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63화
1198화
그저 비쩍 마른 고목인 줄로만 알았던 나무였다.
분명 몬스터는 아니었다.
한데 눈도 입도 없는, 음산하게 생겼을 뿐인 나무의 가지가 움직였다. 그것도 기사가 휘두르는 검이 연상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촤르르르-
고목과 미라 노인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가 겹쳐지고, 또 그걸 중심으로 가시덤불이 빼곡히 자라나며 두꺼운 방패의 형태를 갖췄다. 그 위로 무형대천강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철판조차 찢어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무형대천강을, 고작 나무 방패 따위로 막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콰지지직!!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튀며 부서졌다.
하지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정말 평범한 나뭇가지였다면 강기에 닿기도 전, 그 여파만으로 가루가 되었을 테니까. 아니, 진짜 평범했다면 애초에 움직이는 일도 없었겠지. 좌우간 가시덤불 방패는 강철보다 단단하진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끈끈하며 탄성이 강했다.
콰드득.
빠드드득.
무형대천강에 가시덤불 방패가 부서져 나갈 때마다 검에 담긴 기운이 약해졌다. 부서진 가지에 아교라도 발린 양 무형대천강을 붙잡아 당기듯 검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방패가 모두 부서진 순간.
콰콱!
미라 노인과 고목은 물론, 그들이 디디고 선 땅까지 갈라 버릴 것 같았던 무형대천강은 고목의 가지를 고작 절반 정도 잘라 내고서는 멈추고 말았다.
“느어는 무엇… 이냐!!”
직후 미라 노인이 좀 더 분명해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무형대천강이 박힌 나뭇가지에서 또다시 가시덤불이 자라났다. 촤르르르르-
가시덤불은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무형대천강을 휘감으며 기어올랐다. 심지어 단순히 타고 오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타타타탁!
가시덤불은 제 몸의 가시를 길게 뽑아 무형대천강을 파괴하려 했다. 파괴는커녕, 닿기만 해도 오히려 닿은 자가 파괴되는 강기를 말이다. 드드득!
끼기기긱!
하지만 이런 기본 상식은 잠시 집에 두고 온 것일까. 뾰족한 가시는 부러지긴커녕 무형대천강을 긁어 대며 시퍼런 불꽃을 만들어 냈다. 좀 전 무형대천강을 막는 족족 산산이 부서지던 때와는 또 다른 모습.
확실한 건 하나였다.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시의 강도가 강기에 버금간다는 것.
강기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강기뿐이니까!
쯔즈즈즉!
그렇게 뻗어 낸 가시를 조이며 가시덤불이 거슬러 오르는 모습은 마치 징그러운 지네와 같았다. 그 속도 또한 매우 빨랐다.
순식간에 일라이져의 검극 앞에 도착한 가시덤불은 사나운 독사처럼 대가리를 바짝 들고서 이드의 얼굴을 노렸다.
그러나 정작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강기에 부서지지 않는 나무와 가시는 분명 신기하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즈으응.
가시덤불에 휘감긴 무형대천강을 든 이드의 손이 희미하게 흔들린 다음 순간.
찌잉!
시퍼런 불꽃 몇 조각을 몸에 단 일라이져의 검신이 허공을 수평으로 가로지른 채 멈춰 섰다.
텅.
직후 이드와 한 뼘의 거리를 남기고 멈춰 선 가시가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그뿐 아니다.
콰르르르르-
무형대천강을 타고 오르던, 지네의 몸뚱이 같던 가시덤불 역시 폭삭 무너져 내렸다. 타고 오르던 무형대천강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무려 강기를 뚫으려던 가시덤불이다. 고작 버팀목 하나 빠졌다고 무너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이드가 무형대천강을 거두기 전, 초고속으로 끊어 친 검에 모든 가시덤불이 조각조각 잘려 나간 영향이었다. 가시가 강기를 상대할 만큼 단단한 것은 대단하지만, 그뿐이다.
그저 존재하는 수준에 불과한 강기와 시전자의 손에서 그 뜻에 따라 움직이는 강기는 쓰임에 있어 하늘과 땅 차이. 가시는 가시일 뿐,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진짜’ 강기는 될 수 없었다.
프스스트
그렇게 산산조각 난 나뭇조각은 앞서와 같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덕분에 이드와 미라 영감 사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이 비워졌다.
“느어는 무엇・・・・・・ 이냐!”
미라 영감의 입이 다시 열렸다.
