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44화
1379화
존 워스의 흡수가 끝나는 순간 검룡의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그 순간은 찰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 멈춘다는 것은 자살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스르릉,
다시 움직임을 시작한 검룡이 검날을 비볐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움직임이다. 그런데도 분명 멈추기 전과 무언가가 달랐다. 지금 검룡은 멈추기 전의 검룡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차이는 눈이다.
점토 인형처럼 모양만 잡혀 있던 것이, 흑진주처럼 번들거리고 있다. 다른 부위도 마찬가지였다.
비늘이 단단해지고, 이빨은 날카로워졌으며, 비늘 아래서 꿈틀거리는 근육에는 힘이 빵빵하게 들어갔다.
이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용을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드래곤이 있지만, 아무렴 드래곤과 용은 다른 존재니까.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저 검룡은 분명 진짜 용과 전혀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존 워스는 자신의 영혼을 불어 넣어 검룡을 진짜로 만든 것이다. 설마 중원 땅도 아니고 여기 그레센에서 용을 보게 될 줄이야.
짧은 감상이 머리를 스치지만, 그뿐이다.
이드의 눈길에 선명히 드러나는 것은 불쾌함이었다.
“설마 겨우 그것이 당신이 준비한 마지막 수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어서 아니라고 말해.
그렇게 답을 정해 놓고 강요하는 것 같은 이드의 말에 검룡은 어리둥절했다.
크르르르-
이제 막 태어났다고 하기엔 너무 강대한 힘과 완성된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엄연히 신생아였다.
검룡은 이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반대로 이드는 이런 반응에 기가 찼다.
“어떻게 혼돈의 파편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다 사기꾼이냐? 작별 인사를 미리 한다면서 지랄을 떨어 놓고 한다는 짓이, 겨우 껍데기를 가꾸는 거였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런 짓을 하고도 부끄럽지 않아?”
갑작스럽게 시작된 매도에 검룡은 어리둥절하고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러나?
크르르릉!
저 인간은 자신의 적이다. 그건 본능에 각인된 사실이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죽여야 한다는 의지가 솟는다. 절대 좋은 관계를 쌓을 수 없는 관계랄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상대라도 무턱대고 매도당하는 건 또 엄연히 다른 일이다.
무엇보다 부끄럽지 않냐고 묻는다.
아니, 왜? 이렇게나 강대하고 완벽한 자신이 어째서 저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크릉크릉!
검룡은 콧김을 뿜으며 강력하게 반발했고, 이드는 그런 반발을 차갑게 무시했다.
이드로서는 억울이고 자시고 엄연한 사실을 지적했을 뿐이니까.
지금도 그렇다. 자신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검게 윤이 나는 검룡의 눈동자 속에 선명하게 비치는 영혼의 모습.
“다 보인다고! 거기 있는 존 워스, 당신의 모습이 말이야!”
한편, 매도에 이어 자신의 존재까지 부정당한 검룡은 크게 분노했다. 이제 막 자아를 각성한 검룡에 있어 자신에 대한 부정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기에 그는 참지 않았다.
쿠오오오오!!
울분을 담아 크게 소리를 지른 검룡이 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몸에 솟아 있는 대검의 예기가 일제히 이드를 향하는데, 그 기세가 참으로 매섭고도 흉흉했다.
그리고 그런 검룡을 내려다보는 이드는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검룡의 분노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존재는 존 워스가 뒤집어쓴 가짜. 결코 진짜 자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쌍하고 말고를 따질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신 존 워스에 대한 짜증이 남았다.
원하는 대로 껍데기를 바꾸는 모습이 꼭 재생과 부활을 반복하는 혼돈의 파편을 상징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혹시 저 모습을 통해 자신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꿈 깨라고 말해 주고 싶다. 자신이 차원의 인의 주인이 된 이상 메르시오와 마찬가지로 그가 부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괘씸하단 말이지.”
자신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존 워스.
그는 혼돈의 파편이 아닌 철벽의 검왕 존 워스로의 자부심을 세웠다. 혼돈의 파편으로의 권능이 아닌, 한 사람의 검사로서 검을 놓치 않았다. 그런 모습에 이드도 나름 호감이 갔던 것인데.
마지막에 와서 이런 꼴이라니.
‘그래도 같은 검사로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더니.’
이래서야 자신만 바보가 된 것 같지 않은가.
한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검룡을 향한 이드의 눈이 서늘해졌다. 이드는 그대로 대붕의 고삐를 당겼다.
꾸어어억!
이드의 기분을 전달받은 대붕이 단숨에 몸을 뒤집었다. 검룡을 향해 날카로운 부리를 세운 대붕은 한줄기 벼락이 되었다.
펑!
힘찬 날갯짓과 함께 날개를 접은 대붕이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대신 남은 것은 구름처럼 하얀 충격파뿐.
검룡과 대붕 사이의 간격은 찰나 간에 사라져 버렸다.
검룡에게 달려든 대붕은 뱀을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검룡의 몸에 박아 넣고 부리를 찔렀다.
검룡이 대검을 움직여 이를 막으려 하자 어느새 대붕의 머리에 올라선 이드가 나섰다.
떠어어엉!!
무극검강을 두른 일라이져로 대검을 받아넘긴 것. 작은 일라이져로 그보다 수백 배 거대한 대검을 받아넘기는 모습은 이해 불가의 광경이었다. 이쑤시개로 건물의 기둥을 옮기는 것과 비견될 만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이드는 그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너무 쉽게 해냈다. 덕분에 대붕은 아무런 방해 없이 부리를 박아 넣었다.
푸억!
