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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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6화


제5장. 강호초행(江湖初行)

누런 황톳길 저쪽 끝에 붉은 노을이 걸려 있었다. 관도 양편에 늘어선 나무들이 황혼을 받아 긴 그림자를 길 위에 드리우는 모습이 마치 길게 도열해 선 병사(兵士)들을 연상케 했다.

휘잉…!

한차례 세찬 바람이 불자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하늘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바닥을 쓸 듯이 어디론가로 계속 굴러가 버렸다. 그때 관도 저편에서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한 떼의 인마(人馬)가 나타났다. 말이 다가오며 드러난 모습은 사남일녀(四男一女)였다. 네 명의 남자는 모두 바람막이 피풍을 두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인 또한 백색 피풍을 두르고 있었는데,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려고 했는지 머리에 죽립(竹笠)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낙엽과 흙먼지를 밟으며 길을 재촉했다. 문득 일행 중 가장 앞서 달리고 있던 백의인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조금만 더 가면 제법 괜찮은 주루가 나올 겁니다. 그곳에서 잠깐 쉬어 가는게 어떻습니까?”

네 명의 남자 중 가장 체구가 크고 몸집이 좋은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다섯 사람은 더욱 질풍같이 말을 몰아 앞으로 치달려갔다. 얼마쯤 가자 과연 관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몇 채의 인가(人家)와 함께 주루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酒)> 라고 쓰여진 붉은 깃발이 세찬 바람에 마구 펄럭이고 있었다. 이미 몇 사람의 손님이 와 있는지 주루 앞에는 몇 마리의 말이 매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새하얀 백마(白馬)가 눈을 끌었다. 백마는 잡털 하나 섞이지 않아 눈부시게 희었는데, 특이하게도 네 개의 발굽 부위에만 유독 붉은 색 털이 나 있어 더욱 시선을 사로잡았다.

“설리총(雪離聰)이군. 이런 곳에서 설리총을 보게 될 줄이야…”

일행 중 체구가 가장 작은 백의인이 혀를 차며 탄성을 내지르자 가장 앞서 있던 백의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사형은 항상 괜찮은 말만 보면 사죽을 못쓰는군요. 어떻게 사람보다 말을 더 좋아해요?”

“네가 몰라서 그런다. 이건 정말 좋은 말이야. 천중일선(千中一選)의 명마(名馬)라구. 누가 이런 명마를 타고 있을까?”

“보나마나 사형 취향에 딱 맞는 천하절색(天下絶色)의 미인(美人)일 거에요.”

앞서 있던 백의인이 말에서 내려 고삐를 주루 앞에 있는 나무에 묶으며 낄낄거렸다. 주루는 밖에서 보기 보다 훨씬 넓었다. 칠 팔 개의 탁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이미 세 개의 탁자에 먼저 온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섯 사람이 들어가자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로 쏠렸다. 앞장서서 주루로 뛰어들어오다 시피 했던 백의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이런 제길. 사람 얼굴 처음 보나?’

그는 멋 적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창문 가에 빈 탁자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급히 발길을 돌렸다.

“저쪽이 좋겠군요.”

자리에 앉자 그제 서야 백의인은 어색함이 풀린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때까지도 하나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의 영롱한 시선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들에게서 두 개의 탁자 건너편에 두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 중 홍의경장(紅衣輕裝)을 한 미소녀 하나가 눈을 빛낸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홍의 미소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백의인은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붉은 홍시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풋!”

그 모습이 우습던지 홍의 미소녀가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백의인은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다른 일행들은 자리에 앉느라 그 광경을 보지 못했으나, 조금 전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체구가 작은 백의인은 눈치 빠르게 그걸 발견하고는 히죽 웃었다.

“일방. 벌써 아는 여자를 만난 거냐? 정말 발이 넓구나.”

백의인은 아예 목덜미까지 붉어져서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 아는 여자라니요? 난 그런 여자 없어요.”

“호. 그럼 초면(初面)인데도 벌써 눈이 맞은 여자가 생겼단 말이구나. 네 실력이 그토록 대단한 줄 미처 몰랐다.”

