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62화
1197화
공포영화 배경으로 쓰면 백만 정도는 깔아 줄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의 고목. 거기에 바람 한 점 없는데 기분 나쁘게 흐느적거리는 빛바래고 해진 로브까지.
심지어 그 안에 든 건 더 형편없다.
로브에 가려지지 않은 하관은 미라처럼 쭈글쭈글하게 말라비틀어져 몇 가닥 수염만 달라붙어 있고, 힘없이 늘어진 손에는 더러워 보이는 검은
손톱이 길게 자라 있었기 때문이다.
“어우 씨, 놀라라. 귀신이야, 뭐야.”
그 모습에는 이드도 솔직히 놀라 버렸다.
무언가 나타난 줄은 알았지만, 저런 모습일 줄이야.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이드지만, 이건 죽고 죽이는 종류와는 그 결이 다른 문제였다.
결코 이드가 겁쟁이라서 놀란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귀신 따위 퇴마시켜 버리면 되는 것을, 무서워할 이유가 뭐 있다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이드는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
“행색을 봐선 귀신보다는 요괴 출신 같은데. 살아 있기는…………… 한 것 같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 부분. 하나 그와 별개로, 미라를 연상케 하는 모습은 ‘어떻게 살아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고루마공을 익혀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라 노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노인이 이곳 주인이오?”
귀가 나쁜 걸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듣지 못할 거리도 아닌데 미라 노인은 반응이 없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저 상태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거늘, 심지어 알 수 없는 능력으로 갑자기 나타나기까지 한 노인이다. 그런 노인이, 고작 청력이 떨어져서 듣지 못한다고?
물론 정말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과 신, 그리고 악마의 힘이 살아 있는 그레센이 아닌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면 떨어진 청력 정도는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보정이 가능하다.
잠시 주변을 요리조리 살피던 이드는 좌우로 움직여 보고, 뒤로 물러나 보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
그에 이드는 상대를 향해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번뜩.
파파파팍!
그리고 이드가 일정 거리 이상 거리를 좁힌 순간.
로브에 가려졌던 미라 노인의 눈구멍에서 노란빛이 번뜩이고, 뒤이어 검은 바닥이 악어의 이빨처럼 뾰족하게 솟아올라 이드의 전신을 관통했다.
“그흐…….”
그에 미라 노인의 입에서 웃음도, 신음도 아닌 괴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검은 이빨에 관통되어 있던 이드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결국에는 공기 중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고. 그나저나, 하고 있는 꼴 만큼이나 하는 짓도 고약한 노인일세. 앞서 여기 온 사람들도 당신이 죽였겠군?” 그리고 들려오는 이드의 목소리.
이드는 움직이기 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검을 길게 늘어트린 채
그런 이드에게선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의 공격에 빠르게 물러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기로 허상을 세우고, 부운귀령보로 모습을 감춰 적의 시선과 감각을 모조리 속여 버렸다.
조금 늦게 그 사실을 자각한 노란 안광이 이드를 향했다.
“그하…….”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터였다.
그 증거로, 미라 노인이 녹슨 양 삐걱거리는 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두 팔에는 심상치 않은 검은 기류가 모여들고 있었다.
딱 봐도 공격을 위한 준비다.
“흐음. 너무 느린데.”
팔 하나 움직이는 것도 편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그대로, 병들고 쇠약해진 노인이 겨우 팔을 드는 듯한 모양새였다.
저래서야 저 공격을 맞아 줄 사람이 있을까?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설픈 애송이도 당하지 않을 터. 더욱이 이곳에 발을 들인 자들은 하나같이 쟁쟁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미라 노인의 방식은 마법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적의 위치에 상관없이 공격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공격이란 게 위치 지정보다 타이밍, 그리고 적이 대비하지 못하도록 호흡을 훔치는 게 더 중요하다.
한데 저래서야 언제 들어올지 뻔히 보이지 않은가.
게다가 저렇게 준비가 느린데, 그걸 보고만 있을 사람이 있을까? 능력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짜자작!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이드의 손가락 끝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오더니, 미라 노인의 이마를 두드렸다.
이드의 지공 중 강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혈뇌천강지.
퍽.
붉은 번개는 빛과 같은 속도로 미라 노인의 미간을 꿰뚫었다. 그 충격에 미라 노인의 목이 부러질 듯 뒤로 꺾이며 넘어갔다.
“엥?”
이드는 그 모습에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대로라면 미라 노인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중간에 걸리거나, 막아서는 것 하나 없이 깨끗하게 공격이 들어갔다. 고목신공을 완성해서 강철같이 강해진 피골의 방어력으로 공격을 견딘 것도 아니다.
혈뇌천강지는 분명히 미라 노인의 머리를 관통했다.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던 두부 같은 뇌는 콩물처럼 묽게 변해 버렸거나, 단단하게 익어 버렸을 것이다.
머리를 관통당했으니, 분명 그래야 하는데………….
“진짜 요괴야? 왜 살아 있는 건데?”
덜덜거리면서 움직이던 팔이 온전히 자신을 향하고,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쏟아져 나온다.
