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6화 – 장백산의 괴인
장백산의 괴인
옥화무제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단숨에 장백산이 있는 요동까지 달려갔다. 그녀는 장백산 인근에서 그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고정 첩자 셋 과 접선했다. 그 세 명은 총관이 섭외한 인물들로, 셋 다 장백산 인근에서 사용되는 토착어에 능했다.
옥화무제는 그들을 데리고 장백산에 숨어 살고 있는 비밀문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하지만 고생한 것에 비해 얻은 소득은 거의 없었다. 그저 장백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는 것 말고는.
그러던 어느 날, 진척없는 수색 작업에 지친 옥화무제가 차라리 직접 장백산에 올라 부딪쳐볼까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요즘 백두산(白頭山)의 신선에 대해 수소문하며 다니고 있는 자가 바로 자네인가?』
등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 꽤나 매력적인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옥화무제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화경에 오른 자신이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목소리가 들려온 지금까지도. 과연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지, 아니면 목소리만 그렇게 들리도록 유도한 것인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상대는 그녀보다 월등한 고수라는 사실 말이다.
옥화무제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곳에는 신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단아한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다. 중원의 것과는 색다른 이국적인 복색, 더군다나 말도 이곳 토착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부터 건넸다.
“저는 무영문이라는 작은 문파를 이끌고 있는 매향옥이라고 합니다, 대인.”
서로 말이 통하지는 않겠지만, 상큼한 미소와 정중한 인사만으로도 그녀가 원하는 게 싸움 따위는 아니라는 것을 사내가 눈치 챘으리라. 아니, 적어 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안 그러면 자신은 말도 꺼내보지 못한 채 목이 날아가야 할 테니까.
“저는 이곳 토착어를 알지 못합니다. 통역사를 불러도 괜찮을런지요?”
사내는 옥화무제의 말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밖에 대기하고 있던 통역을 맡고 있는 수하를 부르는 것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 다. 아마도 그녀가 하는 그 어떤 행동도,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그녀의 응대에 통역을 맡고 있는 수하가 들어왔다. 그는 방에 옥화무제 외에도 이방인이 한 명 서 있는 것을 보고 흠칫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반 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옥화무제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찾으셨습니까? 태상문주님.”
“저분과의 통역을 부탁해요. 최대한 공경을 다하도록 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통역사가 준비되자 그녀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귀인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소문을 저 멀리 중원에서 듣고, 흠모하는 마음에 잠시라도 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왔 습니다.”
여인이 하는 말을 통역사가 발해어로 통역하여 전해주는 것을 듣고, 사내는 생각을 바꿔먹었다. 계속 자신을 귀찮게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 릴 생각이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적당히 대화를 나눠보고 내쫓는 것으로……………
『꽤나 말을 잘하는 여아로구나.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소문을 듣고 알았다고? 혹, 일전에 이곳을 서성이던 녀석들과 한패더냐?』
“그들은 제 수하들이었사온데, 혹여 대인께 무슨 실례라도 범했습니까?”
그러자 사내는 냉정한 어조로 대꾸했다.
『되놈 주제에 나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닌 것 하나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고 봐야겠지.』
통역사가 말한 되놈, 그것은 이곳의 토착민들이 중원인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라고 했다. 북명신공을 이어받은 후인들이 어쩌면 중원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대놓고 되놈이라고 칭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다.
원래 옥화무제는 북명신공을 전수받을 수 있는지,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자신들과 손을 잡을 수 있는지를 타진해 보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하지 만 사내의 말투로 미뤄보아, 지금은 그런 말을 꺼낼 단계가 아님이 확실했다. 지금은 저 무뚝뚝한 성격의 사내와 신뢰관계를 쌓아나가야 할 때였다. 그녀가 원하던 것들은 그 이후에나 가능하리라.
