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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13화


1348화

그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러한 존 워스의 말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탑주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통하지 않는구나.’

절망스러웠다.

목적을 알면 그걸 계기로 이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반전을 노려볼 텐데. 매정하게도 상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마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지금까지 긴 시간 고생도 많았고, 고난도 많았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이고 넘었다.

‘하지만 이번 위험은 넘을 자신이 생기지 않는구나.’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일까.

초인 마법이라는 목표 하나로 굳건하던 탑주의 마음이 굽혀졌다.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절망이나, 역류한 마나로 인한 심각한 부상과는 지금 상황이 질적으로 달랐다. 마치 유리로 된 절벽을 앞에 둔 듯, 너무나 막막하고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또한 뇌 기능이 어느 정도 돌아왔기에 이제 알 수 있다.

자신은 이미 절반은 죽은 상태다. 운이 좋아 이대로 풀려나더라도 오래 살기는 글렀다.

한계를 넘어선 과부하로 인해 마나 로드는 물론 뇌세포와 신경, 근육까지 상한 상태다.

이 상태라면 길어야 넉 달이다.

고작 넉 달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복수는 어림도 없고, 유산을 남기기에도 시간이 너무 짧다.

초인 마법.

넉 달 동안 정리하면 입문서 정도는 만들 시간이 될까? 하지만 겨우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보냐!

자신은 물론 수많은 마법사들이 초인 마법에 쏟아부은 시간과 마나가 얼마인데. 이 시점에서 무엇을 살려야 할지는 자명해졌다.

설마 존 워스가 이대로 자신을 놓아준다 한들, 몸까지 회복시켜 주지는 않을 터.

그렇기에 빌었다.

자신이 아닌, 부관주와 영혼의 관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부관주와 그녀를 따르는 영혼의 관이라면, 자신이 남긴 초인 마법을 세상에 알려 줄 테니까. 그렇게 한다면 자신은 죽더라도, 자신의 이름만은 긴긴 마도 역사에 남을 테니까.

다만 이런 희망도 존 워스의 승낙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리고 목적을 밝히지 않는 존 워스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품은 희망은 결코 밝지 않은 것 같다.

“어차피 날 살려 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 정도 답은 들려줄 수 있는 것 아니오? 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소. 지금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 방향은 앞서 당신이 말한 목적과는 너무 다르단 말이오.”

그러나 실낱같은 희망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탑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또한 그가 품은 의문은 진심이기도 했다.

앞서 존 워스는 말했다.

자신은 초인을 혐오한다고, 초인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바이트 타블렛이면 그것이 가능할 것 같으니, 돕겠다고.

그러나 이 상황이 오고 돌이켜 보고서야 알았다. 그 목적이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물론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목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진심은 바로 그 ‘더 큰 목적’에 있다.

진짜 목적이 자신에게 밝힌 대로라면 절대로 자신을 이렇게 만들 이유가 없다.

그저 자신이 계획한 대로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하기만 하면 존 워스의 바람은 모두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안대로 바이트 타블렛이 완성된다면 수많은 일이 가능해진다.

우선 예고 없이 발생하는 자연 각성 상태의 초인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그야말로 현재가 아닌 미래의 초인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 초인의 씨앗은 오로지 자신의 허락 아래서만 새싹을 틔우는 것이 허락된다.

기존의 초인들 또한 멀쩡할 수는 없다.

마법적 복잡도가 올라갈 뿐.

이미 각성한 초인의 초인기를 박탈하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초인이든 일반인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렇게 회수한 초인기를 원하는 대상에 이식하는 것조차 가능하다.

그야말로 초인 시대 종말의 날이었다.

생각해 보라.

마탑의 선택을 받아 탄생한 초인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까?

언제든 회수될 수 있는 힘. 그때부터 그것의 주인은 결코 그들이 아니었다.

모든 힘의 주인은 바로 미완의 마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구름 위로 높이 솟은 바벨은 붕괴한다. 대신 바벨의 자리에・・・・・・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곳에 미완의 마탑이 높이 솟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초인을 한 손에 쥐고서.

그날이야말로 미완의 마탑이 모든 마탑 위에 서는 날이다.

탑주는 확신했다. 그 순간 미완의 마탑이 가지게 되는 힘은 제국에 비교해 전혀 모자람이 없을 것이라고.

마탑의 힘이 제국을 넘어선다.

얼마나 짜릿한가. 그야말로 저 고대에 존재했다는 마도 제국 시절에나 가능했을 일이 현실에 벌어지는 것이다.

존 워스가 원하기만 했다면, 허락만 한다면 이 위대한 일의 중심에 그가 설 수 있었다.

초인 마법을 세상에 우뚝 세울 수 있다면 마도 제국의 황제 자리도 내어 줄 수 있었다.

물론 이제는 모두 틀려 버린 일이 되었다.

어째서인지 존 워스는 이러한 방향으로의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 방향을 바꾸었다. 그가 그토록 경멸한다는 초인을 없앨 기회를 스스로 버려 버린 것이다. 모든 초인을 발아래 꿇릴 기회를 발로 차 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탑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마도를 개척할 정도로 높은 지혜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탑주를 가볍게 본 것일까.

“그건 당연한 일이오, 탑주. 그건 어디까지나 존 워스의 목적이니까. 내 목적과는 다르다는 거요.”

존 워스가 짧게 답했다.

그 말에 탑주는 혼란스러워했다.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자신이 존 워스이면서 존 워스와 자신의 목적이 다르다니?

