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2화 – 여우와 너구리의 지략 대결
여우와 너구리의 지략 대결
무영문 총단이 마교의 기습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급보는 최창 분타주를 통해 무림맹에 전해졌다. 이에 무림맹의 수뇌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과연 큰소리를 칠 만도 하군요.”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외다. 마교에게 무영문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설마 그들이 그걸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 었소.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지금이라도 무영문을 보호해야만 하오이다.”
“그건 그렇소이다만…………. 하지만 보호하고 싶어도 뭘 알아야 보호할 게 아니오. 최창 분타주도 무영문의 총단이 공격당했다는 사실만 알려줬지, 그 곳이 어딘지는 알려주지 않았소이다.”
무림맹의 장로들은 이 뜻밖의 사태에 급히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격을 당한 무영문의 총단이 어딘지를 알아야 뭘 도와주든, 지원군을 보내든 하지 않겠는가.
갑작스럽게 총단으로부터 무림맹 분타로 황색인장이 날아온 후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 최창 분타주는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분타주인 그조차도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림맹 분타가 외부에 너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외부와의 접촉이 잦아지면 그만큼 변 질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무림맹을 완벽하게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칫 무영문과 무림맹의 사이가 악화되었을 때 분타주가 포로로 잡히게 될 상황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문에 장사는 없다. 또 고문이 아니더라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물이라던지, 정신을 굴복시키는 무공들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철저히 총단의 위치를 숨겨온 무영문의 비밀주의가 가장 큰 이유였다. 무영문의 문도라 하더라도 총단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창 분타주가 무림맹에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청할 수가 없는 모순점이 드러난 것이다.
“설사 총단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대체 어떤 명분으로 그들을 돕겠다는 말이오? 우리는 이미 저들에게 무영문에 대한 공격을 허락했다는 것을 벌써 잊으신 게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무림맹이 무사들을 동원한다고 해서 마교가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자칫하면 또 다른 분쟁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일단은 습격을 받았다는 총단 위치부터 찾는 게 먼저인 듯 싶소이다.”
“찾고 난 다음에는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무사들을 파견해 마교의 대응을 살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마교와의 충돌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으로 하고 말입니다.”
습격을 받았다는 무영문 총단의 위치는 예상과 달리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무영문 총단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깊은 산중이라고는 하지만, 바로 그 옆에 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제산맥으로 인해 단절되어 있는 복건성과 강소성을 연결해 주는 가장 중요한 도로였던 만큼, 평소 에도 수많은 행인들이 넘나들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깊은 산맥 속에서 뭔가 괴변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인근에 급속히 퍼져나갔던 것이다.
예상보다 빨리 총단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했지만, 개방의 조사 결과 무림맹에서 끼어들기에는 시기를 놓친 후였다. 이미 모든 게 끝나있었던 것이 다. 그렇기에 당초의 계획과 달리 맹에 집결되어 있던 무사들을 그곳으로 파견시키는 계획은 자연스럽게 철회되었다.
“무영문의 피해는 어떤 것 같소이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정확히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개방에서 보내 온 보고서에 따르면 거의 치명타에 가까운 타격을 입지 않았을까 사료된답니다.” 공수개 장로의 말에 다른 장로들 역시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각 문파가 지니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 바로 총단 이다. 그런 만큼 총단은 언제나 그 문파의 최고의 정예들이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총단이 박살나 버렸다는 소리는 그동안 수집해 놓은 모든 유형적 인 자산들을 약탈당하고, 지키고 있던 정예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된다면 아무리 거대한 문파라 할지라도, 기둥뿌리가 흔들리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개방에서 폐허가 된 무영문 총단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그곳에서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개방도들은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을 것임을 믿 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마교가 적이라 간주한 문파를 어떤 식으로 멸문을 시켜왔는지 잘 알고 있었고, 무림에는 시체를 없애는데 뛰어 난 효용을 가진 약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허어, 이거 참. 무영문은 이제 완전히 끝장이 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구려.”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총단이 무너졌다고 하나 중원 곳곳에 분타가 남아있고, 옥화 봉공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든 꾸려 가실 겁니다. 물 론, 예전과 같은 수준의 정보력은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한참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무영문의 무림맹 분타주인 최창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기를 청한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새로운 정보가 입수된 게 있는 모양입니다.”
장로들의 의견에 따라 최창 분타주의 참석이 허락되었다. 최창 분타주는 침통한 어조로 무영문의 피해를 보고했다.
