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1053화


1488화

이드는 초상화를 다시 살폈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얼굴을 살핀 그는 이내 더 볼 필요 없다는 듯, 서류들을 스폴에게 넘겼다.

“그런 이유라면 더 볼 필요 없겠네.”

서로 얼굴 붉힐 일을 피하자고?

결국, 적당히 서로 양보하면서 체면을 차려주자는 말이지 않은가.

“그래도 클라인 백작님이 애써 준비해주신 건데, 조금 더 살펴보시지.”

“얼굴은 익혔으니까, 그거면 충분해. 얼굴하고 이름만 알면 되지 굳이 세세한 인적 사항까지? 스폴 경도 말했잖아. 어차피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황제라고.”

그래도 한번 얼굴을 봤다고 나람 공작에 대한 서류는 좀 더 살펴보긴 했지만, 그뿐. 이런 이드의 말에 스폴은 얌전히 서류를 받아 정리했다.

“그래도 필요하시면 언제든 다시 말씀하세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알았어.”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해도 저물었고, 저녁 식사도 끝났다. 내일 또 달리려면 푹 쉬어야 했다. 그렇게 스폴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스폴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층은 자신들이 통째로 빌렸고, 계단 입구에 경비를 세워두었기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충! 호위단 소속 기사 풀럼입니다.”

“들어와도 좋다.”

“실례하겠습니다.”

스폴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건장한 기사가 나타났다. 그는 이드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딱 한걸음 들어와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저희 방문을 알고 이곳 영주가 하인을 보냈습니다. 귀한 손님이라면 초대하고 싶다고 합니다.”

“하핫!”

기사의 말에 스폴은 기가 찬 듯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귀족들이란,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 만한 일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니까요. 아마 마차와 호위대 규모를 보고 뭔가 냄새를 맡은 모양입니다.”

“우리가 사신단인 줄은 모르는 것 같지?”

“절대 모릅니다. 알았다면 하인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주가 직접 움직였을 겁니다. 제가 가서 돌려보내겠습니다. 혹시, 초대에 응하실 생각이 있으신 건…….”

“없어. 절대 없어.”

그런 귀찮은 짓을 할 시간이 어딨나?

검후가 미리 챙겨줬다는 통행증이 아까워서라도 이런 시시한 초대에 응할 생각은 없다.

“저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럼 세 분 편히 쉬십시오.”

말과 함께 꾸벅 고개를 숙인 스폴이 방을 나서며 문을 얌전하게 닫았다. 그리고 뒤이어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그 하인은 어딨나, 앞장서라.”

방에 있을 때와는 다른 무게감 있는 명령에 이어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그에 라미아가 침구를 펼치며 말했다.

“믿음직하네요.”

“정말 그래요. 평소와는 달라요. 은색 기사단에서의 모습과도 다르고, 책임감이 느껴져요.”

이드도 두 아내의 말에 동감이었다.

“호위단 단장은 잘 뽑은 것 같네요. 황성까지 편하게 가겠어요. 그럼 누가 먼저 씻을래요?”

“오늘은 그냥 마법으로 간단히 처리하는 건 어때요?”

“음, 가끔은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해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움직이면 병사들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럴 바에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도 편한 일이다.

휘리리릭!

다음 순간, 짧은 세 번의 파동과 함께 세 사람의 샤워가 끝났고, 그들은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매일매일 쉼 없이 달려야 하는 만큼 당분간은 이런 단순한 생활 패턴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

눈치 빠른 영주가 첫날부터 등장했던 것과는 별개로 이후 가일라로의 여정은 순탄했다. 미리 경로를 잘 짜놓은 탓에 불편한 노숙도 피할 수 있었다. 중간에 도적이나 몬스터라도 나타났다면 차질이 생겼겠지만, 호위단의 규모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여행길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다행인 점은 첫날을 제외하고 머물게 되는 곳의 영주가 일행을 초대하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스폴은 국경에 위치한 영지라서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평온한 여정도 열흘이 지날 때였다.

가일라로 향하는 경로 딱 중간 지점.

일행은 어느 백작 영지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영지의 이름은 레크널. 이드와 라미아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며, 사건 사고가 함께 했던 이름을 가진 영지였다.

“여길 또 지날 줄은 몰랐네요.’

“클라인 백작도 모르고 이랬겠지?”

“당연하죠. 알면 일부러라도 피하지 않았겠어요?”

슬쩍 창밖을 살핀 이드와 라미아의 말에 일리나도 관심을 보였다. 평소 자신과 헤어진 동안 있었던 일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당연하게도 이드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레크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또 문제가 생기진 않겠죠?”

“글쎄요. 생길까?”

고개를 갸웃한 이드가 묻자 라미아가 옅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듣는 귀가 있다면 이드가 명예 후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도 없는데다가. 우리가 본 소영주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그래, 아니다.

