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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53화


1188화

전쟁에 대한 검후와 황녀의 생각은 분명했다.

아마 황제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마스의 태도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지만, 마스가 갑자기 돌변해서 무릎이라도 꿇지 않는 이상 상황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기습을 받은 제국이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니까.

오히려 물렁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여기저기서 호구로 볼 수 있으니, 더욱 과감하게 나서야 옳았다.

철저한 약육강식에 기반한 국제 관계에 있어 이러한 태도는 그야말로 기본이랄까. 그야말로 어디 책 속에나 있을 신을 모시는 신관들의 성국이 아닌 바에야 말이다.

같은 제왕학을 배워서 그런 것일까.

이드는 생각까지 닮은 두 조손을 바라보다 말했다.

“라울도 그러더군요. 제국은 전쟁을 원한다고.”

“무례한 말이네요. 제국은 상식적으로 대응하고 있을 뿐인데. 전쟁을 바라는 건 제국이 아니라 마스라고요.”

기분이 나빠진 듯 약간 새초롬해진 황녀였다.

그녀의 말대로 제국의 대응은 지극히 상식선에 있었다. 오히려 기습을 당하고서도 변명할 시간을 주고 있으니, 차라리 자비롭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황녀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연신 손을 움찔거리던 검후가 작은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이드 님, 바벨은 이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이라고 하던가요?”

“하하.”

“그 웃음은 어떤 의미죠?”

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는 검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 저도 지금 검후님과 똑같은 질문을 했던 것이 생각나서 그만.”

그리고 이드는 그 질문을 받은 라울의 표정을 따라 씰룩이려는 입꼬리를 내리눌렀다.

“이드님?”

“아, 죄송합니다. 바벨은 그러니까, 이번 마스의 돌발 행동에 대해서는 제국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합니다.”

“마스에 대해서는, 이라. 말이 좀 이상하군요?”

“알아차리셨나요?”

아직 뒤에 이어질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정확히 핵심을 짚어내는 검후에 이드는 내심 박수를 보냈다.

‘역시 잘 컸어.’

과연 지금의 검후를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검후가 들었을 때의 반응이 자못 기대되는 생각을 뒤로한 이드가 말을 이었다.

“라울의 말에 따르면, 바벨에선 전쟁이 시작되면 그들 단독으로 마탑을 처리할 거라고 했어요. 초반엔 최소한 한 달. 그 이상 전쟁이 길어질 경우, 마탑에 대한 처리가 뒷전이 될 거라고도요.”

“이런 무례한! 제국은 바벨의 그러한 독단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상해 있던 황녀가 대번에 발끈했다.

물론 그래 봤자 바벨에선 눈도 깜빡이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권력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바벨이며, 이제는 실제로 그 가진바 힘도 국가에 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이쿠, 황녀님, 검후님 앞이니 제발 진정을……..”

당장이라도 황제를 찾아가 이 사실을 고하겠다는 황녀를 에단이 재빨리 나서 제지했다. 과연 황녀에게 ‘검후’라는 단어는 적절했던지, 입술을 앙다문 황녀가 곱게 제자리에 앉았다.

“못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할마마마.”

“황녀로서 충분히 노여워해야 할 일이니, 죄송할 건 없습니다. 황녀.”

검후가 황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이드를 바라보았다.

“일단 제국의 입장은 보신 바와 같습니다.”

“목표가 같으니, 양측 간에 조율이 필요하겠네요.”

“그건 차차 진행하면 될 것이고. 전 이드 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제 생각 말입니까?”

“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드 님께선 바벨을 지지하는 것 같아서요.’

이드는 갑자기 자신의 생각을 묻는 검후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가 몰라서 묻는 것일까. 마침 눈이 마주친 검후의 시선 황녀를 향하자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전쟁이 커질 것 같으면, 저희는 바벨과 함께할 생각입니다.”

“넷? 어째서 제국이 아닌 바벨과……!”

“황녀님. 바벨이냐, 제국이냐, 저희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닙니다. 마탑. 그리고 그에 손을 뻗은 혼돈의 파편이 더 중요합니다.”

설마 이드가 바벨을 선택할 줄은 몰랐는지 울상이 되었던 황녀는 뒤이어 나온 ‘혼돈의 파편’이란 말에 아차 싶었는지 검후를 돌아보았다. 그에 검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머지않은 마스와의 전쟁 뒤에는 마탑, 혹은 혼돈의 파편이 손을 뻗고 있을 테지요.”

“물증이 없을 뿐, 일단 마탑은 확실하죠.”

이드가 검후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더했다.

이미 대부분의 관련자가 짐작하고 있을 사실.

황녀 또한 모르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전쟁을 우선하는 발언을 한 것은, 둘을 하나로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작은 관점의 차이랄까.

이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더욱이 최근 여기저기서 혼돈의 파편이 남긴 흔적이 발견되는 것이, 이전까지와 달리 움직임이 한층 활발해졌습니다.”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말이군요.’