그 전에는 잘 몰랐는데, 되놈 어쩌구 할 때 발해인의 표정이 너무나 섬뜩하여 소름까지 쭉 끼친 옥화무제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고수치고는 감정 의 기복이 너무 심하다고 할까? 중원에서는 ‘소살(殺)이라고 하여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불시에 손을 쓰는 사람을 가장 까다로운 상대로 생각했 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리라. 물론, 옥화무제처럼 손꼽히는 고수들의 경우 그런 얄팍한 수단 따위는 쓸 필요 없이 자
신의 감정을 다 드러냈다.
하지만 발해인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그걸 느낀 순간 옥화무제의 마음속에는 요란한 경종이 울려 퍼졌다. 오랫동안 말을 섞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상대다. 이런 상대의 경우, 요점만 간단히 얘기를 나누면서, 최대한 이쪽의 인상을 좋게 유지시키는 게 중요했다.
옥화무제는 사내를 향해 표정을 최대한 온화하면서도 밝게 꾸미려고 애쓰며 말을 걸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인께 한 가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뭐냐?』
“대인께서 북명신공과 관련이 있으신지, 그것을 묻고 싶었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북명신공? 글쎄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로구나.』
“북명신공은 중원에서 천하제일대협으로 추앙받았던 구휘라는 고수가 요동지역을 떠돌며 그 지역에서 찾아낸 발해의 무공이라고 들었습니다. 확실 하지는 않으나 대략 12가지 정도의 무공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하나같이 상승의 무공이라고……………”
옥화무제는 여기에서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내가 북명신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12가지의 무공이라는 말에 온화하 던 사내의 눈빛이 마치 불이라도 뿜듯 무섭게 번쩍였던 것이다.
『허어~, 발해의 후예들에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안배해 뒀던 것이건만, 그걸 되놈이 도둑질해 가다니…………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발해인. 감정의 기복만으로 봤을 때는 전혀 고인(高人)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가 화 를 내자 옥화무제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그에게서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망연자실 잠시 말없이 서있던 사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에서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손에 잡힐 듯 그런 끈적끈적하기 그지없는 짙 은 살기가.
그걸 북명신공이라고 부른다고?』
“예.”
『내 노력을 헛되게 만든, 그 구휘라는 놈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혹시 알고 있느냐?』
대화의 방향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옥화무제로서는 사내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경 의 그녀로서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사내가 일으키는 위압감과 살기가 엄청났던 것이다.
“오래 전에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대인.”
『행방불명되었다고? 그자가 행방불명된 것이 언제쯤이더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인.”
옥화무제의 대답에 사내는 한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그는 잠시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서 옥화무제의 시선도 그 검쪽으로 쏠렸다.
뭘 생각하는지 살기등등하던 사내의 기세가 순식간에 차갑게 굳는 것을 느끼며, 옥화무제는 저 검에 뭔가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구휘에 대한 얘 기를 하던 도중이었던 만큼, 저 검이 혹시 구휘의 것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저 검으로 구휘를 벴다는 것일까? 전해지기로는 구휘가 만년에 사용했던 검은 10대 기병 중 서열 1위에 꼽히던 흑묵검(黑墨劍)이다.
사내의 허리에 걸려있는 검을 바라보는 옥화무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검신을 직접 보기 전에는 저 검이 흑묵검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검집에 새겨진 아름다우면서도 고상한 문양만 봐도 범상치 않은 장인이 제작했음에 틀림없다. 당연히 그 속에 감춰져 있을 검신 또 한 범상한 물건은 아니리라.
‘저게 흑묵검일까? 아닐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귀에 사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혹, 구휘라는 자 말고, 북명신공을 익힌 자가 또 있느냐?』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현재 마교의 교주가 그것을 익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명신공이 기록된 비급을 마교가 가지고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호오, 비급이 존재한다는 말이지? 그 비급이란 것도 구휘라는 녀석이 만든 것이겠구나.』
“예, 대인.”
