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12화 – 최강의 드래곤 제스미네어
최강의 드래곤 제스미네어
팔시온은 아르티어스에게 지시받은 대로 아이들을 끌어 모으고, 또 그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교육시킬 방안을 강구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일을 시킨 아르티어스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함에 온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아이들에게 검술 교육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써글. 그러고 보니 뭔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여기에 있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여기서 이렇게 빈둥거리느니, 차라리 둥지로 돌아가서 부족한 잠이나 보충을…….”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지. 그보다 먼저 브로마네스 녀석이나 꼬시는 게 좋겠어. 그놈을 끌어들이는 게 여러모로 편리한 게 사실이니까. 또 심심하지도 않고.”
마음을 정한 아르티어스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브로마네스의 레어가 있는 위치로 공간이동을 했다.
“이보게, 친구. 얘기나 좀 나누세.”
부드러운 어조로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 온 것은 퉁명스런 대꾸였다. 심사가 단단히 꼬였는지 브로마네스는 레어 밖으로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너하고 할 얘기 없어, 이 오크 새꺄!”
“친구, 자네 정말 이럴 건가?”
“치인~구? 난 싸가지 없는 골드 드래곤 친구는 있지만, 너 같은 오크 새끼를 친구로 둔 적은 없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오크 타령에, 짜증이 난 아르티어스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 새끼가! 누가 오크라는 거야?”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레어 밖으로 걸어 나오며 이죽거렸다.
“누군 누구야, 바로 너지. 얼마 전에 네 녀석 입으로 분명히 말했잖아. 두 번 다시 여기를 찾아오면 네가 오크라며?”
아르티어스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얼른 얼버무렸다.
“에이, 그런 사소한 거는 잊어버리지. 우리 둘이서 그동안 함께 지내온 세월이 대체 얼만가? 우린 돈독한 친구 사이가 아닌가 말이야.”
“드레곤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잊는 거 봤냐? 지도 드래곤인 주제에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리고 돈독하기는 개뿔이. 네놈과 내가 뭐가 친하다는 건데?”
이렇게 둘이 투닥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브로마네스의 레어 앞쪽으로 엄청난 존재감이 이동해 오는 게 느껴졌다.
“호오, 너 꽤 바쁘게 사는 모양이다? 친구도 다 찾아오고.”
“누구지? 너 말고 찾아올 놈이 없는데? 더군다나 이런 존재감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드래곤 2마리가 공간이동해 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곧이어 자신의 감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낸 건 4마리였기 때문이다. 둘의 존재감이 워낙에 엄청나서 나머지 둘의 존재감을 삼켜버렸기에 그런 착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래곤 4마리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넷씩이나 함께 몰려온 것을 보면 자신과 달리 브로마네스는 꽤나 동료 드래곤들 사이에 인망이 있는 모양 이라고 아르티어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브로마네스 녀석이 갑자기 허겁지겁 레어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공간 이동해 온 넷의 생김새는 모두 달랐다. 엘프 둘에 처음 보는 모습을 한 수인종(獸人種) 둘. 수인종들의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달린 것을 보면, 아 마 물속에 서식하는 종류인 모양이다.
이때, 아르티어스는 엘프들 중 한 놈의 얼굴이 낮이 꽤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두어 달 전에 묵사발을 내놨던 바로 그 애송이 실버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그 애송이도 아르티어스를 금방 알아봤다. 놈은 아르티어스를 손가락질하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바, 바로 저놈입니다!”
그 말에 놈의 옆에 서 있던 엘프가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너, 이 악독한 놈! 잘 만났다.”
왠지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엘프가 앞으로 튀어나오려는 순간, 수인족 중 하나가 손을 쓱 들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질책했다.
“어르신께서 계시는데 이 무슨 경거망동인가?”
그 말에 엘프는 흠칫하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이때 뒤쪽에 조용히 서있던 괴이한 모양의 수인종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아르티어스냐?”
