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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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4화


제3장. 실인실물(失人失物)

그날 밤.
진산월은 후원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 채의 아담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한 달 전만 해도 그 전각의 주인은 태평검객 임장홍이었다. 하나 이제 임장홍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진산월이 새로운 주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진산월은 전에도 몇 번 이 전각 안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하나 주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분명 같은 장소, 같은 방이건만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예전 임장홍이 살아 있을 때는 다들 이 전각을 태평각(太平閣)이라고 불렀다. ‘태평’이라는 단어만큼 임장홍에게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임장홍은 그야말로 태평무사(太平無邪)한 사람이었다. 성격이 그러했고, 무공도 그러했다. 무엇보다도 사람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더욱 그러했다. 그는 결코 유능하거나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으나, 누구도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싫어질 수 없는 인간이었다. 온화한 태도, 느릿한 어조(語調),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는 느긋한 성격…. 그의 검법도 성격만큼이나 느리고 완만했다. 그래서 모두들 그를 태평검객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아무도 그를 천하무쌍(天下無雙)의 검객(劍客)이라고 하지 않았으나, 종남파의 천하삼십육검을 그만큼 완벽하게 익힌 사람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의 내공(內功)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보다 훨씬 모자라는 실력의 고수와 싸워도 곧잘 패하고는 했던 것이다. 종남파가 몰락의 길을 더욱 재촉하게 된 것도 장문인인 그가 다른 문파의 이류급(二流級) 고수들에게 몇 번씩이나 무참하게 패한 것이 커다란 원인 중 하나였다. 임장홍이 제자들에게 먹일 영약을 찾아 심산유곡(深山幽谷)을 헤매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만큼은 내공이 모자라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이나 이름난 명산(名山)의 후미진 계곡을 뒤지고 다녔던 것이다.

종남파 문하들의 내공이 빈약하게 된 것은 종남파에 전래되는 내공심법(內功心法)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백 년 전만 해도 종남파에는 육합귀진신공(六合歸眞神功)이라는 절세무쌍의 내공심법이 있었다. 하나 이백 년 전에 종남파 사상제일고수(史上第一高手)였던 태을검선(太乙劍仙)이 신비스럽게 실종된 후, 종남파에는 더 이상 육합귀진신공이 전해지지 않았다. 태을검선은 종남파에서 배출된 최초이자 최후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였다. 그가 건재했을 당시 종남파는 비단 구대문파 중에서도 제일의 자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문파(門派)였다. 하나 태을검선은 미처 자신의 절학(絶學)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고, 그 후로 종남파는 차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절세(絶世)의 신공인 육합귀진신공의 비결이 없어진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임장홍은 제자들의 빈약한 내공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영약(靈藥)의 도움이라도 받으려 했으나, 그런 영약들이 쉽사리 구해질 리 없었다.

진산월이 임장홍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때 그는 아무것도 없는 떠돌이 거렁뱅이였으며, 거의 굶어죽기 직전에 처해 있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 날, 진산월은 곱은 손을 호호불며 구걸을 하다가 차디찬 눈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삶을 살아갈 희망도, 기력도 없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 하나의 만두가 내밀어졌다.

차디차게 식은 그 만두를 씹을 때 진산월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만두와 함께 들려오던 음성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네놈은 마치 삼십 년 전의 나 같구나. 나와 같이 가지 않겠느냐?”

진산월은 눈물에 젖어 짭짤한 만두를 씹어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비쩍 마르고 보잘것없는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등 뒤에는 길다란 장검을 매고 있었고, 한 손에는 댕기머리를 한 예쁘장한 계집아이를 잡고 있었다.

진산월은 하염없이 중년인을 올려다보았다.

꾀죄죄한 몰골의 중년인은 부드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보며 웃고 있었다.

진산월은 한참 동안 그를 올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人生)은 결정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자신이 몰락해 가는 문파의 마지막 줄에 서 있는 신세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서 좋았고, 추위를 막아줄 거처가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예쁜 사매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진산월은 자신이 그 이상 바란다면 그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임장홍도 진산월만큼 욕심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종남파의 부활(復活)이었다.