미세하지만 조금 더 분명해진 발음. 그래 봤자 말하는 내용은 하나지만.
곧장 뛰어들려던 이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발을 멈췄다.
“이봐, 영감. 내 정체를 알고 싶으면 우선 당신 소개부터 해야지. 그 나이 먹고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나?”
“느어는 무엇…… 이냐!”
“・・・・・・ 예의보단 말부터 다시 배워야겠네.”
이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미라 영감에 조금 질려 버렸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지루할 틈은 없었다.
아까도 똑같은 질문을 해 놓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공격하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빠지지직!
여전히 이드를 가리키고 있는 미라 영감의 두 팔을 중심으로, 검은 뇌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뜨드득.
곧이어 미라 영감의 뒤에서 고목의 가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지에서 솟아오른 가시가 뇌전을 휘감고 날았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가시를 휘감는 뇌전이 미라 영감에게서 떨어진 후에도 이 검은 세상의 사방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끝없이 에너지를 전달받는 전차의 레일처럼.
쯔즉, 쯔즉, 쯔즉.
첫 한 발을 시작으로, 뇌전을 감은 가시가 비처럼 쏘아졌다.
이드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날아오는 가시 벽을 향해 철황포를 쏘아 냈다.
콰아앙!
귀를 울리는 폭음이 공간을 떨어 울렸다. 어지간한 성벽에도 구멍을 낼 정도의 일격.
쯔즈즈즈즉!
하지만 가시 벽은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가시 수십 개가 가루로 변했지만, 그 빈자리를 검은 뇌전이 채웠다. 더욱이 철황포의 충격을 출렁이는 뇌전의 그물이 해소하기까지 했다.
검은 가시 뇌전은 마치 물고기를 모는 것처럼 이드를 몰아 갔다.
“흥.”
마치 중세 시대 고문 도구 안에 들어온 것 같은 상황. 그에 이드는 콧방귀를 날리며 진각을 밟았다.
쿠웅!
마각철황격의 진각에 바닥이 출렁거렸다. 그에 따라 사방으로 이어진 검은 뇌전이 일렁이고, 그 흐름을 타고 흐르는 뇌력의 길목을 쫓아 일라이져가 움직였다.
난화십이식 뇌정분영화.
붉게 물든 일라이져가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로 순식간에 늘어났다. 이드를 감싸 오는 검은 가시 뇌전에 대항하듯. 이드의 전신을 두른 검의 숫자는 정확히 가시의 두 배.
번쩍.
그렇게 검이 정렬한 다음 순간.
이드를 둘러싼 검이 붉은 뇌전을 토하기 시작했다. 일견 검은 뇌전과 같아 보이나, 그 성질이 달라 결코 섞일 수 없는 힘이 검은 뇌전의 맥을 가닥가닥 끊어 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뇌전의 검강은 가시를 두 조각내며 그 뒤에 버티고 선 미라 노인과 고목을 단숨에 꼬치 꿰듯 꿰뚫었다.
물론 머리에 구멍이 나고도 멀쩡히 잘만 움직이던 미라 영감이 몸에 구멍 좀 생겼다고 죽을 리는 없다.
“느어는 무엇…… 이거거거거.”
그러나 이드 역시 생각 없이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나 최악의 주사 중 하나라는 ‘했던 말 또 하기’를 시전하려던 미라 영감이지만,
그 몸에 박힌 뇌전에서 뿜어진 열기에 온몸을 떨며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뿐인가. 열었던 입을 닫지도 못했다. 종내에는 벌어진 아래쪽 턱이 뇌전에 타 버리며 떨어지기까지 했다.
“느어어어…… 느어…… 느어!”
그렇다고 미라 영감이 죽은 것은 아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신음을 쏟아 냈다.
대신 그런 미라 영감을 대신해 고목이 비명을 질렀다.
끼이이이이이
그 소리가 마치 원한에 찬 귀곡성 같았다.
혹은 환상의 동물이라는 기린이 운다면 저것과 비슷할런지도 몰랐다.
미라 영감과 함께 뇌령화의 검강에 꿰인 고목이 태풍에 휩쓸린 나무처럼 온몸을 떨어 댔다.
쯔컹!
그에 그 몸을 꿰뚫고 있던 붉은 검강이 부서져 내렸다.