『비급이 존재한다면, 더 많은 인물이 그 무공을 익혔을 수도 있겠구먼.』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북명신공은 오로지 교주만이 익힐 수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을 이리로 데리고 오너라. 북명신공이라는 비급과 함께.』
사내의 말에 옥화무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교주가 뉘 집 똥개도 아니고, 오란다고 올 사람인가. 게다가 마교의 보물이라는 비급까지 가지고 말
이다. 또한 자신 역시 무영문의 태상문주였다. 그런데 자신을 언제 봤다고, 저런 시건방진 명령을 내린다는 말인가.
하지만 옥화무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 무림에서 쌓아온 그녀의 직감에 사내의 말에 반했다가는 위험 해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그는 현재 중원제일의 고수입니다. 저로서는 그를 이리로 데리고 올 능력이 없습니다. 대인.”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놈을 이리로 데리고 와야 할 게다. 안 그러면 네가 죽을 테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내. 하지만 그 말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살기에 옥화무제의 안색이 일순 창백하게 질렸다.
“예? 그, 그건 무슨 말씀……………”
하지만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사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녀를 덮쳐왔기 때문이다.
휘휘휙!
그녀는 황급히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건 아예 불가능했다. 상대가 너무나도 빨랐던 것이다.
퍽퍽퍽퍽!
몸의 몇 군데에선가 강한 압력이 느껴진다. 옥화무제가 소스라치게 놀라 내력을 운용해 봤더니, 심장을 중심으로 몇 군데의 혈에서 강한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느 샌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간 사내가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네 몸에 두 달의 시간을 새겼다. 그 사이에 이리로 놈을 데리고 온다면 금제(禁制)를 해제해 주마. 하지만 내 말을 어기고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시 간이 지체된다면 너는 심장이 터져 죽게 될 것이니라.』
다짜고짜 손을 쓰고는 저런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하다니, 이건 교주보다 더한 놈이었다. 저런 놈을 회유해 보겠다고 불원천리 이곳까지 달려온 자신 이 너무나도 멍청하게 느껴지는 옥화무제였다.
“두, 두 달은 너무 짧습니다, 대인.”
하지만 사내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단호하고 차디차기만 했다.
『잊지 마라. 두 달이다. 두 달 내로 백두산 정상으로 오너라.』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창밖으로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버린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바탕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몇몇 혈도에서 느껴지는 강한 이질감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급히 가부좌를 틀며 수하에게 명령했다.
“호법을 부탁해요.”
“예, 태상문주님.”
지금은 저 망할 발해놈의 행방을 찾는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옥화무제는 운기조식을 통해 상대방의 금제를 해제해 보려고 노력했 다. 하지만 혈도에 자리잡고 있는 상대방의 내공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오묘해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해소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금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옥화무제는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와 같이 엄청난 실력을 가진 인물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화경에 오르면 더 이상 적이 없을 줄 알았다. 비록 문파의 힘은 약하더라도, 일대일로 그녀를 핍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 대는 무참히도 꺾였다. 세상에 이렇게 손쉽게 그녀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칠 인물이 있을 줄이야. 옥화무제는 참담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운기조식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었던 옥화무제가 힘없이 일어섰다.
“중원으로 돌아가야겠어.”
힘을 얻으려고 온 길이었지만, 오히려 목숨만 날리게 생겼다. 살고 싶다면 교주를 이리로 끌고 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것도 2개월 내 로.
“무영문으로부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교주님.”
설민이 건네주는 봉서를 받아들며 묵향은 희희낙락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응답이 왔기 때문이다.
“오오, 굉장히 빠르군. 과연 무영문이야. 처음부터 이 일을 무영문에 부탁했어야 했는데…”
두툼한 봉서를 개봉하니, 묵향이 매영인에게 제시했던 3가지 조건들 중 만통음제와 아르티어스의 수색 작업에 관한 진행 상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봉서의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글은 놀랍게도 옥화무제가 묵향과의 대면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2번째 조건에 대한 단서를 잡았는 데, 그걸 알고 싶다면 북명신공이 기록되어 있는 비급을 지참하고 나오라며 말이다.
