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8화 – 대체 어떤 놈의 씨야?
대체 어떤 놈의 씨야?
용병단을 움직이는 핵심 부서라고 하면, 단연 행정부와 운용부가 손꼽힌다. 행정부는 용병단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 따위와 인원 관리에 관여한다. 신병을 모 집하여 인원을 보충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자의 급료를 계산해서 지급하는 것도 행정부의 몫이다.
이에 반해 운용부에서 하는 일은 용병들을 적절히 운용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일거리의 대부분은 길드를 통해 들어온다. 의뢰인이 용병을 원하는 곳은 왕 국 전체, 어떨 때는 왕국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까지 있다. 운용부에서는 의뢰인과 협의하여 언제 그곳으로 용병부대를 투입할 것인지 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적절하게 인원 배치를 하여 적은 숫자의 용병으로 최대한 많은 의뢰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게 운용부에서 하는 일이었다.
즉, 운용부는 용병단의 수입을, 행정부는 지출을 관리한다고 보면 옳다.
운용부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용병단의 수입이 결정되기에, 규모가 작은 용병대의 경우에는 부단장이 직접 운용부를 챙기는 게 관례였다. 하지 만 페가수스 용병단처럼 규모가 큰 경우에는 전문적으로 운용부를 담당할 사람을 따로 임명하였다.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온 운용관을 보며, 단장은 하던 일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얼마 전에 입단한 마법사에 대해서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마법사라……?”
잠시 생각하던 단장은 이윽고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 그 덴코 왕국 출신이라는 마법사?”
“예, 그 마법사 말입니다.”
운용관은 344중대에서 행한 고블린 토벌 작전에서 그 마법사의 활약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제가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기에 수석마법사님께 조언을 청했지요.”
단장도 꽤나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흠. 그래, 수석마법사는 뭐라고 하던가?”
“마법진 자체는 그리 놀라운 게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평이한 수준의 마법진들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서로 다른 5개의 마법진을 연계하여 자체적으로 마나를 끌어모아 폭발을 일으키도록 설계하는 것은 엄청난 고난도의 작업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듣던 단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렇다면 중범죄자라는 뜻인가?”
“수석마법사님의 결론도 그랬습니다.”
마법진 5개 연계 구동 같은 고난도의 작업을 용병단을 떠도는 마법사가 구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의 수준이 4사이클급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 법진에 대한 연구를 깊이 있게 한 인물이라면, 3사이클급이라고 해도 여러 마법진을 동시에 구동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용병단에서 그를 중범죄자라고 단정 짓는 이유는, 마법진 연구는 곧 타이탄의 심장인 엑스시온의 연구와 맞물리기 때문이었다.
알카사스 왕국의 경우, 마도왕국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마법사 길드에서도 타이탄이나 엑스시온을 생산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 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왕실 직속으로 철저히 관리할 만큼 중요도가 높은 산업이었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마법사가 신분을 숨긴 채 외국을 떠돌 이유가 뭐겠는가. 반역 등의 중범죄 외에는 답이 없었다.
“흐음, 어떻게 보면 기회라면 기회일 수도 있긴 한데…….”
“조사를 좀 해 볼까요?”
운용관의 질문에 단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해서 뭐 하겠나. 만약 중범죄자가 맞다면 그가 제시했던 신분 증명은 몽땅 다 위조된 게 뻔할 텐데 말이야. 그리고 괜히 조사한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셔 봐야 좋을 게 있을까? 자칫 하이에나들만 끌어들일 뿐이야.”
중범죄자가 맞다면 엄청난 현상금이 붙어 있을 것은 당연했고, 현상금 사냥꾼들이 전 대륙을 이 잡듯 뒤지고 있을 게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의 섣부른 행동은 자칫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마법사의 신상 정보를 노출시키는 최악의 결과를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겠습니까?”
잠시 고민을 하던 단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냥 놔둬. 일단은 조용히 지켜보는 거야. 그러다가 틈이 보이면 회유해 보기로 하지. 이런 인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하게 오는 것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단장님.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 **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짝 드러내 보여 줬다. 호비트들의 수준을 감안해 적당한 수준에서 말이다. 요 근래에는 유희를 즐기지 않았지만, 예전에 혈기왕성하던 시절에는 대륙 곳곳을 싸돌아다녔었던 아르티어스다.
