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10화 – 흑마법사 수난시대
흑마법사 수난시대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이 모습을 감춘지도 벌써 30여 년이 넘게 흘렀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치레아 공국은 아직까지 건재하고 있었다. 영지의 주인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현재,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을 대신하여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팔시온 폰 치레아 대공이었다. 60세가 넘은 노기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는 아직도 정력적으로 공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크, 큰일 났사옵니다. 대, 대공 전하.”
거의 부숴버릴 듯 문을 사납게 열어제낀 시종은 허둥지둥 달려오다가 카펫에 발이 걸려 데구르르 굴러버렸다. 오랜만에 업무에서 벗어나 부인과 담 소를 나누고 있던 팔시온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오후의 나른하고 평화롭던 시간이 깨진 것이다.
그의 얼굴은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변한 게 없었다. 아직도 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지만, 예전에 다크와 어울리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많이 퇴화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건 아마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탓에 근육을 그리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리 라. 그리고 그건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그의 부인 미디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오우거 찜 쪄 먹을 정도의 근육질이었는데, 지금은 오크 정 도의 근육질로 줄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방정맞은 시종의 모습에 혀를 차고 있는 팔시온을 대신해, 미디아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크, 큰일 났습니다. 드, 드, 드래곤이…….”
“드래곤?”
일순 팔시온과 미디아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드래곤이라면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간 두 사람으로서도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한 몬스터다. 성격이 라도 좋다면 어떻게 사귀어 보겠지만, 이건 정말이지 예측불허의 상대다. 드래곤의 기분이 나쁠 때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기분이 좋을 때 역시 언제 변덕을 부려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지 걱정을 해야만 하는……………
“어허, 답답하구나. 드래곤이 뭘 어쨌다는 것이냐?”
이때 문 쪽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이 멍충이들아! 네놈들을 찾아왔다는 거잖아.”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팔시온과 미디아. 그들은 벌떡 일어서서 아르티어스에게 달려가 공손히 인사를 건넨다. 시종이 지 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저자세의 대공의 모습이었다.
“어르신,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으셨네요.”
잠시 인사가 오고간 후, 팔시온은 눈치를 봐서 다크의 안부를 물었다.
“그나저나 다크는 잘 있습니까?”
그러자 자신만만해 보이던 아르티어스의 기세가 푹 수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그거 때문에 너희들을 찾아 온 거야.”
“제 도움이 필요하다니 영광입니다, 어르신. 그런데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드래곤이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팔시온이었다. 거의 전지전능한 존재가 어찌 한낱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때, 아르티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력이 좋은 흑마법사가 한 놈 필요해.”
“예? 그런 놈을 데려다가 어디에다 쓰시려고…………?”
하지만 팔시온의 의문은 곧 아르티어스의 광폭한 눈빛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 네놈에게 시시콜콜 알려줄 생각은 없다.”
“그렇습죠, 어르신.”
팔시온은 긴장감에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을 소매로 쓱 훔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조건 흑마법사이기만 하면 됩니까? 아니면 뭐, 추가로 필요하신 사항이라도…………….”
“죽음의 기사(Death Knight)를 만들 수 있는 놈이라야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놈을 찾아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흑마법사들의 씨가 말라서…”
하지만 그런 변명이 통할 아르티어스 옹이 아니었다.
“내가 인내심이 많이 부족한 거 알고 있지?”
“옛, 어르신, 최대한 빨리 찾아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일순 팔시온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웃으며 시종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공국을 다스리며 쌓인 연륜이 녹록치 않았던 것 이다.
“기다리시는 동안 편히 지내시도록 조치를 취해 드리겠습니다. 맛있는 포도주라도 드시면서………….”
하지만 팔시온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아르티어스가 손을 흔들며 그의 말을 막았던 것이다.
“아니, 나는 가볼 데가 있다. 수정구슬이나 하나 가져와 봐.”
“옛.”
잠시 후, 팔시온의 명령을 받은 시종이 수정구슬을 하나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르티어스는 시종이 가져온 수정구슬에 손바닥을 슬쩍 올렸다. 순간 영롱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서서히 그 빛이 사라졌다.
“흑마법사를 찾으면 이 수정구슬을 이용해 나를 부르도록 해라. 수정구슬을 동작시키는 방법은, 이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 마나를 주입하기만 하면 된다. 알겠느냐?”
“옛, 어르신.”
“그럼 나는 가보겠다.”
