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꾼은 아닌 것 같고

라이가 모험가 일행과 만난 다음 날 오후쯤이었다. 드디어 멀리 작은 마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리치몬드는 멀리 보이는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라이에 게 말했다.

“저 마을이 틴스부르라네. 이 근방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지.”

리치몬드의 말과 달리 그다지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몬스터에 대한 경계 태새는 완벽했다. 마을 전체를 높직한 울타리로 감싸 놓은 것만으로도 부족해, 울타리 밖 에해자(垓字)까지 파 놨다. 거리가 멀어 해자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저 정도만 해도 마을 단위의 방어선이라고 하기에는 좀 과한 면이 있었 다. 아마 어지간한 몬스터는 쳐들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리라.

마을이 점점 가까워지자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사냥꾼이라고 착각할 만큼 투박한 가죽갑옷, 창처럼 굵고 커다란 화살들, 그리 고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활. 그것도 모자라 경비병들의 허리춤에는 도끼가 매여 있었다.

“헉!”

경비병들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며 걷던 라이는 갑자기 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은 도렌 영지의 병사들임에 틀림없었다. 얼마 전까지 적으로서 전투를 벌였던..

라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리치몬드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혹시 산적들에게 신분증까지 털린 건가?”

그제서야 신분증에 생각이 미친 라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상태로는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 빌어먹을 산적 놈들에게 먼지 한 톨 남김없이 탈탈 털렸기에…….?

“흐음, 이거 아주 곤란하게 됐군. 요즘 도렌은 메르헨과 영지전 중이기 때문에 신분증 검사를 철저하게 할 텐데…….”

이때, 옆에 있던 젠슨이 끼어들었다.

“리치몬드 씨. 경비병에게 사정을 말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거 같으니, 차라리 올리버의 신분증을 라이에게 빌려 주면 어떨까요?”

“아, 그렇지. 그거 좋은 생각이군.”

리치몬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려 뒤쪽에 서 있던 닉을 바라봤다.

“닉, 올리버의 신분증 네가 가지고 있지?”

“그, 그건 왜……?”

“그걸 이 친구에게 건네줘.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당분간만 빌려 주는 거니까 네가 이해하도록 해.”

닉은 알겠다는 듯 곧바로 품속을 뒤져 신분증 하나를 꺼내 라이에게 건네줬다.

“여기 있어.”

라이가 신분증을 받아 들자, 젠슨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쯧, 그 신분증은 얼마 전에 죽은 우리 동료의 유품이지. 닉의 불알친구이기도 하고. 꽤나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었는데, 재수가 없었어. 어쨌든 새 신분증을 만들 때까지는 자네가 그걸 쓰도록 하게.”

“하지만 이게 통하겠어요? 올리버라는 동료 분과 제가 닮은 것도 아닐 텐데…….”

신분증에는 그 대상의 신체적 특징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젠슨은 걱정 말라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핫핫, 너무 걱정하지 마. 운 좋게도 올리버와 자네는 생긴 게 비슷하니까 말이야.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 그리고 나이. 이 세 가지만 대충 비슷하면 나머지는 얼렁 뚱땅 넘어갈 수 있거든. 그렇게 자세히 보지도 않겠지만, 봐 봐야 저들이 뭘 알겠어? 뭐, 여행 도중에 병에 걸렸다거나, 아니면 몬스터와 싸우다 부상을 당해 몸이 많 이 축났다고 둘러대면 통과시켜 줄 거야.”

“아…, 그건 그러네요.”

라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신분증을 두 손으로 꼬옥 움켜쥐었다.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산속에서 개고생을 하며 헤매고 난 뒤, 꼬인 실타래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인심 좋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핫핫,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고맙다면 나중에 혹시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자네가 거하게 한잔 사. 그럼 되지 않겠어?”

리치몬드는 젠슨의 너스레에 피식 웃으며 일행을 재촉했다.

“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마을로 들어가세. 시원한 맥주부터 한잔하고 싶으니 말이야.”