임장홍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본 파(本派)의 무공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잃어버린 신공비결(神功秘訣)만 찾게 되면 우리는 충분히 이백 년 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 군림천하(君臨天下)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남들은 아무도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지만 진산월만은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사부의 말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너희들을 반드시 군림천하 하도록 해주겠다.”

임장홍은 제자들을 향해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뇌이며 영약을 찾아 심산유곡을 뒤지고 다녔다.

그런 임장홍이 오랜 동안의 수소문 끝에 마침내 절세의 영물(靈物)로 알려진 만년삼정(萬年蔘精)이 용문산(龍門山) 깊숙한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뻐하는 모습이란 세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임장홍은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천신만고 끝에 만년삼정을 구할 수 있었으나, 실족(失足)하여 절벽에서 떨어져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만년삼정과 장문인의 지위를 진산월에게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산월아. 너만은 꼭 군림천하 해야 한다…!”

진산월은 자신의 손을 꼭 움켜쥔 채, ‘군림천하’의 네 글자를 입가에 남기고 죽은 임장홍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 군림천하(君臨天下)!

이 단순한 네 글자의 단어 속에 함축된 뜻은 실로 너무도 거대무비(巨大無比)한 것이었다. 무릇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군림천하를 꿈꾸지만, 진실로 그것을 이룬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 혼자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가 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 모두가 천하를 석권(席卷)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의 상징은 ‘군림천하기(君臨天下旗)’였다.

군림천하기는 그 이름만 전해질 뿐, 단 한 번도 실재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주창한 사람은 백년 전의 천하제일고수였던 신검(神劍) 조일화(趙日華)였다. 조일화는 화산파(華山派)가 배출한 사상 최고의 검객(劍客)으로, 별호 그대로 검에 관한 한 신(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화산파를 명실상부한 구대문파의 제일봉(第一峯)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깃발을 만들어 구대문파를 하나씩 찾아다니며 화산파에 굴종한다는 서약을 받으려고 했다. 그것이 ‘군림천하기’의 시초였다.

하나 그의 야망은 결국 화산파를 제외한 구대문파 전체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소림(少林)과 무당(武當), 아미(峨嵋)의 최고고수들의 합공(合攻)을 받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만든 깃발도 갈가리 찢겨졌다.

그때 이후 강호무림에는 하나의 전설(傳說)이 탄생하게 되었다.

누구든 하나의 깃발에 구대문파의 서약(誓約)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군림천하(君臨天下)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림천하기’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뒤로 백 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군림천하기’를 만든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것을 만들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구대문파는 서로가 혹시라도 상대방이 ‘군림천하기’를 만들 것을 두려워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고, 군림천하의 야망을 품고 있어도 그것을 차마 펼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른 팔 개 문파를 완벽하게 누를 자신이 없고서야 ‘군림천하기’를 만든다는 것은 스스로의 멸망을 재촉하는 길임을 알았던 것이다. 임장홍이 ‘군림천하’를 입버릇처럼 외우고 다닌 것도 어쩌면 구대문파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반발심리(反撥心理)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임장홍 자신도 군림천하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는 결국 군림천하의 무거운 임무를 진산월의 어깨에 올려주고 죽었고, 진산월은 사부의 유명(遺命)을 받들어야만 했다. 지금의 진산월에게 군림천하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머나먼 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산월은 그 별을 쫓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사부가 남긴 만년삼정을 복용함으로써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진산월은 만년삼정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 운명(運命)이었다.

그날 밤, 사부가 남긴 만년삼정을 복용하기 위해 만년삼정을 담은 옥함을 열었을 때, 진산월은 옥함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림인이 복용하면 능히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타통하게 해 준다는 희대의 보물, 만년삼정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건 두기춘(杜期春)의 짓이다!”

응계성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모두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년삼정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똑같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두기춘 외에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짐작을 확신시켜주듯이 두기춘의 방으로 달려갔던 낙일방이 허겁지겁 돌아왔다.