그 말을 끝으로 아르티어스의 몸이 번쩍 하며 사라졌다. 아마도 어딘가로 공간이동을 해버린 모양이다.
아르티어스가 서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팔시온.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다 보니 마치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인 모양이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모습에 옆에서 보다 못한 미디아가 팔시온의 등을 툭 치며 말을 걸었다.
“뭐하고 있어요, 지금 당장 흑마법사를 찾으러 밖으로 뛰쳐나가도 시원찮을 판에.”
그러자 팔시온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뛰어나가 봐야 흑마법사가 어디 있는 줄 알고………….”
“그럼 이대로 멍하니 앉아있겠다는 거예요? 여보, 난 이 나이에 미망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구요.” 팔시온은 잠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갑자기 떠오를 리가 없었다.
“으아아악!”
짜증이 나는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팔시온. 그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괜찮은 생각 하나가 돌연 떠올랐다.
“이런 젠장, 내가 머리를 굴린다고 좋은 방법이 떠오르겠어? 이런 때는 그저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한테 슬쩍 떠넘기는 게 최고지.”
팔시온은 곧 부관을 불러 명령했다.
“가스톤 경과의 마법통신을 연결하도록 해라.”
“옛, 대공 전하.”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 속에 가스톤의 관록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제국의 대마법사다운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는 길게 기른 수염을 쓰윽 쓰다듬 으며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팔시온. 잘 지냈나?”
“실은 문제가 있어서 자네를 부른 거야.”
“문제? 자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문제가 있다니 놀랍구먼. 감히 치레아 공국을 건드릴 간 큰 나라는 단 하나도 없을 텐데 말이야.”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오셨어.”
팔시온의 말에 가스톤의 여유롭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이계로 떠나기 전, 그에게 받았던 혹독했던 수업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로서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아니 기억에서조차 완전히 지워 없애버리고 싶었던 시간들이었다. 물론 그 끔찍한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있는 것이기 는 했지만…………….
“어르신이 흑마법사를 한 놈 데려오래. 산채로 말이야.”
“흑마법사? 흑마법을 익힌 놈이면 아무나 다 되는 거야?”
“아니, 죽음의 기사를 만들 수 있는 놈이라야 한다는군.”
“죽음의 기사라……”
일순 가스톤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죽음의 기사를 만들 수 있는 흑마법사는 죽음의 신 카론(Charon) 일족과 계약을 맺은 자들뿐이었다.
문제는 카론의 권능에는 강력한 공격마법이 없어, 흑마법사들 중 카론과 계약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이런 떠그랄! 너 어르신한테 무슨 원한 살 일이라도 했냐?”
팔시온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혀 없는데?”
“안 그래도 거의 씨가 마른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아주 희소성이 있는 자를 원하시다니. 처음부터 너를 물 먹일 생각이 아니라면, 이런 터무니없는 주문을 하실 리가 없잖아?”
“아, 몰라. 아무튼 어르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 안 된다는 생각이 아닌, 긍정적인 방향으로 좀 생각하라구. 어쨌거나 어르신께서는 흑마법사를 원하시니까 알아봐 줘.”
“알았어. 한 번 알아보지.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마.”
가스톤과의 통신을 끝낸 팔시온은 내친김에 옛 친구 미카엘에게도 연락을 했다. 어쨌거나 흑마법사를 찾는데 여럿이 힘을 합칠수록 시간은 단축될 테니 말이다. 물론 자신에게 닥친 이 불행을 혼자 짊어진다는 게 좀 아니, 많이 억울했던 팔시온이었기에 옛 친구들에게도 아낌없이 책임 전가를 하 는지도 몰랐다.
잠시 후, 수정구 속에는 감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정도로 잘생긴 중년 남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젊었을 때도 꽤나 미남이었지만, 나이가 들 면서 관록과 함께 자신감이 더해지자 턱에 삐죽삐죽 돋아있는 수염마저도 근사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생긴 것과 달리, 미카엘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대공 전하.”
필요 이상으로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미카엘. 그런 모습에 팔시온은 왜 그러냐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마. 실은,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연락했어.”
“호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저같이 미천한 기사에게 청할 게 있으시다니, 참으로 황송한 일이로군요.”
뭔가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투에 팔시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발칵 냈다.
“자꾸 개소리 할래! 제국의 은십자 기사단 단장이 미천한 기사라니, 지나가던 오크가 웃겠다.”
팔시온이 언성을 높이는데도 불구하고, 미카엘은 느긋한 어조로 대꾸했다.