더군다나 근래에는 아들놈을 도와 대규모 전쟁도 치러냈고, 또 치레아 공국의 살림꾼 역할까지 수행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호비트의 세상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착각이었다. 다크는 상류층 생활을 영위했고, 그렇다 보니 아르티어스 역시 고위급 인물들만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서부터 단추가 어 긋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예전에 세상을 돌아다녔었던 그 시절과 지금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위급에 있어서야 거의 차이가 없 었지만, 하위급은 질적으로 엄청난 변동이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거의 대부분 기사단에 흡수된다. 타이탄 생산 때문이었다. 그 외에 기사단에 들어가지 못한 양질의 인력은 각종 연구소나 마법물품을 생산하는 단체로 들어가게 된다. 폭넓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엄청난 자금 지원은 물론이고, 부가적으로 막대한 보수까지 약속되니 누가 그런 자리를 마 다하겠는가.
물론 마법사들 중에는 안락한 생활보다는 위험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실전 경험을 쌓으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용병단으로 들어가지는 않았 다.
용병단에 소속되어 잡다한 의뢰를 수행한답시고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다소 위험하긴 해도 소수의 실력 있는 모험가 파티와 함께 모험을 즐기는 쪽이 훨씬 배우는 것도 많았고, 수입 또한 짭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가장 인기 없는 일터인 용병단을 찾아오는 마법사의 실력이 어떨지는 뻔할 뻔 자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마법사에게 용병단도 나름 인기 있는 직장들 중 하나였으니까.
타이탄이 없던 그 시절, 용병단들 중에는 엄청난 부와 세력을 자랑하던 곳들도 간혹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나라를 세운 용병대장까지 있었을 정도다. 물론 지금 은 꿈도 꿀 수 없는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아르티어스가 생각해 놓은 적당한 수준의 마법을 몇 번 사용하자, 용병들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들의 시선에는 경외감마저 어려 있었다.
“마법사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지금껏 여러 마법사님들을 만나봤었지만, 정녕 마법사님처럼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계셨던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천성적으로 아부 받는 것을 좋아하는 아르티어스였기에, 처음에는 그들의 찬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흥, 멍청하기 짝이 없는 호비트들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능력을 알아보는 눈깔은 박혀 있군. 그래, 찬양할지어다. 네놈들이 어디 가서 나 같은 실력을 지닌 마법 사를 만나보겠냐.’
그렇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불찰이었다. 계속 마법진을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안 쓸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별거 아닌 거라 생각해서 한 번씩 도움 을 주다 보니, 어느새 모든 중대원들이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게 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끄응. 아무래도 내가 너무 과했나?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요즘 마법사들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졌나? 예전에는 4사이클급 정도면 이 정도는 다 했는 데.”
물론 지금도 쓸 만한 마법사는 그 정도는 충분히 했다. 문제는 그런 인물들이 용병단으로 안 온다는 것이었지만.
“임무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법사님.”
“나도 자네처럼 내 의도에 맞춰 잘 따라 주는 지휘관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아주 편했다네. 자네 꽤 유능한 지휘관인 것 같아.”
“핫핫,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마법사님과 함께 임무를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중대원들의 생각도 중대장과 비슷했다. 마법사가 지닌 능력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으니 말이다.
마법이 지닌 파괴력은 막강하다. 문제는 그게 발동될 때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고, 그동안 자신들이 ‘몸빵’을 하면서 마법사를 지켜야 한다는 전제 조건 이 있었지만 말이다. 하기야, 그런 필요성조차 없다면 마법사들이 왜 파티를 짜서 동료들과 함께 다니겠는가. 자기 혼자 다니고 말지.
몇 달에 걸쳐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생사고락을 함께했다는 짙은 연대감이 생기게 된다. 그렇기에 임무를 모두 끝낸 지금, 술이라도 한잔하자며 청할 법도 하건만, 용병들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 친교를 맺자며 다가가기에는 아르티어스가 너무나도 엄청난 능력을 지닌 마법사였던 것이다.
중대원들과 헤어진 후, 아르티어스는 하늘을 힐끗 쳐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지금 브로마네스를 만나러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아직 업무가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한참을 기다려야겠군.’
마법통신을 보내 볼 수도 있지만, 자칫 누군가의 눈에 띌 우려가 있었다.
아마 어딘가에서 브로마네스를 감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2급 마법사로 들어온 자신도 동료들과 헤어지자마자 감시를 받고 있는데, 특급인 브로마네스가 감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을 리 만무했다.
생각을 정리한 아르티어스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커다랗게 기지개를 켠 뒤 중얼거렸다.
“으아아, 피곤하다. 오랜만에 숙소로 돌아왔으니, 오늘은 잠이나 퍼 자면서 푹 쉬어 볼까.”
감시자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숙소를 향해 느긋한 발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아르티어스와 브로마네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곳은 다란스였다. 주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맛있는 술과 음식을 즐기는 데는 촌구 석보다는 수도가 훨씬 더 나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자네,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는 거 아닌가?”
브로마네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나 잘해. 훈련소 신세는 빨리 벗어나야 할 거 아냐?”
아르티어스의 질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브로마네스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훗, 내가 누군가?”
