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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70화


1505화

황녀의 부탁에 곤란해하는 라미아와 일리나.

이런 기색을 빠르게 알아차린 황녀가 본격적으로 둘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해주세요~ 해주세요~ 네?”

앙증맞은 손으로는 두 사람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글썽이는 눈을 치켜뜨고 애원하듯 올려다보는 얼굴이라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능숙해도 너무 능숙하다.

이드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쪼끄만게 요물이네, 요물이야.’

어째서 황제가 올리비아 황녀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지 그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아빠 입장에서 딸이 저런 모습을 보이면 당연히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주고 싶어지겠지.

생판 남인 자신이 봐도 이런데, 부모라면 그 마음이 얼마나 클까.

거기에 미운 떼를 계속 쓰는 것도 아니고, 간간이 애교를 섞어가며 강약 조절까지 완벽하게 하고 있으니. 면역이 없는 사람이라면 진작에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줬을 것 같다.

물론 라미아, 일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녀의 사랑스러움에 두 사람도 녹아내리기 직전인 모습이다.

참으로 미래가 걱정되는 황녀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건 미래고,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아이였다.

떼를 쓰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걸 까먹고 또 떼를 쓰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면 자신할 만도 하다.

황녀에서 눈을 뗀 이드가 라미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별궁 앞에서 황녀를 발견했을 때, 뒷감당은 자신이 하겠다며 데려오란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

그런데 그 자신감이 지금은 황녀의 애교에 녹아내리기 직전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는 섣부른 판단.

라미아는 역시 라미아였다.

‘후훗, 제가 이 꼬맹이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보세요.’

자신만만한 얼굴로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 라미아.

곧이어 그녀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린 황녀를 달랑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지만, 황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한두 번 무릎에 앉아본 것이 아닌 듯 편안한 모습.

오히려 기쁜 얼굴로 라미아를 올려다본다.

“허락하시는 건가요?”

그녀에게 있어 무릎에 앉는 것이 일종의 허락 의미였나 보다.

“죄송하지만 그건 아니랍니다. 황녀 전하.”

“그럼 얼마나 더 열심히 부탁해야 들어주실 건가요?”

황녀의 질문에 라미아가 싱긋 웃었다.

절대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가득한 질문이 아닌가. 그야말로 황궁의 숨은 실력자.

라미아는 이 숨은 실력자에게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황녀 전하께선 아직 모르시겠지만, 전하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일들과 달리 매우 중요한 일이랍니다.”

“그런가요?”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분들의 허락이 먼저 필요하답니다.”

“허락받을 자신 있어요!”

우쭐한 황녀는 그 어떤 상대라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황제가 있는데.

“그런 자신감이라면 어렵지 않겠군요. 두 분의 허락만 받아오시면 됩니다.”

“누군가요? 제가 허락을 받아야 할 두 사람이?”

“첫 번째는 황녀 전하의 아버님이신,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분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어렵지 않아요!”

황녀는 아주 쉬운 조건이라는 듯 흥분해서 씩씩 콧김을 뿜었다.

“그렇죠. 황녀 전하께는 어렵지 않을 일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어렵습니다. 왜냐면 검후 님의 허락이 필요하거든요. 검후 님은 아시죠?”

“네, 알아요. 그런데 아직 직접 만나뵙지는 못했어요.”

힘찬 대답에 이어진 목소리는 어쩐지 기운이 빠져 있다.

태어난 후 지금까지 황궁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황녀였다. 그런 그녀가 어디서 검후를 만날 수 있겠는가.

그런 사실을 깨달은 황녀가 급격히 시무룩해진 것이다.

“꼭 검후 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나요?”

“네, 꼭 있어야 합니다. 만약 황녀 전하께서 두 분의 허락만 받아오신다면 저와 일리나도 기쁜 마음으로 황녀 전하의 스승이 되는 일에 대해 고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드는 순간 웃음이 날 뻔한 것을 참았다.

허락을 받아오면 무조건 스승이 되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때가 되어서 고심하겠다니.

앞의 어려운 조건에 정신을 팔게 만들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뒤에 숨겼다.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실로 치사한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엔 황녀가 의문을 느끼지 못하도록 눈부시게 웃어 보이며 시선을 돌리는 수법까지, 능숙한 사기꾼이 따로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수작에 홀딱 넘어간 황녀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다가 곧장 심각한 얼굴을 했다.

이런 표정의 변화는 아이답게 변화무쌍했다.

“혹시 공주 마법사님은 어떻게 해야 검후 님의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 아시나요?”

“물론 알지요. 전혀 어렵지 않답니다. 호호호.”

“그럼 제게도 알려주세요!”

“잘 들으세요. 황녀 전하께서 검후 님을 뵙는 건 어렵습니다. 대신 황녀 전하께는 황제 폐하가 계시지요. 그러니, 지금 가서 황제 폐하의 허락도 받고, 부탁도 드리세요. 그럼 황제 폐하께서 황녀 전하 대신 검후 님의 허락을 받아주실 겁니다.”