‘이게 미쳤나?’
자신하고 만나는 바로 그날이 제삿날이 될 것을 뻔히 알 텐데, 이따위 주문을 해오다니. 간덩이가 커진 건지, 아니면 총단이 박살난 것 때문에 영활 하던 그녀의 머리통이 살짝 맛이 가버린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설민은 묵향이 건네주는 봉서 안의 내용을 황급히 읽었다. 일단 뭔 내용인지 알아야 교주의 물음에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혹, 함정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설민의 말에 묵향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흥! 함정? 자네 제법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무영문이 전력을 다 기울인다 해서 본좌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조심을 하시는 게………….”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슬쩍 눈쌀을 찌푸리던 묵향이 다시 물었다.
“하여튼 자네는 이게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이거지?”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저쪽에서 뭔가 확실한 열쇠를 쥔 게 틀림없다고 사료됩니다, 교주님.”
의외의 대답에 묵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열쇠라고?”
“예. 교주님의 앞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목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자신감을 그분에게 안겨준 뭔가가 있다는 말이지요.”
“호오, 그게 바로 열쇠라는 말이로군.”
설민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교주님.”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 그런 게 있을 수가 있을까? 내가 만약 듣고자 하는 대답을 다 듣고 난 뒤 약속을 지키고 않고, 그대로 그녀의 목을 뎅겅 잘라버릴 수도 있잖 아?”
“그러니까 속하의 말은, 교주님께 2번째 조건에 대한 대답을 드린 후에도 목이 안 잘릴 자신이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흠, 과연 그런 게 있을 수가 있을까?”
묵향은 한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모든 열쇠는 북명신공 비급 서문에 적혀있던 발해어가 쥐 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건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있다는 것 같은 그런 간단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만약 그런 거였다면 그녀가 벌써 꿀꺽해 버 렸지, 구태여 자신에게 알려주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북명신공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위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한참을 고심하던 묵향은 설민에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잠시 다녀와야겠어.”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대답을 들으려면 그럴 수밖에. 일단 여우의 말을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는 게 빠르겠어. 목을 칠건지, 아니면 그쪽의 제안을 들어줄 건지…
묵향이 약속 장소로 나가보니, 놀랍게도 그곳에는 옥화무제 혼자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앉아있는 탁자 위에는 맛있어 보이는 안주 3접시와 술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자신을 만나기에 앞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니, 지금까지 이런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묵향이다. 어쩌면 죽기 전 에 마지막으로 술을 한잔 하고 싶었던 것일까?
묵향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녀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점소이 한 놈이 쪼르르 달려와, 그의 앞에 수저와 술잔을 놓으며 주문을 더 하시 겠느냐고 물었다.
“됐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묵향을 향해, 옥화무제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할망구라고 불릴 나이임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이 얼토당토않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아직 앳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을 떠 받치고 있는 것은 새하얗고도 긴 목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을 바라보는 순간, 묵향은 문득 심한 갈증을 느꼈다. 군침을 꿀꺽 삼키는 묵향. 불문곡직 하고 저 목을 그대로 비틀어 버리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그녀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사조차 안 받아 주는 건가요?”
옥화무제의 가벼운 질책에 묵향은 그제야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아, 정말 반갑군. 총단에 쳐들어갔을 때 만났으면, 더 반가웠을 텐데.
삐딱한 묵향의 대답에 옥화무제는 새침한 어조로 대꾸했다.
“흥! 뚫린 입이라고…. 허세는.”
“본좌가 무영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뻔히 알 텐데, 그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하다니. 솔직히 이번만큼은 그대의 배포에 놀랐다고나 할까?”
“걱정하지 말아요. 죽으려고 온 건 절대로 아니니까요.”
“호오, 그래?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일단 본좌에게 북명신공을 가지고 오라 한 이유부터 듣고 싶구먼.”
