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57화
1192화
“자작님, 저와 이야기 좀 하시지요!”
화난 뱀처럼, 악문 잇새로 바람 소리가 샌다.
좀 전까지 이드를 상대로 보여 주었던 품위는 간데없다. 작위도, 명성도, 자산도 모두 톤 자작이 앞섬에도 콘펌 남작은 거침이 없었다.
“쯧쯧, 말투하고는. 저놈이 어떻게 보겠소. 예의를 지키시오.”
톤 자작은 그런 행동을 예사롭게 않게 받았다.
여태까지 그가 보여 준 모습대로라면 그 대단한 자존심에 하극상이라고 눈에 불을 켜야 할 텐데, 전혀 그러지 않은 것이 서로 이 정도의 말은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인 모양이다.
“예의? 지금 예의란 말이 입으로 나오시오? 미친 거 아니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쓰읍. 목소리가 높소. 그렇게 소리치려거든 차라리 성탑 위에라도 올라가든가.”
“뿌득.”
마치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능글거리는 톤 자작.
그에 턱이 터질 듯 이를 악문 콘펌 남작이 턱짓으로 복도에 붙은 방 하나를 가리켰다.
곧이어 두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삐걱 소리가 요란하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는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중간중간 병사와 기사가 동상처럼 서 있었다.
이드를 경계하는 모습은 없지만,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두 사람도 이드를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간 것이고.
“안에서 무슨 말을 할지 들어 봐야겠는데. 그냥은 듣기 힘들 것 같고.”
이미 귀에 내력을 더하고 있는 상태인데도 방에 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소리를 차단하는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을 터. 아무렴, 황제의 허락도 없이 이드를 황궁에 들였다.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들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분명히 말해 콘펌 남작의 행동은 반역으로 볼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하나 들인 것.
심지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동행하고, 그 신분도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게 무에 그리 문제냐 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일이든 시간과 장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
무려 황제가 머무는 황궁에 허락 없이 사람을 들인다는 것은 충분히 죽을죄였다.
다시 말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
그럼에도 콘펌 남작이 참지 못하고 이드도 혼자 둔 채 톤 자작을 끌고 갔다.
그만큼 참지 못할 정도로 톤 자작에게 화가 났다는 의미다.
어떻게 해서든 작은 정보라도 얻고 싶은 이드에게는 사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원래 잘 조율된 하모니보다 불협화음에서 알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은 법이기 때문이다. 호흡이 맞지 않는 소리는 서로의 단점과 허점을 감싸 주지 못하는 법이니까.
당장 두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굳이 지금 꺼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무리한 일에 대한 분노로 참지 못하고 꺼낸 격일 테니까.
“잠깐 실례.”
따닥.
이드의 손끝에서 몽글몽글한 무형의 지력이 쏘아졌다.
현재 이드를 시야에 두고 있는 경비의 숫자는 다섯. 그리고 다시 그들을 시야 안에 두고 있는 사람은 스물넷. 짜자자작.
가까이 선 다섯을 향해 날아가던 지력이 갈라지더니, 더 멀리 있던 사람들의 수혈과 마혈까지 동시에 짚었다.
자신이 잠드는지도 모르고 눈을 감은 사람들이 그대로 굳었다.
한 치의 변화도 없기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한 이드는 고요한 걸음으로 두 사람이 들어간 방문 앞에 다가갔다.
여전히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드가 방문에 한 손을 가져다 댔다. 검기의 단계만 되어도 접촉한 물체에 내력을 투사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문을 넘은 내력의 파동이 공간을 채우자, 방 안의 광경이 이드의 머리에 그려졌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방. 한쪽에 자리한 책상을 제외하곤 아무런 집기도 없었다. 그 중앙에 파동을 막는 원형의 공간이 있었다.
“다행히 공간 계열 마법은 아니네.”
공간 마법으로 목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면 라미아를 불러야 했겠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감지되는 마나 파동의 형태로 보아 저들이 사용한 마법은 사일런스.
“그럼, 우리 같이 좀 들어 봅시다.”
마법의 정체와 마나 파동에 대한 해석을 순식간에 끝낸 이드는, 아주 미세한 내력의 실을 뻗어 마나 파동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만약 마법사가 직접 마법을 사용했다거나, 시전자의 감각이 예민하다면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티팩트를 이용한 평범한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진심입니까? 겨우 그딴 이유로 이런 짓을 했단 말입니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듯,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어, 그딴 이유라니. 내 명예와 자존심이 달린 일이 어떻게 그딴 일이오.”
“・・・ 지금 제 생각을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그 얼굴을 보면 뻔하지. 하지 마시오. 서로 감정 상할 필요 없지 않소?”
“전 이미 감정이 상했습니다. 감정뿐 아니라, 위험까지 감수했단 말입니다! 다름 아닌 그분의 일이라고 했기에……”
점점 고조되는 콘펌 남작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멈췄다.
그러더니 기름기가 쪽 빠진 톤 자작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다행이오. 내가 남작을 벌하는 일이 생기지 않아서.”
