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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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1화


서장(序章) 1 – 장례식(葬禮式)

바람이 차고 공기가 신선한 날이었다. 겨울이 오려면 아직도 몇 달은 더 있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산정(山頂)에 부는 바람이 유달리 차가워서 진산월(陳山月)은 자신도 모르게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장례식 장면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단순히 무겁다거나 슬프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비애(悲哀)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진산월은 지금까지 다섯 번인가 장례식에 참석했었지만 그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곤 했다.

어쩌면 그런 분위기는 진산월만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슬픈 표정도 없이 저희들끼리 큰소리로 떠들거나 심지어는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거리고 있는 모습도 곧잘 보이곤 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런 작자들을 보면 공연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도 웃거나 떠드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묵묵히 술을 따르고, 향(香)을 올리고, 지전(紙錢)을 불살랐다. 장례식 다운 장중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진산월은 일단 마음이 놓였다.

더욱 다행인 것은 사매(師妹) 역시 무덤에 술을 부으면서 울거나 처량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매의 눈에서 눈물이라도 흘러내렸다면 진산월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 사매는 울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갑작스런 충격을 받게 되면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사매가 재배(再拜)를 하고 나자 모두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진산월의 차례였다.

진산월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남들처럼 똑같이 술을 따르고, 향을 피우고, 지전을 태웠다.

두 번 절을 하고 바닥에서 일어섰을 때 누군가의 푸념소리가 들려왔다.

“쳇!”

진산월은 보지 않아도 그것이 응계성(應戒星)의 음성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 녀석은 진산월이 바닥에 엎드려 통곡이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무덤 속에 들어간 사람이 되살아 날 수만 있다면 진산월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나 그렇지 않은 이상 공연히 남들 앞에서 청승맞은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진산월 마저 마치고 나자 장내에는 더 이상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장례식도 허무했지만 장례가 끝난 후는 더욱 허무했다.

누군가가 구슬픈 만가(輓歌)라도 부를 법한데 모두들 말없이 무덤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덤의 봉분은 작고 초라했다.

한때 구대문파(九大門派)에서도 혁혁한 명성을 자랑하던 대종남파(大終南派)의 이십대 장문인(掌門人)의 무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다시 한차례 차가운 바람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자 검게 탄 지전의 재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허공을 휘돌다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진산월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든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그만 내려가지.”

정해(程解)와 낙일방(駱一方)이 주섬주섬 제기(祭器)들을 치우고, 방취아(龐醉兒)와 두기춘(杜期春)이 술잔과 향로를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묵묵히 진산월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막 산정을 내려오기 직전에 진산월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향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무덤 가의 풍경이 그렇게 황량할 수가 없었다.

사매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사형.”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당(祠堂)이라도 세울 걸 그랬어. 주위가 너무 쓸쓸하군.”

사매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그런걸 좋아하지 않는 줄은 사형도 알잖아요. 이걸로 됐어요.”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행중 제일 마지막으로 산을 내려왔다.

산정 아래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돌았을 때, 유난히 파란 가을 하늘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울창한 수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수림 사이에 파묻힌 듯 자리잡고 있는 몇 채의 전각을 보는 순간 진산월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장문인이로군.’

그렇다.

이제 그는 비록 몰락할대로 몰락해버려 지금은 구대문파에서도 쫓겨나긴 했으나, 한때는 중원(中原)의 유수한 명문정파(名門正派)로 명성을 떨치던 종남파의 이십일대(二十一代) 장문인(掌門人)이 된 것이다.

구월(九月) 십칠일(十七日).

날씨는 맑았으나, 바람이 유난히 심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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