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67화
1402화
정확히 21분 33초 걸렸다.
연락을 받은 황제가 황궁에서 이곳 서재까지 달려오기까지 걸린 시간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황제는 가장 먼저 검후를 찾았다. 그리고 편안한 모습의 검후를 확인하고는 안심한 얼굴이 되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밤새 걱정이 컸습니다.”
눈에 핏발이 선 황제의 모습을 보면 빈말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피붙이의 반김에 검후도 기껍게 그 마음을 받았다.
“황제는 내가 누구인지 잊으셨나 봅니다. 쓸데없는 걱정은 놓고 국정을 위해 푹 주무셨어야지요.”
“검후의 안위가 곧 제국의 안위입니다. 할마마마보다 중요한 국정은 없습니다.”
검후와 제국을 동일시하다니. 황제가 아니라면 반역으로 몰렸을 말이다.
“호호호. 밤새 그 말을 궁리하셨던 모양이오. 듣기는 좋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할마마마.”
기분 좋게 웃는 검후와 짐짓 기분이 상한 체하는 황제.
참으로 화기애애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걸음 떨어져 이 광경을 지척에서 지켜본 라울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건 좀・・・・・・ 충격적인데.’
이전에도 한번 황제가 달려온 적이 있었다.
자신도 그로 인해 식은땀을 꽤 흘려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검후의 무게를 새삼 실감하기는 했다.
관련된 문제가 가볍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굳이 황제가 직접 달려오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검후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황궁에 있던 황제를 황궁 밖으로 달려 나오게 만드는, 그런 존재.
사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도 있었다. 검후의 납치를 계획하며 살펴본 자료였다.
하지만 글로 읽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더욱이 그 자료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미묘한 균열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이런 광경은 상상하지 못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권력을 사이에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로열 블러드가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다만, 그날 한달음에 달려오는 황제를 보고 두 사람이 관계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균열이 있었지만, 이제는 메꾼 걸 수도 있었고.
그런데 이런 판단도 좀 섣불렀나 보다.
검후의 부름에 달려오는 황제의 속도가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
겨우 21분 33초라니.
‘혹시 황궁과 이 저택 사이에 땅굴이라도 뚫린 건 아니겠지?’
그 신속함에 어이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속도가 아니라 서재에 들어온 후에 보여 준 황제의 반응이었다.
황제가 누구던가.
최강국 아나크렌 제국의 유일무이한 지배자가 아닌가.
손짓 하나로 수천의 기사를 움직이고, 말 한마디로 왕국의 경제를 휘청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분명 그렇게 고귀하고 위엄있는 존재였는데.
지금은…….
‘아무리 봐도 그냥 귀여운 손자 같잖아.’
라울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서도 두려웠다. 과연 제국의 황제를 이렇게 평가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어쩌겠나.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한 것뿐인데.
‘이건 말해 봤자 믿을 놈이 아무도 없겠는데.’
라울은 자신이 보고 있는 사실에 대해 침묵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국의 황제가 검후 앞에서 귀엽게 애교를 부린다?
어디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냐고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다. 플레타 놈이 주먹이나 휘두르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울은 저 멀리 황궁을 돌아보았다.
황제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황궁의 업무가 모두 멈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이 거대한 만큼 황제가 살피고 처리해야 할 사안은 한둘이 아니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업무량이랄까.
스케줄이 그야말로 분 단위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대신들과 조례를 하거나 중대 사항에 따라 대신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어야 하는 시간. 무엇보다 영혼의 관이 붕괴되고, 하늘을 달리는 초록빛까지. 중대 보고 사안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보고를 받고 명령을 내려야 할 황제가 갑자기 자리를 비웠으니.
대신들은 그야말로 혼란한 상황에 빠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미안하네.’
라울은 그들을 향해 심심한 사과의 말을 띄워 보냈다.
바람처럼 자리를 비우는 상사라니. 비밀이지만 라울은 그런 상사를 둔 대신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바벨의 총수가 바로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음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대한 조직의 간부로서는 모시기 힘든 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총수를 떠올린 라울은 자연스럽게 이드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 총수와 대면할 기회를 만들긴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할 것 같은데, 가 아니라 꼭 그래야 했다.
이전엔 가까이 지내서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꼭 친해질 필요가 있는 인물이 바로 이드였다.
그건 앞으로 남은 혼돈의 파편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동시에 바벨이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협력은 아니라도 최소한 친분은 다져 놓아야 할 대상이 이드였다.