그들은 종남파를 떠나온 진산월 일행이었다. 그들은 이달 보름에 소림사에서 열리는 무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오늘 아침 일찍 길을 떠났던 것이다. 낙일방은 정해가 자꾸 자신을 놀리자 안색이 욹으락붉으락 해지다가 입을 삐죽거렸다.

“정사형. 자꾸 사람 무안하게 하지 말아요. 내가 사매와 사저 외에는 아는 여자가 없다는 건 사형도 잘 알잖아요.”

정해는 더 놀리려다가 자칫하면 그가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대신에 낙일방을 슬금슬금 쳐다보며 연신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매달았다. 낙일방은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는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했다. 그 모습이 또 우스운지 홍의 미소녀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홍의 미소녀의 앞에 앉아 있던 청삼을 걸친 중년인이 홍의 미소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홍아(紅兒)야. 무얼 보고 그리 웃는 게냐?”

홍의 미소녀는 재빨리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얼굴만큼이나 음성도 깜찍하고 귀여웠다. 청삼 중년인은 이상한 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진산월 일행을 한 사람씩 훑어보던 청삼 중년인의 시선이 그들 중 유난히도 얼굴이 붉게 상기된 낙일방에게로 고정되었다. 청삼 중년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여자처럼 고운 미소년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좌불안석(坐不安席)해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청삼 중년인은 그제 서야 홍의 미소녀가 웃은 이유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돌려 홍의 미소녀를 응시했다.

“네가 또 남을 놀린 게로구나.”

홍의 미소녀는 잽싸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다 큰 여자아이가 괜찮게 생긴 남자만 보면 실실거리며 웃다니… 이러다가 자칫 집안 망신이 될까 두렵구나.”

홍의 미소녀는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에요. 아빠. 저 녀석이 괜히 혼자 저러는 거란 말이에요.”

청삼 중년인의 눈가에 엄격한 빛이 떠올랐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이냐?”

홍의 미소녀는 입을 삐쭉거렸다.

“어때요?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그리고 괜찮게 생기긴요? 희멀게 가지고 기생 오라비 같은 인상인데…”

“어허! 이 아이가 점점… 아무래도 내가 너를 너무 버릇없이 키운 모양이구나.”

청삼 중년인은 그녀를 꾸짖으려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줄 알고 이번 길에 너를 데려오지 않으려고 한 건데… 네가 자꾸 이러면 너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겠다.”

“안돼요. 아빠. 다신 안 그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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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네가 그 버릇을 남 주겠느냐?”

홍의 미소녀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지며 입이 퉁퉁 튀어나왔다.

“치, 아빠는 괜히 나만 가지고 난리야. 저 멀대같은 녀석 때문에 나만 혼났잖아.”

청삼 중년인은 점잖게 웃었다.

“저렇게 잘생긴 멀대 보았느냐?”

“핏!”

홍의 미소녀는 코웃음을 쳤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낙일방을 힐끔거렸다. 사실 종남파의 문하 중에서 낙일방이 가장 준수했다. 아니, 종남파뿐만 아니라 어디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자신의 외모에 굉장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두기춘도 자신이 용모 면에서는 낙일방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두기춘은 평소에도 낙일방을 사사건건 못마땅해하곤 했었다.

청삼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낙일방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주게. 무남독녀 외딸인지라 너무 귀여워했더니만 영 버릇이 없구먼.”

낙일방은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지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원래 이렇게 생긴 걸요.”

그 말에 홍의 미소녀가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고 말았다.

“호호호…”

청삼 중년인도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은 채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왕 만난 김에 서로 이름이나 알고 지내지. 나는 농서(농西)에서 온 상원건(尙元乾)이라고 하네.”

낙일방은 급히 포권을 했다.

“종남의 낙일방입니다.”

청삼 중년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호. 종남의 문하라? 이거 뜻밖이군.”

