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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70화


1205화

하늘에 떠 있는 구멍.

그 너머에는 혼돈의 파편이 아직 둘이나 남아 있다.

지금이야 드래곤들이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얌전히 있지만, 언제 어느 때 남은 둘이 구멍을 넘어올지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이드가 유리한 순간일 때 그들이 돌아와 재를 뿌릴 거라는 거다.

그렇다면 당연히 보이는 족족 부숴 주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런데 혹시, 저거 부수면 그 너머에 있을 드래곤들도 피해를 보는 건가?”

바로 그레센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 중일 드래곤들이었다.

혼돈의 파편 둘이 드나들 구멍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드래곤들의 복귀가 늦어지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이런 과정에서 구멍이 파괴되지 않을 경우에 대한 대비가 없다는 건데.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혼돈의 파편도 소멸되는 마당에 그들의 손에 만들어진 구멍이 무어 대수일까.

“흐음. 아마도 없지 않을까요? 있어도 미미할 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요리조리 가능성을 따져 보던 라미아가 바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더 볼 것 없네.”

“뭐야…… 정말 파괴하려는 거요? 저 구멍을?”

이런 두 사람의 대화를 멍하니 듣고만 있던 게르만이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사뭇 경직되어 있었다.

그래봤자 소가죽처럼 말라비틀어져 크게 티는 나지 않지만.

“그럼 다른 구멍이겠소?”

“그만두시오. 저것에 손을 대는 순간 모두 끝장이오!”

꿈틀꿈틀.

어느새 아기의 팔다리처럼 조그맣게 재생된 사지를 꾸물대는 게르만이 온몸을 다해 막으려 나섰다.

“갑자기 혼돈의 파편에 대해 없던 충성심이 솟아난 것은 아닐 테고. 저걸 부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소?”

과거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은 듯 행동하던 인간이, 갑자기 저러는 걸 보면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이드의 재촉에 게르만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 구멍에 손을 대는 순간・・・・・・ 놈이 튀어나올 거요. 공허의 드래곤!”

“……꽤 거창한 이름인데, 그게 뭐요?”

“거창하고 자시고, 그딴 건 없거든요!”

라미아가 얼치기 사기꾼을 발견한 것처럼 게르만을 노려봤다.

그녀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레이드론은 드래곤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찌 보면 드래곤의 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만큼 라미아 역시 드래곤 일족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고.

그런 라미아 앞에서 듣도 보도 못한 종류의 드래곤을 들먹였으니, 이런 날 선 반응은 당연했다. 아니, 꼭 그녀가 아니라도 세상 좀 떠돌았다 하는 사람이나 마법사라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다.

공허의 드래곤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다고!

당장이라도 역시 죽일 놈이 맞다며, 당장 필요한 정보만 추출해서 처리해 버리자고 말할 것 같은 라미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르만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놈은 저 구멍과 이 공간, 그림자 관을 지키는 감시자요. 이 꼴이 된 나를 살게 하는 것도 바로 놈이오. 내 몸이 달라붙어 있는 고목은 놈의 단말일 뿐이지.”

다시금 자신의 신세를 깨달은 것인지 또 한 번의 한숨을 더한 게르만이 라미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일컬은 호칭이 귀하를 혼동케 했다면 미안하게 되었소. 그대 말이 옳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드래곤 중에 그런 속성은 있을 수 없지.” 

흔히 용사가 쓰러트리는 마룡조차 사실 중간계의 드래곤이 타락한 존재일 뿐, ‘마룡’이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

“이 그림자 관을 감시하는 놈에게 내가 임의로 붙인 이름이오. 생김새도 드래곤과 다르오. 하지만 드래곤보다 크고, 강하며, 마룡보다 사악하지. 그러니 ・・・・・・・”

“구멍을 파괴할 생각은 말라?”

이드가 뒤에 이어질 말을 뺏어 가자 게르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목을 돌아보았다.

마치 앞서 그와 고목을 분리하지 말라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어쩌구 했던 게 바로 그 존재를 두고 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불쾌하네요. 덩치만 큰 괴물에 드래곤이라는 호칭을 붙이다니. 드래곤의 이름은 그렇게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게 아닌데.”

게르만의 설명에도 라미아는 좀처럼 불쾌감을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그럼, 그 공허라는 놈도 혼돈의 파편이 만들어 낸 거요?”

이드가 그런 라미아를 대신해 물었다. 중간에 저도 모르게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붙일 뻔했지만, 잘 끊어 낼 수 있었다. 라미아에게 그레이드론이 부모인 것처럼, 이드에게도 그는 은인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렇다고 여기고 있소. 그렇지 않고서야 이유 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그런데, 공허는 어떻게 본 거요? 또 놈이 강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제정신도 아닌데 놈과 싸웠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아무렴 직접 보지도 않고, 단순히 크기만으로 강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오래전이오. 그간 이곳에 꽤 다양한 인간이 들어왔고, 내 손에…………. 죽어 나갔소. 하지만 그중 그렇지 않은 자가 하나 있었소.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제국 황궁 마법사를 의미하는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매우 강했소. 마치 오늘 이곳을 찾은 당신들처럼.”

“황궁 마법사씩이나 되어서 뭐가 아쉽다고…… 쯧.”

지식에 대한 탐욕인지, 보물에 대한 호기심인지.

