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9권 1화 – 오지 마을의 소년

오지 마을의 소년

퍽!

도끼가 내리쳐진 순간, 받침대 위에 놓여져 있던 나무토막이 두 조각으로 쫙쪼개진다. 소년은 또다시 나무토막 하나를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다음, 도끼를 위로 들어올렸다.

움직임에 따라 강인해 보이는 근육이 물결친다. 군살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조각품과도 같은 매끄러운 몸매는, 소년이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육체적인 수련을 해왔 는지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 도끼질을 하고 있었던 듯, 잘 쪼개진 장작들이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다.

소년의 도끼질은 아주 매끄럽고도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윗통을 벗어젖힌 소년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 듯하던 도끼가 어느 순간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며 밑으로 내리꽂혔다.

퍽!

이번 도끼질을 마지막으로 소년은 자신이 쪼개놓은 나무토막들을 둘러봤다. 한동안 쓰기에 충분한 양이다. 소년은 씨익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끝이다. 내가 두 번 다시 도끼질을 하면 사람이 아니야. 큭큭…….”

소년에게는 꿈이 있었다.

크라레스 제국의 전설적인 영웅, 다크 폰 치레아 대공 같은 전설적인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명문귀족 출신도 아니었고, 실력이 뛰어난 스승을 둔 것도 아니 었다. 어쩌면 비천한 태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대공이 되었고, 또 마도전쟁을 승리로 이끈 중심축이 되었다.

잠시 동경하던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을 떠올리던 소년은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인상을 찡그렸다.

‘휴우, 아무리 검술을 연마하면 뭐해.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어서야…….”

그의 아버지는 기사였고(지금은 경비대 하급장교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그 또한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기사 수업을 받으며 성장했다. 15세에 이른 지금, 검술에 있어서만큼은 아버지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었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또래 애들 중에서도 그가 단연 최고의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실전경험이라는 면에서는 아버지와 비교했을 때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게 사실이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봤을 때는 그렇다는 얘기다.

자신에게 필요한 게 경험이라는 것을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험을 이런 시골구석에서 쌓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벗어나 큰물에서 경험을 쌓고 싶었던 것이다.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파티를 맺어 여행을 하는 것도 좋고, 유명한 무가(武家)의 수련생으로 들어가 좀 더 심도 깊은 검술을 배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실력과 경험을 쌓아 자신의 몸값을 어떻게 해서든 올려놓는 게 중요했다. 아버지처럼 능력 없는 주군을 만나,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는 것을 피하려면……

“어이, 라이!”

그때 집 앞을 지나가던 소년 하나가 아는 척을 했다. 땀을 닦으며 쉬고 있던 라이는 손짓으로 대응을 했다.

“가출 할 준비는 다 해놨어?”

순간, 라이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위에 누가 있는지 살펴봤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백하게 질렸던 라이의 안색이 그제서야 겨우 돌아왔다. 라이는 경솔하기 짝이 없는 친구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가 미쳤나! 그걸 대놓고 말하면 어떻게 해?”

소년은 라이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주위에 사람 없는 거 확인하고 한 말이다. 어쨌건 너희 아버지한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너나 조심해, 이 짜식아!”

“그럼 난 간다.”

소년은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렇다. 라이는 지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모의하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이 촌구석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고리타분한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결행은 4일 뒤.

이곳은 워낙 오지에 위치한 마을인지라 생필품을 들여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생필품이 들어오지 못하면 마을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에, 마을 촌 장(村長)은 자경대(自警隊)를 투입하여 한 달에 한 번 생필품을 구하러 이웃마을로 가는 짐마차를 호위해줬다.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길을 무장도 하지 않은 사람 들만 보내는 것은 굉장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때를 기다려 짐마차의 행렬을 따라갔다. 라이를 비롯한 소년들은 그때 짐마차를 따라 몰래 마을을 벗어날 계획이었다.

‘도시로만 갈 수 있다면 난 출세할 거야. 아니, 꼭 출세하고 말 거야. 넌 할 수 있어, 라이.’

4일 후면 이 지긋지긋한 집과도 끝이다. 그리고 이놈의 장작패기도…….

‘거의 3주일은 쓰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하게 장작을 패놨으니, 그 다음은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

라이는 손때가 잔뜩 묻은 도끼자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이제 너하고도 끝이구나.’

