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38화
1073화
밤은 사람들에게 고요한 휴식을 내려 준다.
물론 모두에게 통용되는 얘기는 아니다. 개인의 사정이 있고, 직업에 따라서 활동 시간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특히 제국 수도 정도가 되면 가히 불야성의 뜻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도박장과 살롱 등의 술집이다.
이들이 모여 있는 거리는 잠이 없다.
그리고 이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밤에 열심히 일해야 하는 직업이 또 있다.
바로 도둑이다. 누구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
토벌대를 위한 축제와 함께 이들도 특수를 맞이해 업계 전체에 대호황을 맞이한 상태였다.
지금, 말간 달빛을 피해 그림자에 숨어서 잠긴 창문을 열기 위해 깔짝거리는 이 도둑처럼 말이다.
‘으흐흐흐. 여기만 털고 바로 바락에 가서 인디 년이나 벗겨 놓고 뒹굴어야지. 요번에 작업한 걸 다 합치면 한 이 년은 즐길 수 있을 거야.’
곧 이어질 질펀한 나날들을 상상하며 희희낙락하면서도 손가락은 열심히 움직였다.
찰칵.
곧이어 걸쇠가 풀리고,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빼꼼히 열리며 방 안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어라…… 라……?”
스르륵.
복면 아래로 음흉하게 웃던 도둑은 희미해지는 의식에 제대로 된 의문도 품을 새도 없이 방안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소리에 잠이 깬 주인이 뛰쳐나와 그를 발견하곤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 도둑! 이 빌어먹을 도둑놈이!”
신기한 사실은 이와 같은 일이 이 집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당장 비슷한 현장만 무려 열 한 곳. 당연하지만 새삼 ‘천벌’ 같은 건 아니다.
하늘을 대신해 도둑들을 재워 버린 건 다름 아닌 이드였다.
“아무리 축제 기간이라지만, 수도 치안 이대로 괜찮은 거냐? 돌아가면 검후와 황녀를 나란히 두고 한 소리 해 줘야겠는데?”
이드는 등 뒤로 들리는 선명한 몽둥이 소리에 혀를 찼다.
사실 마음 먹고 도둑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우연히 황녀를 마중하기 위해 나선 게 딱 도둑들의 활동 시간과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거기에 대해같이 넓은 이드의 기감에 도둑들이 걸린거고 말이다.
그렇다고 뻔히 움직이는 도둑을 그냥 둘 수도 없는 일이라, 눈에 보이는 놈만이라도 잡다 보니 그게 어느새 두 자릿수!
그중 이미 문을 따고 침입해서 한창 수확에 열중하던 도둑도 넷이나 있었다.
그래 봤자 이드의 기감을 벗어날 힘도, 취을난지의 특급지력을 피할 능력도 없으니 기절할 수밖에.
뭐・・・・・・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도둑 따위를 하고 있지도 않겠지만.
“그나저나 이거 괜히 돌아가게 생겼네.”
황녀와 접선하기로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여태까지보다 한층 더 바쁘게 허공을 차는 이드의 신형이 밤하늘을 가르는 부엉이처럼 쭉 뻗어 나갔다.
괜히 서두르게 된 탓일까.
이드는 수도의 이 형편없는 치안에 대해 꼭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인간 세상에 도둑이 전혀 없을 수야 없겠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안티로스에 이렇게 많아서야.
이건 수도를 관리하는 황궁의 체면이 달린 문제다.
아마 은근히 뒤끝이 있는 검후와 토벌에서의 활약으로 높아진 황녀 면전에서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도둑 이야기를 해 주면, 그 후가 아주 볼만할 것이다.
일차로 황녀가, 이후 복귀한 검후가 다시 한번 차례로 황제와 대신들을 볶아 댈 것이 분명하니까.
그래 봤자 다 자업자득. 절대 심술은 아니라고, 누군지 모를 상대로 변명하는 이드였다.
“뭐, 그래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담을 넘는 내가 도둑을 욕할 입장은 아닌가?”
게다가 쉐어 가든까지 합하면 보름 사이 세 번이나 담을 넘은 거다.
거기다 오늘 황궁에 방문해서 데려 나올 황녀까지 포함하면 한 번도 빈손으로 나온 경우가 없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도둑들보다 실적이 좋은 걸지도?
터턱.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황궁 외곽에 도착했다. 이드는 적당한 높이의 지붕에 올라 주변을 살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황궁의 보안은 철저하다. 사전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그래도 들어가기 전에 확인은 필수다.
이리저리 살피던 이드는 문득 왜 자신이 황녀 마중까지 하게 되었나를 되돌아봤다. 처음 말은 쉴라에게 나왔지만, 확인 결과 그 뒤에는 역시나 검후가 있었다.
“그 귀여운 것이 절 보고 싶다고 눈물짓는다는데 어떻게 못 본 척해요!”
그렇단다.
아니, 이드님. 고마워요. 존경해요. 이드 님. 할 땐 언제고 그새 익숙해졌다고 이런 심부름까지 시킨다. 대체 얼마나 만만하게 보는 걸까.
“이대로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하면 곤란한데.’
이드도 검후가 마음먹고 그러려 한다면 여러모로 곤란한 게 사실이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는 이드의 나이가 더 많았지만, 지금은 살아온 세월로 보나, 지위로 보나 검후가 우위에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검후가 억지를 부릴 것도 아니고,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이드도 아닌 건 분명했다. 하지만 일상이 고달파지는 건 피할 수 없으리라. 특히, 스폴이나 라미아가 그 흐름에 동참하기라도 하면…………….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떤 이드는 나지막이 결심했다.
“여기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영혼의 관을 처리하러 뜨자.”
그런 생각을 하며 탐색을 끝낸 이드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이동을 시작했다.