“지금 그 말은, 당신이 존 워스가 아니라는 그런…”

“그만. 탑주의 질문은 여기까지 듣기로 합시다. 지금 중요한 건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 쓸데없는 곳에 머리를 쓸 필요는 없지 않겠소? 부관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해야지요.”

말과 함께 존 워스가 탑주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앞서 그의 정신을 깨운 것처럼, 최소한을 남겨 두고 뇌의 모든 능력을 다시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그걸 깨달은 탑주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지금이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대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는 순간, 자신은 끝이다. 그리고 영혼의 관과 부관주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겠지.

“잠깐! 잠깐 멈추시오! 이대로 날 재운다면 당신은 절대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을 볼 수 없을 거요. 절대로!”

이렇게 허무하게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다.

그렇게 악을 쓰는 탑주였지만, 존 워스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힘겨운 발버둥에 대한 비웃음조차 없는 무심한 눈동자가 탑주를 향할 뿐이다. 이런 반응도 당연했다.

현재 탑주는 마음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나 로드조차 장악당해 마법도 행사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목이 터지게 소리치는 것뿐.

“멈추란 말이다!”

푸확! 하나, 아니었다.

탑주의 협박은 결코 의미 없는 발버둥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탑주의 눈과 귀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핏물은 묽었다. 피에 뇌수가 섞여 나오고 있다는 의미다.

그건 뇌수가 빠져나올 정도로 뇌압이 높아졌다는 말로, 이 상태라면 당장이라도 내부 압력에 의해 뇌가 푸딩처럼 뭉개질 수 있다.

즉, 탑주가 악을 쓴 대로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존 워스의 손도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좋소. 멈췄으니, 그만하시오. 지금 일로 전체 뇌 성능이 14% 정도 떨어졌으니까.”

“헉헉・・・・・・ 그러니…… 헉헉…… 진작에 내 말을 들었으면 좋잖소.”

탑주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에도 존 워스를 향한 경계심을 멈추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찰나의 방심에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기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거래 거래를 원하오.”

“거래라면 이미 끝난 거 아니었소? 탑주는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하고, 나는 그것을 돕는 것으로.”

천연덕스러운, 당한 사람으로 하여금 속에 천불이 날 것 같은 존 워스의 반응에 탑주는 허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흐흐, 말은 바로 합시다. 그건 거래가 아니라 사기요.”

“그럼 승낙하질 말았어야지. 이미 지난 일을 어쩌란 말이오?”

“물론이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

사기든 아니든 거래는 이뤄졌다.

이런 경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서명하기 전에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라고 하지만, 정작 마음이 급한 사람들은 항상 실수를 하고 만다. “내가 원하는 건 새로운 거래요.”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부릅뜬 두 눈이 존 워스를 노려본다.

“글쎄, 그 거래에 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당신에겐 더 이상 테이블에 올릴 조건이 없을 텐데?”

“흐흐흐. 그럴 리가. 정말 없다면 당신이 지금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나 했겠소?”

“……”

“내가 내놓을 것은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과 내 목숨이오.”

조건은 둘이었지만, 사실 그 둘은 하나였다.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을 위해 소모하다 보면 넉 달의 수명도 금방 바닥을 드러내게 될 테니까.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은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소?”

“내가 말한 완성과 당신의 말하는 완성의 방향이 바뀌었으니 거래 조건도 달라져야지 않겠소? 무엇보다 우리가 언제 계약서를 쓴 적이라도 있소?” 

“후후후. 없지.”

“그렇소. 당신이 일방적으로 내 목숨줄을 잡고 있을 뿐, 계약서를 쓴 적도 없지 않소. 이제 와 거래 조건을 좀 바꾼들 무슨 상관이오.”

마나를 증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자신의 상태 역시 그 못지않게 위태롭다. 그러니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것이겠지.

탑주는 비틀린 조소를 띠었다. 눈앞의 존 워스가 아닌 자신을 향해서.

그러나 탑주의 내심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지금도 부관주의 비명이 간간이 들려오는 중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다만 이런 조건은 존 워스 역시 마찬가지.

탑주는 영상 속 명예 후작을 경계하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존 워스의 모습을 믿어 보기로 했다. “좋소. 거래하지. 탑주의 목숨값이 그리 싸지는 않으니까. 원하는 건 부관주와 영혼의 관이겠지?”

그 말에 탑주의 얼굴 위로 안도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존 워스의 말을 어떻게 믿을까. 그는 이미 한차례 교묘한 말로 자신을 이 꼴로 만들어 놓지 않았나.

“그렇소, 부관주와 영혼의 관에 속한 마법사들이 저 침입자들은 물론, 당신의 손에서도 온전히 벗어나는 것. 그리고 당신이 그들에 대한 관심을 끊어 주는 것. 이에 대해 맹세를 해 주시오. 내가 바라는 건 이뿐이오.”

“꼼꼼하군.”

이미 거래를 응했기 때문일까.

존 워스는 망설임 없이 탑주의 마법 능력 일부를 해방시켰다. 탑주가 말하는 맹세를 위해서다. 아무렴, 그냥 말로만 나눈 약속을 어떻게 믿을까. 마나라는 절대의 증인 정도는 세워야지.

탑주와 존 워스는 서로의 마나를 걸고서 진실하고 정당한 계약을 나누었다.

‘딸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여기까지뿐이라서 미안하구나.’

계약이 이뤄지는 순간.

탑주는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부관주의 모습을 깊이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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