“두사형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응계성이 다시 소리쳤다.

“그 나쁜 놈이 결국은 일을 저질렀구나!”

정해가 낙일방에게 급히 물었다.

“다른 곳은 찾아보았는가?”

낙일방은 인상을 있는 데로 찡그렸다.

“찾아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두 사형의 옷가지와 자질구레한 짐까지도 모조리 없어졌으니까요. 틀림없이 어디론가로 내뺀 게 분명해요.”

처음 진산월로부터 연락을 받고 사람들을 소집했을 때 두기춘의 모습만 나타나지 않았었다. 즉각 의심이 든 정해가 낙일방을 급히 두기춘의 방으로 보냈으나 이미 두기춘의 행적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두기춘이 만년삼정을 가지고 사라졌다면 그의 종적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두기춘은 용의주도한 성격이어서 결코 꼬리를 잡힐 짓을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어졌다. 만년삼정은 비단 희대(稀代)의 영약일 뿐 아니라, 그들의 사부인 임장홍이 자신의 목숨과 바꾼 것이었다. 임장홍이 그것을 진산월에게 주었을 때 그 속에는 종남파의 부활과 군림천하를 염원하는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소망이 채 피워보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 참이었다. 정해가 진산월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추적대를 보낼까요?”

진산월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둬.”

정해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냥 두라고요?”

“그 녀석이 어지간히 먹고 싶었던 게지. 누구라도 그랬을거야.”

정해는 한숨부터 새어나왔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마침내 응계성이 참지 못하고 성난 외침을 토해냈다.

“장문사형. 사형의 마음이 좋은 건 알겠지만 이건 그냥 내버려둘 일이 아니오. 본 파의 사활(死活)이 걸린 일이란 말이외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물건 하나에 사활을 걸 정도라면 군림천하의 꿈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게 좋을 거야.”

응계성은 막 다시 무어라고 소리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해가 그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응계성 자신이 흥분해서 날뛸 일도 아니었다.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진산월이다. 만년삼정은 원래 진산월이 복용하기로 되어 있던 것이었으니, 의당 화를 내려면 진산월이 내어야 했다. 그런데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옆에 있는 제삼자가 먼저 나서서 흥분한다면 꼴이 우습지 않겠는가? 응계성은 억지로 솟구치는 화를 삭히며 씩씩거리고 있다가 아무래도 못 참겠는지 다시 한마디를 했다.

“그놈이 그런 짓을 했는데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소. 이건 지하에 계신 사부님을 모독하는 일이란 말이오.”

그가 임장홍마저 들먹거리며 떠들어대자 진산월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응계성은 무공에 대한 집착력도 뛰어나고 재질도 좋은 편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조그만 잘못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편협함이 있었다. 응계성의 본명은 응천리(應千里)였다. 하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를 응계성(應戒星)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별(星)을 보고도 꾸짖는다(戒)’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별명처럼 불리워 졌었는데,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모두들 그를 본명보다는 응계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 응계성이었으니 이번 일에 대해서 자기가 당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진산월의 일이니 만큼 그래도 이런 정도에서 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 이제껏 말이 없이 한쪽에 서 있던 매상(梅霜)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놈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언제고 내 손에 걸리면 반드시 숨통을 끊어 줄테니까.”

너무도 차가운 말에 모두들 섬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매상은 입밖에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산월이 입문(入門)한 다음 해에 종남파에 들어왔는데, 이름 그대로 서릿발처럼 날카롭고 매서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했다. 무공실력은 종남파의 문하제자들 중 단연 으뜸이며, 싸움 실력은 더욱더 탁월했다. 비무(比武)를 할 때도 손에 인정사정을 보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는 누구도 그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임장홍은 살아 있을 때 매상의 손쓰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저 녀석은 꼭 투견(鬪犬)처럼 싸우는군. 저건 종남의 방식이 아니야.”

