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71화
1506화
하지만 황제를 직접 만나본 이드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는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술을 꽤 좋아하지만, 소탈했고,
눈치가 빠른 걸 보니 머리 또한 좋은 거 같았다.
개인적으로 필리푸스 황제보다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이가 딸을 이용하는 음험한 계획을 세웠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린 황녀가 개인적으로 쌓은 친분이 국가 간의 일에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된다고 그런 일을 꾸밀까. 굳이 불확실한 일에 위험부담을 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드는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라미아의 주장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은 또 아니었으니까.
아닌 말로, 아무리 황궁 내라지만, 이 늦은 시간에 황녀가 이 별궁까지 오는 걸 아무도 막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후로 더 올 일이 없는 라일론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이드는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길 그만뒀다.
대신 일리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황녀를 많이 귀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퍽 기억에 남았다.
“황녀를 많이 예뻐하던데. 우리도 아이를 가질까요?”
“이드가 원한다면 언제든. 하지만 지금은 싫어요.”
“싫어요?”
상당히 선명한 거절에 이드는 조금 놀랐다. 황녀를 귀여워해서 아이를 원하는 줄 알았는데?
“혼돈의 파편 때문에 그래요?”
일리나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것도 큰 이유지만, 그보다는 장소가 중요해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들 엘프는 숲속에서가 아니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아요.”
“그건 처음 알았어요.”
듣고 나니, 깊이 묻힌 지식 일부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결국 숲으로 돌아가는 것도 혼돈의 파편을 모두 처리한 후라야 가능한 일. 혼돈의 파편을 처리하지 못하면 돌아갈 숲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혼돈의 파편을 처리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
그때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손길이 있었다. 라미아다.
“저한텐 왜 안 물어요?”
“어・・・・・・ 아이, 가지고 싶어? 그렇다고 하기엔 황녀를 너무 대놓고 놀리던데.”
일리나가 황녀를 예뻐했다면, 라미아는 가지고 놀았다는 느낌이다. 둘 다 황녀를 귀여워하긴 했지만 이건 꽤나 큰 차이였다.
그러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샐쭉해지는 라미아의 눈꼬리.
혹시 내가 또 어떤 말실수를?
그러면서 몸의 절반을 일리나 뒤로 숨기는 이드다.
“그건 상대가 황녀니까 그랬죠. 내가 언제 아이를 싫어했다고…….”
알지. 같이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를까,
하지만 분명 황녀를 상대하는 모습은, 이전 지구에서 아이를 상대한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럼 황제 때문에?”
“설마요. 내가 황제에 대한 의심을 황녀에게 풀 사람으로 보여요?”
여기서 장난으로 고개를 끄덕이면 한 대 맞겠지?
“어, 방금 고개를 끄덕…….”
“아니야!”
“흐음, 아무튼 내가 그런 건 황제 때문이 아니라, 스승이 되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나 같은 스승을 원한다면 그 정도 시련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 어차피 허락할 생각도 없으면서.
내심 떠오른 말을 꿀떡 삼킨 이드는 라미아가 원하던 질문을 던졌다.
“아이, 가지고 싶어?”
“가지고 싶지만, 지금 몸으로는 어렵네요. 누구 씨의 게으름 때문에 말이죠.”
말과 함께 쏘아지는 강렬한 눈길이 ‘너 말이야, 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차원 이동의 부작용으로 라미아는 현재 골렘을 육체로 사용하고 있다.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체가 필요한데, 그 변화는 온전히 이드에게 달린 상황.
이드는 전력을 다해 라미아의 눈길을 피했다.
그도 열심히 노력 중에 있었지만, 인간의 육체를 빚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가 만들어야 할 것이 같은 남성도 아닌, 여성의 육체임에야.
물론 그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라미아에겐 지루하기만 할 뿐. 이드는 급히 이야기를 끝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크허험. 그, 그만 자자. 내일은 정식 알현이 있어서 바쁘다고.”
그는 라미아와 일리나의 손을 잡아 침실로 향했다.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에 라미아는 악동처럼 웃으며 자신의 손을 잡은 이드의 팔에 매달렸다.
“이번엔 내가 봐주는 거예요.”
“……좀 더 노력할게.”
경고 아닌 경고에 여전히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드는 곧 조용히 침실의 문을 닫았다. 그 순간에는 이미 황제와 황녀에 관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있었다.
물론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황녀에게 시달려야 했던 황제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따지고 보면 황녀를 잘 단속하지 못한 황제 본인이 불러온 불행인 것을.
덕분에 예정된 알현 시간이 살짝 늦어졌지만, 뭐, 신경 쓸 필요 없는 사소한 일이었다.
***
처음 라일론 황궁에 발을 들인 사람은 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유는 하나.
바로, 넓은 대전에 깔린 적색 계통의 카펫 때문이다.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마치 붉은 들판에 선 기분을 들게 하는 이 카펫은 그 강렬한 색으로 인해 은근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덕분에 처음 대전에 든 인물은 더욱더 긴장하고 조심하게 된다.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고 깔아 놓은 카펫이었다.