드문드문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나타나길 몇 번. 이드는 어느새 담을 넘어 황궁 안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이후 부운귀령보의 이능을 한껏 발휘한 그는 황궁 내부를 편안히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곳곳에 경비를 서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성문과 성벽을 지키는 만큼 경계가 심하지 않아 낌새는커녕 이상한 느낌을 잡아내는 자들도 없었다.
거기에 중간중간 은밀히 설치된 마법 역시 이드의 신안을 피하지 못했다. 아무리 예민한 마법도 미리 알고 건들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그렇게 해서 황녀가 머무는 거처 앞에 도착한 이드. 그는 반쯤 열려 있는 창문 하나를 확인하고는 그 사이로 몸을 날렸다.
분명 겨우 한 뼘 정도 열린 게 다였지만, 이드는 바람처럼 통과해 방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직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향긋한 향기.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방의 모습.
마지막으로, 가벼운 파츠 아머를 챙겨 입은 채 검을 잡고서 침대에 앉아 있는 황녀였다.
“……오랜만입니다. 황녀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드 님.”
부운귀령보의 이능으로 귀신처럼 갑자기 방 안에 나타난 이드지만, 황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향해 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예를 다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사실 처음엔 조금 불안하기도 했답니다. 이분을 믿어도 될까. 이분이라면 검후 님을 찾아 주실 수 있을까. 부탁을 드린 후에도 가슴 한 곳에 걱정을 담고 있었지요. 하지만, 얼마 전 검후 님과 연락이 닿은 후 그 모든 걱정이 바보 같은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을 믿지 않은 제가 바보였던 거지요. 정말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이드 님은 저희 아나크렌 제국 황실의 큰 은인이십니다. 저는 제국의 황녀로서 그 사실을 절대 잊지 않고 보답할 것입니다.”
“……과분한 말씀이지만 감사는 지금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검후님을 구한 것은 제게도 중요했던 일이니까요. 그렇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거기에 황녀가 아니라도 검후를 통해 필요한 지원은 충분히 받기로 했다.
비단 그녀를 구해서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아니요. 제국 황가의 일원으로서 은원은 반드시 확실히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은근히 고집을 세우는 황녀다. 과연 검후와 한 핏줄이라는 것일까.
이드는 큰 의미 없는 일에 힘 빼고 싶지 않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을 뼈에 새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은혜를 갚겠다는 거다. 애써 거절할 이유가 있나.
검후에 황녀까지 두 배로 챙겨 주면 더 좋은 거지.
“일단 이야기는 가서 하시죠. 밤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더 늦으면 기다리고 계실 검후 님의 눈이 빠질지도 모릅니다.”
“푸풉. 그럼 부탁드릴게요.”
검후를 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웃음이 터진 황녀가 입을 황급히 막았다. 그리곤 나머지 손을 내밀었다. 이드가 그 손을 잡았다.
작은 접촉이지만 그것으로 이드는 황녀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잡았다. 이드의 내력이 황녀의 전신을 감싸 버린 것이다.
그건 신검합일과도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이었다. 오히려 의기충검에 가까울까.
반대로 황녀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신기해했다.
“이상해요. 몸이 허공에 뜬 것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요.”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고 나가기에는 황녀 전하의 실력이 모자라서 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제 실력이 모자란 건 사실이지만 꼭 그걸 강조하실 필요는 없는데.”
아픈 곳을 찌르는 이드에 황녀의 눈꼬리가 살짝 처졌다.
“강조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죠. 당장 마중을 부탁한 시점에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팩트를 날린 이드는 급격히 조용해진 황녀의 손을 잡은 채 부드럽게 바닥을 차고 올랐다.
올 때 이미 전반적인 길과 경비들의 위치를 외운 이드의 움직임은 더욱 빠르고 과감해졌다. 덕분에 황궁의 벽을 넘기까지의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얼마나 거침이 없었으면 이드가 처음 황궁으로 들어서기 전에 서 있던 지붕에 도착했을 때, 황녀가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이드 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황궁이 이렇게 쉽게 뚫리는 모습을 막상 두 눈으로 보니, 좀 충격적이네요.”
“커다란 곳일수록 완벽히 막긴 힘든 법이죠.”
“그렇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황녀지만 새초롬한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황궁의 수비들이 고생을 좀 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나도 고생하게 될지도. 아무래도 경계가 확실히 굳어질 때까지 계속 마중을 부탁할 것 같은데.’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둬야겠다 싶은 이드였다.
그때, 생각을 마친 황녀가 이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다시 출발하시죠?”
“아니요. 잠시만……”
이드는 손을 들어 황녀를 막고는 곧 황궁의 그림자 한구석, 어두운 한 곳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 보이십니까? 아무래도…… 저 말고 황궁에 마중을 부탁받은 사람이 또 있는 모양입니다?”
가벼운 어조지만 그 속에 든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무려 황궁에 침입하려는 자가 있다는 말이니.
오늘은 유독 밤손님이 많구먼, 하고 입맛을 다시는 이드와 달리 황녀의 표정은 어느새 싸움을 준비하는 기사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동시에 차분하지만 무거운 기세가 흘렀다.
“저는 이드 님 말고 부탁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아무래도 잘못 전달받은 사람들 같은데, 친절하게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요?”
“어려운 일은 아니니 그러도록 하죠.”
황녀는 물론이고, 검후를 봐서라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이드가 손을 놓으려 하자, 황녀가 다시 손에 힘을 줬다.
“아뇨. 저도 함께 갈게요. 저희 집을 잘못 찾은 손님이니까요. 비록 불청객이라도 나가 보는 게 도리죠.”
“좀 많이 어지러울 겁니다만?”
“괜찮아요.”
분명히 경고는 했다.
이드는 내심 그렇게 변명하고는 지붕을 차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