그 뒤로 그에게는 투검자(鬪劍子)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투검자 매상이 죽은 목숨이라고 하면 그것은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평상시에도 매상은 두기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두기춘은 약삭빠르고 허영심이 많아서 매상과는 성격부터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고 얼굴이 곱상하다는 것도 매상이 그를 싫어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아홉 명의 사형제들 중 낙일방을 제외하고는 두기춘이 가장 잘생긴 편이었다. 얼굴이 유달리 하얗고, 입술이 여자처럼 붉어서 화장을 하면 정말 여자로 오인 받을 정도의 미남자였다. 그에 비해 매상은 얼굴이 길쭉하고 안면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검상(劍傷)이 나 있어 몹시 차갑고 험악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말재주도 그리 있는 편이 아니었다. 사형제들 중 매상보다 말이 적은 사람은 오직 소지산(蘇遲山)뿐이었다. 소지산은 하루에 한 두 마디를 할까말까할 정도로 말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매상에게는 모욕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매상의 차가운 말 때문에 어색하게 굳어있던 분위기를 깬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내일 소림사로 출발하겠다.”

모두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삼사일 후에 간다면서요?”

방취아가 물었다.

“원래는 그럴려고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그러니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내일 떠나야겠다.”

소림사로 간다! 간단한 말이었으나 그 속에 내포된 뜻은 적어도 종남의 문하들에게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무림대회에 참가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대문파에서 쫓겨나 십 여 년간이나 강호무림 상에서 모습을 나타나지 않았던 종남파가 다시 강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두들 조금 전의 우울함을 잊고 가슴 설렌 표정이 되었다. 진산월을 따라 소림사로 떠나는 사람이든, 종남파에 계속 남아있는 사람이든 이번 강호행(江湖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칫 이번 일이 잘못되면 종남파는 영영 일어설 힘을 잃어버리고 말게 될 것이다.

“일전에 말한 대로 사매와 정해, 일방, 그리고 계성이 나와 동행할거야. 사문의 일은 매이제가 소삼제(蘇三弟)와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고.”

매상이 한쪽 구석에 말없이 서 있는 소지산을 힐끗 돌아보았다.

“저 돌부처와 상의하라니… 농담이 심하군.”

방취아가 옆에서 조잘거렸다.

“나는 왜 빼는 거에요? 소사형이 싫으면 나하고 상의하면 되잖아요.”

매상의 얄팍한 입술이 조금 일그러지며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넌 술이나 마시고 있어.”

방취아의 고운 아미가 잔뜩 치켜 올라가며 볼이 퉁퉁 부어 올랐다.

“왜 다들 나만 따돌리려는 거에요? 내가 뭘 어쨌다고? 술 마시는 것도 죄란 말이에요? 그건 다들 마시잖아요. 왜 나만 못살게 굴어요?”

낙일방이 킬킬거렸다.

“크크…. 말은 잘한다. 하지만 자기보다 술 잘 마시는 여자를 좋아할 남자가 누가 있겠니?”

방취아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꼬나보았다.

“그럼 술이 쎈 게 죄란 말이에요?”

“술이 쎈 게 죄는 아니지. 단지 네가 여자라는 게 죄지.”

“사저도 여자잖아요!”

“사저는 너처럼 술을 마시지 않지.”

방취아는 약이 잔뜩 올라 씩씩거렸다.

“그럼 남자가 술 마시는 건 괜찮고 여자가 술 마시면 죄란 말이에요?”

낙일방은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슬슬 꽁무니를 뺐다.

“그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너를 타박한 건 매사형이니 매사형한테 물어야지.”

낙일방은 성격이 불같고 단순하며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단 한 가지 여자에게만은 이상하리만큼 약했다. 특히 화를 내는 여자는 아주 두려워했다. 방취아가 계속 험악한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자 낙일방은 조금씩 뒤로 물러서서 정해의 뒤로 숨고 말았다.