브로마네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치켜세우자 아르티어스는 일단 맞장구를 쳐 줬다.
“호오, 표정을 보니 뭔가 성과가 있긴 있었던 모양이군.”
“두말하면 잔소리지. 일단은 소대장으로 일해 보래.”
“애개~ 겨우 소대장?”
“비웃지 마. 밖에 나가기만 하면 내 실력을 보여 주겠어.”
“너무 오버하지는 말고.”
“그러는 너나 오버하지 마. 훈련소 안에까지 네 소문이 쫙 퍼졌더라. 굉장한 실력을 지닌 마법사가 한 명 들어왔다고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깜짝 놀라 급히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물론이지. 내가 왜 너한테 헛소리를 하겠냐?”
브로마네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거참, 이상하네. 그렇게 눈에 띌 만한 짓은 안 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용한 마법도 모두 4사이클 안쪽이었고 말이야.”
“웃기지 마, 새꺄. 그렇게 조심했는데 훈련소에까지 네 소문이 쫙 퍼졌을까.”
브로마네스의 질책 어린 말투에도, 아르티어스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정말 아니라니까 그러네. 혹시라도 눈에 띌까 싶어 저급한 마법만 사용하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리고 겨우 그 정도도 못한다면 마법사를 왜 하겠냐? 에 잇,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검사나 할 걸 그랬나?”
“흥! 검사? 검사는 뭐 편한 줄 아냐? 꽁지 빠지게 허접한 놈들 뒤치다꺼리해 준 후에야, 이제 겨우 첫 출전권을 얻어 냈구만..
출전권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이죽거렸다.
“첫 출전 좋아하시네. 누가 들으면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알겠다.”
“에헴, 네놈 말대로 이 몸은 전쟁을 하러 나간다는 말씀.”
“칫! 요즘은 몬스터 몇 마리 잡으러 가는 것도 전쟁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
자신의 말에 계속해서 아르티어스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브로마네스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전쟁이니까 전쟁이라고 하는 거지. 들어는 봤냐? 영지전이라고…….”
“그럼 진짜 호비트들과 싸우는 거야?”
“물론이지. 3일 후, 도렌 영지로 출발한대.”
도렌이라는 명칭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도렌? 처음 듣는 이름인데……?”
“코딱지만 한 영지의 이름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그러면서 브로마네스는 기세 좋게 한 잔 쭉 들이켠 후, 잔을 탁 내려놓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적진을 치고 들어가서 상대편 영주의 목을 썽둥 베기만 하면 곧바로 중대장이라는 말씀. 아니, 어쩌면 대대장을 해 달라고 부탁할지도 모르지.”
당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만 해대는 브로마네스가 너무 답답했는지 아르티어스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너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냐?”
“농담이라니.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며 말하는 건데.”
“가끔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를 하니 그렇지. 너 도대체 유희를 해 본 게 언제냐?”
“흠, 마지막으로 유희를 해 본 게 언제였더라?”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던 브로마네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브로테어를 낳기 전이었으니까, 정확히 845년 됐군. 그러고 보니 유희를 안 해 본 지 꽤 되긴 됐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아르티어스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브, 브로테어를 낳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설마… 너 헤즐링을 말하는 거냐? 그런 거야?”
깜짝 놀라 다급히 되묻는 아르티어스의 질문에 브로마네스는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으며 대꾸했다.
“헤헷, 뭐 대충 그런 거지…….”
순간 아르티어스는 진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녀석도 자신처럼 애 키우는 건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저놈은 몰래 숨어서 남들 하는 거 다해 봤 다는 말이다.
“망할! 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지금까지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식 놈 하나 낳아 기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냐? 일족을 보존하기 위해 후손을 봐야 할 의무도 있고 말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이 자랑스러운지 연신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르티어스는 치미는 질투심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저놈이 헤즐링을 낳아서 키우고 있는 줄 알았다면, 나도 키웠을지도…….?
“대체 어떤 놈한테 씨를 받은 거냐?”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를 받긴 개뿔이. 다 늙어서 헤즐링 낳는 것도 쪽팔려 죽을 지경인데 말이야. 그냥 혼자서 했어.”
자가수정 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놈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테니, 녀석의 아들은 브로마네스와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겼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와 똑같이 생긴 레드 드래곤이 한 마리 더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약간 묘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녀석에게 브로테어가 있다면, 자신에게는 다크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해도, 불현듯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도 알 하나 낳아서 살뜰하게 키워 볼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환생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아들놈을 찾아 정처 없이 대륙을 헤매는 것보다는 그게 더 확실할 수도 있으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복수가 우선이야. 일단은 지금 하고 있는 복수부터 확실하게 마무리하고 생각하자. 기왕에 늦은 거, 지금 낳으나 나중에 낳으나 무슨 상관이 있 겠어.”