화창하고 좋은 날, 친구들하고 노는 게 더 좋지, 도끼질이나 하고 있는 게 뭐가 좋겠는가. 하지만 아버지는 라이가 도끼질을 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되자, 집에서 쓸 장작을 조달하는 것은 모두 다 어린 아들에게 맡겨버렸다. 그동안 지금까지 이놈의 도끼를 얼마나 많이 휘둘러댔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미운정 고운정 다 든 놈이라고 해야 할까? 더 이상 이놈의 도끼를 휘두를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시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4일 후에 여기를 떠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라이는 지금껏 이 마을을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 얘기 좀 하자꾸나.”

갑작스런 아버지의 목소리에 라이는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안 그래도 저질러 놓은 죄가 있어 조마조마한 판에,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시다니. 가슴은 벌렁벌렁 뛰고 있었지만, 라이는 최대한 평상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완고한 성격의 아버지이기는 했지만, 눈치 하나만큼은 그의 칼솜씨만큼이나 빨 랐으니까.

“무슨…, 얘기요?”

“이번에 막내 공자(公子)께서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얘기, 들었냐?”

‘공자는 무슨……. 촌장 아들이지.’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었지만, 이 마을의 촌장인 제럴드 말러의 진짜 이름은 제럴드 폰 로티넨 백작이었다. 신성 아르곤 제국의 국경과 접해 있는 로티넨 영지는 크 라레스 제국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들 중 하나였다.

거대한 쟈코니아 산맥이 양국을 갈라놓고 있는 상태에서, 양국이 서로의 물자를 교류할 수 있는 몇 군데 되지 않는 통로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엄청난 양의 교역물자가 오고가는 통로인 만큼, 그곳의 영주가 한해 거둬들이는 수입 또한 막대했다. 웬만한 뒷줄이 없이는 감히 원하는 것조차 황송한 그 런 자리였던 것이다.

한때나마 그런 영지를 다스렸었다는 것만 봐도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榮華)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 다.

겨우 3년. 정확히 말하면 3년이 되기 12일 전부터 시작해서 암살자들에게 쫓겨 도망다니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의 뒤를 봐주고 있던 란프리아 후작이 황실에 서의 권력 쟁탈전에 패해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참수당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어쨌거나 그가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건지고, 또 이런 오지까지 도망쳐와 아쉬운 대로 작은 마을 하나를 꿰찰 수 있었던 것은 다 충성스런 그의 가신(家臣)들 덕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충성심이 대를 이어 전해지지는 않았다. 기사가 충성을 맹세할 대상은 그 자신이 직접 선택하는 것이 관례였으니까. 그렇기에 라이에게 있어서 제럴 드 폰 로티넨 백작은 촌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가는 경을 칠 게 뻔했기에 라이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들었어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구나. 내 집사 어른께 말씀드려 너도 시종으로…….”

라이는 더 이상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싫어욧!”

라이의 격렬한 반응에 아버지는 일순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아버지의 지레짐작은 틀렸다. 라이는 시종이 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공자의 또 다른 시종인 죠셉이라는 녀석과 얽히는 게 싫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죠셉이 막 내 공자를 따라서 이 마을을 떠난다는 소식에 라이와 그의 친구들은 환호했었다.

정말이지 밥맛 떨어지는 놈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놈과 한솥밥을 먹으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절대로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아버지는 몰랐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아들의 거부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싫다고?”

“예, 절대로 싫어요.”

“왜 싫다는 것이냐?”

“그게….”

죠셉 녀석이 꼴 보기도 싫다는 따위의 변명은 아버지에게 씨알도 안 먹힐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라이는 다른 이유를 꺼내들었다. 아버지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

는 것으로.

“제가 왜 다 망해가는 백작가의 시종이 되어야 합니까?”

라이의 예상대로 아버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라이는 아직 어려서 모르고 있었다. 백작을 모욕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 들게 하 는지를.

평소 같으면 성질을 버럭 내며 돌아섰을 텐데, 오늘의 아버지는 조금 달랐다. 대화를 계속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종 노릇을 평생 하라는 말이 아니지 않느냐.”

“거절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백작을 주군으로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까지 그 선택을 강요하실 생각은 마세요.”