“개소리라니요? 어찌 제가 감히 대공 전하께 허언을 아뢰겠습니까.”
“너 자꾸 이럴래?”
처음에는 몰랐는데 가만히 듣다 보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미카엘의 심사가 꽤나 뒤틀려 있는 모양이었다. 팔시온의 외침에 마침내 미카엘이 본색 을 드러냈다.
“흥! 그러면 어쩔 건데?”
“네가 협조를 안 해준다고 어르신한테 일러줄 거야.”
뭔가 대단한 협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누군가에게 일러준다는 유치찬란한 문장을 읊을 줄이야. 지금 네 나이가 몇 살이냐고, 한껏 비웃어 주려던 미카엘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묘한 단어 하나가 있었다. ‘어르신’이라니…………? 치레아 공국을 통치하고 있는 팔시온이 어르신이라고 부를 만 한 사람이 있었던가? 하지만 곧이어 그의 뇌리에 자신들이 예전에 어르신이라고 불렀었던 사람, 아니 번쩍이는 똥색 드래곤이 떠올랐다.
미카엘은 급격히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설마……………. 에이, 아니겠지? 나 놀리려고, 괜히 해보는 소리지? 기억을 되살리는 것만 해도 섬뜩하다, 야.”
“내가 이 시간에 너한테 마법통신 걸어서 헛소리 할 이유가 있냐?”
미카엘은 마치 누군가 엿듣는 게 두렵기라도 한 듯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후,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황급히 물었다.
“설마, 정말이냐? 어르신은 이계로 떠나셨잖아.”
“오늘 갑자기 찾아오셨다. 죽음의 기사를 제작할 수 있는 흑마법사를 한 놈 잡아오래.”
“죽음의 기사? 드래곤이 죽음의 기사는 만들어서 뭐하시게?”
“낸들 아냐? 궁금해서 슬쩍 물어봤더니 알 필요 없다고 하시며 쫘악 째려보시는데…….”
팔시온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말을 이었다.
“간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팔시온의 표정이 갑자기 짓궂게 변했다.
“어떻게 할 거야? 어르신께 네가 전혀 협조를 안 하더라고 보고할까? 그럼 어르신 성질머리로 봐선……”
그 순간 미카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팔시온의 말대로 그렇게 보고라도 하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성질 더러운 드래
곤은 만사를 제쳐놓고 이쪽으로 날아오리라. 그리고는……………. 허그덩!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는지 미카엘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내, 내가 언제 안 도와 주겠다고 했냐? 적극 협조할게. 아니, 만사를 제쳐두고 흑마법사를 찾을게. 그러니 어르신께 잘 말씀드려다오.”
“쯧, 진작에 그렇게 나올 일이지.”
미카엘과의 통신을 끝낸 팔시온은 그 외에도 어르신과의 각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법통신을 날렸다. 아르티어스가 흑마법 사를 원한다고 말이다.
그날 대륙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신을 끝낸 미카엘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다크만 있으면 설설 기는 드래곤 주제에 미치…………….”
여기까지 말하던 미카엘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황급히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아니! 어르신이 왔다면, 다크도 함께 왔다는 소리잖아?”
다크와 헤어진 지도 벌써 30년이 넘어 버렸다. 헤어지던 그날, 다크는 미카엘에게 마나를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가르쳐 줬었다. 그리고 그 수련법 이 안겨다 준 놀라운 효능. 미카엘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마스터가 되어있는 자신의 옛 동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은 치레아의 대공 부부가 되어있는 팔시온과 미디아. 그들은 다크로부터 뼈를 깎는 수련을 받아 놀랍게도 단 5년 만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버 렸다. 그때만 해도 미카엘은 자신도 열심히 수련하면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스터라는 벽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 벽을 깨지 못했다. 아버지인 로체스터 공작이 심혈을 기울여 개인교습까지 해줬지만, 아직까지 마지막 관문을 돌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 들어 그는 간혹 생각한다. 그때 다크를 떠나는 게 아니었다고 말이다. 만약 그때 친구들과 함께 했었다면…, 그랬다면 그도 벌써 마스터가 되어 있었을 거다. 물론 치가 떨릴 만큼 혹독한 수련을 해야 했겠지만, 친구들이 마스터가 되어 있는 모습을 좌절감에 쌓여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됐다는 말이다. 그것도 33년 전에!