“상부에서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본문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수집해 놓았던 방대한 양의 자료들이 약 탈당한 것은 물론이고, 2천명에 가까운 인원이 사로잡혀 압송해 가기까지 했답니다. 문제는 그들 중 일부가 정보 분석 임무에 종사하던 자들이었다 고………….”
최창 분타주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놀란 장로들이 저마다 대책을 요구하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 정보 가 마교에게로 넘어갔을까? 아니, 장로들의 주된 관심사는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문파의, 비밀을 요하는 정보가 그 안에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 포심이었다. 모두들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 비밀 정보라는 게 절대 외부에 밝혀져서는 안 되는 치부(部)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노부는 마교가 무영문을 치도록 허락하는 걸 반대했었던 거요.”
“나중에는 귀하도 찬성표를 던져놓고 무슨 말이오?”
“닥치시오. 내가 언제 그랬다고……”
회의장은 더 이상 제대로 된 토의를 이어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맹주는 어쩔 수 없이 내일 다시 회의를 개최하자며 장로회의를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곤륜무황이 맹주로 즉위하며 곤륜파에서 데려 온 최고위급 장로는 2명이다. 무량(戊) 대장로와 무정(正) 장로다. 무자 배분을 지닌 고수 중 남은 한 명인 무원(元) 장로는 곤륜에 남겨뒀다. 연륜이 모자라는 장문인 보다는 아무래도 그가 훨씬 더 믿음직했으니까.
회의실에서 나온 맹주는 집무실에서 곤륜파 장로들과 대화를 나눴다.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듯 합니다.”
무량 대장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맹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 이것도 다 원시천존님의 뜻인 게지. 무량수불…….”
“피해 상황을 듣고 보니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고 계실 때가 아닌 듯 합니다.”
“속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맹주의 떨떠름한 반문에 무량 대장로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제가 말이 너무 과했습니다, 맹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허허, 하산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세속에 물이 든 것이더냐?”
고개를 조아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무량 대장로의 모습을 자애로운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던 맹주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마지막 정사대전이 벌어진지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건만, 너희들은 벌써 다 잊어버린 것이더냐.”
“……?”
두 장로가 의문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때, 맹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중원에 허다한 문파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 본문만큼 커다란 고난을 많이 겪은 문파도 없을 게다. 곤륜산이 불바다가 된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더 냐.”
맹주의 말에 두 장로는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한대씩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상청각(上淸閣)이 불타오르고, 문파를 대표할 만한 정예고수들이 죽임을 당해 이대로 멸문당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의 커다란 피해를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건물인 상청각만 해도 불타 파괴된 것을 새로 지어올린 게 일곱 번은 된다. 워낙 자주 불타오르다 보니, 곤륜파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는 볼품없다 싶을 정도로 작았다. 그건 상청각을 문파의 위명에 걸맞게 짓기보다는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시설에 분산해서 가급적이면 피해를 줄이려고 한 고심의 결과였다.
한중길 교주, 장인걸 교주, 그리고 현임교주인 묵향에 이르기까지 꽤나 오랜 세월 평화가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청각을 지금보다 더욱 큰 규모로 다시 건립하자는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인물들만 해도 상청각이 불타는 것을 2번씩이나 목격한 산증인들이었다. 그들은 교주의 마음이 바뀌는 그 순간, 또다시 상청각이 불타오를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단시일에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일 게다. 하지만 무영문처럼 저력 있는 문파가 겨우 이 정도로 존망의 기로에 섰
다는 말은 왠지 어폐가 있다고 생각되는구나.”
“맹주님의 말씀이 옳으신 듯 합니다.”
“아직까지도 사물의 근본을 꿰뚫지 못하고 있는 미흡한 저희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허허, 그것이 어찌 너희들의 잘못이겠느냐.”
사실 맹주가 이렇게 빨리 옥화무제의 농간을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은 곤륜파가 지금까지 당해온 환난과 무관치 않았다. 아직까지 총단이 박살나는 경험을 겪어본 적이 없는 문파들이야 이게 엄청난 피해라고 생각하겠지만, 막상 당해보면 그것도 그리 큰일이 아닌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물질적인 피해쯤은 시간만 지나면 복구가 되는 법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곤륜파처럼 항상 총단이 박살나는 것에 대한 대비까지 해놓은 상태라면, 그 피해는 더 욱 줄어들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맹주가 옥화무제의 농간을 간파하게 된 것은 조금 전 최창 분타주의 피해 상황을 들었을 때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었던 옥화무제의 대처 방법과는 큰 괴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그녀가 아직까지도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우환거리로구나.”