삐딱한 아들의 응대에 아버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성을 터트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거라! 한때, 대제국의 핵심 영지를 맡으셨던 분이시다.”

“죄송해요, 아버지.”

“휴우,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느냐. 이것도 다 네 녀석을 잘못 키운 내 잘못이지.”

기분이 상한 아버지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뒤로 돌아섰다. 성(城; 현재 촌장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요새를 말함이다)에서 근무하다가 방금 전에 이 소식을 듣고 아들놈이 원한다면 시종으로 넣어줄 요량으로 급히 달려온 것이었는데…….

다시 성으로 돌아가려던 아버지는 차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아들놈이 얼마나 세상구경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아내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내라면 저 고집불통인 놈을 살살 달래가며 말을 듣게 만들었을 텐데. 하지만 아내는 이미 죽고 없었고, 이번 기회는 그가 생각했을 때 정말 놓치기 아까운 것이 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뒤돌아서서 다시 한 번 아들놈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기사는 주군에 매인 존재. 주군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건 내 경우를 봐도 잘 알 게다.”

“…..”

아버지가 평소와는 다르게 왜 갑자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던 라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표정을 힐끔 살핀 다음 말을 이었다.

“이 시골구석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어 봐야 훌륭한 주군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자고로 남자는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다. 넓은 세상에 나가야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

곧이어 라이의 불만 가득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게 이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상관이 있지.”

잠시 아들의 표정을 살피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시종으로 따라 나선다면, 최소한 다르칸까지는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지 않겠느냐.”

순간 불만 가득했던 라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지긋지긋한 야만의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아버 지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충분했다. 그 밥맛없는 죠셉 녀석과 함께 지내야 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4일 후에 친구들과 함께 가출하는 것도 괜찮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웃 마을로 도망친 이후는 아무런 대책도 없다는 것이다. 고작해야 생각해 둔 것이, 그 마을 에 있는 용병길드에 가입하여 괜찮은 용병대를 소개받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막내 공자 일행을 따라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도인 다르칸까지 가는 안전한 통행로가 확보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동안의 의식주는 물론이고, 얼마 되 지는 않겠지만 월급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머리를 굴려 고민하던 라이는 누가 혹시 엿듣지나 않는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 다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다르칸에 가자마자 제가 시종을 그만두면 아버지의 입장이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의외로 아버지의 표정은 평온했다.

“별 상관없다. 그건 네가 괜찮은 주군을 선택했다는 뜻일 테니, 오히려 애비로서는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 되겠지.”

“예? 선택…, 이라니요?”

순간 의심스런 눈빛으로 라이를 노려보며 아버지가 물었다.

“너, 설마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무턱대고 그냥 떠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겠지?”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라이를 한심하다는 듯이 잠시 쳐다본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들이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지 말이다.

“지금 막내 공자님이 가시는 곳이 다르칸 아카데미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다르칸 아카데미는 이 나라 최고의 명문가 자제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네가 주군을 택하고자 한다면, 밖에서 찾는 것보다 그곳에서 찾는 게 훨씬 빠르고 확실할 게다.”

“그, 그건 그렇겠네요.”

물론 말을 하는 도중 은근슬쩍 빼먹은 게 있다. 이 나라는 덩치는 클지 몰라도 인구는 아주 적은 약소국이라는 것을. 그런 만큼 아들이 원하는 훌륭한 주군을 얻고 싶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좀 더 크고, 풍족한 강대한 나라로 말이다.

하지만 이미 마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꽉 찬 라이의 머릿속에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버지는 착잡한 얼굴로 라이에게 다가가 그 어깨에 손을 올 려 토닥거리며 말했다.

“막내 공자께서 열흘 후에 출발하신다고 하니, 잘 생각해보고 내일 아침에는 대답을 해다오.”

“알겠어요. 생각해 볼게요. 그런데 제가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 주실 수는 있는 거예요?”

“염려 말거라. 집사 어른도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하실 게다.”