길 더 레크널.

이드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라미아의 정체를 단숨에 꿰뚫어 본 레크널의 영민한 소영주. 거기에 뒤를 쫓아 보물을 얻으려는 집요함까지 있는 그라면 결코 멍청한 짓을 다시 시도하진 않을 것이다.

“여기 소용주 길 더 레크널에 대한 말입니까?”

때마침 슬쩍 열린 창에 가까이 다가오던 스폴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관심을 보였고, 이드도 그런 스폴에게 관심이 갔다.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소영주의 이름이 어쩐지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스폴 경은 혹시 그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혹시 듣는 귀가 있을지 몰라 예의를 차린 이드의 물음.

“잘은 모르지만, 들어봤습니다. 소드 팰러스에서요. 길지는 않았지만, 그도 한때 소드 팰러스를 다녀간 적이 있었으니까요.”

“호오, 그런 일이.”

설마 소드 팰러스와도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소드 팰러스가 국적에 상관없이 수련생을 받는 것은 알았지만, 길 더 레크널도 한때 소드 팰러스에서 검을 익혔을 줄이야.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인연일 수 있었다.

검후도 레크널도 과거에 인연이 있었으니까.

그런 과거의 인연을 서로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라도 엮이게 되나 보다.

“당시, 천재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재능있는 기사라고 이름을 날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이드 님은 그를 어떻게 아시는지? 명령하신다면 미리 영주성에 사람을 보내놓겠습니다.”

정말이지 호위 단장을 맡고 나서는 평소 덜렁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는 스폴이다. 설마 이런 행동 하나하나도 클라인 백작이 적어준 것일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반갑게 볼 얼굴은 아니라서.”

“혹시 제가 미리 알아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거기다 이제 혹시 트러블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돌려 묻기까지 한다.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라미아의 말처럼 과거의 일로 눈이 뒤집힐 정도로 길 더 레크널이 멍청하진 않으니까. 다만 혹시 모르는 일인 만큼 스폴이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제법 기니, 잠깐 안으로 들어와요.”

말과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고, 스폴은 구렁이 담 넘듯 마차로 옮겨탔다. 덕분에 말이 순식간에 기수를 잃어버렸지만, 녀석은 똑똑하게도 당황하지 않고 얌전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마차와 함께 달려나갔다.

그러는 사이 마차 안에서는, 일 년 전 그레센으로 돌아온 이드가 잠시 세상을 떠돌던 당시의 이야기가 짧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를 모두 들은 스폴의 반응은.

“길 더 레크널 소영주. 수재가 아니라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이었군요. 이드 님께 그런 짓을 하고도 목숨을 건졌다니.”

냉소적인 비웃음이 입가에 진득하게 걸렸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여하튼 귀족들은 이래서 문제라는 겁니다. 신의가 없어요. 자국으로 모시겠다고, 좋게 이야기를 끝내 놓고는 뒤통수를 치려 했다니. 당장 소드 팰러스의 이름으로 기사 작위를 빼앗아야 할 놈입니다.”

길 더 레크널.

라일론의 기사.

사실 소드 팰러스가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거나 거둘 권한은 없다. 하지만 권위는 있었다. 소드 팰러스는 모든 기사들이 존경하는 기사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소드 팰러스의 권위라면 기사 한둘의 작위를 거두는 것은 사실 큰일도 아니다. 가령 이런 것이다. 각 교단의 교황청이 각국에 나가 있는 사제나, 해당 지역에서 임명된 집사나 권사의 권한을 마음대로 거둘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그 대상이 백작 가문의 소영주 정도가 되면, 문제가 아주 없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좌우간 스폴에게 있어서는 그 정도로 길 소영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게 박혔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몰랐다고 하지만 감히 이드 님께 그분의 무공과 검을 빼앗으려 했다니.

‘아니지. 이건 이드 님의 문제가 아니야. 아무리 보물이라도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한 시점에서 그건 기사가 아니라 도적이지.’

스폴은 이번 임무를 끝내고 돌아가면 이 부분에 대해 검후에게 세세하게 보고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길 소영주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럼 기사들에게 미리 전투 준비를 해 두라고 일러놓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니까.”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이드는 콧바람을 풍풍 뿜어내는 스폴을 보며 이마를 감쌌다. 딱 봐도 당장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것 같은 황소 같은 모습이 아닌가. 이래서야 누가 싸움을 거는 건지 모를 것 같다.

“한번 뒤통수를 때린 인간은 두 번도 때릴 수 있는 겁니다. 원래 그런 비열함이 귀족의 기본 소양이니까요.”

“……솔직히 말해봐. 당신 귀족에게 무슨 반감 있어?”

국경을 넘은 후, 무슨 말만 하면 귀족을 물고 늘어지는 스폴이었다. 우선 본인부터 귀족이면서 말이다. 누워서 침 뱉기도 아니고.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