라울에게 이드의 중요도는 저기서 연신 웃음을 보이는 황제에 모자라지 않았다. 아니, 그게 최소한이었다.
책임과 결정이 쉽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조심해야 할 상대였다.
제국과 관계가 불편해지면 그저 불편할 뿐이지만, 이드와 관계가 불편해지면 그 즉시 검이 날아온다.
바로 그런 차이다.
그렇게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라울의 시선을 느낀 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뭡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식간에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라울.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지만, 이드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런다고 사실대로 말할 인물도 아니었고, 반응을 봐서도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검후와 충분한 대화를 나눈 황제가 서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특히 쉴라와 스폴은 그의 시선에 기사의 예를 표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직접 두 사람을 일으키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 주었다. 자칫 대륙에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해결하였으니, 그대들의 공이 참으로 크다.”
“황공하옵니다.”
“공식적으로 그 공을 치하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함이 아쉽다. 그러나 나는 방법을 찾아 그대들의 공에 맞는 포상을 내릴 것이다.”
아무렴 몰래 국경을 넘어 적국의 중요 전략 자산을 파괴했다. 이미 전쟁 중이라면 몰라도, 그 문제로 인해 한창 전쟁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라면 공공연히 밝힐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넘어 명분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해당 작전의 주체도 제국이 아니라는 점도 컸다.
물론 검후가 해당 작전에 참가한 시점에서 제국의 일이 아니라고 한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또 그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볼 당사자 중 하나가 제국이기도 하니까.
그런 만큼 이 일은 공식화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묻어 두고 넘어갈 생각도 없는 황제였다. 그러기엔 그에 관련된 인물들이 하나같이 너무도 중요했다. 황제는 그 중요 인사 중 가장 첫손에 꼽힐 이드를 향했다.
“특히 명예 후작의 활약이 컸다고 들었소. 할마마마와 은색 기사단을 지켜 준 그대의 노고는 특별히 잊지 않을 터. 그에 대해서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소.”
황제가 표하는 직접적인 감사.
이건 분명 특별한 일이었다. 이번 습격 작전에 함께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하지만 이드의 정체를 알고 있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외부인이 있기에 최대한 표를 내지 않으려 한 것.
물론 그럼에도 라울은 그 자체로 이미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에 대해 이상한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과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건가. 어떻게든 제국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황제가 저렇게나 신경을 쓰는 걸 보면 말이야.’
제삼자 입장에선 이드의 정체를 알지 못해도 그 가치가 변하는 일은 없다. 특히 라울은 지난밤 이드의 활약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황제의 이런 행동은 그에게는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사실 가능하다면 자신도 나서서 이드를 바벨로 끌어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상태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검후의 존재로 인해 나서지 못할 뿐이다.
‘어쩐지 이 문제가 두고두고 속을 썩일 것 같은데……………’
라울은 불길한 예감에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래 봤자 어차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 황제의 치하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둘러앉았다. 황제와 이렇게 편히 자리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고작 그 정도에 흥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마마마께 짧게 이야기는 들었소. 하지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누가 설명을 해 주겠소? 특히 새벽부터 하늘이 초록빛으로 빛났다는 긴급 보고가 있었는데. 아마 그것도 그대들과 연관이 있겠지?”
역시 황제도 그 문제로 인해 일찍 보고를 받은 것 같다.
워낙 심상치 않은 일이다 보니, 황제의 잠 시간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황제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예 잠을 자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말보다는 직접 보시는 쪽이 더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라미아가 나섰다.
황제는 그 말에 기꺼운 미소로 답했다.
“나도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럼 명예 후작 부인께서 나를 위해 고생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귀부인이다 보니 말이 좀 더 정중해지는 황제.
그에 고개를 끄덕인 라미아는 중앙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 지난밤의 행적을 풀어 놓았다.
시작은 산 위에서 영혼의 관을 내려다 보는 일행들의 모습이었다. 탁자 위에 선 이드의 모습은 새끼손가락 보다 작았다.
그러나 누가 누구인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라미아가 따로 처리를 한 듯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또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묘하게 빨랐다.
“원래 속도로 하면 너무 오래 걸리거든요.”
“그렇지요. 그럼・・・・・・ 세 배속으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황제 폐하.”
라미아의 대답과 함께 탁자 위에 펼쳐진 세상이 갑자기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