문에 공수개 장로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을 본다면 그런 것 같소이다. 혹, 맹주직에 오르기 싫어 연극을 하고 계신 게 아니라면 말이오.”

공수개 장로의 말에 모두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이 좋아 주화입마지, 결국 미쳤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리고 미칠 때 미치더라도 왜 하필이면 이런 급박한 상황에 미친다는 말인가. 이제 장로들이 선택할 수 있는 운용의 폭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곤륜무황 대협으로….”

“곤륜무황은 절대로 안 되오!”

청호진인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공동파 출신인 지파천 장로가 반박했다. 무극검황이 맹주였던 시절, 무림맹에는 공동파 출신의 장로가 4명씩이나 있었다. 하지만 공동파가 몰락해 버린 지금, 지파천 혼자만이 맹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의 주장을 백량 장로가 반박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말이오? 예전처럼 곤륜파가 변방에만 자리 잡고 있다면 혹 모르겠지만, 이번에 천자산(天子山)에 분타까지 개설하지 않았소? 설 마 그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요?”

곤륜파가 호남성 북서쪽의 천자산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전대 맹주였던 태극검황과의 밀약 덕분이었다. 전대 맹주는 곤륜무황을 끌어들이 기 위해 곤륜파의 요청을 허락했고,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장로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자신들도 그 사안에 대해 찬성했었으니 말이

다.

“위치 때문에 반대하는 건 아니외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곤륜은 그동안 무림맹에 은근히 홀대를 당해 왔소. 마교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던 처지였던 만큼, 우리 쪽에 악감정이 없을 리가 없지 않겠소?”

지파천 장로의 주장에 공수개 장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저런 걱정을 할 정도로 공동파가 아니, 전전대 맹주였던 무극검황이 곤륜파에 저질러 놓은 죄가 많았던 것이다.

“흐음, 지파천 장로께서는 혹, 보복이라도 당할까 그게 걱정되시는 모양이구려.”

은근히 비꼬는 말투에 지파천 장로의 안색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랜 연륜을 쌓은 능구렁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찔리다 보니 무심결 에 감정이 드러난 것이다.

“누가 보복을 두려워 한단 말이오? 노부의 말은 잘못된 인선으로 인해 분란만 가중될까 두렵다는 뜻이외다. 지금은 모든 문파들의 지지를 회복하고, 일치단결해야 할 때가 아니오. 내 말이 틀렸소?”

“귀하의 말이 옳소이다만, 곤륜무황을 제외한다면 딱히 맹주가 되실만한 분이 안 계시니 그게 문제이지 않소. 공공대사께서 그렇게 무공을 폐하지 만 않으셨어도 차기 맹주로서 손색이 없으셨을 터인데………….”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공수개 장로의 말처럼 맹주가 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무림맹의 최대 고민이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세인들이 꼽 는 절대고수의 숫자는 3황5제로, 변화가 없었다. 예우상 공공대사를 3황에 아직까지 집어넣고 있었고, 패력검제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직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현천검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모든 변수를 다 고려한다 면 2황제로 불리는 게 맞겠지만, 세인들은 3황4제로 생각할 것이다.

뭐, 숫자야 어찌 되었건 맹주감을 선출하려니 마땅한 사람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세인들이 아직까지도 3황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존 경받고 있는 공공대사가 최고의 맹주감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공을 상실한 인물을 맹주로 추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라도제는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듯했고, 만통음제는 행방불명된 후 아직까지도 행방이 묘연했다. 현천검제와 황룡무제는 둘 다 연륜이 짧아 맹주로 선택되기에는 문제가 컸다. 더군다나 현천검제는 무림맹과 원한까지 지지 않았던가.

그렇게 되면 남는 사람은 옥화무제와 곤륜무황뿐이었다.

“그렇다고 옥화무제 여협을 맹주로 추대할 수는 없지 않소이까?”

공수개 장로의 말에 청호진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렇지요. 그분을 맹주로 추대하기에는 석연찮은 점들이 너무 많지요. 특히 마교와의 관계를 보더라도 말이외다.”

청호진인의 말에 모든 장로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찬성을 표했다. 옥화무제는 마교와 너무 가까웠다. 그런 인물을 정파의 얼굴로 내세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옥화무제가 이 얘기를 들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론을 제기했겠지만, 지금 맹의 장로들은 마지막 순간에 옥화무제와 교주가 한 하늘을 이고 는 살 수 없는 지경까지 틀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곤륜무황 대협을 추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지파천 장로께서는 또 다른 복안이라도 있으신 게요?”