“알겠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성으로 돌아간 뒤, 시간이 한참 흘렀음에도 라이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의 머리는 빠개질 것만 같았다. 4일 후에 몇몇 친한 친구놈들과 가출을 하느냐, 아니면 10일 후에 공자와 함께 출발하느냐. 둘 다 일장일단이 있다 보니,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라이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에잇, 골치 아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이는 내심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모반죄를 뒤집어 쓰고 도망치던 와중에 아들을 얻은 아버지는 『희망』이라는 뜻을 지닌 북쪽지방의 토속어인 라이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지어줬다고 했다. 하지만 이름에 담긴 뜻과 달리 자신의 탄생은 아버지에게 있어 전혀 다른 아픔으로 다가왔다.

고된 도망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을 출산하는 통에 어머니의 몸은 급격히 약해졌고, 결국은 몇 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 후, 하나뿐인 아들이 아버지에게 희망을 줬느냐? 물론 처음에는 희망을 줬었다. 아주 영특한 데다가, 검술실력까지 뛰어나다 보니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검 술을 가르치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머리가 영특했던 만큼, 갑갑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깨닫는 것도 빨랐다. 이곳에서는 도저히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암울한 절망감. 라이 는 자신의 절망감을 반항이라는 형태로 표출했다.

안 그래도 삐딱한 아들놈 때문에 그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셨는데, 이번에 가출까지 하게 되면 아버지가 받을 충격은 보통이 아니리라. 라이는 이번만은 효도 하는 셈 치고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편이 다르칸까지 가기가 훨씬 더 편할 듯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 내가 가출까지 하면 뒤로 넘어가실 거야. 안 그래도 요즘 몸도 썩 좋지 않으신 것 같던데…….?

***

아침 일찍 일어난 라이는 평소와 달리 세수를 끝낸 다음, 곧바로 가죽갑옷부터 착용했다. 갑옷은 질긴 트롤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투박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아주 실용적이고 튼튼했다. 더군다나 몬스터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의 타격점을 생각해서, 폭이 좁은 철판을 갑옷 위에 이리저리 덧대어 충격이 분산되도록 만들어져 있 었다.

그렇기에 갑옷의 무게에 비했을 때, 둔기 공격에 대한 방어력은 꽤나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칼과 같이 날카로운 무기에는 의외로 쉽게 치명상 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방어까지 고려한다면 갑옷이 너무 무거워지므로, 그 부분은 아예 포기했던 것이다. 즉, 이 갑옷은 몬스터 전용의 갑옷이었지, 사람과의 전투는 아예 포기한 갑옷이라는 말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기에, 마을 소년들 대부분이 이런 갑옷을 입고 있었다.

라이는 습관적으로 허리에 장검을 찬 다음, 단검 1자루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이 정도 무장이면 충분했겠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단검 2자루를 더 꺼내 양쪽 장화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화살들을 몽땅 다 집어들어 예비 화살통 안에 꽉꽉 쑤셔넣었다.

이 정도 무장이면 평소 사냥을 갈 때 준비하는 것에 비해 거의 3배쯤 되는 양이다. 하지만 라이는 이 정도로도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마을을 벗 어나 먼 길을 떠나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오늘이 바로 막내 공자가 아카데미를 향해 출발하는 바로 그날이었다. 그리고 라이가 생애 처음으로 영지를 벗어나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고.

일주일쯤 전, 3명의 악동들이 가출해 버린 사건으로 인해 마을은 뒤숭숭한 상태였다. 물론 라이에게도 추궁이 들어왔었다. 그놈들이 너한테 뭐라고 한 거 없었느 냐면서. 하지만 라이는 딱 잡아뗐다. 함께 가출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고 말이다. 홀로 계신 아버지를 놔두고 몰래 도망칠 수는 없었다 고.

악동들의 아버지들은 즉시 백작에게 휴가를 받아 아들놈들을 잡아오겠다며 마을을 떠났다. 그런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녀석들은 탈출에 성공을 한 것인지도..

“아냐. 결국에는 잡혀 올 거야. 튀어봤자 벼룩이지. 거기에서 어디로 튀겠어? 내가 생각 잘 했지. 암.”

방을 나서기 전, 라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방을 감회 어린 시선으로 천천히 둘러봤다. 낡은 침상 하나에 손때 묻은 테이블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초라하 다고 할 만큼 단촐한 모습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이 15년을 살았던 정이 듬뿍 든 방이다. 객사(客死)를 당하든지, 아니면 훌륭한 새 주군을 찾아 그의 밑으로 들 어가든지.

자신의 미래가 어떤 형식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라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오랜 꿈이 오늘에야 이뤄지는 것이다.