“・・・・・・ 알고 있습니다. 그분에 관련한 발언은 오직 약속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잘 기억하시오. 그대의 목숨을 계속 붙여 두기 위해선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말이니까.”
짧은 경고와 두려움이 깃든 대화.
그 짧은 몇 마디에 콘펌 남작은 대화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아쉽기는 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분이 누구야? 이왕 말을 꺼냈으면 시원하게 뱉어 냈어야지, 이 양반아. 쯧쯧’
하지만 주도권을 잃었어도 속에 쌓인 화까지 사라지는 건 아닌지, 억울함을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자작께도 해당하는 말이 아니오? 어제 내게 급히 요청할 때, 그분을 언급한 것 말이오.”
“흥,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소.”
“……정말 해보자는 거요?”
“잘 기억해 보시오. 내가 당신에게 그분의 명령이라고 했던 적이 있소?”
“지금 날 상대로 말장난을 했다는 거요!”
“장난이 아니라, 당신의 오해였다는 거요. 그렇다고 어쩔 거요. 이 사실을 그분께 고하시겠소? 당신의 판단력이 떨어져서 벌어진 일이라고?” “이익!”
“서로 좋게 좋게 갑시다. 무파 안에서 우리만큼 가까운 사이가 어딨겠소?”
어르고 달래고 화내고.
그야말로 현란한 말발, 그 자체였다. 톤 자작의 혀끝에 이리저리 휘둘린 콘펌 남작은 결국 긴 한숨과 함께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내 말로는 자작을 이길 수 없으니 이쯤 하겠소. 하지만 이거 하나는 명심하시오. 넘어가는 것은 이번뿐이오. 다음은 없소.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의 행동을 그분께 직접 알리고 말겠소.’
“하하하. 걱정 마시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나도 이번 일을 통해, 개도 함부로 패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지 뭐요.”
너스레를 떠는 톤 자작의 말에 콘펌 남작이 혀를 차기 시작했다.
개를 패도 주인부터 봐야 한다는 건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설마 톤 자작이 그것을 모를까.
콘펌 남작도 톤 자작의 파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중간중간 톤 자작의 무리한 행동도 충분히 알았고 말이다.
“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작은 바벨을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소.”
“쉽게 보다니. 그 무슨 말이오. 그들처럼 큰 거래처가 없는데, 우리 수칵 상단의 가장 큰 VIP 중 하나란 말이오.”
“젠장. 내가 자작에게 이런 말을 아무리 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소. 알아서 하시오. 하지만 알아 두시오. 언젠가 바벨이라는 무엄한 놈들을 소탕해야 할 때가 올 테지만, 그건 최소한 이 대륙의 절반이 우리 제국의 것이 된 뒤라는 사실 말이오. 자작이 아무리 원해도 그 때가 바뀌는 일은 없을 거요. 그분의 계획은 절대적이라는 사실. 자작도 잘 알거요.”
“후후후, 그건 두고 봅시다.”
“그럽시다. 우선은 밖에 있는 감찰관이 먼저일 테니.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거요? 미리 말하지만 여기서 내게 뭔가를 더 요구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요구하고 말고가 어딨소. 말 그대로 황궁을 둘러보기 위해 온 것인데.”
“…….”
“어허. 그 눈은 뭐요? 조금 전 예의를 잊은 당신의 말과 행동보다 더 무엄하다는 것 아오?”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급한 일이 생겨서 안내를 그만두게 될 거요. 그럼 황궁 기사가 대신하게 될 것 같소만?”
콘펌 남작이 말하는 ‘황궁 기사’란, 황제의 기사로서 톤 자작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부당한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가령 누군가를 해하고 보지 못한 것으로 하라는 둥의
물론 정말 단순히 궁을 구경하고 나가기만 한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그건 좀 곤란하군.”
“젠장.”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말에 콘펌 남작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냈다.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더 요구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사를 대신 안내로 붙이는 것도 거부했다. 그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황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한참을 궁리해야 할 테지만, 궁을 일터로 두고 있는 콘펌 남작에게는 그 속이 훤하게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보고도 침묵해야 할 상황.
황궁에서 그런 경우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자작은 저 감찰관을 금지에 던져 넣을 셈인 거요?”
“불행한 사고가 될 거요.”
“다시 묻지만, 제정신이시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는 거요? 저자가 작위가 없다고 해서 진짜 어디 이름 없이 굴러다니는 평민인 줄 아시오? 무려 바벨의 감찰관이오. 요수일 간의 행적만으로 수도에 모르는 귀족이 없을 만큼 유명해진 인물! 그가 황궁에 들어와서 사라지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소? 진정 그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불가능할 건 또 뭐요. 그야말로 불행한 사고인데, 황궁에서 벌어진 일이오. 분명 그의 무리한 요구였고, 애초에 감찰관은 금지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런 요구를 했던 거요.”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고 보시오?”
“통하지 않으면? 바벨의 힘이 강해도 우리는 제국이요. 그놈들이 감히 제국의 황궁을 조사하겠다고 들이닥치기라도 할 것 같소? 뭐, 솔직히 그래 준다면 나야 즐거운 일이지만 말이오.”
톤 자작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콘펌 남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