마을 정문을 무사히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모험가 일행은 식당부터 찾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식당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이런 산골 오지 마을에 있는 식당들은 거의 대부분 숙박업을 함께 한다. 마을 주민들이 매 끼니를 식당에 와서 해결할 리는 없고, 결국 뜨내기 여행객들을 대상으 로 장사를 하다 보니 그런 것이다.

가장 큰 식당이라고 알려 준 곳을 찾아갔음에도, 식당의 규모는 작고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을에 식당이라고는 이거 하나뿐 이었으니까.

“신선한 고기 있습니까?”

“신선한 거라곤 닭밖에 없수다.”

마치 먹기 싫으면 나가라는 듯 퉁명스런 어투의 주인장이었다. 이곳을 나가 봐야 달리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배짱 장사를 할 수밖에.

“그럼 구운 닭 5마리에……

“쩝, 지금 닭이 3마리밖에 없는데…….”

“그럼 3마리 전부 구워 주시고, 나머지는…….?”

잠시 메뉴를 고민하던 리치몬드는 곧 귀찮다는 듯 대충 주문했다.

“나머지는 주인장이 알아서 가져다 주시죠. 맛있는 걸로 말입니다.”

“그럽시다. 잠시만 기다리슈.”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은 스튜 한 사발과 빵을 양손 가득 들고 왔다.

“우선은 이걸로 허기를 채우슈. 나머지는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 드릴 테니까.” 리치몬드는 사발에서 스튜를 가득 떠 그릇에 담은 뒤 라이에게 건네줬다.

“배가 많이 고프겠지만, 우선 이거라도 먼저 먹게.”

라이는 군침을 꼴깍 삼키며 그릇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스튜의 향기에 배가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라이는 감사하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그릇에 얼굴을 처박았 다.

쩝쩝, 후르륵.

뭘 넣고 끓였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건더기가 뭉개져 버린 스튜였지만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라 그런지 너무나도 맛이 있었다. 게다가 만든 지 며칠 은 족히 지나 보이는 딱딱한 빵조차도 입 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이 몽땅 다 사라지고 나서야 라이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눈길이 가장 먼저 훑은 것은 소피아 수녀였다. 식탁에 앉으면서 언제나 머리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길이 소피아 수녀에게 머문 것은 거의 순간이나 다름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행여 소피아 수녀가 자신의 눈길을 눈치챌까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 을 돌렸기 때문이다.

라이가 두 번째로 바라본 대상은 닉이라는 소년이었다. 평소 닉은 소피아 수녀처럼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닉이 후드를 벗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닉의 머리카락 색깔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닉의 머리 색깔이 자신보다 약간 옅었지만, 얼핏 보면 분 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 색깔도 비슷하네…….’

하지만 머리카락 색깔이나 눈동자 색깔이 비슷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분증의 원주인인 올리버라는 소년의 인상착의도 그와 비 슷하다는데 말이다.

별로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 닉에 대한 관찰은 그쯤에서 끝내고, 라이의 눈길은 다시 한 번 소피아 수녀를 훔쳐본 후 재빨리 젠슨에게로 이동했다.

“빵하고 스튜일 뿐인데 정말 맛있네요. 주인장 솜씨가 보통이 아닌가 봐요.”

라이의 말에 젠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네 배가 그만큼 고팠던 거겠지.”

스튜와 빵을 시작으로 음식들이 계속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닭구이뿐이었다. 나머지는 뭘 넣고 만들었는지 짐작조차 되 지 않는 허접스런 음식들뿐이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이곳은 오지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었으니까. 그나마 소금에 절인 두툼한 돼지고기 조각이 군데군데 보이는 걸 보면, 주인장이 나름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음식의 이름이 뭐가 되었건, 그들은 나오는 족족 뱃속에 밀어넣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여기까지 오면서 씹어 먹고 있던 건조 식량에 비한다면 이건 진수 성찬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배가 불러오자 그제서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생각이 미친 라이는 리더인 리치몬드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자신을 동료로 받아 줄 수 없겠느냐고. 하지만 리 치몬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곧바로 거절했다.