청삼 중년인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종남파는 이제는 거의 유명무실(有名無實)해져서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는 문파 중 하나였다. 더구나 지난 칠팔 년간은 강호무림에 종남파의 제자가 나타난 적이 전무(全無)한 형편이었다. 상원건의 시선이 다른 네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럼 이분들도…?”

낙일방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에 앉아 있는 듬직한 체구의 청년을 가리켰다.

“저 분이 본 파의 장문인이시고 다른 분들은 모두 제 사형과 사저이십니다.”

상원건이 의외라는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의 나이가 아무리 보아도 이십대 초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설마 장문인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진산월입니다.”

상원건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황급히 마주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진장문인(陳掌門人)이셨구료. 농서의 상원건이라고 하외다.”

상원건의 나이는 사십대 중반이었다. 하나 아무리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엄연히 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장문인의 신분이니 함부로 아랫사람 대하듯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종남파라면 한때 구대문파 중에서도 혁혁한 명성을 떨치던 명문정파(名門正派)가 아닌가?

상원건은 홍의 미소녀를 불렀다.

“홍아야. 이리 와서 진장문인께 인사드려라.”

홍의 미소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진산월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상소홍(尙小紅)이에요.”

상원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홍아야. 그게 무슨 무례한 태도냐? 다시 정중하게 인사드려라.”

상소홍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이보다 더 정중하게 인사를 하라는 거야?’

하나 상원건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며 금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자 황급히 허리를 굽혀 머리를 조아렸다.

“홍아가 진장문인을 뵈옵니다.”

진산월은 그녀의 표정으로 그녀가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담담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격식을 차릴 필요 없소, 상낭자. 그보다 두 분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셨으면 우리와 합석을 하시지요.”

상원건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상소홍이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요.”

상원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녀를 따라 착석을 했다. 그런데 상소홍이 앉은 자리가 하필이면 낙일방의 바로 맞은편 자리여서 낙일방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고개만 쳐들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치게 되었다. 낙일방은 시선을 어느 곳에 둘지 몰라 괜히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탁자를 내려보다가 했다. 그러다가 가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낙일방이 그러면 그럴수록 상소홍은 더욱 짖궂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상원건이 그녀를 툭 쳤다.

“홍아야. 적당히 좀 해라.”

상소홍은 아예 턱까지 고인 채 낙일방을 빤히 응시하며 조잘거렸다.

“아빠의 착한 딸은 아무 짓도 안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중이에요.”

상원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정말 너를 잘못 키웠구나. 그렇게 멋대로 굴다가는 언제고 한 번 호되게 당할 날이 있을 것이다.”

상소홍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피. 누가 감히 나를요.”

한데 그때였다.

히히힝!

밖에서 갑자기 요란한 말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성난 외침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중인들이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데, 낙일방이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제가 나가보고 오지요.”

낙일방은 뒤에서 누가 쫓아 오기라도 하듯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와서는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여자야. 왜 그렇게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거지?”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저거…”

주루 앞에 묶여 있는 설리총의 주위를 서너 명의 장한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그들의 일행인 듯한 장한 하나가 하늘을 올려다본 채 벌러덩 누워 있었다. 장한들은 밧줄과 갈고리 같은 것을 이용하여 설리총을 강제로 붙잡으려 하고 있었고, 설리총은 그들의 손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구 날뛰고 있었다. 아마 바닥에 쓰러진 장한은 그 날뛰는 설리총의 뒷발에 채이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이보시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요?”

낙일방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장한들 중 수염이 가득 난 텁석부리 하나가 힐끗 그를 돌아보더니 거칠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꼬마야. 알 것 없으니 저리 꺼져라.”

낙일방의 눈꼬리가 쭈욱 치켜 올라갔다. 낙일방은 비록 얼굴은 곱상했지만 성격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불같은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평소에도 ‘꼬마’라는 말을 제일 싫어했다. 그러니 나오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텁석부리 장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꼬마 놈이 귀가 먹었나? 빨리 꺼지지 못해?”

낙일방의 얼굴이 다시 시뻘게졌다. 조금 전과는 달리 진짜 화가 솟구쳐서 붉어진 것이다.

