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99화
1334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플레타.
이런 플레타를 바라보는 부관주의 시선이 서늘하다.
과연 저것이 항복을 말하는 사람의 눈빛인가.
분명 영혼의 관이 몰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분위기는 그 반대가 되어 있다.
설마 플레타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말을 꺼낸 것일까?
그렇다면 참으로 요망한 여자가 아닌가.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어깨가 툭 떨어진 플레타의 꼴이 영 보기 불편했다.
라미아와 일리나.
둘과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실시간으로 생각을 주고받은 덕분에 두 사람의 상황은 파악했다.
추가로 부관주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도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이상 부관주의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전에, 저 플레타의 바보 같은 생각은 바꿔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욕을 먹은 것도 아니고,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분해 하는 겁니까?”
“배신자라지 않습니까. 욕이라면 차라리 웃어넘기겠는데, 배신자는 제가 제일 혐오하는 족속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배신자라니!”
・・・・・・마지막 외침이 ‘고자’로 들린 건 착각이겠지?
반사적으로 떠오른 지구의 영상 한 토막.
이드는 그걸 애써 흘려 넘기고는, 플레타를 조금은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바벨을 보고 한 말이지, 플레타 대장을 보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바벨을 향한 말이 곧 절 향한 말이죠.”
흠. 제법 위험한 사상이 의심되는 말이다. 차후에 저 발언이 바벨을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시킬지도?
그렇다 해도 자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뭐, 누굴 향한 말이냐가 중요한 건 아니죠.”
“아니, 방금은……”
“그보다!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억지로 말머리를 돌렸기 때문일까.
어째 자신을 향한 플레타의 눈빛이 시큼털털하다.
그리고 이런 자신들의 대화를 그저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는 부관주.
그 모습을 보자 짐작에 좀 더 확신이 더해진다.
“나는 분명 왜 검후님께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답에 왜 배신자가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 걸까요? 설마 검후님이 배신자라는 뜻일까요?”
검후가 배신자?
애초에 협력 관계조차 아니었는데 배신 관계가 성립할 수가 있나.
그에 따라 플레타의 머리도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그보다는 그냥 이야기가 그렇게 흐른 거지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그쪽으로 돌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행히 플레타는 감정적인 면이 있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껌뻑거리던 큰 눈에서 대번에 칼이 번뜩인다.
“허, 시펄, 그럼 저년이 우리를 농락하려던 거였다는 겁니까?”
“일단 플레타 대장은 제대로 당하고 있었죠.”
우리에서 나는 빼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확실하게 선을 그어 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플레타는 듣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플레타가 부관주를 향해 침을 뱉었다.
“카악 퉤! 반반한 얼굴을 들이밀더니. 겨우 하는 짓이 말장난이냐? 시펄, 부대원들이 알면 이 망신을 어떡하나. 어쩔 수 없지. 부대원들이 알기 전에 네년의 목을 자르는 수밖에.”
그야말로 살기등등이다.
검 자루를 한껏 움켜쥔 플레타는 당장이라도 미친 소처럼 달려 나갈 태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드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상 그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일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드는 그런 플레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부관주를 바라봤다.
자신의 말 몇 마디에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혔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도 상관이 없는 건 아닐 테고.
“부관주는 어떻습니까. 내가 한 이야기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깔끔한 인정은 참 보기 좋다.
다만, 때로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화를 돋우기도 한다.
그 좋은 예가 플레타다.
그는 기세만이 아니라 정말 미친 소가 빙의한 것처럼 식식거리며 콧바람을 뿜어 댔다. 당장이라도 고개만 끄덕이면 미친 듯이 달려 나갈 모양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그렇게 간단한 인간이 아니다.
“그래도 궁금한 건 있겠죠. 가령 어째서 당신의 초인기가 내게 통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 같은 거 말입니다.”
“역시 알아차리셨군요.”
“무슨 말입니까? 초인기라니.”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의 부관주에 비해, 플레타는 어리둥절하다.
제법 놀랐는지 임계점까지 끌어 올렸던 기세마저 흐트러질 정도다.
“새삼 놀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앞서 영혼의 관에서 만들어 낸 인공 초인들도 많이 봤잖아요. 그런 겁니다.”
“그렇기는…… 아니, 다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몸 자체에 초인기를 심어 놓은 마법사는 없었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초인기를 이식받은 마법사가 나서지 않은 것이겠죠. 아마 꽤 많을 겁니다. 부관주가 초인기를 사용할 정도라면, 응당 그 아래 마법사들도 초인기를 이식받지 않았겠습니까.”
원래 윗사람이 본을 보이면 아랫사람은 자연스럽게 따르기 마련이다. 특히 그것이 개인의 무력을 증대시키는 종류의 것이라면 더더욱 얻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다.
그것은 단순히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사회생활이 아니라, 강해지고자 하는 본능이 시키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저년이 저희에게 무슨 초인기를 어떻게 쓰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인상을 찡그리며 대검을 어깨에 걸치는 플레타.