방취아는 술에 취하면 요조숙녀처럼 얌전해지지만,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팔팔하고 암팡진 데가 있었다. 남들하고는 정반대라서 다들 아주 재미있어 했지만, 대신에 그녀가 술에 취해 있지 않을 때는 조심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녀의 주량(酒量)이 너무 세서 웬만큼 마셔서는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에 들어있는 ‘취(翠)’를 ‘취(醉)’로 바꿔 부른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녀의 ‘취아(醉兒)’라는 이름 속에는 은근히 그녀가 취해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지도 몰랐다.

정해는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가서 괜히 창피만 당하는 게 아닐까요?”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진산월은 오늘 만년삼정을 복용한 후 이삼일간의 운공(運功)으로 임독양맥을 타통한 절세고수(絶世高手)가 되어야 했다. 그런 연후 이번 무림대회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어 종남파의 부활을 천하무림에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 만년삼정은 이미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고, 진산월은 절세고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지금의 실력으로 무림대회에 갔다가는 정해의 걱정처럼 오히려 남들의 괄시만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경험이라도 쌓는다고 생각하면 돼.”

정해는 진산월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이 되었다.

‘정말 배짱이 좋은 건지 성격이 둔한 건지… 대사형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진산월은 낙일방을 돌아보았다.

“너는 행장(行裝)을 꾸려라.”

낙일방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사형.”

“타고 갈 말들과 장비를 빠짐없이 챙기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낙일방이 방을 나갈 때 정해도 그를 따라나갔다.

“내가 도와주지.”

진산월의 시선은 옆에 있는 방취아에게로 돌려졌다. 방취아는 아직도 화가 채 풀리지 않았는지 얼굴에 심통이 가득 나 있었다. 진산월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취아는 나와 같이 음식을 만들자꾸나. 오늘 저녁에는 모처럼 실컷 먹고 마셔야겠다.”

방취아의 얼굴이 언제 찌푸렸냐는 듯 활짝 펴지며 자신도 모르게 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거 좋아요. 모처럼 대사형다운 생각을 했군요.”

응계성이 퉁명스런 음성으로 대꾸했다.

“먹고 마시는 게 대사형다운 생각이라고? 그거야말로 너다운 생각이다.”

방취아의 눈에 다시 쌍심지가 돋았다.

“왜 또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에요?”

“그럼 지금이 먹고 마실 때냐? 제일 큰 자금줄인 대왕령의 주루는 듣도 보도 못한 사숙인가 뭔가 하는 작자한테 모두 빼앗기고, 믿었던 만년삼정은 엉뚱한 놈이 가지고 내빼서 완전히 쪽박차게 생긴 신세인데…”

“내가 먼저 그랬어요? 대사형이 하자고 하잖아요.”

“그러면 너라도 말려야지.”

방취아의 음성이 절로 뾰족해졌다.

“그렇게 못마땅하면 응사형이 직접 말하지 그래요? 왜 자꾸 애꿋은 나만 들볶고 난리를 치는 거에요?”

그녀의 말마따나 응계성도 진산월에게 투덜거리고 싶었다. 하나 그래도 명색이 장문인인 진산월에게 대놓고 할 수는 없어 괜히 엉뚱한 방취아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응계성은 진산월을 흘끔 돌아보다가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너는 말하면 알아들을 사람 같아서 그랬다.”

그때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일 길을 떠나면 최소한 한달 이상은 서로 만나지 못할 거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모두 모여서 함께 식사할 시간을 갖자는 것 뿐이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 두기춘, 그 녀석은 어디 쳐박혀서 만년삼정을 쳐먹고 절세의 내공을 닦고 있을 겁니다.”

진산월은 다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응계성은 또 다시 분통이 치밀어 오르는지 관자놀이 부근이 붉게 물들었다.

“장문사형은 정말… 아! 관둡시다. 말해 보았자 내 입만 아프니…”

응계성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휑하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취아는 그의 멀어져 가는 뒷등을 보고 있다가 혀를 낼름 거렸다.