“파편 중 하나인 메르시오가 소멸되었으니 변화가 있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저들의 움직임이 변한 게 꼭 그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마스가 갑자기 마탑을 감싸고 나선 이유도 그중 하나일 테고요.” 

라미아와이드가 번갈아 가며 이어 가는 말에 황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후가 옳다고 나서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

그럼에도 영 아쉬운지 기어코 한마디를 더했다.

“그렇다면 전쟁과 토벌을 동시에 진행하면 어떨까요. 제국이라면 충분히 그만한 힘이 있습니다.”

마스가 갑자기 제국을 도발한 이유는 마탑 때문이다.

한데 정작 그 마탑을 치려 한다면 마스가 가만히 있을까. 그런 마스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국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게 황녀의 주장이었다. 물론 이러한 제국의 움직임이 오히려 마스를 더욱더 끌어들이는 효과를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그 문제는 차차 풀어 보죠. 당장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은 아니니까요.”

잠시 생각하던 이드가 결정을 뒤로 미뤘다.

이 자리에서 얘길 더 나눠 봤자 당장 정해질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나서면 검후가 따라온다. 그에 따른 발언력은 분명 강력하다.

하지만 전쟁을 앞에 둔 제국이 자신과 검후의 한마디에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바벨의 문제도 있으니.

“잘 알겠습니다. 이드 님의 뜻은 황제 폐하께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녀. 그리고 검후님께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드와 황녀의 대화를 한 걸음 물러선 태도로 지켜본 검후다.

그러나 이드만큼이나 혼돈의 파편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사람이 바로 검후였다. 직접 충돌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목적과 무서움을 이드 일행을 제외하고는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혼돈의 파편이 그들에게 심어진 진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국가 간의 전쟁 따위는 농담조차 되지 않을 사태가 발생할 터였다.

“맡겨 주세요. 그런데, 두 분 부인과 이드 님은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실 건가요? 사태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만큼 돌아오시는 것도 좋을 듯한데요.”

“그렇지 않아도 이삼 일 안으로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이삼 일 후라. 그사이에 그쪽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네. 좋은 기회가 생겨서 말입니다. 카논의 황궁을 한번 둘러보고 가려고 합니다.”

내기 후 얻은 승자의 권리. 이드는 통신이 끝난 직후라도 그걸 이용해 황궁 안내를 요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황궁이 가 보고 싶다고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런 부담이야 톤 자작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순간, 자택에 있던 톤 자작은 이유도 없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고 한다.

“…….

“할 말이 있나?”

그때, 통신이 시작되고 얌전히 오가는 이야기에 눈동자만 굴리던 에단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에단이 꼴깍 침을 삼키고 말했다.

“황궁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 타란 백작이 왕의 명령을 받아 블레인 자작령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지켜본 바로는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이 크다고 합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당연한 반응이지.”

검후의 말에 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이드 님께 들었던 과거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이야기 때문입니다. 현재 마스의 행동은 아무리 전쟁에 미친놈들이라고 한들, 너무 무리한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제국에 더해서 바벨이라니요.”

에단은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는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이번 일이 제국뿐 아니라 바벨을 자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모두가 공통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에 이드는 어서 다음 말을 해 보라며 눈짓을 보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혼돈의 파편이 마스에 숨어들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있잖습니까. 카논의 전설이 된 해방의 마법사.”

“게르만 말이군.”

해방의 마법사 게르만.

카논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자연스럽게 듣게 된 이름이다.

처음 그 이름과 칭호를 들었을 때, 이드 일가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를 갈았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골치 아픈 일의 시작에 있는 마법사에게, ‘해방’이라는 칭호라니.

이 세계의 약속된 종말과도 같은 존재를 부활시켰으니, 해방보다는 차라리 ‘멸망’이 백배는 더 잘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아무리 사실을 외쳐 봐야 들어 줄 사람은 없다.

아니, 카논인이라면 오히려 돌을 던질 것이다. ‘게르만’은 그만큼 카논 제국에서 존경받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렇게 된 데 혼돈의 파편이 있음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것이 혼돈의 파편이 게르만과 맺은 계약의 조건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아마 그 당시의 게르만은 행복했으리라. 설마 자신이 봉인에서 풀어낸 존재들의 목표가 세상을 리셋하는 것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만약 알았다면 죄책감에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조차 거부했으리라.

“네. 그 마법사처럼 녀석 중 하나가 현 마스의 왕 행세라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가능성만을 보자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무리 마탑이 내놓은 패가 좋아도 힘든 전쟁임은 분명하니까.

하나 이드는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아니야.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놈들을 찾는 수고도 덜 수 있고. 하지만 놈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엔 마스는 너무 가벼워.”

“아…… 하하, 그렇군요. 마스가・・・・・・ 가볍군요.”

가볍게 뱉어 낸 이드의 말에 에단은 물론 황녀의 얼굴까지 파르르 떨렸다.

다른 건 몰라도 전력에 있어서만은 세 제국의 뒤를 잇는 마스였다. 그런 곳이 혼돈의 파편 하나보다 가볍다니.

이드 일가와 검후는 그런 두 사람을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당연한 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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