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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54화


1489화

다행히 자신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혐오감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검후를 모시는 동안 질릴 대로 질려버린 진상들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의 표출이었다.

‘도대체 은색 기사단은 어떤 진상들로부터 검후를 지켜온 것이냐.’

그런 의문이 자연스레 들었다.

다만 낙천적인 스폴이 이럴 정도라면 어지간한 지옥도는 비교도 안 될 거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동정심에 빠져 있으려니, 밖에서 호위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레크널의 영주성이 보입니다.”

“알았다.”

간단히 답한 스폴이 마차 밖으로 나섰다.

“아무튼, 소영주에 대한 건은 확인했으니, 나머지는 제가 대응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자신만만한 미소를 끝으로 달리는 말의 안장에 올라탄 스폴의 얼굴이 사라졌다.

이드는 어쩐지 상쾌한 그녀의 미소가 제법 불안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이해한 것 맞겠지?”

“당연하죠. 호위 단장인 스폴은 우리가 알던 그 스폴이 아니잖아요. 자기가 어제 그렇게 말해 놓고도 아직 몰라요?” 

그렇기는 하지만, 이 불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이지? 아무래도 기존 스폴의 모습이 너무 강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니면 좀 어때요. 어차피 피를 보는 것만 아니면 어지간해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텐데.”

“그렇겠지? 검후의 통행증도 있고.”

어지간한 트러블은 검후의 통행증만 보여도 충분히 무마하고 넘길 수 있다. 더욱이 몰랐던 사실이지만 영지의 소영주가 한때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했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더욱이 통행증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영주 본인과 얼굴만 마주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만약 통행증을 들고 있는 것이 이드 자신이라는 것을 그가 안다면? 글쎄. 안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그가 그때의 실패를 이미 털어 버렸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고, 그걸 여태 잊지 않고 곱씹고 있었다면, 이드가 아나크렌의 명예 후작이 되었다는 것을 알 테니, 더욱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이러나저러나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 알아서 잘하겠지.”

그렇게 내심 결론을 내린 이드의 몸이 스르륵 옆으로 넘어졌다. 그런 그의 머리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일리나의 허벅지 위.

그는 쓸데없는 걱정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다리를 펴고 누웠다.

***

그러는 사이 마차는 빠르게 영주성에 다가서고 있었다.

평소 마차 옆에서 달리던 것과 달리 선두로 자리를 옮긴 스폴의 입가에는 그 삐뚜름한 미소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미친놈,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한 검으로 감히 이드 님께 그딴 도적놈 같은 짓거리를 했단 말이지.’

이드의 걱정은 옳았다.

책임감 가득한 모습과는 반대로 스폴은 속으로 뽀득뽀득 이를 갈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드란 존재는 그만큼 대단했다. 그는 그녀 아니, 은색 기사단 모두에게 있어 한없이 존경받는 존재이며, 또한 더없이 감사한 은인이었다.

그런 이드를 속이고, 협박하고 강도질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비록 과거의 일일지언정 스폴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분노하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분노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책임을 잊지 않았다. 현재 그녀는 은색 기사단의 기사가 아니라 사신단의 호위 단장이었다.

당장 그녀에게 있어서 최우선 임무는 이드의 여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

스폴은 과연 이 망할 놈을 차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를 궁리하는 것으로 당장의 분노를 삭였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레크널의 소영주인 길 더 레크널이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본인이 등판해 버렸다.

“역시 본색을 드러냈구나!”

“그게 무슨……?”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의 소영주 길.

이런 모습에 반사적으로 소리친 스폴도 번뜩 제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들.

아나크렌과 대동소이한 성문의 출입 상황.

그리고 성문 앞까지 나와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길과 그가 호위로 대동한 듯 보이는 두 명의 기사.

그것이 전부였다.

‘기사단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성벽 위에 올라 있는 궁사와 마법사도 보이질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전투가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스폴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크흠. 제가 잠시 착각을 한 것 같군요.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소영주께서 무슨 목적으로 저희 앞을 막으시는 겁니까?”

분명 그는 목적 없이 성문 앞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다가가자 정확히 알아보고 먼저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길이었다.

“나는 라일론을 방문한 귀한 손님을 마중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게 저희란 말씀이십니까? 혹시 상대를 잘못 안 것은 아니실지?”

“소드 팰러스에서 오신 분들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제 손님이 맞습니다.”

아나크렌이 아니라 소드 팰러스라고 말했다.

스폴은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했다. 눈앞의 소영주는 자신들이 아나크렌에서 온 것뿐 아니라 검후의 사신이라는 사실까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가일라에서 어떤 연락을 받은 것일까.

