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22화 – 각성 (1권 끝)
각성
“제기랄, 언젠가 이런 일을 한 번 당해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하기야. 헉헉, 이런 일을 두 번이나 당할 리가 없지. 내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 군. 제기랄, 헉헉.”
국광이 죽자고 도망치고 있었지만 흑의와 적의를 입은 자들의 추격은 집요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국광을 향해 암기를 날려 댔다. 벌써 국광 의 등에는 장거리의 적에게 공격하기에 알맞게 만들어 놓은 다섯 치(약 15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묵직한 암기인 혈령전다섯 개나 박혀있었다. 물론 이것들은 호신강기 때문에 피부 속으로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옷에 덜렁거리며 붙어 있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암기란 쇠털처럼 가늘고 가벼운 흑모침(黑毛針)부터 혈령전처럼 크고 무거운 것까지 수많은 종류가 있다. 가늘고 가벼운 것들은 보통 공력으로 날리 며 대부분이 2장(약 6미터) 이상 거리가 벌어지면 맞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혈령전처럼 무거운 것들은 공력과 힘을 이용해서 날리면 무게가 있기에 대단히 멀리 날아가며 거리를 벌리고 도주하거나 돌진해 오는 적들을 향해 사용한다. 이걸 한두 대 쏴 봐야 피하면 그만이지만 뒤쫓는 모든 무리들이 쏘아 대다 보니 한두 방은 맞고 그중에서 공력이 높은 녀석들이 쏘아 대는 것만 피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공력이 높은 자가 쏘는 건 호 신강기를 뚫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또다시 뒤에서 파공성과 함께 무서운 예기가 느껴졌다.
“누굴 바보로 아나?”
예기가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순간 국광은 뒤로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합!”
캉!
검은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가 옆의 나무에 깊게 박혔다. 그걸 본 국광은 또다시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국광은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 렸다. 이때 또다시 뒤에서 파공성이 들려왔다.
‘멈추지 말고 해결하자. 이런 식으로 계속 멈추면 따라잡힌다.’
국광은 멈추지 않고 달리면서 고개를 뒤로 살짝 돌렸다. 저 뒤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는 검이 보였다. 적당한 시간을 재서 국광은 멈추지 않 고 몸만 살짝 뒤로 돌려 묵혼을 휘둘러 쳐 냈다.
캉!
불꽃을 튀기며 옆으로 떨어지는 검을 보며 국광은 신이 나서 외쳤다.
“크흐흐흐, 나는 살아날 수 있어…, 억!”
풍덩!
뒤에서 날아오는 검에만 신경 쓴다고 앞을 보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하기야 어두운 밤이라 거의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안 보는 것보다는 보는 게 낫지 않은가.
“어푸푸, 이게 뭐야!”
묵향은 공력을 운기해서 배에 꼽힌 검을 간단히 뽑아낸 다음 물 밖으로 나왔다.
‘몸 사정이 말이 아니군…………..
그 즉시 북명신공(北冥神功)을 운용하여 주위의 대지로부터 공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묵향의 몸은 투명한 청광(靑光)을 냈고, 그 밝은 빛은 쫓아오 던 무리들이 묵향의 위치를 포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묵향의 몸에서 청광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고 능비계가 해공공에게 물었다.
“해공공, 황궁무공 중에서 저런 것도 있습니까?”
“글쎄…, 저건 처음 보는 것 같군. 하기야 미완성의 무학들이 스무 개 정도 있고, 또 황궁무고 안에 있는 모든 무공을 내가 알 수는 없잖아.”
“그렇군요.”
능비계는 좀 찝찝한 마음을 느끼며 묵향에게로 다가갔다. 어느덧 묵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청광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미약한 빛 만 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모두들 그 아름다움과 괴기함에 질려 묵향의 주변에 모여 포위하고 섰을 뿐, 더 이상 접근하는 바보는 한 명도 없었다. 묵향은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눈 채 눈치만 보고 있는 흑, 적, 황색의 옷을 입은 무리들을 보며 말했다.
“이런, 비겁한 자식들! 네 녀석들이 쓴 방법은 내 방법이란 말이야! 감히 내가 즐겨 쓰는 방법으로 나를 기습해서 이 지경을 만들다니……”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아리송한 말에 모두들 이상한 표정으로 옆 사람의 얼굴을 쳐다봤다.
‘저 자식이 미쳤나?”
하지만 이들은 어둠 때문에 가장 간단한 것을 한 가지 놓쳐 버렸다. 어느새 묵향의 상처가 다 나아 버린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교주가 나 모르게 별의별 종자들을 만들어 뒀군. 크흐흐흐, 감히 나한테 검을 들이밀다니· 거기에 추격대의 두목은 능비계인가?”
묵향은 무심히 조금 높게 쳐들었던 검을 아래로 내렸다. 천천히. 그걸 본 능비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검을 왜 내렸을까? 검을 허리 아래로 내리는 것은 별로 좋은 자세는 아닌데. 거기에 검을 내리는 기세는 산악과 같이 무거운……………?
“피해랏!”