그만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굳이 위험에 뛰어들었다는 황궁 마법사에 이드는 혀를 차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뒤이어진 황궁 마법사에 대한 묘사는 확실히 오늘의 이드와 비슷했다.

힘없이 죽어 나간 자들과 달리, 그림자 관으로 끌려 들어온 그는 고목과 게르만에 대항해 싸워 이겼다.

차이점이라면 이드는 검을 사용했고, 그 마법사는 마법을 썼다는 정도다.

좌우간 싸움에서 승리한 마법사는 게르만과 고목의 불사성이 둘의 연결에 있다고 판단, 두 존재의 분리를 시도했고.

그 행동은 공허의 드래곤을 깨우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강력한 마법으로 게르만과 고목을 쓰러트린 것과 달리,

심해에서 기어 나온 신화 속 괴수 같은 공허의 드래곤에 맞선 마법사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한 끼 식사로서 놈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그대로 게르만의 기억에 남았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던 일.

죽어 버린 후배에 대해 애도조차 할 수 없었지만, 자아가 돌아온 지금은 달랐다.

돌아온 자아를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이드를 제지하는 동시에 그의 뇌는 과거의 일을 분석했다.

위험한 것에 신경을 쓰는 건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게르만의 뇌는 자신을 기준으로 후배의 전력을 판단하고, 그런 후배를 손쉽게 해치운 공허의 드래곤이 가진 힘의 크기를 짐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공허의 드래곤’이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이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게르만은 과거 우연하게도 드래곤의 힘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는데, 공허의 드래곤이 보여 준 힘이 그때의 그 드래곤보다 강력했기 때문이다.

“잠깐! 그래서 그 멍청이가 누구죠?”

“누구 말이오?”

대충 중요한 이야기는 다 들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부족한 점이 있었다. 한데 듣다 말고 갑자기 불쑥 끼어든 라미아의 추궁에 게르만은 영문을 몰랐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 멍청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누구긴 누구예요? 진짜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인간에게 약골 드래곤의 이미지를 심어 준 그 멍청이 말이에요! 이유, 속상해.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어요! 얼마나 비실비실했으면 허수 공간에 처박힌 몬스터 따위보다 약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냐고! 이건 일족의 수치라고요! 수치!”

말을 하다 보니 더 화가 나는지, 라미아가 쿵쿵 발을 굴렀다.

그에 맞춰 게르만의 눈도 두 배씩 커졌다. 누가 일족의 수치라는 말인가.

“호・・・・・・ 혹시 위대한 일족에 속하신 분이십니까?”

게르만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미 죽어 버린 심장이 다시금 멈추는 것 같다. 그의 눈이 라미아를 지나 이드를 향했다.

“그리고 귀하께서도…….”

“그렇게 오해하는 건 충분히 이해하는데, 아니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라고 했던가.

평소 그 말을 믿는 쪽이었는지, 이드의 부정에도 게르만은 쉽게 믿는 눈치가 아니다.

아무렴 그러기엔 라미아의 반응이 너무 생생했지. 드래곤을 두고 ‘일족의 수치’라고 방방 뛸 존재가 같은 드래곤 말고 누가 있겠는가.

사실 그 비슷한 관계인 것도 맞고 말이다.

이드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게르만을 보며 말했다.

“거, 아니라니깐.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지. 그리고, 설령 우리가 진짜 드래곤이라고 해도. 뭐 달라질 거 있소?”

“그렇군요. 달라질 건・・ 없군요.”

게르만이 맥이 풀린 듯 말했다.

자신의 꼴이 더 참혹해질 순 있지만, 이드와 라미아가 진짜 드래곤이라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드래곤의 위대함은 뇌 깊숙이 박혀 있지만, 그런 드래곤을 저 구멍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 혼돈의 파편 아니던가.

그 모습을 직접 본 게르만에게 이전과 같은 드래곤에 대한 경외심은 없었다.

“쳇, 정말 마음에 안 드네요.”

그 모습에 또 눈에 거슬린 라미아의 입술이 샐쭉해졌다. 하지만 게르만을 추궁하던 모습은 이제 없다.

라미아가 물었다.

“공허의 괴수라는데.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런 것이 있다고 달라질 것 있어?”

“없죠?”

“그러니까.”

이드는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는 라미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렇다. 공허의 드래곤인지 괴수인지. 그런 놈이 여기 어디 숨어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오늘 저 구멍은 무조건 파괴된다. 공허의 괴수가 기어 나오면 같이 썰어 버리면 끝날 문제다. 게르만은 두려워 떨고 있지만, 그래 봤자 혼돈의 파편이 부리는 몬스터일 뿐이다.

“그럼 분리하던 것부터 마무리할게요.”

“게르만의 확보만 신경 써. 어차피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필요하면 고목은 날려 버려도 돼. 어렵게 갈 것 없지.”

박력 가득한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놨던 게르만과 고목의 분리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게르만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자신의 경고에도 두 사람이 두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작지만 기대가 피어올랐다.

“정말 공허의 드래곤·

“어머나, 실수.”

“……으어어어…….”

“・・・・・・공허의 괴수를 감당할 수 있겠소?”

“걱정 마시오. 당신에게 싸우라고 말하진 않을 테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드의 말에 게르만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급히 말을 이었다.

“좋소. 어쩌면 내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해 둘 것이 있소.”

“뭘 말이오.”

“내가 알고 있는 혼돈의 파편에 대한 모든 것, 세상의 죄인으로서 나도 어떻게든 사죄를 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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