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64화
1399화
새로운 왕.
스폴의 말을 가만히 되뇌는 검후.
함께한 사람들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검후의 모습은 저 마스 국왕의 반응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서로 닮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레센 땅을 지배하는 지배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스폴 경. 왜 괜한 말을 꺼내는 것이냐!”
이런 검후의 반응에 쉴라가 무서운 눈을 하고서 스폴을 노려봤다. 그러자 스폴은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했다.
“아니~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차피 다 알아서 비밀도 아닌 일인데.”
“그래서! 지금 잘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잘못했습니다.”
소심한 스폴의 반항은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편안한 자리라면 스폴의 놀림감인 쉴라이지만 검후 관련이나 공적인 일에서는 철벽과 같았기 때문이다. 스폴은 내심 두고 보자며 복수를 다짐하는 동시에 소심하게 몇 개 남지 않은 쿠키를 씹는 것으로 분노를 삭였다.
물론 그렇다고 스폴에게 반성의 기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말에 심각해진 검후의 반응을 봤기 때문이다. 검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라면 쉴라에 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스폴로서는 절로 눈치가 보인 것.
“나는 괜찮으니까 그만하렴.”
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검후가 말했다.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 때문일까. 굳었던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스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너무 민감하게 굴었지.”
“송구한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스스로를 탓하는 검후에 쉴라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거기에 추가해 다시 한번 스폴을 노려보자, 스폴도 함께 나서 검후의 심기를 달래기 시작했다.
검후는 그런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거, 검후님…….”
물론 반응은 좋지 않았다.
특히 쉴라가 그랬다. 은색 기사단뿐이라면 몰라도, 이 자리에는 외부인도 함께였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아이 같은 취급을 받으니 부끄러웠던 것.
“왜. 싫으니?”
“그・・・・・・ 그건 아닙니다만.”
감히 어떤 분의 손길인데 싫다고 답할 수 있을까. 갈등이 가득한 쉴라의 모습에 검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손길을 거두지 않은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라울과 눈을 마주친 검후.
“오늘 이 자리에 있었던 일은……”
“당연히 제가 다른 곳에서 흘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안심해 주십시오.”
“・・・・・・ 믿지. 자, 저렇다는구나. 그럼 조금 더 쓰다듬어도 괜찮지?”
“……네.”
대답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아 버리는 쉴라.
검후는 그 모습이 귀여워 또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대단한 은색 기사단장도 그녀에겐 귀여운 딸일 뿐이다.
쉴라에겐 다행스럽게도 쓰담쓰담이 더 이어지진 않았다. 잠시 끊어졌던 이야기가 다시 제 궤도를 찾아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온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일단 무겁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이유는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드는 아직 얼굴이 붉은 쉴라와 그런 그녀를 보며 여전히 쿠키를 갉아 먹는 스폴이 참 고마웠다.
두 사람이 검후에게 어떤 위로가 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고 할까.
그러는 사이 검후는 스폴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보자, 마스의 국왕이 검왕과 손을 잡겠냐고 물었지?”
“음…… 네.”
고개를 갸웃한 스폴이 답했다.
추가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저것이 그녀가 던진 질문의 핵심 내용이었다.
“당연히 잡겠지.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확실한 이득이 있다면 다른 눈치를 보지 않는 과감함이 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역시 뭔가 더 있구나.
그런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스폴에 검후는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검왕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는 건 다른 문제지.”
“그럼 역시나?”
“그래. 마스의 왕은 절대 검왕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란다. 마스의 왕뿐 아니라, 그레센을 지배하고 있는 왕이라면 모두 그럴 것이야. 이유는 많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혹시 알겠니?”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
재미 삼아 질문을 던진 검후는 동시에 라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물었다. 너는 아느냐고.
그에 라울이 고개를 끄덕일 때, 잠깐 고민하던 스폴의 입이 열렸다.
“땅…… 이 아닐까요?”
“왜 땅이라고 생각했니?”
“새 왕국이 생겨나기 위해선 땅이 필요한데, 사하의 땅 말고 이 그레센에 주인 없는 땅은 없잖아요. 그럼 결국 누군가는 땅을 내놔야 한다는 말인데. 훗!”
말을 하던 스폴은 비웃음을 담은 콧방귀를 날리며 두 손을 들었다.