수인종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묻고 있었지만, 아르티어스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토록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게 한 드래곤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법에는 능했지만, 육체적인 능력은 그리 대단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가 내뿜는 존재감 또한 그저 그런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르 티어스의 앞에 서있는 이 드래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가 지닌 무지막지한 육체적 능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뿜어내는 기세가 워낙에 엄청났기 때문에 천하의 브로마네스가 찍소리도 못하고 재빨리 레어 안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서며 대답했다.
“예. 그, 그렇습니다만.
“허허, 네 모습을 보니 예전의 아르티엔을 보는 것만 같구나.”
그 말에 깜짝 놀란 아르티어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서, 선친(親)을 아십니까?”
“우연히 네가 여기에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체면 불구하고, 아이들을 따라오게 된 것이지.”
“…..?”
“넌 내가 누군지 아마 모를 거다. 육지로는 별로 나다니지 않았으니까. 나는 제스미네어라고 한다.”
제스미네어.
실버 일족 최고 연장자의 이름이며, 아르티엔만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드래곤으로서 칭송받았었을 존재였다. 하지만 문제는 아르티어스가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름을 말해줘도 자신을 모르는 듯 하자, 제스미네어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를 해줬다.
“혹시 아르티엔에게서 내 이름을 듣지 못했느냐? 나는 예전에 그와 세 번에 걸쳐 대결을 펼쳤었다.”
“예? 선친과 말씀이십니까?”
“이런, 아르티엔으로부터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순간 제스미네어의 온화하던 얼굴에 무시무시한 노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아르티어스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깨달았다. 돌아가신 아버지 도 대적이 불가능했지만, 눈앞의 이 노망난 드래곤 또한 대적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만약 이 노망난 드래곤이 저놈들의 편을 들어준다면, 오늘이 바로 자신의 제삿날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노회하기 짝이 없는 아르티어스는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예로부터 호비트 세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드래곤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 면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말씀드리기는 뭣 합니다만, 제가 워낙 말썽만 부리던 처지라 분가한 이후 선친을 찾아뵙지 못했었습니다. 아니, 찾아뵙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행여나 만날 세라 도망 다니기에 바빴지요. 그 때문에 어르신과의 세 번에 걸친 대결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노기에 차올랐던 제스미네어의 얼굴 표정이 다소 부드럽게 변했다. 아르티엔이 자신을 무시해서 그 얘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눈치를 살피던 아르티어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분가하기 전에 선친께 들었던 주의사항이 떠오르군요. 워낙에 말썽을 부리며 돌아다니자, 선친께서 제게 당부를 하나 하신 게 있었습니다. 웬 만하면 실버 일족은 건드리지 말라구요.”
“뭐, 실버 일족은 건드리지 말라고?”
“예. 그 당부 뿐이셨습니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제스미네어의 표정에 미약하지만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한 미소 뿐이었지만, 곱씹어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은지 그의 얼굴은 조금씩 더 밝아졌다.
“네 말을 듣고 보니, 천하의 아르티엔도 감히 우리 일족을 무시하지만은 못했다는 것을 알겠다. 크흠! 그건 그렇고, 내가 자네를 만나고자 여기까지 온 것은, 얼마 전에 브라키어를 만났었기 때문이야.”
브라키어의 얘기가 나오자 아르티어스는 비로써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대마왕과 싸웠을 때의 상황이 궁금해서 그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아, 그러셨습니까?”
“내가 그때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지만 애석하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는 전혀 아쉬움이 묻어있지 않다는 것을 아르티어스는 눈치 챘다. 방금 전에 그는 아버지와 3번에 걸쳐 대결을 했었다 고 했다. 즉, 아버지의 라이벌이라고 봐야 했다. 그것도 아버지에게 치여 맨날 2등밖에 하지 못한 라이벌 말이다.
그런 그가 왜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하겠는가. 도와주기 위해서? 그건 절대로 아닐 것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라이벌을 왜 도와주겠는가.