날카로운 부리는 단숨에 검룡의 몸에 구멍을 뚫었다. 대붕은 그 상태에서 머리를 흔들어 구멍을 넓히고, 날카로운 이빨로 검룡의 몸체를 물어 뜯었다.
쩌러러렁!
그러는 사이 날카로운 발톱과 검룡의 몸에 돋아 있는 대검 사이에는 불꽃이 튀었고, 대붕의 날개와 검룡의 꼬리가 쉼 없이 흔들렸다.
그야말로 괴수대전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보통은 날짐승이 유리하지만, 검룡은 날개가 없어도 비행이 가능한 만큼 날짐승의 가장 큰 이점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게 보면 검룡이 유리해야 옳다.
그러나 애초 대붕이 가진 힘이 검룡보다 컸으며, 무엇보다 홀로 분투 중인 검룡과 달리 대붕은 이드가 함께하고 있었다.
괴수대전의 현장에서 이드는 마치 한 마리 개미 같았다. 두 마리 괴수와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으니까.
그러나 이드를 보고 누가 작다고 무시할 수 있을까. 검 끝으로 대붕을 낳은 존재가 바로 이드였다. 무엇보다 대붕을 낳고도 이드의 검과 내력에는 여유가 있었다.
대붕의 머리 위에서 자리를 옮긴 이드는 허공을 무자비하게 가로지르며 검룡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대검이 번뜩일라치면 그 앞에는 언제나 무극검강이 나타나 대검을 비껴 냈다. 검룡으로서는 참으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차라리 한 자리에 눌러앉아 있다면 모르겠다. 차라리 힘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았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이드는 쉼 없이 옮겨 다니며 검룡의 공격을 비껴 내기만 했다. 덕분에 검룡의 공격은 의미 없이 허공에 흩뿌려질 뿐이었다. 전투의 맥이 끊기고, 공격의 시작점을 찾을 길이 없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 공격은 하지 않는다. 공격은 온전히 대붕의 몫이다. 이드가 검룡의 공격을 비껴 낸 자리에는 어김없이 대붕의 발톱과 부리가 찔러 든다. 방어와 공격이 교차하는 타이밍이 그야말로 환상적이라 당하는 검룡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대붕과 이드는 한 몸 같았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대붕의 모든 움직임에는 이드의 의지가 실려 있으니까. 교차하는 타이밍에 오차가 생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콰과과곽!
찌지지직!
그리고 마침 지금 또 한 번의 공방이 교차했다. 검룡이 찔러 넣는 대검을 불꽃을 튀기며 받아넘긴 순간, 대붕의 발톱이 검룡의 옆구리를 길게 찢어 놓았다.
쿠아아아!!
순간 검룡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자아를 각성하기 전 고통을 느끼지 못하던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다. 그걸 보면 자아가 생겼다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드는 상대의 이런 고통도 놓치지 않았고, 그 의지를 내려 받은 대붕은 검룡의 고개가 돌아간 틈을 노려 검룡의 목을 물어뜯었다. 콰직!
그러나 과연 존 워스가 뒤에 있어서 그럴까. 검룡은 목을 찔리는 순간 대붕의 머리를 물었다.
입안에 서로의 목과 머리를 머금은 상황. 그러나 상황은 일방적으로 검룡에 유리했다. 그에겐 브레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검룡의 입에서 하얀 냉기와 함께 검강의 브레스가 뿜어졌다.
쿠콰콰・・・ 쾅!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
저 아래 부근에 있던 이드가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나타나 검룡의 턱을 차 올리며 브레스의 방향을 바꿨다.
하지만 그의 개입은 조금 늦었다. 그 결과 대붕의 머리는 절반이 날아갔고, 또 검룡의 이빨에 찢겨 너덜거리게 되었다.
“역시 쉽게 죽어 주진 않겠다는 건가.”
살짝 피곤한 목소리가 된 이드가 부서진 대붕의 머리에 올라섰다. 그러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즉시 회복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대붕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드의 내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는 형상화된 의지의 집합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다. 내력의 소모는 말할 것도 없고, 심력의 소모가 크다. 이것은 피로감이 되어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대붕의 몸짓이 극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꾸어어억!
부리와 발톱에 더해 대붕의 거친 날갯짓을 시작했다. 활짝 펼친 깃털 끝에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정체는 당연하게도 검강이었다. 대붕의 존재는 의형강기. 이드의 변하는 순간 대붕의 모든 부위가 공격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거거거걱!
날카로운 검강으로 변한 수십 장의 깃털이 검룡의 전신을 베어 냈다. 일순간 공격력이 수십 배 늘어난 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 거리를 벌리려 하는 검룡이었으나, 대붕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대붕이 더욱 달라붙었다.
검룡의 몸에 부리를 박아 넣고, 가죽을 찢었다. 두껍고 날카로운 두 발톱으로는 대검을 움켜쥐고서 힘을 준다.
쩌저적!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대검에 금이 갔고, 곧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대검이 깨지고 만다.
검룡은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상대의 공격력은 증가했지만, 자신은 오히려 공격 수단을 잃었다. 부러진 대검은 재생이 가능하지만 시간이 걸린다.
우선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슈르르륵!
그런 판단과 함께, 몸에 돋아난 대검이 길게 늘어나며 검룡의 몸을 감쌌다. 그 모습은 마치 갑옷과 같았다. 몸을 단단히 해서 공격을 버티겠다는 의도다.
“멍청하긴. 검이 부러지는 걸 봤으면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나?”
마지막 순간의 선택이 그야말로 최악이지 않은가.
어느새 대붕의 머리 위에 올라선 이드가 한심하다는 표정이 되어 검을 휘둘렀다. 검끝이 향하는 곳은 검룡의 목.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