“일어났느냐?”

“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버지.”

“앉거라. 먼 길을 떠나려면 속이 든든해야 하는 법이다.”

식탁 위에는 아침식사가 거나하게 차려져 있었다. 물론 호화로운 식사라는 말은 아니다. 아침에는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것들로 대충 떼우고 일터로 나가는 게 보 통이었지만, 오늘은 따끈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 아버지는 이걸 만들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었음에 틀림없었다.

그걸 느낀 라이는 눈물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탁자에 앉기는 했지만, 아버지에게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평소에도 그리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다. 더군다나 요즘 들어서는 더욱더 반항적으로 아버지를 대해왔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떠나는 마당이라고 갑작스럽게 아버지에 게 살가운 대화를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부자간의 식사는 말없이 진행되었다.

식사를 끝낸 라이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이는 문가에 걸려 있던 두터운 로브를 집어들었다. 아버지가 쓰던 걸 물려받은 거였기에 꽤나 낡은 물건이기는 했지만, 추위를 막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만…, 가볼게요, 아버지.”

아버지는 문밖으로 나가려는 라이의 어깨를 다급히 붙잡으며 말했다.

“이건 가져가야지.”

아버지가 건넨 것은 제법 묵직해 보이는 자루 한 개였다.

“이게…,

뭡니까?”

“가면서 먹을 음식들을 좀 챙겼다. 물론 식량이 배급되기는 하겠지만, 따로 가져가는 게 좋을 게다. 네 나이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픈 법이니까.”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래, 몸 건강하거라.”

라이는 활과 화살, 그리고 식량 자루를 등에 지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때 등 뒤로 아버지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이거다 싶을 때는 최선을 다하거라. 부디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빈다.”

아버지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건만, 야속한 아들놈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영악한 놈이니 잘 해내겠지.”

라이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아버지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명 사이로 인마(人馬)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머리를 맞대고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뭔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을 가지고 가지 않는 게 안전하다니까 그러네요.”

“자네, 이미 결정을 내린 걸 가지고 계속 그럴 건가? 공자님께서 가시는데 그 먼 거리를 도보로 걸어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이 생각해도 이 정도 이유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그는 곧이어 말을 이었다.

“여차하면 그때 말을 포기하면 되지 않겠나. 몬스터들이 말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그 순간을 활용해서 탈출할 수도 있고 말일세.”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잠깐!”

쑤군거리던 사내들 중 한 명이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손을 들어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시 후, 사내는 다가오는 사람이 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서 오너라, 라이.”

짙은 턱수염과 구레나룻 때문에 얼굴의 윤곽조차 알아보기 힘든 사내가 라이를 향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짙은 턱수염 탓에 입이 더욱 빨갛게 보인다.

“안녕하세요, 헤슬러 아저씨.”

마틴 헤슬러 남작은 백작이 총애하는 가신들 중 한 명이다. 그의 곁에 서 있는 3명의 기사들 역시 모두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헤슬러보

다는 무게감이 적었다. 그걸 보면 헤슬러가 호위대의 대장인 모양이다.

라이는 다른 기사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모두들 라이의 아버지 정도의 연배들이다. 백작은 제국을 탈출한 이래 제대로 된 기사들을 더 이상 영입하지 못했던 것이 다.

“너는 저기에 있는 밤색 암말을 타도록 해라. 순한 녀석이니 다루기 편할 게다.”

라이는 말을 타고 갈 거라는 말에 흥분했다. 그는 말을 거의 타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와, 말이다.”

라이는 순간의 선택을 정말 기가 막히게 했다고 생각했다.

‘역시 가출하지 않고 공자 일행에 묻어가기를 잘했어. 말까지 타게 될 줄이야.’

노회한 밤색 암말은 라이가 초짜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채고는 얕잡아보고 툴툴거렸지만, 녀석의 내심을 알 리 없는 라이는 말을 진정시키고자 목을 쓰다듬어 줬다. 녀석은 라이도 잘 알고 있는 말이었다. ‘팔로아’라고 불리는 나이가 제법 든 암말로서, 성질이 순해서 초보자도 다루기 쉬운 녀석이다.