“미안하네만, 자네가 우리 파티와 함께하기는 힘들 것 같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젠슨도 리치몬드의 의견을 거들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 우리처럼 적은 인원으로 구성된 파티는 한 사람이라도 제구실을 못하면 순식간에 전멸당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니까. 말이 좋아 모험이지, 정말 위험한 일이야. 어떨 때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땡전 한 푼 못 건지기도 하니까.”

두 사람이 자신의 합류를 거부하자 라이는 몸이 달아올랐다. 현재 속옷만 한 벌 달랑 입고 있는 처지에, 이대로 이들과 헤어지게 되면 앞으로 뭘 어찌해야 한단 말 인가. 게다가 언제 용병단에서 추적자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랬기에 라이로서는 최소한 위험지역을 벗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이들 곁에 붙어 있고 싶었다. 라이는 짐짓 볼멘 목소리로 항변했다.

“제가 상인이긴 하지만 검이라면 제법 쓸 줄 압니다. 몬스터 몇 마리쯤 해치울 실력도 없다면, 어떻게 이런 산골짜기까지 물건을 지고 올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 까. 물론 산적들한테 기습을 당한 탓에 지금 이런 몰골이긴 합니다만, 저 그렇게 동료의 발목을 잡을 만큼 물러 터진 놈은 아닙니다.”

라이의 말에 리치몬드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옆에 앉아있는 젠슨과 귓속말로 뭔가 대화를 나눴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리치몬드는 라이를 향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아주 험난하다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 그래도 우리와 함께 가고 싶은가?”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데 그러십니까?”

리치몬드는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산맥을 관통하여 국경을 넘을 걸세.”

그 말에 라이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경을 넘는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굳이 이 오지 중의 오지인 도렌 영지까지 와서 사람들이 다니지도 않는 길로 산맥을 넘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견문이 짧은 라이가 도렌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도렌 영지 쪽에서는 산맥을 넘어가는 통로가 없다는 것을. 만약 있었 다면 도렌 영지가 이토록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산맥을 넘어 오고 가는 물자들에 대해 약간의 통과세… 아니, 세금 따위를 붙일 필요조차 없다. 교역 을 하기 위해 영지를 통과하는 상인들이 뿌리는 돈만으로도 영지 전체가 흥청거릴 테니까.

‘흠, 평범한 모험자 파티가 아닌가 보네. 그럼 이들의 정체가 뭘까? 짐이 거의 없는 걸로 보아, 밀수꾼들은 아닌 것 같고…….?

라이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을 하는 듯하자, 리치몬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왜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험한 산맥을 넘어 국경을 통과하려는지 이해를 못하겠지?”

“예.”

“하지만 우리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자네에게 그런 속사정까지 얘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네. 자네는 그저 우리와 함께 갈 것인지, 아니면 자네 살길을 찾아 떠 날 것인지만 결정하게.”

약간 찜찜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국경을 넘는다는 말은 라이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현재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받아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이의 대답에 리치몬드의 눈빛이 순간 음침하게 변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따라나서겠다는 라이가 오히려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리 치몬드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함께하겠다니 동료로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알려 줌세.”

리치몬드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주위를 더 훑어봤다. 그래 봐야 식당 안에 손님이라고는 그들 일행밖에 없었지만.

“이름을 듣기만 해도 알 만한 그런 대마법사의 던전이, 저 산맥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네. 우리는 그 지도를 입수했지.”

그 말만으로도 라이의 의심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운이 좋으면 돈벼락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던전 발굴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굳이 험난한 산맥을 넘 으려 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이들은 정말 모험가 파티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소수로 움직이는 걸 보면 꽤나 능력이 있는 파티일지도 모른다. 라이의 눈에 어린 의혹의 빛이 사라자자 리치몬드는 씨익 미소 지었다.

“어쨌거나 동료가 되었으니, 앞으로 발굴하게 될 보물의 지분(持分)에 대해서 미리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군.”