부관주에 대한 호칭은 ‘저년’으로 확정된 모양이다.
말 한마디에 휘둘렸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뼈아픈 모양이었다.
“앞서 배신자라는 말에 플레타 대장이 너무 쉽게 휘둘린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저년의 초인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과연. 그렇군요.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군요. 모두 저년 때문이었어요.”
아니, 사실 전부 부관주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드는 같은 편에 대한 의리로 굳이 그 부분을 교정하지 않았다.
“그런 겁니다. 정확히는 소리를 조종한 거죠. 음악이 사람을 웃고 울리는 것처럼, 소리로 사람의 심리를 조종한 겁니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분노하도록.”
“그게 초인기다?”
“마법에 따른 마나의 흐름은 없었으니까요. 마법이 아닌 능력이라면 초인기라고 봐야 옳겠지요.”
“확실히…… 바벨에도 그와 비슷한 식으로 소리를 만지는 놈이 있기는 하지요. 그럼 그렇게 저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세뇌를 하는 것이 목적이겠군요. 진짜 죽일 년일세!”
“……다릅니다.”
세뇌?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르는데?
저 봐라.
이쪽을 향해 무표정하던 부관주의 눈꼬리가 살짝 휘었지 않나.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것이 분명했다.
순도 100%의 비웃음이겠지.
자신의 꿍꿍이가 발각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올 정도라면 플레타의 말이 얼마나 우습게 들렸다는 것일까.
그런데 정작 우스운 꼴이 된 플레타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당당하다.
자신의 생각 정도는 틀릴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태도다.
“제 짐작이 틀린 모양입니다?”
“세뇌가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잖습니까. 더욱이 저도 저지만, 플레타 대장이 그렇게 쉽게 세뇌될 사람입니까?”
넌 어떠냐는 질문에 플레타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하얀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다.
“어림도 없지요. 세뇌에 대한 대처는 이미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그리 쉽게 당할 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하기에는 아까 물미역처럼 감정이 흔들리던 모습이 너무 선명하다.
“……아무튼, 그런 겁니다. 부관주의 목적은 세뇌가 아니라, 저희를 혼란시키는 거죠.”
“혼란시켜서 어떻게 하려고요?”
“항복이라는 헛소리를 통하게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로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관주.”
“….”
자신을 향한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는 부관주.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대답이었다.
모든 상황을 이해한 플레타가 벅벅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긁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저희를 함정으로 몰아넣은 거네요?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건 모르는 일이죠. 도망이 아니라, 치명적인 반격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명예 후작께선 생각보다 더 예리한 분이셨군요. 솔직히, 이렇게 빠르게 눈치채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담담히 고백하는 부관주.
그제서야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라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영혼이 없던 인형에 영혼이 들어온 것 같다고 할까.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이드의 눈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왔다.
“부관주가 우리 일행을 나눠 준 덕분입니다. 아마 검후님 앞에서 항복을 말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신기하네요. 정말 그 하나로 제 목적을 알아차리셨다는 말인가요?”
“순순히 인정한 것에 비해 질문이 많네요. 이것도 시간을 끌기 위한 것 같지만, 여기까진 그래도 답하도록 할까요. 당연히 정보는 더 있습니다. 부관주는 몰랐겠지만, 나에겐 통신을 위한 아티팩트가 있습니다. 그건 내 아내들과 연결되어 있지요. 두 사람이 말하더군요. 그들 앞에도 당신이 나타나 항복과 협상을 말하고 있다고.”
이 정도면 답이 나오지 않았냐는 듯 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일행을 나누고, 그런 일행들 앞에 나타나 당장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논한다? 이유야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티팩트라. 이건 명백히 제 실수로군요.”
마법사들을 따로 떨어트려 놓은 데다, 일반적인 통신 마법도 방해 공작을 해 둔 상태였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설마 그 통신 방해를 뚫고 연결될 정도로 강력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명백히 아쉬움을 담아 한숨을 토하는 부관주
한데 플레타는 이런 부관주를 보며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이드의 말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두 분 명예 후작 부인들 앞에도 저년이 나타났다는 겁니까? 그럼, 저년도 가짜라는 거 아닙니까.”
지금까지 허상을 두고 분노하고, 짜증을 내고, 쪽팔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야말로 스스로에 대해 실망이 역력한 모습.
그러나 이드는 전혀 실망할 것 없다며 말했다.
“실망할 거 없습니다. 플레타 대장에겐 다행하게도, 우리 앞에 있는 부관주가 진짜니까요.”
“…..제 눈에도 진짜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진짜로요?”
“확실합니다. 제 눈이 보증합니다.”
뿐인가.
라미아가 확인했고, 진실을 간파하는 엘프의 눈이 증명했다. 이보다 더한 사실 확인이 어딨을까.
“그래도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흐흐, 그거 좋네요.”
한가득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플레타.
콰콱!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리를 박찬 그가, 돌연 부관주를 향해 대검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