은근히 비꼬는 듯한 공수개 장로의 어투에 지파천 장로는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노부의 말은 맹의 미래가 걸려 있는 일인 만큼 맹주를 선출하는 건 재삼재사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었소. 그렇게까지 말하시니 곤륜무황을 맹주로 추대하는 것에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겠소.”

흘러가는 분위기로 봐서 곤륜무황이 맹주로 추대될 것이 분명한데 혼자 반대를 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 지파천 장로는 재빨리 꼬리 를 내렸다. 처음부터 맹주에게 미운털이 박혀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

“장로회는 곤륜무황을 차기 맹주로 추대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청호진인의 보고에 태극검황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이상한 일이로구나. 노부는 수라도제가 맹주로 선택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수라도제가 선택되지 못한 것은 주화입마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공공대사처럼 말이지요.”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한 의사전달이 힘들다고 느꼈기에 그는 공공대사를 끼워 넣었다. 태극검황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든 걸 보면, 뜻이 제대로 전달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게 사실이더냐?”

“공수개 장로가 장로회에서 꺼낸 말이니, 아마 사실일 겁니다.”

태극검황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너무나도 부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허, 그는 돌파구를 찾아낸 듯하구나.”

청호 장로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정신을 차리는 날, 이 세상에는 또 한 명의 현경급 고수가 탄생하게 된다는 말이니라.”

“공공대사가 현경에 올라선 것은 사실………….”

거기까지 말하던 청호진인은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그렇다면 사숙께서는 현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쳐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청호진인의 물음에 태극검황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구휘(區揮) 대협은 처음부터 현경의 경지를 개척한 상태에서 무림에 모습을 드러냈기에 그 과정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그런데 이번에 공공대사가 보여 준 모습을 보면, 주화입마도 현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경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 더구나.”

지금까지 옆에서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청수진인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마교 교주도 이유를 알 수 없는 20여 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다음에야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사제, 그는 처음에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탈마였지 않은가.”

청호진인의 반박에 청수진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시죠. 마공들 중 일부는 아주 특이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이 번에 주살당한 흑살마왕만 해도 그렇습니다. 흑살마장이라는 희대의 마공을 극성으로 익힌 탓에 그의 장에 한 번만 격중 당하면 아무리 화경급 고수 라 해도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죠. 그에 반해 그는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가 극마급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아마 모두들 그가 탈마의 경지를 깨달았다고 믿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말에 태극검황은 좋은 걸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호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현 교주가 잠적하기 전에 실제 실력을 보였던 것은 단 한 번, 뇌전검황을 상대했을 때뿐이니 말이다.” “예, 당시 관전자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제령문에서는 입을 꾹 다물었고, 우연히 그 장면을 관전한 자들이 퍼트린 입소문 에 의해 사건의 전말이 어렴풋이 드러난 정도였지요. 더군다나 관전자들의 무공 수준이 너무 낮아서 상세한 부분은 알 수조차 없었고, 뇌전검황이 일 방적으로 밀리다가 패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그래서 그가 탈마라고 소문이 퍼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말이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태극검황은 청수진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참, 그러고 보니 주화입마에 들기 전에 수라도제가 공공대사와 함께 있었다고 했었느냐?”

“예, 사숙님.”

“흐음, 그에게서 현경으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도움을 받았던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보다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해서 안 해 본 짓이 없는 태극검황이다. 무당파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공을 익힌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중원 각파 가 자랑하는 무공들 중에서 특이한 것들까지 죄다 섭렵했다.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비전(祕傳)만 아니라면, 태극검황의 힘으로 구하는 게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무공을 익혀 봐도 윗단계로 올라갈 만한 실마리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그 다음에 손을 댄 것은 시서화(詩書畵) 등 각종 잡기들이었다. 한 가지에 너무 집착을 가지는 것보다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잊어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일이 다.