끼이이이이-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한 번의 귀곡성. 그와 함께 고목의 나뭇가지들이 처녀 귀신의 머리카락처럼 힘없이 너울거리더니, 사방으로 뻗어 났다. 마치 뱀처럼, 혹은 사방으로 번지는 번개의 그물처럼. 검은 공간의 천장과 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공간을 가득 채울 듯한 그 기세는 공간을 절반 정도 지배하고 나서야 멈췄다.
그리고, 그렇게 사방으로 뻗어 나간 수백, 수천의 나뭇가지는 모두 채찍과 창으로 변해 이드를 공격했다.
거기에 사이사이 이어지는 미라 영감의 마법까지.
이드는 만류일품과 뇌령전궁보를 동시에 밟았다.
일만의 흐름을 품고서 번개처럼 움직이는 그는 폭우가 쏟아지는 중에도 비에 맞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적의 공격은 비처럼 간단하지 않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드도 피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짧지만 간단치 않은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 속에서 상대의 패턴과 성향에 대한 파악은 끝났다.
미라 노인의 공격은 느리나 강력하다. 고목은 빠르지만 직선적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고 불사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강력한 회복력을 가졌다. 사실 회복이라기보다는 재생이라고 해야 옳아 보인다.
갑자기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던져진다면, 무슨 수로 이런 자들을 상대해서 살아 돌아갈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은 거짓이 없는 참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마법사들 이야기고, 나는 애초에 마법사가 아닌걸.’
물론 마법사인지, 검사인지는 그리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이드 자신이 지금까지 이곳에 온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
“보이지 않는 흐름이 만상을 제압하는 법. 아무리 많은 손발이라도 보이지 않는 벽을 뚫는 방법은 없지. 무형기류.’
파앗.
은빛 검강이 환하게 일어났다가 투명하게 변한다. 원형으로 일어난 무형기류가 길게 늘어지며 통로를 만들었다.
기이이이익!
쉼 없이 허공을 날며 이드를 노렸지만 닿지 못하던 고목의 나무줄기가, 이번엔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모두 미끄러지고 만다.
이드는 그렇게 난 길을 향해 쏘아 갔다. 그를 중심으로 한 무형기류가 함께 공간을 가른다.
그에 고목의 나뭇가지가 무형기류와 함께 이드를 통째로 휘감으려 하자, 무형의 벽이 붉게 타오르며 변했다.
수라삼검 수라참마인.
검은 공간에 붉은 태양이 뜨면 이러할까. 환하지는 않지만 붉게 빛나는 태양에서, 붉은 검강이 공간을 가득 채울 기세를 한 채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수천, 수만 가닥의 검강은 단 하나의 빈틈도 없이 공간을 꿰뚫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봉인이 되어 수천의 나뭇가지와 미라 영감, 그리고 고목을 그 자리에 못 박았다.
파악.
직후,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듯 이드가 태양의 중심에서 미라 영감 앞으로 내려서고.
“느……”
“닥쳐.”
그새 재생된 입으로 또 똑같은 말을 반복하려는 미라 영감의 목을 베어 버렸다. 머리에 구멍이 나도 재생하는 불사신일지언정 목이 잘리는 것은 이야기가 다른 걸까.
아니면 소리를 만들어 낼 공기가 없기 때문일까.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미라 영감의 머리가 바닥을 굴러가는 순간.
퓨퓻!
미라 영감의 머리와 함께 수라참마인의 검강이 사라진 덕분일까. 상처 없이 온전히 드러난 고목이 불쑥 솟아오르며 이드의 미간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인내하고 인내하여 기회를 기다리는 암살자와도 같은 일격은.
턱.
이드의 손에 잡히고,
퍽.
그에 대해 고목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 나무줄기 한중간에 일라이져가 박혔다. 한데 검강에 꿰뚫리고도 멀쩡했던 고목의 반응이 이번엔 달랐다. 끼아아아아
귀곡성이 아닌, 고통에 찬 비명. 그와 함께 사방으로 뻗어 있던 가지들이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뿐만 아니다.
바닥을 구르면서도 입을 벙긋거리던 미라 노인이 돌연 입을 닫고 눈알만 굴렸고,
일라이져가 박힌 고목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다른 것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저 무형의 기운으로 변한 검은 연기와 달리, 거기에서는 메케한 탄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일라이져의 검신이 오리하르콘이지 않았던가?
“……지가 뱀파이어야 뭐야? 일라이져가 박혔다고 타는 건 뭔데?”
이드가 정체가 드러난 스파이를 바라보듯 고목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