“이 털만 가득 난 놈이 누구 보고 자꾸 꼬마래? 한 번만 더 그런 소리를 지껄이면 그 털을 몽땅 뽑아버리고 말 테다!”

텁석부리 장한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풍뎅이새끼가?”

텁석부리 장한이 막 낙일방을 향해 달려들려는데 그의 옆에 있는 뱀 눈의 장한이 그를 제지했다.

“마상(馬象). 그런 꼬마 놈은 신경 쓸 거 없네. 그보다 빨리 이놈 좀 잡게. 보기보단 성깔이 대단하군.”

알겠어. 수정 조건을 반영해서 다시 작성할게.

설리총은 정말 웬만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만큼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얼마나 세차게 날뛰는지 장한들은 밧줄을 설리총의 목에 걸고도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상이라 불리운 텁석부리 장한은 낙일방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꼬마 놈아!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이 어르신네가 정말 성질내기 전에 어서 빨리 네 어미 품속으로 꺼져버려라!”

낙일방은 아무 말도 없이 쏜살같이 마상의 앞으로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빡!

마상은 이 겉으로 보기에 기생오라비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애송이가 설마 진짜로 자신에게 덤벼들 줄은 몰랐는지라 피할 겨를도 없이 정통으로 턱주가리를 맞고 말았다.

“억!”

마상은 손에 든 갈고리를 놓으며 바닥에 볼상 사납게 나부라졌다. 다른 장한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멀거니 낙일방과 마상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상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거친 숨소리를 내며 낙일방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 찢어 죽일 놈이 감히 ….”

하나 그의 몸이 채 한 발짝 앞으로 움직이기도 전에 다시 낙일방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크!”

마상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다. 낙일방은 화가 단단히 났는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다시 빠르게 마상의 앞으로 돌진해 들어오며 연거푸 주먹을 날렸다.

휙! 휙!

매서운 바람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낙일방의 주먹은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마상은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하나 낙일방의 공세가 워낙 질풍처럼 빠르고 날카로워 다시 두 대의 주먹을 옆구리와 아래 턱에 연거푸 강타 당하고 말았다.

“어헉!”

마상이 인상을 찡그리고 턱을 부여잡으며 휘청거리는 순간 다시 낙일방의 반대쪽 주먹이 사정없이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끄응…”

마상은 짤막한 신음과 함께 몸을 쭈욱 뻗었다. 낙일방은 마상을 때려 누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상의 멱살을 바짝 움켜잡고 정말로 수염을 잡아 뽑으려고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어느 놈이 감히 본가(本家)의 행사를 방해 하는거냐?”

날카로운 호통소리와 함께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기운이 낙일방의 뒷통수를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낙일방은 황급히 몸을 돌려 옆으로 피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뒤에는 두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우측의 인물은 백삼을 걸치고 손에는 쇠로 된 주판을 든 사십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호리호리한 키에 턱에 세 가닥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주판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연신 수염을 꼬는 모습이 약간은 경망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좌측의 인물은 역시 백삼을 입고 얼굴이 여자처럼 새하얀 젊은 공자(公子)였다. 전체적으로 준수한 인상이었으나, 입술이 유달리 붉고 눈자위가 거무스름해서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백삼공자는 뒷짐을 진 채 낙일방은 쳐다보지도 않고 설리총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낙일방이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자 백삼 중년인이 수염을 꼬며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본가의 식솔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는 거냐?”

낙일방은 그 음성을 듣자 그가 바로 조금 전에 자신에게 암습을 한 인물임을 알아차리고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누가 할 소리? 보아하니 이자들은 벌건 대낮에 남의 말을 훔치려는 파렴치한들 같은데 당신도 이자들과 한 패란 말이오?”

백삼중년인의 눈꼬리가 쭈욱 치켜 올라갔다.

“우리가 말을 훔치려 한다고? 정말 정신나간 놈이로구나. 우리가 누구인줄 알고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낙일방은 입을 삐죽거렸다.

‘누구긴. 말 도둑 일당들이지.’