그와 동시에 무형의 검풍이 일으키는 회오리에 늘어선 검수들은 충격을 받고 나뒹굴거나 튕겨났다. 그때를 놓칠 묵향이 아니다.
“오늘이 네놈들 제삿날이다.”
묵향은 거의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 나오며 검을 휘둘렀고 무시무시한 강기의 회오리가 묵혼검을 통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아아, 무림에서 잊혀 진 저주받은 검법이 회생하는 순간이었다. 무상검법(無上劍法)이라 불리는………………
‘클클, 다강(多剛)을 응용한 통강(通剛)…………… 감히 나한테 숫자만 믿고 덤비다니…………?
주변에 널린 수하들을 토막 내며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접근해 오는 묵향을 보고 능비계는 아찔함을 느꼈다.
‘글렀다. 각성해 버렸구나. 탈마의 고수를 상대로 도주는 불가능. 이렇게 되면 남은 길은 하나…………..?
순간적으로 능비계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며 온몸에서 적광(光)이 은은히 피어올랐다. 거기에 머리카락까지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악귀 와 같은 형상을 갖춘 능비계는 몸속의 모든 공력을 뽑아 올렸다.
“적양신공(陽神功)!”
그와 동시에 두 손을 모아 접근해 오는 묵향을 향해 모든 공력을 다해 뿜어냈다.
쿠아아아아…………….
두 손에서 붉은 강기의 덩어리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묵향은 그 강기의 덩어리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묵향은 강기의 덩어리를 피하는 수고를 생략하고 곧바로 1장 4절, 방(防)의 초식을 전개했고, 그 엄청난 강기의 덩어리는 묵향의 1장 안으로 뚫고 들어오지 못한 채 좌우로 퍼져 나가 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능비계가 회피 동작을 취하려 했을 때는 이미 묵향은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그 순간 묵혼검은 푸른 광채를 내며 이글이 글 타오르는 가운데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끼얏!”
묵향의 검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거의 타오르는 것 같은 강렬한 청광을 내기 시작한 데다 능비계가 일초에 두 토막이 나자 모두들 경악했다. 이제서 야 모든 흑의를 입은 자들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부교주의 기억이 돌아왔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묵향에 대한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마교의 1백 위권 내의 모든 고수들과 주요 무 력 세력들이 총집합했던 일을 그들은 기억했다. 그만큼의 준비를 해야만 감히 척살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때는 다행히도 연이은 암습 으로 큰 피해 없이 거함(巨艦)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기억까지 되살아나 웬만한 방법으로는 그를 암습한다는 건 꿈도 못 꿀 것이다. 거기에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단 하나의 약점으 로 꼽혔던 동자공도 가짜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능비계까지 두 토막이 나서 쓰러진 지금 그들은 한 가지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부교주님・・・, 용서를…….”
흑의를 입은 자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한 채로 그 말만을 내뱉었다. 오히려 칼 들고 싸우는 것보다는 이쪽이 생존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사태의 반전에 당황한 쪽은 황궁의 무리들이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죽자고 싸워도 시원치 않은 판에 겨우 두목이 죽었다고 저 야단이라니…………. 마교도 완전히 말뿐이었군.’
해공공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깔깔깔, 마교도 별거 아니군. 겨우 두목이 죽었다고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깔깔깔, 거기에 마교의 최고고수라는 자들이 쓰는 무공이, 깔 깔, 저렇듯 무식하게도 정면충돌이나 일삼다니. 무예의 기본조차 모를 줄이야, 깔깔.”
묵향은 이 비남비녀(非男女)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한 수 하는 작자란 것은 그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는데, 도대체가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인 것 이 수상쩍었다. 거기에 귀에 거슬리는 고음(高音)의 웃음소리……………
‘3년 전에 먹은 게 올라오려고 하는군. 징그럽게…………?
묵향은 묵혼검에 쏟아 붙던 공력을 회수하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묵혼검에서는 더 이상의 광채가 나지 않았다.
“귀하께서는 누구십니까?”
뜻하지 않은 묵향의 정중한 물음에 해공공이 말했다.
“본좌는 해공공이라고 하지.”
“아! 해공공 나으리시군요. 황궁에서 무림의 일에 관여를 하시다니 의외로군요.”
그 질문에 어리둥절해진 건 해공공.
이놈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지? 무림이 황궁의 일에 관여를 한 건데…………. 아하, 지금은 마교와의 은원을 매듭짓는 자리니 순순히 떠나라는 협박인가……”
“깔깔깔, 황궁이 무림의 일에 관여할 수도 있지. 서로들 관여를 안 한다고 하지만, 예전부터 비밀리에 계속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거나 방해를 해오지 않았나?”
해공공을 향해 슬그머니 공력을 뿜어내며 묵향이 아직도 공손하게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소인은 이번에는 황궁이 너무 깊게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뎁쇼?”
“흥! 황궁이 어떤 일에 어떻게 간섭하든 네놈이 알 바가 아냐. 무림인들은 황토(皇) 위에 사는 신민(臣民)이 아니란 말인가?”
“아닐 수도 있죠.”