“자기 땅을 얌전히 내어 줄 멍청이가 세상에 어딨겠어요. 어림도 없지.”
그렇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당장 한 뼘의 땅을 더 얻기 위해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국가다. 그런데 그 땅을 내어 줘야 할 상황을 순순히 인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이야말로 지배자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고 해야 옳았다.
이드는 냉소적이기까지 한 스폴의 말을 들으며 일리나를 돌아봤다.
“왜요?”
“아니, 일리나가 저 말을 이해하나 싶어서요. 아무래도 인간의 일이잖아요.”
숲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엘프 사회와 욕망으로 굴러가는 인간 사회는 그 뿌리부터 색깔이 달랐기 때문에 나온 궁금증이었다.
그에 일리나는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있죠, 엘프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에 대해 잘 알아요. 심지어 어떤 부분에선 인간 본인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죠.”
하긴, 달리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 그레센 땅에서 엘프가 존재한 시간이 얼마인가. 세는 것조차 아득할 정도로 긴 시간을 함께했다.
인간뿐 아니라 각 종족의 특성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개개인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집단을 형성한 인간의 행동 방식은 뻔하다는 것이 엘프의 입장이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인간의 왕국이 수없이 생겨나고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일리나가 이드를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기초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드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검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정확하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어차피 그건 다 부질없는 것들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건 땅이란다. 그리고 그 땅을 채울 백성, 왕이라면 어느 하나라도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들이지. 그렇기에 검왕을 인정할 왕은 없단다.”
“그럼에도 일단 협력하는 척은 하겠군요?”
“그래. 협력의 우선권을 쥔 건 마스니까. 하지만 마스가 검왕에게 협력하는 일은 없겠지.”
다시 말해 마스가 검왕을 이용해 먹고 버릴 거라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저 검왕이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마스와 손을 잡을까?
“잡을 수밖에 없겠지요. 검왕에게 그 말고는 선택지가 없을 테니까요.”
라울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쉴라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못마땅한 눈빛을 한 채 대꾸했다. 감히 누구 앞에서 다리를 꼬는 것인가.
“검왕이라면 다음 기회를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이렇게 검후님이 계신데, 어떻게 말입니까?”
“용서를 빌거나. 그것도 아니면 잠시 모습을 숨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신이 말을 하고서도 근거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쉴라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물론 라울이 그녀의 질문을 비웃는 일은 없었다. 여긴 자신의 서재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가 내던진 것이 너무 크죠. 지금이 아니면 그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겁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용서를 비는 건. 어떻습니까? 그가 용서를 빈다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흥, 어림도 없지.”
칼 같은 검후의 대답에 라울이 빙긋이 웃음을 머금었다.
동시에 내심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검후를 상대로 자신은 용서를 받을 수 있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새삼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왕이 한 짓은 기사로서도, 제자로서도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황제가 부탁을 한다고 해도 내가 그를 용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칼 같은 답에 이어 확실히 못을 박는 검후다.
“그렇지. 말.. 씀 잘하셨습니다.”
라울을 슬쩍 돌아본 이드가 검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에 라울이 갑자기 호기심이 솟았는지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서 물었다.
“혹시 명예 후작께서 계시던 곳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어디나 비슷한 법이니까요. 아마 다른 세상, 다른 시간에서도 이런 일은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그럼 그에 대한 처벌은 어떤 식으로 내려집니까?”
“보통은 사지근맥하고 토굴에 가둬 버립니다. 그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죠.”
“사지근맥이면, 손발의 근육과 신경을 자른다는 겁니까?”
“네. 그걸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신체의 주요 경맥을 모조리 끊어 내는 거죠. 다시는 무공을 익힐 수도 없도록.”
“그 정도면 살아 있는 시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려 두는 이유는 …..혹시 본보기입니까?”
라울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죄인을 죽이지 않는 이유를 단번에 짚어 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생각해 보면 정파에서도 끔찍한 형벌은 많았다. 특히 기사멸조에 해당하는 죄에 대한 처벌은 사파에서도 벌벌 떨 정도로 지독했다. 하지만 이드를 포함해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범해서는 안 될 잘못이고, 벌이지 않으면 처벌될 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처벌이 내려질 때 그 심판 과정은 항상 진실하고 정의로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