그의 입에서 막 이런 말이 나오려는 순간 백삼 중년인이 더욱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운문세가(雲門世家)가 강호를 호령한지 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남에게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은 없었다. 정녕 네놈이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었단 말이냐?”

운문세가라는 말에 낙일방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운문세가?”

백삼중년인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렇다. 본좌는 운문세가의 삼총관(三總官)인 철산반(鐵算班) 하후성(何侯盛)이고 이 옆의 분은 본가의 둘째 공자이시다. 저 설리총은 본래 이공자(二公子)님의 애마(愛馬)인데 며칠 전에 실종되어 그 동안 사람을 풀어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네놈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느냐?”

낙일방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일이 엉뚱하게 꼬여간다는 것을 알고 당혹감을 느꼈다. 운문세가는 섬서성(陝西省)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세가(名門世家)중 하나로 강호에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그들은 구대문파 중에서도 세력이 당당한 화산파(華山派)와 혈연(血緣)관계에 있어 당금 무림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위세를 지니고 있었다.
낙일방이 운문세가라는 이름에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단순한 말 도둑인 줄 알았던 장한들이 사실은 운문세가의 식솔들이고, 말도 또한 원래 운문세가의 것이라고 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성급히 뛰어든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업질러진 물이었다.

‘이런 제기랄… 대사형이 이번에는 일을 저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는데 큰일났군.’

낙일방은 당황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었다.

“저… 그게… 난 그런 줄 몰랐소. 이자들의 하는 행동이 꼭 남의 말을 강제로 훔쳐 가려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낙일방이 시뻘게진 얼굴로 더듬더듬 중얼거리듯 말하는데 갑자기 차가운 음성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삼총관. 저런 애송이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말이나 잡아오도록 하게.”

입을 연 사람은 뒷짐을 지고 있던 백삼공자였다. 백삼공자의 음성은 어찌나 냉랭하고 차갑던지 장내에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였다.
철산반 하후성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이공자님.”

이어 그는 낙일방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이공자님이 아니었다면 네놈은 큰 화(禍)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서 빨리 꺼져라.”

그는 낙일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장한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뭐하는 게냐, 이 밥통 같은 녀석들아! 말 한 마리 잡는데 한나절을 다 소비할 셈이냐?”

낙일방은 백삼공자가 자신을 애송이라고 부르고 하후성이 말끝마다 이놈 저놈 하자 다시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 조금 전에도 너무 성급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통에 실수를 범했는지라 솟구쳐 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러 참으며 이자들의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장한들은 다시 설리총의 목에 몇 개의 갈고리를 던져 마구 발버둥치는 설리총을 억지로 끌어가려 하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낙일방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후성의 말대로 라면 설리총은 저 얼음덩이같이 차갑고 오만무도한 백삼공자의 애마일텐데 자신의 애마를 저토록 우악스럽고 거칠게 다루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더구나 설리총 정도 되는 명마(名馬)가 주인도 몰라보고 마구 날뛴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낙일방은 호기심이 일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씩 장내로 다가갔다.
한데 그때 힐끗 뒤를 돌아보던 하후성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낙일방을 발견하고는 두 눈에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이놈! 아직도 가지 않고 무얼 얼쩡거리는 거냐?”

낙일방은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답게 즉시 입을 열었다.

“이상한 게 있어서 그렇소.”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저 말이 진짜 당신 네 공자의 것이 분명하오?”

하후성의 안색이 싹 변했다.

“네놈이 감히 우리를 의심하는 거냐?”

“그렇지 않소? 당신 네 공자의 말이라면서 왜 저토록 결사적으로 날뛴단 말이오? 당신 네 공자가 원주인이라면 그가 직접 말을 다루면 될게 아니겠소?”

한쪽 편에 서 있던 백삼공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낙일방을 노려보았다. 분을 바른 듯 새하얀 얼굴 가운데 박혀 있는 두 개의 눈에서 뿜어 나오는 안광이 마치 화살처럼 낙일방에게 쏘아져왔다.
하나 낙일방은 그런 눈빛에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자신도 눈에 힘을 주고 백삼공자를 마주 쏘아보았다. 마치 눈싸움이라면 나도 절대 지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수정한 버전입니다. 아래 조건에 맞게 작성했습니다.

