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45화
1080화
생명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그저 우연히 태어나 살아갈 뿐인가?
같은 질문을 두고 지구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쉬지 않고 다퉜고, 신이 존재하는 그레센에서는 신관들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말했다.
밝혀진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이 너무 높고 커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런 신관들도 고양이를, 나무를, 이름 없는 들풀을 왜 만들었냐고 물으면 답하지 못했다.
인간처럼 큰 인과를 만드는 것도 아닌 저 무언가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큰 뜻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뭐, 일단 그건 두고,
이와 비슷한 이유로 생물이 가진 기능도 그 연원을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냄새를 잘 맡는 이유, 독을 가진 이유, 혀가 긴 이유 같은 것들 말이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런 기능이 생긴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생물들은 그저 있는 능력을 사용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갑작스러운 초인의 발생은 세상을 뒤집을 만했다. 응당 그 까닭에 대해 온갖 추측과 의문을 낳았다.
도대체 초인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관은 이번에도 신의 뜻이라고 단호하게 잘랐지만, 학자들과 마법사들은 이를 두고 다양한 주장과 설을 내놓으며 궁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초인의 존재 이유를 가장 밝히고 싶은 이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당사자들. 초인이다.
당장은 현실을 살아가기에 정신없는 이들이지만, 그들 모두의 마음 한편에는 같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신은 왜 초인을 만들었지? 그리고 날 초인으로 선택한 이유는 뭐지?’
물론 좋으면 장땡이라는 멍청이들이나, 자신은 특별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당연하다는 극도의 나르시스트들은 제외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바라는 답이 지금 이드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아마 자신의 기능에 대한 존재 이유를 인식하게 되는 건 인간으로서 최초가 아닐까?
어디까지나 이드가 사실을 밝힐 때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드가 초인의 존재 이유에 대해 되새기고 있을 때, 라울은 그런 이드의 머릿속을 읽어 내려는 듯 살폈다.
‘절대 당신 같은 거물이 이따위 일로 직접 움직일 리가 없지. 자, 진짜 목적이 뭐냐.’
이 저택에 진을 친 후 라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에 감시망을 까는 일이었다.
저택 정원에 경비를 가득 깔아 놓기는 했지만, 사실 라울은 그들보다 자신의 초인기인 황금안을 믿고 있었다.
이드의 존재 역시 경비들과 달리 그가 담을 넘은 순간부터 알아차렸고, 그 순간부터 고심했다.
이드가 직접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정치적 영향력은 검후가 크겠지만, 전력적인 면과 미래 가치를 따지면 검후보다 몇 배는 더한 폭발력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바로 이드였다. 라울은 그에 대한 가치를 그리 매기고 있었다.
그런데 용건이 고작 침입자의 조사에 대한 협력 요청 때문이라니, 라울로서는 그걸 순순히 믿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자자~ 본론을 꺼내 보라고, 본론을!’
그리고 마침 그런 라울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양, 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바벨에서 큰일을 한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까? 안티로스에 오래 머물려는 것 같은데.”
당장 열아홉이나 되는 비서들이 그 증거다. 본격적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계획이 아니라면 그 많은 인원을 불러들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침입자에 이은 검은 돌의 두 번째 실책이었다. 이 비서들이 충원될 동안 그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 말이다.
‘꼭 그렇지도 않은가. 누가 열아홉이나 되는 미녀들을 불러들일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거기에 존 워스의 문제로 한창 발터의 저택에 전력을 모으는 중이니, 거기에 섞여 들었다면 알아차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혀요. 지금 이 안티로스보다 중요한 곳이 어딨겠습니까? 존 워스라는 폭탄에 검후님은 물론이고 이렇게 명예 후작님도 계시잖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대담하군요.”
“대담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 바벨과 제국이 적대 관계도 아니고,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검후께서 저희들을 봐주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완전히 용서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안심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드는 털털하게 웃는 라울을 보다 문득 그들 역시 마탑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럼 제국 안에 있던 초인을 마탑에 넘긴 건 어떻습니까? 제국 입장에선 자국의 초인들을 죽인 일이 되는 셈인데요.”
순간 라울의 웃음이 뚝 멈췄다.
제국도 제국이지만, 초인으로서 같은 초인을 마법사의 연구라는 금지된 목적으로 넘긴 일은 도저히 웃으며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런데도 여전히 당당한 라울이었다.
“단순히 제국 내의 초인이란 문제로만 보자면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이 제국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면에선 어떨까요? 저희가 마탑에 제공한 자들은 모두 하등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등 범죄를 저지른 자들. 진실을 안다면 잘못이라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실 제국에 그럴 자격이 있을진 모르겠습니다만.”
말과 함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라울.
이드는 굳이 그 미소의 의미를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마탑을 지원했던 세력이 한둘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바벨의 입장에선 어떻습니까? 그들도 바벨에 속해 있는 초인들일 텐데요.”
“우선 잘못된 사실은, 그들이 모두 바벨에 속해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대부분의 초인들이 바벨 소속인 건 맞지만, 모든 초인이 바벨인 건 아니죠.”