“예? 복수를 꿈꾸고 있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 번 생각을 해보거라. 자신들의 문파가 얼마나 커다란 피해를 입었는지 맹에 자세하게 보고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거야 맹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니라.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계지. 약하게 보이면 잡아먹히게 되는 법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실제보다 더욱 강하 게 보이려고 모두들 허세를 부리고 있지 않더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과장되게 선전한다는 것은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고 밖에 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무량 대장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맹에서 마교의 무영문 침공을 허락했다는 걸 옥화 봉공이 뻔히 알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자신들의 피해 상황을 전해오는 것이 의아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무영문에 대한 판단을 전면적으로 재수정 해야겠군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나눈 얘기는 한동안 너희들만 알고 있으라는 말이니라. 어차피 우리 문파로서는 맹이 적당히 마교와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게 좋으니 말 이다. 더군다나 무영문이 살아남아 있어야 마교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할게 아니더냐.”
무량 대장로는 왠지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걸 느꼈다. 곤륜파에 있었을 때야 아군과 적의 구분이 명확했지만, 맹에 들어와 보니 자신의 이분론 적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군도 속이고, 때론 속는 척 해야 하며 적과도 태연히 손을 잡을 수 있는 흉험한 세상 이라는 걸 새삼 느낀 무량 대장로는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깊이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맹주님.”
소기의 목적대로 무림맹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놓긴 했지만, 옥화무제의 심사는 그리 편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번에 마교의 기습에 대한 조사보 고서를 추밀단주가 가져왔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찬찬히 훑어보던 옥화무제의 눈에 일순 놀라움이 떠올랐다.
“설마 첩자가 스며들었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물론 옥화무제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의심을 애써 지워버렸을 정도로 무영문의 통제는 확실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 도 첩자가 침투해 들어올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뭔가 의심이 가는 인물이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첩자라는 걸 밝힐 만한 증거를 찾았습니까?”
옥화무제의 물음에 추밀단주는 침묵했다. 옥화무제는 황급히 보고서의 뒷장을 넘기며 첩자에 대해 적힌 것이 있는지 찾아봤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 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옥화무제는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추밀단주를 바라봤다.
추밀단주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기 힘들었는지, 침중한 표정으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첩자가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된 이유가 뭐죠?”
“그것 외에는 도저히 다른 이유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던 옥화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용의선상에 두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요?”
“비영단의 장길수 선임조장입니다.”
예상치도 못했던 추밀단주의 말에 옥화무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길수 선임조장이요?”
“예. 대금전쟁에서 마교와의 연합작전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가 왜……………?”
“그 당시 본문은 필요에 의해 마교와 가깝게 지냈었습니다. 그 덕분에 마교쪽 인물들 중 몇몇을 포섭하는데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역으로 우리측 문도들이 마교에 포섭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옥화무제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지목된 인물이 바로 장길수 선임조장이다 이거군요. 그가 첩자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이…
“일단 총단의 위치를 알고 있는 간부급들 중에서 마교와 접촉이 있었던 자들을 추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아무리 찾아봐도 미세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일을 은밀히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는 그 뿐이었습니다. 첩자가 스며든 것은 확실하고, 아무리 찾아도 그 흔적을 찾을 수 가 없다면 그만한 능력이 있는 자가 바로 첩자가 아니겠습니까? 비영단의 선임조장인 그가 만약 마교에 포섭되었다면 증거 따위는 티끌만큼도 남길 리가 없을 테니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추밀단주의 추측을 믿고 싶지 않았다. 선임조장이라면 임무에 따라 몇 개, 혹은 몇십 개의 조 를 할당받아 그 일을 추진해 나가는 총책임자였다. 그런 만큼 실력도 실력이지만, 문파에 대한 충성심도 확실했다. 그런 자가 배신을 하다니……………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아직 금나라에 있습니다. 금나라 남쪽에 파견되어 있는 6개 조를 지휘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중입니다.”
“뭔가 수상한 점은?”
추밀단주는 딱 잘라 대답했다.
“전혀 없습니다.”
“크흠…….”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잠시 고심하던 옥화무제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의심스럽다 하여 증거도 없이 간부급 문도를 붙잡아 족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일은…….”
옥화무제가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말을 하려 할 때 추밀단주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태상문주님. 비영단의 선임조장인 그가 만약 배신을 했다고 하면 그 어 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오랜 시간 그를 따랐던 조장들이나 조원들 중 마교에 포섭된 인물이 없을 거 라 자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무턱대고 그를 죄인으로 몰수는 없잖아요. 조심스럽게 뒷조사를 더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신이 만약 조사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라도 채게 되면 곧바로 마교로 투항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된다면 문파 내에 미치는 파급이 너무 커집니다.”