지분을 나눠 준다는 말에 라이의 이성이 더욱 뒤흔들렸다.

“무, 물론이죠.”

“지금껏 슷한 난관을 뚫으며 여기까지 온 우리들과 자네의 지분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라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던전의 보물을 발굴하게 되면, 자네에게 그중 3%를 주겠네.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는데,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라이는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모험가! 이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 단어인가. 어디에 얽매이는 곳 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모험을 즐긴다. 라이가 어렸을 적부터 수도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펴 며 동경해 왔던 직업이었다. 라이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자네의 지금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걸세.”

식사를 끝낸 후, 리치몬드는 은화 몇 닢을 라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 자네는 잡화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도록 하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네. 아무 장비도 갖추지 못한 현재로서는, 자네가 도움이 전혀 되지 않으니 말이야. 대신 어설프게 행동해서 우리의 발목을 잡거나 하 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리치몬드는 소피아 수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혹시 필요하신 물품이 있으시다면 지금 구입하십시오. 산맥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을이 더 이상 없으니까요. 라이에게 부탁하시든지, 아니면 함께 다녀오셔도 됩니다.”

“아뇨,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방으로 올라가서 편히 쉬십시오. 저희들은 한잔 더 한 다음에 올라가겠습니다. 이곳에 방이 3개 있다고 하더군요. 2층 가장 오른쪽에 있는 방이 제일 작다고 하니, 그곳을 소피아 수녀님께서 혼자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저 먼저 올라가 쉬도록 하죠.”

소피아 수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2층 계단 쪽으로 향할 때였다.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리치몬드가 소피아 수녀를 향해 급히 말을 건넸다.

“아 참, 이곳에서 말을 모두 처분할 겁니다. 말을 끌고 산맥을 넘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혹시 안장에 놔둔 물품이 있다면 미리 챙겨 두십시오.”

리치몬드의 말에 소피아 수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뒤, 2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마도 마구간 쪽으로 가는 것이리라. “그럼 저는 잡화점에 다녀오겠습니다.”

“외딴 마을이라 쓸 만한 게 별로 없겠지만 잘 찾아보게. 의외로 괜찮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예.”

라이가 밖으로 나왔을 때, 수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여관 주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관 주인은 신이 나 있었다. 오랜만에 손님이 들어온 데다, 저렇게 엄청나게 먹어대고 있으니……. 그는 살아 있는 닭 여섯 마리가 들어 있는 상자를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내일 아침 식사용으로 쓰려고 구해 온 것인 모양이 다.

라이는 여관 주인을 향해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잡화점이 어디에 있는지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작은 동네라 잡화점도 하나뿐이었다. 주인에게 설명을 듣고 돌아섰을 때, 그곳에 소피아 수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 다. 그 모습을 보고 라이는 그녀가 마굿간에 간 게 미처 챙기지 못한 짐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말과 작별 인사를 나눴던 것이리라. 라이는 못 본 척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잡화점에 갈 거지?”

“예, 수녀님.”

“나도 같이 가. 살 것도 있고 하니…….””

아마도 기분 전환 겸 자신을 따라나서려는 것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예. 마침 위치를 알아뒀으니 함께 가시죠. 저쪽입니다.”

소피아 수녀와 단둘이서만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둘이서 오붓하게 걷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라이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걷고 있는 게 조금 어색했던 것일까. 수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쓸 만한 물건이 없을지도 몰라. 다리를 건너오면서 경비병들이 입고 있는 갑옷 봤지?”

“예.”

“잡화점에서 판매하는 갑옷도 그 정도 수준 정도밖에 없을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용병단에 처음 들어가서 지급받았던 갑옷은 정말 형편없는 것들이었다. 겉모양은 용병단의 갑옷이 좀 더 나았을지 모르지만, 방어력은 오히려 이곳 경비병들이 입 고 있는 게 훨씬 더 좋아 보였다. 게다가 라이는 보여지는 겉모습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실속파였다. 그렇기에 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것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잖아요.”

“무기는 어떤 걸 잘 다뤄? 검? 활?”