백삼공자의 안색이 점차로 딱딱하게 굳어지며 눈가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때 하후성이 사나운 폭갈을 터뜨리며 낙일방을 향해 덮쳐왔다.

“이 하루살이 같은 놈!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낙일방은 그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을 향해 덤벼들자 더욱 의심이 들었다. 그는 슬쩍 옆으로 몸을 움직여 피하며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자신의 애마라면서 갈고리를 던져 끌고 가려 하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믿을 줄 알았소?”

하후성은 살기등등한 얼굴이 되어 낙일방의 옆구리를 수중에 든 철주판으로 사정없이 찍어왔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나중에 함부로 아가리 질을 한 걸 후회나 하지 마라!”

낙일방은 상대의 공세 속에 인정사정보지 않는 살심(殺心)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리고 바짝 긴장이 되어 다시 옆으로 두 걸음 빠르게 이동했다. 동시에 삼환투일(三環投日)의 식으로 하후성의 앞가슴을 향해 오른주먹을 세 번 연거푸 내찔렀다.

하후성은 풋내기 애송이로만 알았던 낙일방의 공세가 의외로 날카롭고 매서운 것을 보자 황급히 철주판을 회수하며 빠르게 회전시켰다.

파파팍!

매서운 바람소리와 함께 낙일방이 급히 주먹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낙일방의 공세가 비록 날카롭다고는 하나 하후성의 쇠로 된 주판에 맨손으로 부딪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후성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벼락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낙일방의 관자놀이를 쇠주판으로 휘둘렀다.

“이놈! 죽어라!”

그 쇠주판에 담겨 있는 경력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어서 스치기만 해도 머리통이 부서질 게 뻔했다. 낙일방은 다시 세 걸음이나 물러서서 간신히 하후성이 쇠주판을 피했다.

하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하후성이 더욱 빠르게 달려들며 쇠주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쐐액!

공기가 갈라지는 듯한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낙일방은 다급한 김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미처 뽑지도 못하고 검집 째 머리 위로 쳐들었다.

쨍!

낙일방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윽!’

비록 간신히 상대의 공격을 막았으나 그 쇠주판에 담겨 있는 막강한 경력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하후성은 이미 낙일방을 죽이기로 작정을 했는지 추호도 망설임 없이 다시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식으로 낙일방의 안면을 향해 쓸어왔다. 횡소천군은 비록 절초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지금 하후성이 휘두른 일식에는 그의 강한 내공력(內功力)이 고스란히 실려있어 강호의 일류고수라도 감당 못할 무서운 위력이 있었다.

낙일방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한 눈에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횡소천군의 일식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어린 소년에게 이렇게 독한 살수(殺手)를 쓰다니 너무 심하지 않소?”

한 소리 낭랑한 외침과 함께 한 줄기 강력한 바람이 불어와 낙일방의 몸을 저만큼 옆으로 밀어냈다. 그 바람에 하후성의 무시무시한 일격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하후성은 누군가가 너무도 수월하게 자신의 공세 속에서 낙일방을 빼돌리자 흠칫 놀라 손을 거두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와 낙일방의 사이에 푸른 청삼을 입은 중년인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하후성은 청삼 중년인의 신색이 범상치 않은 것을 알고 급히 물었다.

“귀하는 누구요?”

청삼 중년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포권을 했다.

“나는 상원건이라는 사람이오.”

“상원건?”

하후성은 잠시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다가 안색이 약간 변했다.

“당신은 혹시 감숙(甘肅)과 농서일대에서 명성이 자자한 비룡객(飛龍客)이 아니오?”

상원건은 빙긋 웃었다.

“하하… 비룡객이란 떠들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장난 삼아 붙여준 이름이오. 불초가 바로 농서의 상원건이외다.”