이때, 브로마네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 그건 왜 물었냐? 내가 유희를 마지막으로 해 본 게 언제인지 말이야.”
“참, 그 얘기를 하고 있었지. 유희는 안 했다손 치더라도 레어 밖으로 나다닌 적은 있을 거 아냐?”
“당연하지. 자네하고 얽혀서 밖에 나가기도 했었고, 브로테어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려고 나간 적도 있었지. 그 외에도 뭐, 여러 가지 일로 들락거리기는 했어. 참, 얼마 전에 자네를 데리고 갔었던 그 정보 단체도 그러는 와중에 알게 됐었지. 생각보다 꽤 똘똘한 놈들이야. 모르는 게 거의 없더라니깐.”
“그 얘기는 됐어. 젠장. 내가 왜 자네에게 언제 밖에 나갔었는지를 물어보는가 하면, 겉으로 대충 훑어봤을 때는 호비트들 세상이 별로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보여도 꽤 많은 게 바뀌었으니 하는 말이야.”
“바뀌긴 뭐가 바뀌어? 너하고 돌아다닐 때나, 지금이나 별로 바뀐 것도 없구만…….”
“아냐, 그렇지가 않아. 우리 입장에서는 그리 바뀐 것도 없지만, 호비트들 입장에서는 많이 바뀌었지. 특히나 타이탄이라는 게 만들어지기 이전과 이후가 말이야.” 옛날, 아르티어스와 브로마네스가 함께 유희를 즐기던 그 시절에는 타이탄이라는 게 없었다. 타이탄과 같은 가공할 만한 위력의 마법 병기가 없었던 만큼, 국왕의 힘은 그리 크지 못했다. 물론 개중에는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던 왕도 간혹 있긴 했지만, 그가 늙거나 죽은 후에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제자리로 되돌아 왔다.
그런 이유로 국왕이 영주들을 휘어잡기 힘들었다. 지금과 비교해 보면 왕국이 아니라 공국(國)에 가까운 상태였다. 몇몇 영주들이 힘을 합치기라도 하면 오히려 왕의 군사력보다 더욱 강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왕이라고는 해도 영주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었다.
그렇다 보니 이웃 영주들과 전쟁을 벌이는 일이 아주 잦았다. 상대의 땅을 조금이라도 더 뺏을수록 자신의 힘은 증가했으니까. 그러다가 전쟁터에서 이웃 영주를 해치우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횡재하는 셈이었다. 상대의 영지를 통째로 꿀꺽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왕권이 너무나도 강력해져서, 왕국 내의 모든 영주들이 연합해서 달려든다고 해도 국왕의 기사단을 이길 수가 없는 세상 이 된 것이다.
절대왕권 앞에서 모든 영주들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일부 사유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국토는 국왕의 소유였고, 영주는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영지를 관리할 뿐이었다.
국왕이 파견한 대리인인 영주를 무단으로 참살했다가는 자칫 반역죄까지 뒤집어쓸 우려까지 있었다. 그런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서까지 영지전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물론 있었다. 상대방 영주와의 갈등은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다툼의 경우, 국왕이 허락해 주는 게 관 례였다.
영지전을 완전히 금지시키면, 어느 영주가 군사력을 키우는 데 엄청난 돈과 열정을 쏟겠는가. 열심히 사병(私兵)들을 키운 데 대한 보상 차원에서라도 그 병사들 을 써먹을 데가 있게 해 줘야 했다. 그렇게 해 놔야 나중에 타국과 전쟁이라도 붙게 되면, 각 영주들의 사병들을 징집해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게 되니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설명을 들은 브로마네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젠장! 그렇다면 영주의 목을 베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쯧쯧, 그걸 이제야 알다니…….’
잠시 난감한 듯하던 브로마네스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갑자기 쾌활하게 말했다.
“상관없어. 그렇다면 영주는 빼고, 그 밑에 있는 다른 높은 놈의 목을 베면 되지. 수많은 병사들이 격돌하는 전장의 중앙을 뚫고 들어가 적장의 목을 단숨에 베는 무명(無名)의 기사. 크! 어때? 완전 한 폭의 그림이잖아.”
열과 성을 다해서 설명을 해 줬더니,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조언을 해 봐야 자신의 입만 아프다는 것을 느꼈다.
“에휴~ 미쳐 버리겠군…….”
아르티어스가 답답해하건 말건, 브로마네스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그 모가지 한 개로 나는 중대장이 되는 거야. 크하하핫!”
한참을 호쾌하게 웃던 브로마네스는 뭘 생각했는지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적장을 어떻게 베어야 그 장면이 더욱 멋있게 보일까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첫 번째 재물인데 대충 잘라 버릴 수야 없지. 다른 호비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