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52화
1387화
제도 안티로스의 수많은 굴뚝에서 몽글몽글 연기가 올라왔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이기에 집집마다 아침을 준비 중인 것이다. 덕분에 맛있는 냄새가 길 여기저기에 넘쳐났다. 이드와 일행들이 저택에 도착한 것도 딱 이때였다.
마법으로 편히 공간을 넘은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사방에서 흘러들어 온 맛있는 냄새에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밤새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아, 갑자기 배가 고픈데.’
일부러 굶긴 것은 아니다. 그 난장판에서 뭘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이나 있었던가.
“모두 지쳤을 터이니, 길게 말하지 않겠다.”
이런 상태를 모르지 않는 검후가 일행들 앞에 섰다.
그 모습에 언제 고픈 배를 움켜쥐었냐 싶게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칼 같은 정자세를 하는 기사들.
기사가 아닌 비올라 등도 덩달아 허리를 쭉 폈다. 그 모습을 본 검후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길고 힘든 밤이었을 텐데, 고생들 했다. 그대들의 노고는 늦더라도 충분히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선은 바벨이 할 것이고, 바벨이 하지 못한다면…….”
“합니다! 처음부터 은색 기사단의 수고에 대한 보상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훗. 그렇다고 하니, 기대하지.”
은근히 압박을 주는 검후의 말에 반사적으로 나섰던 라울은 이어지는 검후의 은은한 미소에 내심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긴 했지만, 갑자기 수고한 자들에 대한 보상이라니. 사전에 그런 말은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말을 하는데 그런 거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쪼잔해 보이게.
‘아무렴 바벨의 체면이 있지. 그게 아니라도 이들이 바벨을 위해 고생한 것은 사실이니까.’
플레타 부대의 경우야 바벨에 속한 이들이거니와 본인들의 일이기 때문에 따로 보상안을 준비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은색 기사단의 경우는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특히 플레타 부대가 무력화되었을 때 그녀들의 도움도 매우 주요했다.
그런 부분을 검후와의 거래라는 명목하에 대충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엔 은색 기사단과 바벨의 이름이 너무 컸다.
‘지출은 좀 크겠지만, 그래도 멀리 보면 나쁜 일은 아니다. 이걸 기회로 은색 기사단과도 돈독한 관계를 쌓으면 좋고.’
사실 그 지출도 바벨의 규모를 생각하면 티도 나지 않는다. 아무렴 기사들에게 안티로스의 저택 하나씩을 안겨 줄 것도 아니니까. 거기에 관계가 좋아지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이라도 싹틀지.
라울은 기사들의 도움에 부끄러워하던 부대원들을 떠올렸다. 무식한 플레타 아래서 구르고 구르며 싸우기만 해서 순진한 놈들.
‘내가 너희에게 구명줄을 내려 주는 것이다. 고마운 줄 알아라.’
물론 그걸 잡는 건 각자의 용기와 재주에 달렸다. 물론 그 용기를 낼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만.
‘그건 걱정이 없을 듯하단 말이지.’
라울은 앞에 선 검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으로 이동하며 이드, 라미아, 일리나를 살폈다. 영혼의 관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강적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도 이긴 만큼 하나같이 표정이 밝다.
하지만 그것이 전투의 끝을 말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과 함께하다 보면 앞으로 이번과 같은 싸움이 또 있을 터였다.
더욱이 버서커를 일으키는 혼돈의 파편도 아직 남아 있지 않던가. 초인에게 있어 암적인 존재인 그놈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싸움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 자리에는 플레타 부대가 함께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라울은 오늘 밤 플레타 부대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플레타 부대에 있어서는 행운일지, 불행일지 헷갈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겠지만 말이다.
뭐, 그 결과야 모든 것이 끝나면 알 수 있을 터였다. 짝이 생긴 놈은 행운이라 말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놈에겐.
그사이 짧은 격려를 마친 검후는 발언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다들 고생이 많았다. 들어가서 마음껏 먹고 마신 후 쉬어라. 쉴라 단장.”
“예. 검후 님.”
“내일까지는 완전한 휴식 시간이다. 당연히 훈련도 금지다. 아니, 내일까지는 검을 잡지 못하도록 하라.”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검후의 말에 기사들이 반짝거렸다. 그중 몇은 볼이 발그레해질 정도로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경계는 무조건 세워야 합니다.”
물론 쉴라 입장에선 간단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검후의 안전은 절대적이고 최우선적이기 때문이다.
검후도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강요하진 않았다.
“그럼 경계는 최소로 하라. 지붕 위에 두 명 정도면 되겠지?”
“그건 너무…”
적다. 적어도 너무 적다.
“적은 건 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이 숫자로도 충분하다. 나와 이드 명예 후작이 있지 않으냐.”
“・・・・・・ 명을 따릅니다.”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명을 받는 쉴라였다.
이드까지 갈 것도 없이 검후의 기감이 닿는 범위만 해도 저택을 감싸고도 남는다. 은밀히 침입을 시도한다면 경계보다 검후가 먼저 알게 될 것이다. 검후가 이런데 이드는 어떨까.