시전자가 죽었다면 당연히 흩어져야 할 기운이 제어되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그 주인이 살아 있다는 말이었다.
콰르르르-
머리가 관통당하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불합리함에 분노를 느낀 이드는 일단 적의 공격을 회피했다.
회오리치는 바람의 형태. 빠르고 강맹하지만, 범위는 좁았다. 그렇다고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이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고위 마법사라 인정받을 만한 마법사들 기준으로 말이다.
근데 왜 당한 걸까?
설마 지금 이드처럼 죽었다고 생각한 상대가 멀쩡히 살아난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을 향해 공격하는 데 놀라서?
‘그럴 리가 없지.’
뭔가 다른 게 더 있을 터였다.
이드는 회오리를 가볍게 손대지 않았다. 죽어야 할 미라 노인이 죽지 않은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을 굳이 받아치는 쪽보다는 안전하게 회피를 선택한 것이다.
어차피 회오리의 공격 반경은 그리 넓지도 빠르지도 않다.
다음 공격이 들어오기 전, 이번에는 적의 목을 잘라 볼까.
설마 목이 잘리고도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이드가 그리 생각하며 미라 노인을 살필 때다.
퍼러러러럭!
갑자기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바람이 몰아쳐 왔다. 강력한 바람에 옷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이드는 미친 듯이 헝클어지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바람은 강력하지만, 그를 흔들 정도는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깊이 뿌리내린 거목도 뽑아 던져 버릴 태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이드였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통째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발을 디딘 아래쪽에 저 멀리 보이는 별과, 머리 위에 있는 구멍을 제외하면 위아래를 분간하기도 힘든 공간이다. 그런 공간이 통째로 회전하고 있었다.
별과 구멍은 그 자리에 멈춰 있지만, 공간 자체가 회전하고 있다. 이드에게 불어오는 바람은 공간의 회전으로 일어나는 그저 부차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이드를 향한 공격 따위가 아니었다.
“이거 꼭 세탁이 안에 들어온 기분인데.”
세상이 통째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안에 선 이드에게선 한 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라 노인을 보았을 때보다 더 안정적이다.
이드는 미라 노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뒤로 넘어갔던 미라 노인의 머리는 다시 올라와 있다. 뒤집어쓴 로브와 그 안에서 노랗게 번뜩이는 안광도 그대로다.
검은 그림자도 그대로여서, 혈뇌천강지가 뚫고 지나간 흔적은 어떤지도 볼 수 없다. 단순한 그림자가 아닌지, 이드의 안광에도 그 속을 보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된다. 미간에 생겼던 구멍은 아마 깨끗하게 메워졌을 것이다.
머리를 관통하며 틈이 생겼던 기의 흐름이 완전히 회복된 걸 느꼈기 때문이다.
강력한 회복력을 가져 불사신에 가까운 괴물에 대해서라면 이드도 여럿 알고 있지만, 설마 파괴된 뇌까지 순식간에 회복되는 상대라니.
“이런 건 또 처음인데, 썩 즐거운 기분은 아니야.”
천생 무인인 이드는 새로운 상대와의 싸움을 즐기는 편이다. 이건 그 성향이 평화적인가 호전적인가 하는 문제와는 달랐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만난 적 없는 강자와의 싸움에 대해서는 이드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죽여도 죽지 않는 상대라면?
그런 상대와 싸우는 데 의미가 있을까? 상대의 호흡을 빼앗고, 빈틈을 노리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데.
그저 서로 일방적으로 공격을 주고받을 뿐인 적을 상대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마네킹을 상대하는 바와 같지 않을까.
‘그러니 일단 죽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영감!’
바람이 더 강해졌다.
강해진 바람 속에서 검은 칼날이 숨어 날아온다. 조금 전까진 이곳이 세탁기 같았다면, 지금은 분쇄기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 같다. 이드는 더 이상 살필 것도 없이, 미라 노인을 보며 검을 휘둘렀다.
찌이이이잉!
검결을 따라 생겨난 은색 검강의 링이 사방에서 불어오는 검은 바람을 밀어냈다. 그러자 검은 ᄇᄆ은 물이 든 풍선처럼, 비어 있는 다른 공간을 채우며 계속해서 덮쳐들었다. 하지만 이드는 무시했다.
무형대천강
대신 검은 공간에 커다란 빛의 검을 세웠다.
곧게 선 무형대천강에 걸린 검은 바람이 빨갛게 불타며 흩어진다. 그 모습이 음산해 보이는 고목과는 정반대로 성스러운 나무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형대천강은 절대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가 아니다.
오히려 나무를 베어내는 검이다.
콰드득.
이드는 높이 뻗어 올라간 검을 내리쳤다. 움직이지 않는 상대다. 현란한 변화도, 도망치는 적을 쫓는 속도도 필요 없다. 그저 하늘 아래 그 무엇도 남기지 않을 압도적인 파괴력.
“느어는…… 무엇…… 이냐!”
무엇・・
“뭐야, 영감, 말 할 줄 알잖아.”
이번에도 공격을 그냥 몸으로 받아 낼 것인가.
그것에 대한 답은, 미라 노인이 걸려 있던 고목이 무형대천강을 막아 내는 것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