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20화
1355화
메르시오의 원수를 갚겠다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닌 모양이다.
전투의 시작은 묵직했다.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 선명한 감정이 실린 일격.
쿠쿠쿵!
교차하는 검과 검 사이에서, 폭음과 함께 발생한 충격파가 둥글게 퍼져 나갔다. 모래 먼지가 휘몰아치고, 아기 주먹만 한 돌멩이가 휙휙 날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드와 존 워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마주 선 두 사람의 팔과 검이 돌연 사라졌다 싶은 순간.
쩌저저저정!!
수백, 수천 장의 유리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뿌연 안개와 같은 것이 나타나 일시적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렸다.
안개의 정체는 겹겹이 겹친 충격파, 그리고 그 충격파에 의해 부서진 대기 중의 물 입자가 만들어 낸 수증기였다.
물론 수증기는 발생하기 무섭게 흩어졌지만, 충격파는 달랐다. 겹치고 겹친 충격파는 거대한 해일이 되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덕분에 전투 현장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플레타 부대원들이 제일 먼저 그 해일을 맛보게 되었다.
콰우우우우!!
폭풍처럼 몸을 때리는 충격파.
그 속에서 흔들리는 몸을 바로 세우던 한 부대원은 갑자기 이마에서 화끈한 느낌을 받고 손을 움직였다. 곧이어 손에 붉은 피가 묻어나는 모습을 보고는 급히 소리쳤다.
“이건…… 단순한 바람이나 충격파가 아니야. 다들 물러나! 위험하다!”
“아니, 이게 무슨. 겨우 충격파 따위에!”
“일단 닥치고 뛰어! 이 새끼야!”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부대원도 있었지만, 잘 훈련된 부대원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했다. 거기에 라울의 지시가 늦지 않게 더해진 덕분에 부대원들은 큰 피해가 나기 전에 자리를 뜰 수 있었다.
그런 플레타 부대가 최종적으로 자리를 옮긴 곳은 바로 은색 기사단 옆이었다. 처음부터 검후와 라미아 뒤에 서서 대기 중이던 은색 기사단은 덕분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상황.
‘아니, 그런데 왜 하나같이…………..’
‘표정이 살벌한 건데?’
‘혹시 우리가 바보처럼 굴어서 화가 난 건가?’
그럼에도 정작 피해를 당한 플레타 부대보다 훨씬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피난을 온 부대원들은 괜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건 절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은색 기사단이 화가 나 있는 이유는 온전히 존 워스 때문이었다.
삼검왕이 검후를 배신했음을 이제는 모든 은색 기사들이 알고 있다.
검후와 함께 존경했던 우상이, 이제는 비열한 배신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한때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으로서 삼검왕에게 크든 작든 가르침을 받았던 이들로서는 실로 마음 복잡한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그저 상황을 정보로만 알고 있을 때는 순수하게 분노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존 워스를 눈앞에 두게 되자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은 곧 그들의 주인인 검후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옮겨 갔다.
‘당사자도 아닌 우리 마음이 이러한데, 당사자이신 검후님은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자 복잡하던 마음이 온전히 미움으로 쏠렸다.
해서 기사들은 한마음으로 존 워스를 노려봤다. 날이 달렸다면 먼지 단위로 존 워스를 잘라 냈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
“개자식…… 어머!”
무심코 속마음을 흘린 기사가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검후가 놀란 눈으로 해당 기사를 돌아보고는 곧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네 말이 옳다. 저 자식이 개자식이지. 그나저나, 나보다 너희들이 더 화가 난 것 같구나.”
“부끄럽습니다.”
볼이 살짝 붉어진 쉴라가 고개를 숙였다.
검후 앞에서 개자식이라니. 아무리 검후가 소탈하다지만, 은색 기사단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 자리에는 바벨의 초인들이 있지 않은가.
쉴라의 눈꼬리에 날카롭게 날이 섰다. 그리고 뒤에서 이 모습을 확인한 기사들은 내심 울상이 되어 원인이 된 기사를 노려보았다. ‘난 죽었다. 그냥 여기서 죽을까?’
그렇게 해당 기사가 순직을 위장한 자살을 꿈꿀 때.
이어진 검후의 목소리가 그녀를 구했다.
“그러지 말렴. 오히려 저 말을 듣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한걸.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던 게지. 개자식은 개자식일 뿐인데 말이다.”
“…..”
“그러니 너희도 그냥 개자식으로 생각하렴. 그렇게 쓸데없는 감정을 버리고. 대신 저 전투를 유심히 보아 두거라. 너희들 생에 이런 전투는 두 번 다시 볼 기회가 없을 테니까. 오늘 본 것을 머리에 넣어 두고 되새기면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째릿!
검후의 당부를 들은 쉴라가 기사들을 째려본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답.
“두 눈 크게 뜨고 기억에 새기겠습니다!”
힘껏 기합이 들어간 기사들.
검후는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이 진중하게 변하는 것도 순간이었다.