지속적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옥화무제는 짜증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단주는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자고 말씀하시고 싶은 건가요?”
“의심스러운 싹은 하루라도 빨리 미련을 두지 말고, 아예 제거해 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가 거느리고 있는 직속 조원들도 모두 다. 본 문을 위해서는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곧바로 살기 띈 어조로 대답하는 추밀단주였다.
옥화무제는 장시간 고심했지만 추밀단주의 말대로 현 실정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불안요소를 안고 갈 만한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추밀단주의 말처럼 마교의 첩자라면 지금이야 조심스럽게 마교쪽에 제한된 정보밖에 전해주지 못하고 있겠지만, 정체가 발각나 마교에 투항이 라도 하는 날에는 무영문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안 그래도 고정 첩자망 및 분타의 연락망이 무너져 버린 상태가 아닌가. 이런 비상시국에 유 일하게 정상 가동되고 있는 비영단까지 타격을 입게 된다면 끝장이라고 봐야 했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던 옥화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비영단주는 지금 어디에 있죠?”
“감찰부에 맡기시는 게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수하에요. 비영단주에게 처리를 맡기는 게, 그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겠지요. 그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니까요.”
추밀단주는 밖에 대고 비영단주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외부에 출타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다가, 옥화무제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일전에 만통음제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던가요?”
“아직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정보입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건 그 정보를 그의 제자에게 전하도록 하세요. 그 이름이 뭐였더라…………?”
“만통음제를 찾고 있는 제자의 이름은 유운비화(雲飛花설취라고 합니다.”
“맞아요. 그 아이에게 빨리 전하도록 하세요.”
왠지 서두르는 듯한 옥화무제의 태도에 추밀단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자신의 사부의 행적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만, 굳이 확인되지도 않은 정보를 서둘러 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교주와의 연락이 단절된 만큼, 그 아이와 인연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어서예요.”
“하지만 만약 그곳에 만통음제가 없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겠습니까?”
“없어도 상관없어요. 아예 엉터리 정보는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그녀에게 우리 무영문이 호의를 가지고 수색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만 느끼게 해주면 되요. 제가 원하는 건 그것이에요.”
“아, 그런 식으로 인연을 맺어놓은 뒤 나중에 교주와의 연결 통로로 활용하실 생각이시군요.”
“바로 그거예요. 마침 지금 그녀는 만통음제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을 테니, 이럴 때 약간만 도움을 줘도 쉽게 인연의 고리를 만들 수 있을 거 예요. 그러니 설사 어설픈 정보를 줬다 해도 고맙게 받아들일 테죠. 제 뜻을 알아들으셨으면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전달해 주라고 지시하세요.”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럼 똘똘한 놈으로 한 명 그 아이에게 붙여 수색 작업의 진척 상황을 수시로 알려주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호호, 그것도 괜찮겠군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싸늘한 옥화무제를 보며 추밀단주는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며 소름이 돋았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 가 내린다고 하지 않던가. 더군다나 자신의 주군은 당하고는 못사는 여자였다. 아무래도 설취를 이용하여 뭔가 좋지 않은 음모를 꾸미려는 의도가 있 는 게 분명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지시를 내리기 위해 움직여야 할 추밀단주가 왠지 꾸물거리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자 의아하다는 듯 옥화무제가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여쭈어 볼 게 있습니다. 혹시 혈교를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추밀단주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옥화무제는 피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난 또 뭐라고…………. 그럴 생각이에요.”
“아무리 혈교가 장백산에 엄청난 세력을 밀집시켜 놨다 하더라도 교주가 이끄는 마교의 정예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정보란 써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쓰임새가 변하기 나름이니 단순하게만 생각할 게 아니죠. 어쨌든 혈교에 관 한 정보는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하세요. 언젠가는 우리가 내밀 수 있는 최고의 패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추밀단주는 태상문주에게 더 이상 교주를 자극하지 말았으면 하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칫하다가는 복수는커녕, 무영문이 완전히 개박살이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태상문주인 옥화무제가 교주처럼 결코 당하고는 못사는 여인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꼭지가 돌아버린 상황에서, 자신의 조 언이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가 없기에 추밀단주는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속으로 집어삼킨 것이다.
옥화무제의 집무실을 나서는 추밀단주의 얼굴에는 불투명한 무영문의 앞날에 대한 근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에휴~, 잘 되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