하지만 그것들조차도 전혀 도움이 안 되자, 그는 중원무공과는 전혀 다른 궤도를 달리는 마교의 무공에까지 손을 댔었다. 궤도가 틀린 만큼 또 다른 길을 자신에게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포기해야 했다. 왜냐하면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교의 심법을 익히면 정파의 고수들에 비해 훨씬 더 막강한 내공을 빠른 시간 내에 쌓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 보니, 마교의 고수들은 무공의 정밀 도보다는 내공의 힘으로 밀어붙여 버리는 타성에 젖어 버린다. 그게 충분히 먹혀들어가니까 따로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마교의 무공은 초식의 전개에 있어서 정파의 무공에 비해 조잡스럽기 짝이 없었다. 물론 최상승의 마공이라면 얘기가 다를지도 모르지 만, 적어도 태극검황이 구할 수 있었던 비급들은 전부 다 그러했다.

더군다나 마교도들이 익힌다는 심법은 좌절 그 자체였다. 역혈의 심법인 만큼, 그로서는 도저히 익힐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급에 기록된 대로 내공을 역일주천하면 바로 주화입마 빠질 게 뻔한데, 그걸 어찌 실행할 수가 있겠는가. 태극검황은 이런 미친 짓거리를 태연히 행하고 있는 마교도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그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오래전에 접었던 꿈을 이룩할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발견했다.

태극검황의 가슴은 설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더니, 뜻하지 않게 현경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선뜻 그 단서를 활용할 결심을 할 수 없었다. 현경의 벽만 깰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고, 또 그렇게 해 왔었다.

그러나 현경으로 가는 길목에 주화입마가 버티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도 공공대사가 그러했듯이 언제 깨어날지도 알 수 없는 주화입마 상 태라면 말이다.

게다가 만약 주화입마가 현경으로 이르는 단서가 아니라면 어쩌겠는가? 그동안 자신이 저질러야 할 오명은 무슨 수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문 파를 위해 맹주직에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다. 그런 그에게 문파에 커다란 짐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는 것은 너무 커다란 부담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태극검황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허, 현경의 벽은 너무나도 높고도 두텁구나. 설마 주화입마라는 단계까지 존재할 줄이야………….”

실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저마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때 공공대사를 찾아갈까 말까 궁리하고 있는 태극검황에게 청수 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청수진인의 말에 태극검황은 반색했다.

“그게 대체 뭐냐?”

“현경에 이르는 주화입마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 알 수만 있다면 탈출법도 강구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이냐?”

“지금 주화입마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태극검황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허, 네 말은 수라도제를 잡아다가 연구를 해 보자는 말이더냐?”

“예, 그렇습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청호진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청수진인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사제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공공대사가 오랫동안 주화입마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분을 제압하지 못했었네.”

청수진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거야 소림사에 그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수라도제 정도야 사숙께서 직접 손을 쓰신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청수진인의 말에 태극검황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에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미쳐 버린 공공대사를 화경급 고수가 나서서 제압하려고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공공대사가 온갖 엽기적인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건 그 자신의 작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무림을 정복하겠다거나, 아니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과 같은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처리는 오로지 소림사의 몫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수라도제를 제압하는 데 자신이 끼어든다면? 태극검황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과 수라도제는 1세대 이상의 연배 차이가 났다. 또한 세 인들의 평가는 물론이고, 그 자신이 생각해도 수라도제보다는 자신이 한수 위라고 생각해 왔었다. 더군다나 수라도제는 지금 제정신도 아니라고 하 지 않는가.

물론 수라도제가 먼저 현경으로 들어가는 길을 뚫었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태극검황의 투쟁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심과는 달리 태극검황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맹주직도 그만뒀는데, 그럼 수라도제나 잡으러 가 볼까.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서문세가에 있답니다.”

청수진인의 답변에 태극검황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서문세가에? 그렇다면 손을 쓰기가 쉽지 않겠는데……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사숙. 서문세가주는 지금 수라도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게 뻔하니까요.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수라도제를 제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화입마를 치료할 방법까지 모색해 주겠다고 제안한다면 그가 거절할 리가 만무합니다. 아 니, 오히려 전폭적인 도움을 줄 가능성이 크겠지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하자꾸나. 어서 짐을 꾸리도록 해라.”

“예.”

청수진인이 밖으로 허겁지겁 뛰쳐나가는 것을 보며, 청호진인이 태극검황에게 사정했다.

“사숙, 저도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꾸나. 뭐, 여기에 있어 봐야 딱히 할 일도 없잖느냐.”

그건 태극검황의 말이 맞았다. 차기 맹주도 정해진 이상, 더 이상 청호진인이 무림맹에 머물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