“피! 싫으면 이따가 오지 않으면 되잖아요? 대사형이 음식을 만들면 제일 열심히 먹으면서…”

방취아는 종알종알 거리면서 자신도 음식준비를 하기 위해 뒤쪽으로 사라졌다. 매상이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정말 자신 있는 거야? 아니면 무슨 다른 계획이라도 세우고 있던지?”

매상은 진산월이 종남에 온 일년 후에 입문(入門)을 했지만 나이는 서로 동갑이었다. 비록 입문이 늦어서 매상이 사제가 되었지만, 매상은 한 번도 진산월을 사형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진산월도 그를 사제로 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라고 할 수도 없는 묘한 관계였다. 응계성은 가끔 그들의 그런 사이를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 비꼬았지만, 응계성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계획은 무슨…. 실컷 먹고 나면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를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 계획도 없어.”

“그곳에 가면 틀림없이 형산파(衡山派) 인물들이 시비를 걸어올 텐데…”

형산파는 종남파를 밀어내고 구대문파에 속하게 된 문파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유달리 종남파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해서 강호상에서도 종남파의 문하들만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싸움을 걸어오곤 했던 것이다.

“할 수 없지. 시비를 걸면 받아주고 싸우자고 덤비면 응해줄 수밖에.”

매상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래서 자신 있느냐고 물어 본 거야. 그놈들의 원고검법(遠古劍法)을 꺾을 자신이 있냐고.”

“그건 나도 모르겠어.”

“정말 한심하군. 장문인이란 작자가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누가 믿고 따르겠나?”

매상은 씹어 뱉듯이 말했다.

“계성 대신에 나를 데려가.”

진산월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너는 여기 있어야 돼.”

매상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왜?”

진산월은 짤막하게 말했다.

“초가보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

그 말에 매상은 입을 다물었다.

초가보!

그들은 지금 현재 종남파의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조암령 일대에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여 호시탐탐 종남파를 노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종남파에 침입하였을 때 그들을 제지하지 못한다면 종남파의 부활은커녕 존재 자체가 없어질 판이었다.
매상의 관자놀이가 툭툭 불거졌다.

“빌어먹을 일이로군.”

“그렇지. 빌어먹을 일이야.”

매상은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나가서 종남파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건 결코 문하제자가 장문인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하나 진산월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매상은 한차례 더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진산월은 매상의 몸이 보이지 않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한쪽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머리를 까치집처럼 헝클어뜨린 사내 하나가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소지산은 항상 지저분하고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천성이 게으른 건지 아니면 원래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었는지 아무튼 항상 행색이 남루하고 몸에서는 악취가 풍겨 나왔다.
그래서 방취아는 소지산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식사를 할 때도 소지산에게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고, 그와는 몇 달 동안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방취아뿐만 아니라 소지산과 대화를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지산은 게으를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말이 없어서 어떤 때는 벙어리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간혹 입을 열 때도, “그래.”, “아니.” 하는 짤막한 한 마디뿐이어서 도대체 입은 왜 뚫어놓았는지 의아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도 진산월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소지산은 벽에 몸을 기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상은 실력은 좋은데 남을 너무 무시해서 가끔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너도 알고 있지?”

소지산의 고개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끄덕여졌다.
남들이 보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라고 화를 냈겠지만 진산월은 이미 그런 모습에 익숙한지 조금도 변함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초가보의 총관(總官)인 소면호리(笑面狐狸) 악종기(岳鍾起)는 꾀가 많은 사람이라 틀림없이 매상의 그런 점을 이용해 일을 저지르려 할 것이다.”

소지산은 그의 음성을 듣는지 안 듣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개의치 않고 다시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매상을 도와 이곳을 잘 지켜다오.”

소지산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술이 열리며 짤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지요.”

그의 말소리는 매우 느려 답답할 정도였다.
하나 그 음성을 듣자 진산월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소지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소지산이 말이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의 말을 아끼기 때문이었다.
말을 아끼는 만큼 일단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전적으로 책임을 졌다.
그가 일단 그러겠다고 한 이상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렇게 할 것이다.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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