쉴라도 이런 사실을 알기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보호해야 할 대상이 직접 경계에 도움을 준다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사들을 아끼는 검후의 마음을 거부하는 것도 예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급 기사를 중심으로 경계를 짜겠습니다.”
“그렇다는구나. 좋으니?”
“넷!”
미소로 질문을 던지는 검후에 힘차게 대답하는 기사들. 그에 쉴라가 기사들을 살짝 노려보지만, 그게 끝이었다. 지금과 같은 행동이야말로 기사단과 검후가 친근감을 나누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철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검후가 기사들을 워낙 딸처럼 손녀처럼 귀여워하다 보니 생겨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대신 그렇게 즐거운 가운데, 몇몇 기사들은 기뻐하면서도 아쉬운 기색을 하고 있었다. 검후는 이런 모습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하마터면 자칫 사고가 날 걸 늦지 않게 차단했으니까.
사실 검후가 내린 휴식은 단순히 수고의 의미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 기사들에게 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충격적인 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뿐이라면 훈련을 금지하고, 검을 잡지 못하게 할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검을 휘두르는 것이 휴식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당연히 은색 기사단에도 그런 별종이 몇 있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위험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밤 기사들이 받은 자극이 정도를 넘어설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드와 존 워스의 전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전투는 지금까지 기사들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검을 휘두르는 그나마 인간적인 모습도 그러했고, 이후 인간의 모습을 버린 순간도 그러했다.
그 전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생 잊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평범한 사람도 이런데, 기사들의 입장에선 어떨까. 아마 대부분의 기사들은 지금 눈만 감으면 눈앞에 그 장면이 아른거릴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흐를 거다. 이건 정말이지 예외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눈앞의 기사들은 그녀가 가르쳤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하는 말이다.
아무튼, 기사들은 한동안 이렇게 눈을 감을 때마다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을 느끼게 될 거다. 비록 당장 그녀들이 무언가를 얻기에는 수준의 차이가 너무 격렬하지만, 그럼에도 강렬한 영감을 전달받기에는 차고도 넘친다.
이런 현상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예술가만큼 무공 수련자에 중요한 것이 심상이니까.
문제라면 이게 파괴적일 정도로 강렬하다는 점이다. 이드와 존 워스가 전하는 영감은 폭풍이고 해일이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자연재해라는 말이다.
그에 휩쓸리는 순간 정신과 기가 흔들리고, 종국에는 검이 파탄이 난다.
수련 중 크고 작은 부상이야 피할 수 없는 일. 호들갑을 떨 것도 없고, 보통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피륙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기가 상하면 그건 웃어넘길 수 없는 사태가 된다.
심마. 정신과 기를 흔드는 원인을 가리켜 심마라고 한다. 즉, 이드와 존 워스가 전하는 파괴적인 영감은 심마의 다른 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심마에 빠지는 순간 찾아오는 주화입마.
그건 단순한 부상처럼 포션 한 병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공을 연구하던 초기 여러 번 주화입마를 경험한 검후였기에 누구보다 잘 아는 일이었다.
그나마 마법과 신성력의 도움을 받으면 치료가 가능하나, 크고 작은 후유증은 반드시 남는다. 특히 정신을 갉아먹는 입마의 경우는 후유증이 심하다.
검후는 자신이 아끼는 기사들이 그런 위험을 향해 돌진하도록 방치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이야 충격이 심하겠지만, 이틀. 검후가 판단하기에 이틀 정도 검에서 멀어지고 나면 일차적인 충격도 지나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쉴라에게 기사들의 상태를 잘 살피도록 따로 당부를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기사들에 대한 처리가 끝이 나자 쉴라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이 저택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저택의 굴뚝에서도 맛있는 냄새를 담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눈치 빠른 집사가 일행들의 도착과 동시에 식사 준비를 한 것이다.
“마침 배고팠는데 잘됐다. 우리도 들어가서 아침 식사를 하죠.”
“라울 경도 함께 할 텐가?”
“・・・설마 이대로 돌아가라 하려 하셨습니까? 매정하십니다.”
검후의 권유에 라울이 기운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그래 봤자 검후에는 바늘끝 만큼도 통하지 않는 수작이었지만.
“매정이라. 원한다면 진짜 매정이 뭔지 알려 주겠네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참, 힘의 관계가 분명한 두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는 마침 기사들과 함께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비올라를 볼 수 있었다.
휘청휘청 다리에 힘은 없고, 등과 어깨는 굽었으며, 머리도 툭 떨어져 있다. 딱 며칠 굶은 거지가 연상되는 모습이다.
‘그것도 아니면 고백했다가 멘탈이 나간 청춘이거나………………?’
그러나 비올라는 둘 다 해당하지 않았다.
“왜 저래?”
“아, 소중한 걸 잃어서 그래요.”
“소중한 거?”
“바이트 타블렛이요. 사라졌잖아요. 그렇게 목을 매고 연구에 매달렸는데.”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