“…….”
그에 따라 조용해진 기사들.
검후는 그녀들 앞에 선 쉴라를 보며 당부의 말을 더했다.
“기사들은 저 전투를 보는 것이 임무지만, 쉴라 단장은 다르다.”
“듣고 있습니다.”
“단장은 저기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이 어떤 이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여기에 이드와 존 워스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검후가 저 말을 꺼냈다는 의미는, 그 두 이름 뒤에 감춰진 진짜 정체를 말하는 것.
쉴라가 진중한 눈으로 검후를 바라보았다.
“그런 만큼, 저 전투가 어떤 규모로 확대될지 나조차 짐작하기가 어려워. 혹여라도 그에 휩쓸릴까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극히 당연한 걱정이다.
쉴라는 영리하게도 검후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염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때였다면 ‘대응’이 아니라 ‘통제’라는 단어를 썼을 것이다.
은색 기사단과 검후의 이름이면 거의 모든 인물과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기 때문.
그러나 이드와 존 워스에게는 어떤 이름도 통하지 않는다.
그 둘은 이미 세상의 틀을 벗어나 있는 존재. 그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나와 여기 두 분도 도울 것이다. 너무 혼자 책임지려 하지는 마라. 그리고 라울 자작.”
쉴라의 어깨에 손을 올려 신뢰를 표시한 검후가 라울을 불렀다.
“플레타 부대는 제가 완벽히 통제하겠습니다.”
그러자 플레타 부대에 지시를 내린 후, 부관주를 제압하려 뛰어나간 플레타와 오탄을 바라보고 있던 라울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검후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 말이 아니네. 어차피 내겐 바벨에 속한 그의 부대를 어찌할 권한이 없어. 괜한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단 말이네.”
“크흠. 죄송합니다.”
“지금은 죄송한 것보다. 부관주의 문제는 어쩔 건가?”
“하아…….”
말과 함께 검후가 힐끗 눈으로 가리키는 곳.
거기서는 플레타가 뒤통수를 두드리며 오탄을 구박하고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 부관주를 잡으려 애쓰던 두 사람.
그러나 지금 두 사람 앞에는 부관주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 결국 부관주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 미끄러지듯 거리를 벌린 부관주가 두 사람의 손이 닿기 직전, 공간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드처럼 공간을 비틀어 열 능력이 없는 두 사람은 그저 빈 공간을 향해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래 봤자 이미 공간 너머로 사라진 부관주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실로 허망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다 잡아 놓은 부관주를 놓치다니.
아무리 존 워스가 나타나고, 생각도 하지 못한 수법으로 구속구를 풀었다고 해도, 결국 아쉬운 대응이 만들어 낸 실패였다. 더욱이 부관주를 통해 바벨의 초인들을 강화할 가능성을 보고 있던 라울로서는 뱃속이 꼬여 버릴 듯 아쉬웠다.
그러나 아직 작전은 끝나지 않았다.
부관주 또한 여전히 영혼의 관 안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
라울은 절대 부관주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 갈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턱을 꽉 깨문 라울이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다시 잡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기 위해서는 검후님의 조력이 꼭 필요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부관주의 추적에 나서고 싶은 충동이 가득해 보인다.
검후는 그런 라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고 만다. 뭔가 가소롭다는 듯, 감정이 묻어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
검후는 이상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라울을 무시하고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이미 재앙이 내려와 있었다.
묵직하게 시작된 이드와 존 워스의 전투는 빠르게 고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는 이미 충격파 따위는 끼어들 구석도 없다. 충격파가 아니라 검강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다 파훼되지 않은 역도가 용틀임을 하며 공간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땅에는 이미 크고 작은 크레이터가 생겨났고, 산 하나는 허리가 잘려 나가 있었다.
뿐인가. 바람도 두 사람을 비켜 가며 구름도 멀리 도망간 상태.
과연 저 근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기사단을 건사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드가 이런 사태를 염려해 자신들과 거리를 벌렸다는 것. 거기에 더해 라미아가 거대한 결계를 둘러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자신도 기사들에게 두 사람의 전투를 잘 지켜보라고 당부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라울 자작. 자네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무슨 말씀이신지……?”
“부관주를 다시 잡겠다는 자네의 말 말이야.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번 습격 작전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
”….검후께선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그러하네. 내가 생각할 때, 이 작전은 저 싸움이 시작한 시점에서 끝이 난 것이네.”
“죄송합니다만, 지금 하시는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라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다시 부관주를 잡을 기회를 만들려 하는 입장에선, 이미 끝났다는 검후의 말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검후는 라울의 그런 반응에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자네, 내가 감금되어 있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글쎄요. 워낙 많은 말씀을 하셔서.”
“내가 자네에게 말했지. 자네는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크게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감금된 상태에서 나온 말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래. 자네도 혼돈의 파편이 어떤 존재인지 들었지. 그런데 어째서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저 전투가 끝이 났을 때, 과연 영혼의 관이 남아 있을 것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