그가 그곳에 있고 싶었던 이유는 딱 하나 뿐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라이벌의 최후를 직접 확인하는 것, 바로 그것일 게 확실했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지 만, 심성이 삐딱하게 꼬인 아르티어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만약 자신이 그런 처지였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없애버리려 들었을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심을 그대로 드러낼 아르티어스가 아니다. 오랜 세월 인간세상을 들쑤시고 다니며 수없이 많은 경험을 쌓은 그가 아닌가. 그는 뻔히 눈치 챘으면서 도 헤실거리며 아부를 늘어놨다. 평소 아부 따위 하지 않는 아르티어스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안하는 것이었을 뿐, 하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제가 오늘 제스미네어님을 뵈니, 선친께서 왜 실버 일족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셨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만약 그날, 제스미네어님만 그 자리에 계셨다면 선친께서 돌아가시는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칭찬을 좋아하지 않을 놈이 누가 있겠는가. 그건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보통의 드래곤과는 달리,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아르티어스가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자 제스미네어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호오, 이거 나를 너무 높게 쳐주는구먼.”
“그럴 리가요. 현존하는 최강의 드래곤이신 제스미네어님이시라면 이 정도 평가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완전히 기분이 좋아진 제스미네어는 아르티어스의 예상대로 아르티엔이 죽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몇 가지를 물어봤다. 아르티어스는 그 질문에 대해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물론 상대방이 기분 좋도록 아부라는 양념을 듬뿍 섞어서 말이다.
아르티어스가 적성에도 맞지 않는 아부를 이 노망난 드래곤에게 쏟아 붓고 있는 이유는, 바로 제스미네어의 옆에 서있는 드래곤 때문이었다. 비록 공손히 서있기 는 했지만, 지그시 자신을 노려보는 그 눈빛 속에는 사나운 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었다. 제스미네어와 달리 결코 좋은 뜻을 가지고 이곳에 온 놈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느낀 순간, 아르티어스는 제스미네어에 대한 아부를 보다 강화했다. 지금 자신을 살려줄 수 있는 드래곤은 제스미네어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먹혀 들 었는지 제스미네어는 아르티어스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자네 참 말을 잘하는구먼.”
“과찬이십니다. 지금까지 말썽꾼 소리밖에 들은 게 없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 덕분에 견문이라면 저를 따라올 드래곤이 아마 없을 겁니다. 만약 시간이 괜찮으시 다면 제가 호비트를 등쳐먹던 얘기를 좀 들려드릴까요? 아마 배꼽을 잡으실 지도 모르는데…….”
“허허, 아쉽지만 그건 다음에 듣기로 하지.”
제스미네어는 더 이상의 볼 일은 끝났다는 듯 옆에 서있는 수인종에게 말했다.
“쟈크레아, 내 볼 일은 다 끝났네.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 그곳에 직접 있었던 당사자의 증언을 들으니 막혔던 가슴이 확 뚫리는 듯 기분이 아주 상쾌하구먼. 자, 그 럼 돌아가세나.”
과연, 아르티어스의 짐작대로 제스미네어를 수행하고 온 드래곤은 실버 일족의 수장 쟈크레아였다.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망할 놈들이 자신에게 복수하겠다며 쟈크레아만 데리고 이리로 쫓아왔다면, 정말이지 곤란했을 거라고 말이다.
드래곤 최강의 일족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게, 쟈크레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너무나도 엄청났다. 더군다나 쟈크레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살벌하기 그지 없는 눈빛으로 봤을 때, 그에게는 이런 아부가 먹혀들 리 없을 것 같았다. 한눈에 봐도 자신을 싫어한다는 게 빤히 느껴졌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쟈크레아님. 제스미네어님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바로 쟈크레아님이라고 들었었는데, 오늘 뵈니 정말이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요.” 하지만 쟈크레아는 아르티어스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제스미네어에게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이렇게 대충 넘어가실 일이 아닙니다. 이리로 오시기 전에 저 아이가 자리 잡았던 곳을 이미 보셨지 않습니까? 그곳은 틀림없는 쟈코니아 산 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놈이 그곳까지 자신의 영토라고 우긴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따라서 이번 기회에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버릇을 제대로 가르쳐 놔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골드 일족 따위가 감히 실버 일족을 어떻게 보고…….