이미 마스터가 되는 것을 포기한 그에게 다크란 존재는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만 만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도 마스터가 될 수 있다. 아 니, 다크가 자신을 마스터로 만들어 줄 것이다. 미카엘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크를 만나야 해!”
지금 당장 치레아 공국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했다. 먼저 어르신에게 줄 선물부터 장만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기사를 만들 수 있는 흑마법사 한 마리를 말이다.
아르티어스라는 존재가 일으킨 파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아르티어스가 치레아 공국을 방문한지 단 하루 만에, 거의 전 대륙이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티어스에게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받은 팔시온이, 혼자 당하는 게 억울하다는 심보로 각 제국에 퍼져있는 지인들과 지도층에 드래곤의 이름을 팔아 협조를 구한 덕분에 대륙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흑마법사 사냥이 시작되었다. 온 천지사방에 현상수배 전단이 내걸렸고, 기사들이 산골 마을 구석구석까지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국에 위치한 신전에서도 적극 호응하여, 마도전쟁의 잔재를 없애버리겠다는 기치를 내걸며 성기사들을 사방으로 파견했다. 덕분에 예상치 도 못한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은 흑마법사들이었다.
흑마법사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 그 모습을 깊숙이 감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모두들 사력을 다해 들쑤셔대니 성과가 없을 수 없었 다. 시간이 지나자 그 귀하디귀한 흑마법사들이 하나 둘 잡혀오기 시작했다.
“죽음의 기사를 만들 줄 아나?”
질문을 받은 흑마법사는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그런 것 만들 줄 모르오.”
“좋게 말할 때 실토하는 게 좋아.”
“그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겠소?”
흑마법사는 항변했지만, 상대는 마치 흑마법사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집요하게 말했다.
“실토한다고 해서 자네한테 해가 될 일은 없네. 위쪽에서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의 기사가 한 마리 필요한 모양이야. 그것만 만들어 주면, 자유롭게 풀어주겠다고 황제폐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물론 두둑한 수고비도 지급될 테고.”
“좋은 제안이기는 하지만, 만들 수 없는 걸 만들 줄 안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이 새끼! 좋게 말해서는 안 되겠군.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네놈이 편히 죽을 것 같으냐?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어떤 건지 한 번 맛보고 싶다는 거야!”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 없지 않겠소.”
흑마법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법, 곧이어 강도 높은 고문이 가해졌다.
“이 새끼, 빨리 불어! 너 죽음의 기사를 만들 줄 알지?”
흑마법사는 만들 줄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만들 줄 안다고 실토하라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냥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고 문까지 병행하고 있으니 죽을 지경인 것이다.
“크아아악! 차라리 나를 죽여라. 아무리 죽음이 두렵다고는 해도, 만들 수 없는 걸 어떻게 만들 수 있다고 대답을 하겠느냐. 곧바로 들통 날 게 뻔한 데………….”
당연한 지적이었지만, 혹독한 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도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모처럼 잡아들인 흑마법사다. 혹시 이놈이 죽음의 기사를 만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치미를 떼고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고문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변하게 된 이유는 공작이나 대공 같은 지도급 층에서 두 눈을 시뻘겋게 붉히며 연신 닦달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르티어 스의 이름을 판 팔시온의 책임 떠넘기기가 확실하게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결국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하는 자가 몇 명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흑마법사의 실토를 곧이곧대로 믿고, 드래곤에게 데리고 갈 만큼 그들은 멍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사들은 곧장 흑마법사를 데리고 공동묘지로 갔다. 그리고 명령했다. “지금 당장 죽음의 기사를 하나 만들어 봐!”
고문 때문에 거짓 실토를 한 것일 뿐, 그들이 죽음의 기사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다시 감옥으로 끌려가, 이번엔 헛걸음치게 만든 괘씸죄 까지 더해져 더욱 강도 높은 고문이 가해졌다.
“너 만들 수 있으면서도, 못 만드는 척 하는 거지?”
“아,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빨리 불어, 새꺄. 사실은 만들 줄 알지?”
“끄아아악! 미치고 팔짝 뛰겠네. 차라리 날 죽여라!”
고문은 흑마법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 죽으면 그제서야 죽음의 기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말을 믿어줬다. 물론 억울하게 죽은 흑마법사 야 온갖 욕설을 퍼붓고 싶었겠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이런 젠장, 시체 치워라. 이놈도 아닌 모양이군.”
“예.”
“빨리 가서 딴 놈 끌고 와!”
이런 현상이 대륙 곳곳에서 벌어졌고, 흑마법사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나날들이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