“네놈이 뭘 믿고…, 헉!”
펑!
해공공이 무형의 검풍에 휘말리며 중심을 잃는 그 짧은 순간은 묵향에게 해공공을 해치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묵향은 순간적으로 앞으로 튕겨 나가며 진기를 극대로 뿜어 넣은 묵혼검으로 해공공을 위에서 아래로 그어 버렸다.
“이런, 비겁한 놈……………. 암수를 쓰다니.”
묵향은 발악하는 해공공의 말을 비웃음으로 묵살했다.
“원래 나는 비겁하다구, 이 바보야. 네놈은 싸울 값어치도 없어. 나는 사람하고만 싸운다구. 너 같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요괴와 싸우지 않 아.”
푸학!
해공공이 이렇듯 간단히 죽을 위인은 아니었으나 직전에 묵향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한 수 위라는 점을 확인하고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해공공이 절명(絶命)하면서 두 토막으로 쪼개지자 그 옆에 있던 적의를 입은 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묵향의 적수가 아니었다. 남은 열한 명의 적의인들은 간단히 토막이 나 버렸고 그들을 없애 버린 묵향은 하얗게 질려서 이쪽을 보고 있는 황의를 입은 사내들을 쓱 둘러본 다음 흑 의인 중 한 명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천리독행!”
그러자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가 답했다.
“예.”
“네 녀석은 나의 수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겠느냐? 아니면 교주의 개로서 영광스럽게 여기서 죽겠느냐?”
“헤헤헤, 본교는 예로부터 약육강식의 철칙을 지키는 곳. 소인이야 당연히 강하신 묵향 나으리를 모시겠습니다요.”
“좋아, 나를 척살하는 데 너희들만 왔느냐?”
“아닙니다. 염왕대도 함께 왔습니다.”
“좋아, 그럼 네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겠다.”
“하명하십시오.”
“저 거슬리는 황의를 입은 놈들을 모두 죽여 없애라.”
“존명! 나를 따르라.”
1백여 명 남짓 남은 흑의인들은 천리독행의 뒤를 쫓듯 7백이 넘는 황의 입은 사내들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한 번도 충돌하지 않아 서로의 힘을 알 수 없던 두 세력이 부딪친 다음 벌어진 것은 놀랍게도 거의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그만큼 마교의 정예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옥영진 대장군 겨우 한 명을, 그것도 엄승의 권력욕 때문에 척살하면서 송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옥영진 대장군이 지휘하던 그 이름도 찬란하 던 찬황흑풍단의 일부가 그와 지휘관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인들과 교전하여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뿔뿔이 흩어졌 고, 옥 대장군 집에 있던 백인대장급 이상의 고위 장수들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남은 찬황흑풍단 5천여 명도 새로운 지휘관 엄량(嚴亮)의 능력이 너무나 형편없음에 모두 사퇴하고 초야에 묻혀 버렸다. 엄량은 옥영진 대장 군처럼 무공이나 능력, 황제에 대한 충성도에 의해 임명된 것이 아니라 엄승의 친지 중 그래도 가장 뛰어난 무장이기에 임명된 것인데, 그 능력이 흑 풍단원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흑풍단은 그 강력한 힘 덕분에 가장 위험한 곳만 골라서 파견된다고 봐야 한다. 지휘관이 멍청하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으 니 그들이 초야에 묻힌 것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
옥영진 대장군을 척살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금의위의 무사들 1천 명과 친황대의 무사 열두 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친황대는 대주隊)이 하 거의 모든 절정고수들을 잃고 제 기능을 상실했으며 금의위 또한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황권을 수호하던 대부분의 세력들이 와 해되었으니 그 결과는 곧 반란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서경의 주인으로서 대 송제국 영토의 3할을 다스리던 진천왕(眞天王)은 뛰어난 모사 순유(順)의 조언에 따라 황권(權)의 약화를 틈타 정서원수부 (正西元帥府)의 부수장 광해(海) 대장군과 모의하여 곽진(郭) 원수를 살해한 후 반란을 일으킨다. 송군의 주력은 모두 요와의 전쟁터에 파견되어
있었으므로 이번 원정에 각종 핑계로 한 명의 병력도 보내지 않았던 정서원수부의 20만 정병(精兵)을 막을 세력은 거의 없었다. 반란 앞에 모든 지방 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니 반란 세력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를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조정은 아쉬운 대로 몽고의 약체를 기회로 정북원수부의 20만을 뽑아내어 전선을 고착시키며 요와의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요와의 전쟁은 곧 이어 종결되었으나, 본국의 내란으로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는 눈물을 머금고 여진 토벌 계획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토벌은 고사하고 여진을 적당히 무마해 군사를 빼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송화강 동쪽의 영토를 여진의 것으로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여 여진을 만족시킨 후 회군한 군세는 반란 세력과의 오랜 전쟁에 들어간다. 송요전쟁에서 집단전의 기법을 배운 아골타가 송이 반란 진압에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여진을 통합하고 금을 세우니, 훗날 이들이 원에게 멸망할 때
까지 동북방의 호랑이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묵향>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