“앗! 그런 방법이!”

“어렵지 않지요?”

“네, 정말 좋은 방법이에요. 지금 가서 아바마마께 부탁해야겠어요.”

마음을 먹은 황녀는 곧장 라미아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당장이라도 황제가 있는 집무실을 향해 달려갈 기세.

정작 그에 기겁한 것은 유모와 시녀들이었다.

이 밤에 황녀가 이런 일로 황제를 찾아가게 둘 수는 없었다. 황제가 아무리 황녀를 귀여워한다지만, 황궁에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었다.

“황녀 전하.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황제 폐하께는 내일 가세요.’

“싫어. 빨리 허락을 받아야겠어.”

“하지만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선 이미 잠자리에 드셨을 겁니다.”

“아니야. 아까 아바마마의 시종이 왔잖아. 그걸 보면 아직 잠자리에 드시지 않으신 게 분명해.”

황제의 시종은 또 어떻게 알아보고.

유모는 이 작은 고집쟁이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아직 그녀에겐 최후의 방법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황제 폐하를 방해하셔서는 안 됩니다. 늦은 밤까지 살피셔야 할 중요한 업무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황후 마마께서도 말씀하셨는데, 기억하시지요?”

황후가 거론된 순간,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 같던 황녀가 주춤한다. 순식간에 기세가 꺾여버린 황녀. 그녀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 아바마마께서 업무를 보실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

“맞습니다. 그럼 지금 황제 폐하의 업무를 방해하면 안 되겠지요?”

“칫, 어쩔 수 없지. 대신 내일 일찍 아바마마께 갈 거야.”

“네, 네. 그러셔야죠.”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유모.

그 모습에 라미아가 한 마디를 보탠다.

“그런데 내일 일찍 황제 폐하를 뵐려면 황녀 전하께서도 일찍 주무셔야지 않나요?”

“웅…… 꼭 그래야 할까요?”

황녀가 싫은 기색을 가득 내비쳤다.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고 치마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마치 귀여운 새끼 고양이 같았다.

순간 황녀와 조금 더 어울려 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

라미아는 아쉬움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자가 되시려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답니다.”

거짓말쟁이!

제자로 들일 생각은 하나도 없으면서 벌써 스승행세다.

그러나 제자라는 말에 황녀는 그저 기쁘기만 한 것 같았다.

“네, 올리비아는 착한 제자가 될 거예요. 돌아가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황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버리는 라미아다.

그에 수줍게 웃은 황녀가 라미아의 손을 피해 유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작은 손을 팔랑거리며 인사를 남긴 뒤, 유모를 따라 별궁을 나섰다.

밝은 웃음을 보이던 아이가 사라지자, 별궁이 일순 고요해졌다.

기분 탓인지 조명이 조금 어두워진 것도 같다.

일리나가 조용히 다가서 이드의 겉옷을 벗겨주었다.

황녀의 방문에 아직 황제와의 식사 복장 그대로였던 이드였다. 그러자 라미아도 나섰다.

“우리도 옷 갈아입어야죠.”

라미아가 자신과 일리나의 드레스를 손짓하며 마법을 시전하자, 흐릿한 빛이 잠깐 일렁이더니 두 사람의 복장이 편한 잠옷 차림으로 바뀌었다. 스폴이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엄청 편하겠네요. 저도 어떻게 안 될까요?”

“가능해요. 스폴 경이 옷만 가져온다면요.”

웬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라미아.

실제 그녀에게 있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색하던 스폴은 곧 쭛 하고 혀를 찼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다시 따로 움직이실 거 아닙니까. 그럼 소용없지요.”

“며칠은 편할 수 있죠.”

“대신 역체감이 대단할 것 같아서 거절하렵니다. 그런데 참 밝은 황녀님이십니다.”

“그렇죠? 귀여움만 받고 자라서 그런지 순진하기도 하고.”

“그게 그런 순진한 황녀를 속여 먹으신 분이 할 소립니까?”

실실 웃는 스폴의 말에 라미아가 자신은 떳떳하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난 속인 거 없어요. 허락만 받아오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할 생각이었으니까.”

“고민한 후 결국엔 거절하실 거잖아요.”

스폴은 뻔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속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아니, 그에 앞서 검후가 가볍게 생각하고 허락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이제 그녀도 라미아와 일리나의 제자가 된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아나크렌도 아니고 라일론의 황녀가 그런 대단한 인연을 쌓는다? 아나크렌에게 있어 결코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뭐, 그거야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 그냥 가볍게 넘기고, 황제의 허락을 받으란 건 또 무슨 생각이야?”

이드가 물었다.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골칫덩이를 떠넘겼을 뿐이지. 그리고 약간 괘씸한 생각도 들었고, 이번 일….. 딸을 중간에 넣어서 사적인 친분을 쌓아볼 계획 맞잖아요?”

“……그런 것 같진 않은데.”

황녀를 초대한 것은 결국 이드 자신이었다.

자신의 초대가 없었다면 황녀가 별궁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미아는 그 황녀가 별궁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황제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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