소피아 수녀는 이런저런 사소한 질문들을 계속 던졌다. 어쩌면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둘이서 길을 가다 보니 대화가 끊기면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두려워 그러는 것이리라.

“둘 다요.”

“무술은 누구한테 배웠어?”

라이는 은퇴한 용병이었던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대충 둘러댔다. 라이는 감히 소피아 수녀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대답을 했기에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 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수녀의 표정이 점차 심각하게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상인이라면서 왜 굳이 모험가 파티에 참여하려는 거지?”

“모험을 해 보고 싶었거든요. 모험가가 되는 것은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수녀님.”

라이의 대답에 소피아 수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망설였다.

“이런 말을 해 줘도 괜찮을까? 꽤나 순진해 보이는 소년인데, 혹시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지금껏 살아오며 다른 사람에게 모진 말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그녀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을 안 해 주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양심에 걸렸기 때문이 다. 그렇기에 그녀는 애써 용기를 냈다.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닐지도 몰라.”

“예?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우리 파티가 수행하고 있는 모험의 난이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너무 크거든.”

그제야 소피아 수녀가 뭘 염려하고 있는지를 눈치챈 라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가 모험을 해 본 적이 없긴 하지만, 다른 분들께 폐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자, 소피아 수녀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잡화점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아, 저기인 거 같네요. 저 허름한 가게 말입니다.”

오지의 가난한 마을이었기에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잡화점에서 팔고 있는 물품들은 라이의 예상보다 훨씬 더 초라하고 빈약하기만 했다. 몇 벌 있지도 않은 갑옷은 도렌 영지의 병사들이 착용하던 바로 그 투박하기 짝이 없는 가죽갑옷이었다. 그리고 장검은 아예 팔지도 않았고, 활과 화살은 몬스터 사냥용의 초대형뿐이었다.

라이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심란한 눈빛으로 가게 안을 열심히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모험을 하다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장비를 맞춰야 했으니까.

다음 날 새벽,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아 사위가 어둠에 잠겨 있을 때 그들은 일어나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미리 여관 주인에게 말을 해 뒀었기에 그들이 일어나는 시 간에 맞춰 따끈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갓 구운 빵이 가득 들어 있는 자루도 준비되어 있었다. 저 정도면 며칠 정도는 배불리 먹기에 충분하리라.

험난한 산맥을 이동해야 하는 만큼, 일행의 말들은 모두 팔아 버리고 당나귀 네 마리를 사서 짐을 나누어 실었다. 어쨌거나 이런 산골 마을에서 말들을 다 팔아 치 워 버린 것만 봐도 리치몬드가 얼마나 수완이 좋은 리더인지 라이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산간벽지에서 그런 훌륭한 준마를 제값 받고 팔기는 힘들었을 텐데…….?

라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모두의 속이 쓰릴 것을 뻔히 알면서 그들의 상처를 헤집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어 쩔 수 없었으리라. 험한 산길을 뚫고 이동하는 데 있어서 덩치 큰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산맥을 향해 출발한 지 4일째 되는 날 오후, 라이는 어렴풋이 풍겨 오는 오크의 냄새를 맡았다. 보통사람이라면 숲에서 풍겨 나오는 여러 가지 냄새들 탓에 알아채 지 못하고 넘어갔겠지만, 오크 굴에서 신물 나게 살아 봤던 라이의 코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예전에 용병단에 있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줘야 할 때였다.

“리치몬드 씨, 주변에 오크가 있는 거 같은데요.”

하지만 리치몬드는 라이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여관 주인의 말 때문에 그러나? 이 주변에 오크들이 서식하는 건 사실이겠지만, 자네 걱정이 좀 지나친 것 같구먼.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아직 오크들의 영역에 들어서지도 않았으니 말일세.”