쟈크레아의 말처럼 말토리오 산맥은 거대한 쟈코니아 산맥의 지류였다. 말토리오는 크라레스 제국의 남쪽을 관통한 다음 쟈코니아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크로나사 평원 쪽에 사는 사람들은 아르곤과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산맥을 보고 쟈코니아라고 불렀지만, 저 남쪽의 치레아쪽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말토리오 산맥은 물론이고, 그 말토리오가 합류한 이후의 쟈코니아 산맥까지 몽땅 다 그냥 말토리오라고 불렀던 것이다. 산맥을 넘어 아르곤 쪽으로 가면 똑같은 곳을 쟈코니아 산맥이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애송이 실버 드래곤이 자리 잡은 위치가 딱 바로 그곳이었다. 말토리오가 끝난 뒤에 이어지는 쟈코니아 산맥의 남쪽 끝단 부분 말이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그 위 치에 자리 잡았던 실버 드래곤을 아르티어스가 작살낸 게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아르티엔이 그의 뒤에 있었기에 실버 일족으로서는 애써 분을 참으며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 아르티엔이 대마왕과 싸우다 죽어버렸으니, 이번에 는 잘됐다 하면서 찾아온 것이다. 예전의 원한까지 통째로 다 갚아버릴 속셈으로 말이다.
“어허, 실버 일족의 체통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땅덩이를 놔두고, 겨우 그 조그마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서 이 난리를 치겠다는 말인가? 저 아이는 아르티엔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야. 홀로 대마왕과 맞서 싸워, 세상을 구원한 아르티엔이 남긴!”
제스미네어는 조그마한 땅덩어리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드래곤 서너 마리가 둥지를 틀고도 남을 정도의 넓이였으니까.
“그, 그래도…….?”
“이쯤 해두도록 하게. 저 아이를 괴롭히면, 다른 일족들이 우리 일족을 어떻게 보겠는가. 더군다나 저 아이, 듣던 것과는 달리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예의휙바르지 않은가. 그러니 젊은 애들끼리 생긴 일은, 젊은 애들끼리 해결하도록 그냥 놔두게.”
역시 아부의 힘은 위대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쟈크레아가 그냥 이대로 순순히 물러갈 기세가 아니었다. 이때, 초조해 하는 아르티어스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개 와 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즉시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아르티어스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주문을 발동시키자, 쟈크레아의 눈썹이 꿈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대응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르티어스 따위가 기습을 가해온다 해도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운 순간, 밝은 빛을 뿜어내며 거대한 조각상 하나가 제스미네어의 앞으로 공간 이동해 왔다. 새하얀 상아와 보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드 래곤 조각상. 그것은 바로 브로마네스가 애지중지하며 하루 종일 쳐다보며 미소 짓던 바로 그 조각상이었다.
“이건 뭔가?”
“제가 선친의 모습이 그리워질 때마다 보기 위해 드워프들에게 만들라고 지시한 조각상입니다. 그런데 어르신을 뵈니, 어르신께서는 제 선친을 참으로 깊게 생각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그래서 이걸 어르신께 선물하고 싶습니다. 제발 받아주십시오.”
제스미네어는 그 조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헤벌쭉 벌어진 입. 그것 하나만 봐도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계책이 제대로 먹혀들어갔 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브로마네스는 분하고 원통해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하마터면 치밀어 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레어 밖으로 달려 나가 ‘그거 내꺼야! 이 망할 드래곤들아!’하고 외칠 뻔 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브로마네스는 초인적인 의지로 분노를 겨우 참아냈다. 그래봐야 저 조각상을 되찾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로마네스는 피눈물을 흘리며 아르티어스를 저주했다.
‘이 망할 새끼. 두고 보자. 너 오늘 죽었어!’
하지만 이 조각상이 브로마네스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제스미네어. 그는 아르티어스의 선물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 하지만 이런 보물을…….”
“이 조각상을 보시면서 부디 제 선친을 추억해 주십시오. 한때 이 세계에서 쌍벽을 이루셨던 사이이시니, 서로가 라이벌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서로를 존경하고 또 아끼셨던 것 또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최강의 드래곤이라고 일컬어졌던 아르티엔과 쌍벽을 이뤘다고 말해주니, 제스미네어로서는 더욱 기분이 좋았다.
“허어,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다니, 참으로 고맙구먼.”