“그건 몰랐군요.”
“대부분은 그렇죠. 그리고 바벨 소속이라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바벨은 초인을 위해 있는 조직이지만, 동시에 죄를 저지르는 초인들을 벌할 의무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는 조직이라도 그 내부를 단속할 강력한 규칙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조직이라도 고이고 고여 썩어 버릴 테니까. 특히 바벨과 같이 실체가 있는 강대한 힘을 가진 조직이라면 더욱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
“이왕 죽을 자들이라면 조금이나마 이득이 되게끔 하는 편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
그리 되묻는 라울에 이드는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다기보다, 정확히는 범죄자들을 위해 생명의 존엄성이 어쩌니 하며 떠들고 싶지 않았다.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죽을죄라면 죽여야 한다. 대부분의 무림인이 그렇겠지만 이드역시 악즉참 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렇게 거침없는 답을 마친 라울이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듯 말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만족하셨습니까?”
“무엇에 말입니까?”
“진짜 목적을 꺼내기에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를 묻는 겁니다. 아무렴 저따위 일로 이드 님께서 직접 오셨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소드 마스터급의 침입자들을 두고 ‘저따위’ 라니.
이드는 쓰게 웃었다.
분명 말이 좀 거칠긴 해도 이드나 라울 정도가 되면 수십 명의 마스터는 그 정도 취급밖에 되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당장 이드만 해도 황녀가 다 토하기도 전에 상황을 끝냈었으니까.
이드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눈을 번뜩이는 라울의 재촉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확실히 방문 이유가 또 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혼돈의 파편은 찾고 있습니까?”
원하던 대답이 아니어서일까. 라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입을 닫지는 않았다.
“찾고는 있습니다만, 과거 기록만 나올 뿐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습니다. 오히려 명예 후작님이 가진 정보를 얻고 싶습니다만?”
“그거야 제공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바벨이 좀 더 의욕을 가지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금도 의욕은 충분합니다만?”
초인이 가진 가장 큰 불안 요소인 버서커. 그것이 혼돈의 파편과 관련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한데 그것 말고 의욕을 끌어 올릴 요소가 더 있다고? 불신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드는 그런 라울을 보며 말했다.
“이전에 혼돈의 파편 때문에 버서커가 발생한다. 그렇게 말했지요. 그럼 초인과 혼돈의 파편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
무슨 이야기든 해 보라는 듯 불퉁하던 라울의 모습이 바뀌는 건 금방이었다. 심히 불량하던 눈빛이 동굴처럼 깊어졌다.
초인과 혼돈의 파편의 관계에 대해서는 바벨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버서커와의 관련성도 자료를 통해 납득했을 뿐 증거가 없었는데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를 알아냈다는 말입니까?”
“운이 좋았지요.”
정확히는 운이 아니라 세레니아의 철저한 준비성이 빛을 발한 것이지만, 그걸 밝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유가 뭡니까?”
“귀한 정보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드의 말에 기세를 타 대답을 들어 보려던 라울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래 봤자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칫, 조건을 말씀해 보시죠.”
바벨의 모든 정보는 라울을 거친다. 그런 만큼 정보의 가치를 보는 눈도 정확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이드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의 가치는 극상. 바벨의 입장에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꼭 확보해야 하는 정보였다.
무엇을 바랄까.
보통 요구는 상대의 규모에 맞추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바벨의 규모는 왕국급. 대충 예상되는 리스트를 뽑는 것만으로 라울은 속이 쓰려 오는 것 같았다.
이드는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라울에 고개를 저었다.
“조건은 나중에 오늘은 이전 협력 관계를 위한 조건들을 좀 더 강화하는 정도면 될 것 같군요.”
“서로 깔끔할 수 있도록 지금 필요한 걸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그러고 싶어도, 어쩌겠습니까. 당장 요구할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유감이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이드에 라울이 한숨을 푸욱 내쉰다.
“……이래서 을의 거래는 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지요. 정보의 가치를 계산해서 계약서를 쓰지요.”
계약서는 생각에 없었는데, 써 준다면 곱게 받아야지.
그렇게 약속을 받은 후에야 이드의 입이 열렸다.
“옛날 기록을 찾았다면 혼돈의 파편이 가진 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겠지요?”
“압니다. 달려라, 달리지 않으면 죽는다. 과격한 시련이고, 채찍이죠.”
“그렇죠. 달려야죠. 인간도 달리고, 드래곤도 달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살기 위해 달려야죠. 그런데, 종족에 따라 달리는 방법이 다르겠죠? 초인의 발생이 바로 그런 겁니다. 초인이 혼돈의 파편으로 인해 버서커가 되는 것? 당연한 겁니다. 애초에 초인 그 자체가…………… 혼돈의 파편 때문에 생겨난 거니까요.”
“……”
이드의 말이 끝났음에도 라울은 조용했다.
대신 찢어질 듯 크게 뜬 두 눈과 무릎 위에서 부들거리는 주먹이 그가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