“너무 자신하시는 거 아닙니까? 오크들이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영토라고 말뚝을 박아 놓은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일단 대비는 좀 해 두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방어 장비의 무게가 워낙에 무겁다 보니 위험이 닥친 경우가 아니라면 외장 갑옷과 투구, 방패 따위는 나귀에 실어 놓는다. 방어 장비를 몽땅 다 걸치고 산길을 이 동했다가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쭉 뻗어 버릴 게 뻔했으니까.

오크의 존재 유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중무장할 것을 권하는 라이. 리치몬드는 그런 라이를 향해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젠슨처럼 주변의 흔적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가 있나? 저기를 보게.”

일행들보다 10여 미터쯤 앞서 가고 있던 젠슨은 간혹 허리를 굽혀 수풀이나 낙엽 더미를 뒤적이며 뭔가 흔적이 없나 살피고 있었다.

“저렇게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데도 젠슨은 오크에 대해서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았네. 그런데도 자네는 뜬금없이 오크가 주위에 있다고 말하니,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라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저는 제 감각을 믿을 뿐입니다. 특히 후각을요.”

라이는 자신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나귀 등에 걸어 놨던 투구를 들어 머리에 썼다. 묵직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안도감을 느낄 수가 있었 다. 투구를 쓰지 않은 채 오크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머리를 직격당했다가는 머리통이 수박처럼 박살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활도 손에 들었 다.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그런 라이의 모습을 보며 리치몬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괜스레 시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흥, 후각이라고? 자기 코가 개코라도 된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어. 뭐, 까불어 봤자 얼마 견디지 못하고 투구를 벗겠지.’ 생각은 그랬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두에 가고 있는 젠슨을 향해 소리쳤다.

“젠슨! 혹시 이상한 흔적을 발견한 거라도 있나?”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흔적이 너무 없어서 문제죠. 이 정도까지 깊게 들어왔으면, 야생동물의 발자국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여야 정상인데…….

“마을에서 벗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은가. 차차 나오겠지.”

리치몬드는 수풀에 가린 하늘과 주위를 둘러봤다. 망토는 물론이고 외갑(外鉀)과 투구까지 벗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등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사슬갑 옷처럼 벗지 못하고 그냥 입고 있는 장갑(裝甲)의 무게만 해도 엄청난 탓이었다.

리치몬드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내심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덥긴 덥군. 몬스터도 없는데, 이런 산길을 완전무장을 한 채 걸어가자고? 그렇게 되면 체력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게 나와 젠슨인데……. 우 리 둘을 지치게 만들어서 뭘 하겠다는 것이지? 생각할수록 놈의 저의가 의심스럽군.’

리치몬드나 젠슨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세 시간 전부터 케른췩이 거느린 오크 부대의 추적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 오크들은 잘 훈 련된 도렌 영주의 병사들과 숱한 충돌을 겪으며 살아왔다.

호비트들이 연약한 생김새와는 달리 결코 만만한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귀 네 마리는 도저 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족장한테 전령 보내자.”

“췩췩, 안 보내도 된다. 우리 많다!”

지금 케른췩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는 무려 28마리. 호비트 다섯 마리쯤 상대하는 데는 넘칠 정도의 숫자였다.

더군다나 저놈들 중에서 힘 좀 쓸 것처럼 생긴 놈은 겨우 두 마리뿐이었다. 번쩍이는 쇠장식을 몸에 주렁주렁 두르고 있는 게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둘이서 발악 을 해 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하는 게 케른췩의 생각이었다. 나머지 3마리는 덩치도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한주먹거리도 되어 보이지 않았고..

호비트들이 꽤 만만하게 보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마을에 전령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자는 부하의 의견을 케른췩이 묵살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자기보다 상급 자가 지원군을 몰고 온다면 이번 사냥의 공로를 놈이 가져가게 되기 때문이다.

주변의 모든 사냥감들을 싹쓸이해 버린 탓에 먹을 걸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럴 때 저만한 사냥감을 잡아가면 부족 내에서 그의 위치는 더욱 확고 해지리라. 당나귀 네 마리에 호비트 다섯 마리. 케른췩은 입맛을 다시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췩췩, 모두 준비해라. 쉬면 공격한다!”

“췩!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