조각상을 자세히 본다면 그 생김새는 영락없는 레드 드래곤이었지만, 제스미네어는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해 버렸다. 눈앞에 있는 예술품에 대한 탐욕이 그의 이성 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드면 어떻고, 골드면 또 어떤가. 저 엄청난 예술품을 자신의 레어 안에 장식해 둘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말이다.
“정말 고맙네.”
아르티어스가 이 예술품을 자신에게 무슨 이유로 뇌물로 바친 것인지 눈치 채지 못할 제스미네어가 아니다.
‘허~, 그 애비와 달리 꽤나 교활한 녀석이로군. 이거 받고 이번 일을 잘 무마해 달라는 뜻이렷다??
제스미네어는 쟈크레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세. 이걸 내 레어의 어디에 두면 좋을지, 자네에게 조언도 좀 받고 싶고 말이야. 또, 이 앞에서 처음 마시는 차는 자네와 함께 하고 싶구먼.”
“하, 하지만……”
뭐라 말하려 하던 쟈크레아는 어쩔 수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틈을 보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쐐기를 박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어르신. 그럼 다음에 뵙기를.”
“그래, 잘 있게. 나는 가보겠네.”
아르티어스의 바램대로 제스미네어는 쟈크레아를 끌고,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 버렸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아르티어스는 이제 둘밖에 남지 않은 실버 드래곤 부자(父子)를 향해 고개를 획 돌리더니 눈알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정말이지 인상이 순식간에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한테 뭔 볼 일 있냐?”
“아, 아니 그게…….”
애송이 드래곤의 아비인 실버 드래곤은 일순 당황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르티어스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몸이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따지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다.
“아니, 우리 애가 자식을 못 낳게 되면 책임 질 거야? 마법을 쓸 데가 있고, 쓰지 말아야 할 데가 있지. 이 악독한 놈아!’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살기등등한 매서운 눈초리를 보자,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옆에 아들놈도 있는데, 그냥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 다. 그렇기에 그는 억지로 힘을 짜내 항변하듯 말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거시기를 그렇게…, 공격하시면 안 되죠.”
마치 기어들어가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아마도 이것이 약한 자의 설움이리라. 이 때문에 일족의 로드(Lord)에게 도움을 청했었던 것인 데……. 설마하니 자신들만 남겨놓고 모두 돌아가 버릴 줄이야.
“그, 그러다가 고자라도 되면…….”
아르티어스는 별 걸 가지고 다 따진다는 듯 자신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이죽거렸다.
“아, 괜찮아. 저놈이 도저히 애를 못 만들면 나한테 와. 내가 알 하나 낳아 줄께.”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때, 레어 안에서 분기탱천한 브로마네스가 씩씩거리며 달려 나왔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곧장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으르렁거렸다. 빡!
“야, 이 나쁜 새끼야! 그게 어떤 물건인데, 그걸 너 마음대로 줘버린다는 말이야? 그게 너꺼냐?”
“아, 젠장. 겨우 조각상 하나 가지고 뭘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아르티어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변명했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브로마네스의 화를 더욱 치밀게 만들었다. 브로마네스는 분노를 참지 못해 거품을 물며 외쳤다. “친구? 치인구? 이런 오크보다도 못한 새끼! 지금 당장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이, 감히 치인구?”
“허, 그것 참. 그 조각상이 그렇게 아깝냐? 좋아, 내 배상할게. 재료는 내가 줄 테니까, 그거 만든 드워프놈들한테 다시 하나 더 만들라고 하면 되잖아. 똑같은 조각 상을 다시 만드는 것인 만큼, 예전 작품보다 훨씬 더 좋은 게 나올 거야. 안 그런가? 친구.”
둘이서 하는 수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실버 드래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놈의 복수는 이미 물 건너갔음을 느낀 것이다. 왜 자신의 레어 도 아닌 이곳에 있었나 했더니,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 같은 강자까지 친구로 삼고 있을 줄이야.
더군다나 그가 아끼는 보물을 지 마음대로 꺼내 제스미네어에게 선물로 바쳐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저 정도라니. 보물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드래곤의 생리상, 도저 히 저 둘의 사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저런 꼴을 당했다면 곧바로 사생결단을 냈을 것이다.