하지만 오늘.
카펫을 디디고선 인물 중 긴장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긴장은커녕 웃는 얼굴로 서로의 안부를 묻기 바빴다. 대전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에 흔들리기에는 거물인 이들.
이윽고 인사를 마친 그들이 오늘의 용무에 대해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인물들이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그사이 대전으로 들어선 황제가 가장 상석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는 아래에 선 인물의 면면을 살피고는 고개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부름이었는데, 이리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어 고맙소.’
“황제 폐하의 부름에 어찌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맙소, 아마람 공작.”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나람 공작도.”
그렇게 먼저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물들. 여덟 대공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인사를 주고받는 황제였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마람 공작이었다.
“하온데, 폐하.”
“말씀하시오. 공작.”
“눈가에 거뭇하게 피로가 묻어나는 것은 어인 일이 옵니까. 혹여 이번 사신의 방문에 어떤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황제가 자신들을 급히 소집한 이유가 이번 사신에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 중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공작들도 관심을 가지고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허허허. 티가 난 모양인데, 참으로 민망하구려.”
그에 황제는 곤혹스러운 듯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봐도 사신의 방문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나오는 반응은 아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공작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항상 궁정 마법사와 신관의 관리를 받고 있는 황제를 저리 피곤하게 만들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에 황제는 결국 입을 열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사신 때문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실은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비비 때문이라오.”
“올리비아 황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하하하. 과연 그분이라면 우리 제국에서 유일하게 폐하를 괴롭힐 수 있으신 분이시지요.”
공작들도 모두 아들딸은 물론 손자 손녀를 두고 있을 나이의 인물들이었다. 그렇기에 아비로서의 황제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비로서 어린 막내딸이 얼마나 귀여울 것인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것을 이해한 대공작들은 조금은 짓궂은 호기심을 보였다. 과연 황녀는 어떤 일로 아침부터 황제를 괴롭힌 것일까. 공작들은 서로 나서 무슨 문제든 자신들이 해결하겠다며, 황녀가 아침부터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에 황제는 어쩔 수 없다며 입맛을 한번 다시고는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께서도 익히 아시겠지만, 이번에 아나크렌의 명예 후작 부부가 사신으로 왔소.”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이 이렇게 모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황녀와 관련이 있습니까?”
사신과 황녀.
특별히 연결될 구석이 없는 단어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전날 사신들이 입궁하는 모습을 황녀가 보았던 모양이오.”
황제는 전날 황녀가 밤늦게 별궁을 방문한 일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밝혀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 예법에도 맞지 않았고, 괜한 오해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
“그럴 수 있지요. 혹시 명예 후작에 관심을 보이셨습니까?”
명예 후작이 언급되는 순간 몇몇 공작의 눈빛이 심상찮게 빛났다.
황제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관심을 보인 것은 맞는데, 대상이 명예 후작이 아니라, 명예 후작 부인들이었소.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명예 후작 부인들의 미모가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오.”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말은 언뜻 들었습니다만, 미모까지 대단한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일까.
“아무튼 두 부인을 본 황녀가 그들이 동화 속 공주 기사와 공주 마법사 같다며 스승으로 삼고 싶다고, 일찍부터 찾아와 떼를 쓰는 것이 아니겠소.”
“하하하, 사신으로 온 사람을 스승으로 삼겠다니, 폐하께서 퍽 곤혹스러우셨겠습니다.”
“그래도 만약 이루어진다면 좋은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명예 후작 부인과의 인연은 곧 명예 후작과의 인연.
그건 곧 마인드 마스터와의 끈을 라일론 제국으로 끌어 온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명예 후작이라는 작위보다 더 친밀한 사제의 인연을 통해서.
순간 공작들은 혹시 황제가 이 상황을 의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인연이지요.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안될 이유가 있습니까? 명예 후작 부인들이라면 황녀의 스승으로 모자람이 없을 텐데요.”
“황녀의 이야기를 듣고 저쪽에서 조건을 달았습니다. 나와 검후가 허락한다면 깊이 생각해 보겠다고.”
“허!”
황제는 둘째치고.
검후의 허락이 필요하다니.
“그 말은 사실상 거절이 아닙니까.”
공작들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후가 이를 허락해 주겠는가. 비록 소드 팰러스를 세워, 널리 가르침을 내린 검후라지만,
자국의 국익 앞에선 그녀도 쉽게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 분명했다.
“그렇지요. 그것만 아니었다면 나도 벌써 허락을 했을 겁니다.”
“……아침부터 고생이십니다.”
“한 아이의 아비로서 견뎌야 할 일이지요.”
황제는 다시 생각해도 머리가 아프다는 듯 꾹꾹 이마를 누르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자, 그럼 황녀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사신을 만나기 전에 여러분들이 미리 아셔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으니 말입니다.”
한순간에 바뀐 황제의 분위기.
공작들도 곧장 자세를 바로 하고 귀를 기울였다.
“경청하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