비룡객 상원건은 비록 중원(中原)에는 자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감숙 일대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고수였다. 그는 비단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행적이 신비하고 의협심(義俠心)이 대단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후성은 상대의 신분을 알자 낙일방을 대할 때처럼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자신도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상대협이셨구료. 나는 운문세가에서 셋째 총관을 맡고 있는 하후성이라 하오.”

그는 특히 ‘운문세가’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상원건은 그의 의중을 환히 알고 있기 때문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운문세가의 총관을 만나게 되니 오늘 이 상모의 운이 더할 수 없이 좋은 것 같소. 그런데…”

상원건은 슬쩍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낙일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분 소협(少俠)이 아직 나이가 어리고 강호경험이 없어 하후총관에게 결례를 범한 것 같소. 대명(大名)이 자자한 하후총관께서 이런 일로 살수(殺手)를 쓴다면 어울리지 않는 일인 것 같구료.”

하후성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확실히 명성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조금 전에 낙일방에게 손을 쓴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심한 일이었다. 당당한 운문세가의 총관이 아들 뻘밖에 되지 않는 소년을 죽이기 위해 무지막지한 살수를 썼다는 것이 남들에게 알려진다면 그로서는 창피 막심한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후성은 어색한 헛기침을 토한 후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허헛… 살수라니 당치 않소. 그저 저 소년이 너무 천방지축으로 어른을 몰라보고 날뛰길래 따끔하게 훈계를 하려고 했을 뿐이오.”

상원건은 조금 전의 하후성의 공격이 따끔한 훈계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정도로 살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이분 소협도 하후총관의 뜻을 알아들었을 테니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하후총관의 뜻은 어떻소?”

“그… 그게 좋겠소.”

하후성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비룡객이 아니었다면 하후성이 이토록 순순하게 물러날 리가 없었다. 확실히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엉뚱하게도 낙일방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제길. 나는 이대로는 못 참겠어요.”

상원건이 움찔하여 그를 돌아보니 낙일방은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상원건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 다쳤는가?”

낙일방은 하후성을 손으로 가리키며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대로 저 염소수염에게 모욕을 당하고 물러설 수는 없어요. 나는 아무 잘못한 일이 없단 말입니다!”

하후성은 그가 자신을 염소수염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 하자 어처구니가 없는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원건도 내심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보니 생긴 것과는 달리 성깔이 보통이 아니군. 이렇게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하고서야 강호에서 행도(行道)가 여간 고달프지 않겠는걸.’

하나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낙일방은 진짜 하후성에게 커다란 봉변을 당할 게 뻔했다. 하후성은 이미 분노가 솟구치는지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내뿜으며 낙일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원건은 엄격한 눈으로 낙일방을 바라보았다.

“강호에서는 때로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하네. 자네가 성질대로만 행동한다면 자네 뿐만 아니라 자칫 다른 사람에게까지 누(累)가 끼칠지 모르니 말일세.”

상원건의 말속에는 세력이 당당한 운문세가의 인물들과 시비를 일으켜 낙일방이 속한 종남파에 하등 도움이 될 게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 낙일방은 상원건이 자세한 내막도 모르고 무작정 자신을 꾸짖는다고만 생각하고 더욱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상대협(尙大俠)은 제 일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죽어도 내가 죽고 당해도 내가 당할 테니까요.”

그 말은 이제 겨우 강호에 첫발을 내딛은 신출내기가 무림의 고수에게 할 소리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아들 뻘밖에 되지 않는 풋내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참지 못했을 것이다.

상원건도 앞뒤가 꽉 막힌 낙일방의 언행에 노기가 솟구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는 자신이 이대로 홧김에 물러난다면 애꿋은 생명 하나가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고 말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화를 꾹 눌러 참으며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자네의 기파가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군. 하나 자네의 장문인이라면 내 말이 맞다고 할걸세.”

장문인이란 말이 나오자 낙일방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때 그의 뒤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대협의 말씀이 옳다. 너는 좀 더 자중(自重)할 필요가 있다.”

그 음성을 듣자 낙일방은 갑자기 금시라도 폭발할 듯하던 기세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대사형….”

어느새 나타났는지 그의 뒤에서 이 장 여 떨어진 곳에 진산월이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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