이때, 옥화무제는 교주에게 자신의 혈도에 심어져 있는 발해인의 내공을 해소할 수 있을지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 써 그 유혹을 억눌렀다. 상대는 구휘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교주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그 녀는 판단했다.
어쨌거나 자신이 살려면, 교주를 그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가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혈도 얘기를 꺼낸다면, 교주가 아무리 둔감하다고 해도 의심할 게 뻔했다. 그녀로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부러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그나저나 검이 바뀌었군요. 전에는 짤막한 걸 차고 다니더니………….”
“아, 어찌 하다 보니 부서져서 이걸로 바꿨지. 피차 바쁜 사이니까,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 낭비는 하지 말자고.”
“아차, 그러고 보니 십만대산에는 당신이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부인이 있었지요? 신혼이라 한참 깨가 쏟아지고 있었을 텐데, 불러냈으 니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본좌의 인내심을 시험하겠다는 건가?”
묵향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지기 시작한 후에야 옥화무제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노린 것은 상대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 때문에 그녀는 일부러 묵향의 성질을 건드리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게 당신이 영인이에게 전해준 게 맞나요?”
옥화무제가 품속에서 꺼내 든 것은, 발해어가 적혀있는 비단 조각이었다.
“맞아. 그걸 가지고 온 걸 보면, 거기에 적혀있는 문자의 뜻을 알아냈다는 것이겠지?”
“물론이에요.”
“흐음…….”
3가지 조건 중 하나이지만, 문자의 뜻을 알아냈으면 그냥 인편으로 알려줬어도 충분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옥화무제가 직접 나와서 자신과 의 대화를 청한 것을 보면, 뭔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게 뭘까?
“원하는 게 뭐지?”
“이걸 알려주면 나한테 뭘 줄 것인지 그걸 알고 싶어요. 설마, 날로 꿀꺽할 생각은 아니겠죠?”
잠시 옥화무제의 아름다운 눈을 지그시 노려보는 묵향.
‘저 능구렁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일까?’
그때, 묵향의 뇌리를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미 그곳에 가봤군?”
마치 따지기라도 하듯 묵향의 어조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요. 가봤어요. 설마 내가 얌전히 그쪽에 정보를 넘겨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요?”
“그곳에서 뭘 본거지?”
“비단에 적혀있었던 문자는 ‘천하제일을 논하고 싶다면 백두산으로 오라’라는 뜻이었죠.”
“백두산?”
“예, 발해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던 성산(聖山)이지요. 그리고 그곳에는 북명신공을 만든 발해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어요.”
묵향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손가락을 탁 튕기며 물었다.
“이제야 알겠군. 그들이 북명신공을 원하던가?”
“눈치가 정말 빠르군요. 맞아요. 그들은 다짜고짜 북명신공을 원했어요. 그걸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조차 거부하겠다고 하더군요. 힘으로 누를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옥화무제의 말에서 묵향은 자신에게 왜 북명신공의 비급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자가 나보다도 고수던가?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비급까지 가지고 올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맞아요. 제대로 겨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로 봤을 때 최소한 당신에 버금가는 고수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기에 순순히 물러난 거죠.”
공공대사에 이어 또 다른 현경급 고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묵향의 가슴은 세차게 두근거렸다. 중원의 무학과는 또 다른 방향의 무학. 북명신공 자 체가 워낙에 손실된 부분이 많아 제대로 익힐 수가 없었지만, 그자와 겨뤄볼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무공 증진에 커다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좋아, 당신 말이 맞다면 지금까지 무영문과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은 모두 잊어주지. 그럼 되겠지?”
“받아드리죠. 당신 말을 믿겠어요.”
“결론이 났으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일어서지! 백두산이라고? 흐흐흣.”
새로운 무공을 접할 수 있을 거라는 흥분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묵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교주 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옥화무제는 몰래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쪽이 이기든, 내가 살 길이 겨우 열린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