‘그렇다기엔 좀 빠른데.’

슬슬 중앙의 정보가 여기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할 때이긴 했다. 그러나 영주도 아니고 소영주에까지 닿을 정도로 정보가 흥청망청 흐르지는 않을 터. 어떻게 알았을까?

“말씀대로 소드 팰러스에서 출발하신 귀인들이십니다. 그런데 소영주께선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번 방문을 결코 공식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걱정하시는 일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저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귀인을 황성까지 모시기 위해 마중을 나온 것이니까요.”

황제라니?

생각지 못한 대답에 스폴의 눈이 커졌다.

“・・・・・대단하군요. 소영주께선 황궁에서 일하고 계셨습니까?”

“황제 폐하의 은혜로, 요직은 아니지만, 현재 황궁의 대외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겸손을 보이는 길. 하지만 그의 겸손과 달리 벌써 황궁에서 일을 보고 있다는 것은 그 능력을 인정받는 대단한 일이었다. 보통은 저 나이에 영지에서 일을 배우거나, 개인적인 재능을 갈고닦는 것이 일반적.

그런데 길은 황제에게 인정받아 그의 신하로서 황궁에 들었다지 않는가. 결코, 흔치 않은 경우였지만.

스폴은 오히려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

‘어쩐지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이드 님 관련인 것 같다는 예감이…?’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직감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길이 황궁에 들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드와 라미아를 알아보고 행동에 나선 그의 결단력을 인정받은 것 때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고, 감이 있다고 추궁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스폴은 애써 이 부분을 씹어 삼켰다.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라일론의 황제께서 마중을 보내실 줄은. 그것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말입니다.”

“귀인들께서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실 줄은 저희도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요. 서로 소통이 약간 어긋난 것일 뿐이지요.” 

“……칫.”

“슬슬 귀인께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만?”

“잠시 기다리시오. 귀인들게 마중이 왔다고 알릴 테니.”

괜히 한마디 했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한 스폴이 몸을 돌렸다. 생각 같아서는 말이 아니라 검을 들이밀고 싶은데, 매우 아쉽다.

하지만 라일론 황제의 명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스폴이 뒤에 멈춰선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

‘후~ 일단은 성공인가’

길 더 레크널은 그런 스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뭔가 큰 장애물 하나를 넘은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에는 짐작이 갔다. 유난히 날이 선 상대의 대응 때문이었다.

서로 안면 없이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상대. 그녀의 눈에는 선명한 적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건 외국의 기사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아닌 자신 개인을 향한 분노.

길은 상대의 그러한 적대감 표출에 대해 짐작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은색 기사단의 기사가 호위 단장이라고 했으니, 저 기사도 알고 있는 것이겠지. 내가 했던 일에 대해.’

자신이 마인드 마스터의 검과 무공을 노리고, 그 후예를 공격한 사건.

아나크렌이 따로 조사를 했는지, 명예 후작이 그 사실을 직접 밝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와 동시에 길은 자신에게 마중을 명령한 황제가 옳았다고 생각했다.

현재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라일론 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얽혀 있었다. 아니, 얽혀 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라일론이 손을 뻗었다가 낭패를 본 일들.

라일론의 황제 자인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대면하기 전에 이러한 갈등을 풀어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 우선 길을 먼저 마중으로 보낸 것인데. 이는 보기에 따라 잔혹한 결정일 수 있었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한쪽과 빼앗길 뻔한 쪽.

완벽한 가해자와 피해자.

때린 쪽은 몰라도 맞은 쪽은 실제 맞지 않았어도 결코 기분이 좋을 수가 없는 관계가 아닌가. 그런 둘이 입장이 바뀌어 마주하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 사건에 대한 보복을 행할 수도 있는 일. 물론 황제의 명을 받아 마중을 나온 사람을 죽이기야 하겠냐만, 어쩌면 그 이상의 짓을 당할 수도 있는 자리에 길을 내보낸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길은 그러한 결정에 한마디 망설임도 없이 명을 따랐다.

우선 당사자 본인부터가 명예 후작과의 일을 풀어낼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건 그가 황궁에서 일하며 깨달은 것이었다. 황궁에 있으며 명예 후작과 관련된 사건을 주워들으며, 그의 가치가 실시간으로 높아지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

빠르게 풀어내지 않을 경우 자칫 자신이 명예 후작의 반대편 저울추로 올려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위 단장의 모습에서 이 생각이 옳았음을 내심 확신하는 길이었다.

그때 스폴이 다시 다가와 말했다.

“귀인께서 접견을 허락하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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