사실, 아버지를 통해 백작 저택에 있는 말들을 몇 번 타보며 승마술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리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다. 하급 기사의 아들이 마구간의 말들을 대놓 고 이용하기에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라이의 온 정신이 암말에 집중되어 있을 때, 등 뒤에서 헤슬러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에 있는 짐이 네 거다. 말에 싣도록 해라.”

헤슬러가 가리킨 곳에 작은 보따리 2개가 끈으로 연결되어 말에 싣기 편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보따리의 무게는 꽤나 묵직했다. 보따리에서 식욕을 돋우는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는 것을 보면 식량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라이가 보따리를 말에 싣고 있을 때, 그의 나이 또래의 소년 하나가 저택에서 걸어나왔다. 녀석의 이름은 죠셉. 라이보다 더 근육질의 몸매를 지니고 있었고, 키도 좀 더 컸다. 녀석은 라이를 보더니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이거 라이 아냐, 너도 가냐?”

“응.”

“호오, 놀라운데? 말을 타고 간다고 들었기에, 네가 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거든. 너는 말을 탈 줄도 모르잖아.”

이죽거리는 죠셉의 말투에 라이의 기분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에게 뭐라고 쏘아주지는 못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면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결투도 아니고, 애들 싸움에 칼을 들고 설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체격적인 조건에서 놈이 압도 적인 데다가, 더더욱 안 좋은 것은 놈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보다 훨씬 직위가 높다는 데 있었다.

“조금은 탈 줄 알아.”

“조금? 흥! 그 정도 가지고 공자님을 따라갈 생각을 하다니. 너, 하루 종일 말 타본 적 있어? 아마 엉덩이가…….”

슬슬 시비를 걸고 있던 죠셉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왜 갑자기 녀석이 말문을 닫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라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더 이상 짜증나는 놈과 엮 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 싸워봤자 좋을 게 없지. 성격 좋은 내가 참아야지. 젠장.’

속으로 투덜거리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하지만 나빠진 기분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이때, 라이의 등 뒤에서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 오랜만이구나.”

‘이 목소리는?”

라이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등 뒤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아름답다고밖에는 표현하기 힘든 소년이 서 있었다. 길게 기른 금발머리. 백작가의 자식 이라는 훌륭한 혈통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닌 소년이었다. 이렇게 몰락하지만 않았다면, 라이는 서슴지 않고 그를 자신의 주군으로 선택했으리라.

‘젠장, 이래서 내가 만나기 싫었다고.’

초롱초롱한 아름다운 눈망울만 바라봐도 녀석과 같이 있고 싶다는 강한 유혹이 밀려온다. 죠셉은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지만, 라이는 유혹을 참아냈다. 그는 좀 더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가 강한 유혹을 느꼈을 만큼, 막내 공자는 괜찮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공자의 나이 많은 형들은 둘 다 아버지가 떵떵거릴 때 태어나서 부유한 어린 시 절을 보내서 그런지, 그야말로 인간이 덜 된 상태였다. 하지만 불우한 시절에 태어난 막내 공자는 달랐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기사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공자님.”

금발머리는 불만 어린 어조로 라이에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 갑자기 왜 그래? 예전처럼 그냥 짐이라고 불러.”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공자님. 엄연히 신분이라는 게 있는데 말입니다. 공자님께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또다시 혼구녕이 나는 건 저란 말입

니다.”

“위너스 경에게는 내가 잘 말해 둘게.”

“말로 해서 통할 상대였다면, 예전에 그렇게 하셨겠죠.”

그 말에 둘의 대화가 갑자기 끊겼다. 짐, 아니 제임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의 아버지가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지식하다는 것 을 말이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유연한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면, 백작의 총애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백작의 가신들 중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검술의 소유 자가 바로 그였으니까.

이때, 헤슬러 남작이 공자에게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갈 길이 멉니다, 공자님. 얘기는 가는 길에 하시지요.”

백작가의 막내아들이 먼 길을 떠나는데 호위하는 사람이 겨우 기사 4명에 시종 2명이라니……. 그 숫자만 봐도 백작가가 얼마나 몰락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 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했던가? 공자가 말에 오를 때 옆으로 살짝 벌어진 로브 자락 사이로 고풍스런 문양이 새겨진 갑옷이 얼핏 보였다. 과연 과거 대제국의 백작가 아들이 입고 있을 만한 고급스런 갑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