“돌아가자, 얘야.”
“그냥 가자구요?”
“그럼 어쩔 거냐?”
아비 실버 드래곤은 더 이상 말을 않고, 자신의 레어로 곧바로 공간 이동해 버렸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애송이 실버 드래곤. 자신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아웅다 웅 입씨름만 벌이고 있는 레드와 골드 드래곤을 보며, 그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또한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 었다.
두 실버 드래곤이 사라졌는데도 모를 만큼, 브로마네스는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새끼. 명세서 적어 보낼 테니, 거기에서 한 개라도 빼먹어 봐. 가만히 안 놔둘 거야.”
“어허, 걱정 말게, 친구. 나와 거래 한두 번 하나? 내 미안한 마음을 담아 재료 외에도 금괴를..
아르티어스는 처음에 호기롭게 떠올린 숫자가 너무 많은 것 같자, 즉시 반으로 뚝 잘랐다. 하지만 그것도 많다고 느껴졌는지, 거기에서 또 반으로 잘랐다. “금괴 500Kg을 얹어서 주도록 하지. 어떤가?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런 거래가 아닌가?”
“놀고 있네. 만족스럽기는 뭐가 만족스러워?”
거래가 만족스럽지 않은지는 몰라도, 얘기는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브로마네스의 어조가 한 풀 꺾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면 자네는 내가 여기에서 실버 떼거리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었어야 했다는 말인가? 이런 몰인정한 친구 같으니라구.”
“네놈이 죽던 말던…….”
“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친구. 만약 입장이 바뀌어 자네가 나와 같은 처지에 빠졌다면, 나는 조각상 1개가 아니라 2개라도 흔쾌히 내놨을 걸세. 나중에 재료 를 달라는 소리 따위는 하지도 않고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조각상 따위로 레어 안을 장식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드래곤치고는 꽤나 취향이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 아르티 엔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는 마법에 대한 탐닉 외에 다른 것에는 거의 무관심했었으니까.
그걸 잘 아는 브로마네스였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기분이 훨씬 더 좋아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친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아끼는 예술품 2개를 내놓겠 다는 데야 기분이 나쁠 리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르티어스에게 재료를 받아, 드워프들을 족쳐서 똑같은 조각상 하나 더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말이다.
어느새 기분을 돌린 브로마네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레드 일족답게, 그는 자신이 언제 신경질을 냈었냐는 듯 기대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재료는 언제 줄 거야?”
“내가 지금껏 약속을 어긴 적도 없는데, 보채기는.”
아르티어스가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듯 하자 브로마네스는 왈칵 짜증을 토해냈다.
“없긴 뭐가 없어, 새꺄. 네놈이 떼먹은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오크 껌 씹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재료 내놔. 아니면 내가 직접 가서 가져갈까?” 아르티어스는 피식 미소 지으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 중얼거렸다.
“좋을 대로 하시게나, 친구. 겨우 그 정도 양을 가지고, 뭘 그렇게 안달을 하는지, 원……?”
“나중에 너도 한번 당해봐, 임마. 하늘 색깔이 어떻게 바뀌는지 말이야.”
브로마네스는 당시 정말 하늘이 노랗게 바뀌며 기절하는 줄 알았으니까.
“그건 그렇고, 친구. 내 일을 도와줄 생각이 아직도 없나? 자네가 도와준다면 정말 기쁠 텐데…..
“일 없어! 네놈 때문에 없어진 내 조각상을 드워프들 닦달해 만들기도 바쁘니까.”
“이런 나쁜 새끼. 정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재료를 아예 안주는 수가 있어.”
아르티어스의 위협에 브로마네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봐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지금 당장 네놈 창고로 가서, 내가 직접 꺼내 갈 거야.”
브로마네스는 자신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겠다는 듯 곧바로 어딘가로 공간이동했다. 그가 어디로 공간이동 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아르티어스는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어, 어딜 가나? 친구. 내가 주기도 전에 가져가면, 그건 도둑질이라니깐!”
하지만 이미 브로마네스가 있던 자리는 휑하니 비어있었다. 아르티어스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