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9화
제8장. 천봉팔선(天鳳八仙)
“종남파의 제자들 중 최고수는 누구인가?”
예전에 임장홍은 가까운 친구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싸움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매상이고, 참을성이 가장 강한 녀석은 소지산이지. 정해는 똑똑하고, 두기춘은 약삭빠르며, 성질이 가장 급한 건 낙일방 일세.”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누가 그런걸 물어 보았나? 자네 제자들 중 가장 강한 고수가 누구냐니까?”
“사납고 난폭한 건 응계성이 으뜸이고, 술은 방취아가 가장 잘 마시네. 그리고 진산월, 그 녀석은 뭐 하나 특별히 잘하는 게 없지만 그래도 가장 믿음직 하지.”
친구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자꾸 딴 소리만 할텐가? 설마 자네 제자 중에 자네가 내세울만한 고수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그제서야 임장홍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한 사람이 있기야 있지.”
“그게 누군가?”
“말하지 않겠네.”
그 친구는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왜 그런가?”
“사실대로 말하게 되면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 부모가 될테고, 그렇다고 거짓으로 말하는 건 내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일세.”
그때 그 친구는 한동안 물끄러미 임장홍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라면 조만간에 무림에 굉장한 여고수(女高手) 한 사람이 탄생하겠군.”
정해의 뒤를 따라 후원의 담벽을 넘어 갔을 때 상원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너무나 화려해서 영롱해 보이기 조차한 하나의 검무(劍舞)였다.
오대 일(五對一)!
다섯 명의 황의인이 한 명의 여인을 에워싼 채 맹렬하게 병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병기에서 뿜어나오는 예리한 섬광이 주위를 온통 번쩍거렸다. 누가 보기에도 황의인들 속에 갇힌 여인이 금시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은 불을 보듯 빤하게 생각될 것이다. 하나 오히려 정신없이 몰리는 것은 황의인들이었다. 황의인들의 무공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병기를 휘두르는 그들의 손길은 빠르고 날카로워서 절대로 만만한 고수(高手)들이 아님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중앙에 있는 여인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그 검을 막기에 바빠서 그들은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여인의 검을 휘두르는 자세는 무척 유연하면서도 경쾌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그림을 보듯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상원건은 강호경험이 누구 못지않게 풍부한 사람이었으나 이토록 화사하게 펼쳐지는 검법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조금 전에 응계성이 펼쳤던 난폭하기 조차했던 검법과 같은 검로(劍路)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기 까지는 다시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넋을 잃고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 바로 진산월의 뒤에 서 있다가 사라졌던 죽립의 여인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녀는 그 동안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하게 있어서 상원건은 솔직히 그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와 같이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임을 알게 되자 그의 놀라움은 자못 대단한 것이었다.
다섯 명의 황의인들은 이미 옷의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전신에 크고 작은 검상(劍傷)을 입고 있어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아직 아무도 쓰러진 사람이 없었다. 상원건은 잠시동안 더 바라본 다음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립 여인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꾸 손길을 늦춰 그들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이런 상태에서의 대결은 더 진행되어봤자 결말이 뻔한 것이었다.
결국 황의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물이 동료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뒤로 훌쩍 물러나며 외쳤다.
“멈추시오!”
여인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던 검광(劍光)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다른 네 명의 황의인들은 붉게 상기된 얼굴을 감출 기색도 없이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우두머리 황의인을 따라 비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일각(一刻)만 더 지나갔으면 그들은 모두 탈진하여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우두머리 황의인은 검기(劍氣)에 마구 갈라져 누더기처럼 변한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여인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오늘 소저께서 손에 사정을 보아 주신 것은 충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겠소. 우리는 부족함을 알고 이만 물러나겠으니 소저께서는 양해해 주시오.”
여인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가지 않겠어요.”
다섯 명의 황의인들은 한 번 더 그녀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슷한 복장의 황의인 세 명이 응계성, 낙일방과 치열한 혼전(混戰)을 벌이고 있었다.
우두머리 황의인은 후원 밖으로 몸을 날리며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넷째, 여섯째, 여덟째! 오늘 일은 우리의 패배다. 물러나자!”
응계성 등과 싸우고 있던 황의인들은 움찔 하더니 일제히 장력(掌力)을 날려 응계성과 낙일방을 물러나게 하고는 자신들도 우두머리 황의인을 따라 몸을 날렸다. 몇 차례의 세찬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들 여덟 명의 황의인들은 차례로 반쯤 무너진 담벼락을 넘어 사라졌다.
응계성과 낙일방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든 듯 죽립 여인을 향해다가왔다.
“사저.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죽립 여인, 임영옥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들이 때마침 와주어서 별 어려움은 없었어요.”
응계성과 낙일방이 달려 왔을 때 임영옥은 여덟 명의 황의인들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특이한 연환진(連環陣)을 펼쳐 임영옥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응계성과 낙일방이 덤벼드는 바람에 진이 깨어지고 임영옥은 그들중 다섯 명을 상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영옥의 무공으로 그들의 연환진이 완벽하다 해도 그것을 충분히 격파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그 점을 조금도 내색치 않고 응계성과 낙일방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낙일방은 머쓱한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고 있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참… 그런데 장문사형은 어디 가셨습니까? 그리고 그놈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때 마침 상원건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오던 정해가 그의 말을 들었는지 자신이 대신 대답했다.
“그자들은 운문세가의 고수들인 팔염라(八閻羅)다. 그리고 장문사형은 운자개(雲子凱)를 따라갔다.”
낙일방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돌아보며 거듭 물었다.
“운자개? 그 자는 누굽니까? 그리고 왜 장문사형이 그 자를 따라갔습니까?”
“운자개는 조금 전에 너도 보았던 운문세가의 둘째 공자다. 그리고 장문사형이 그를 따라간 이유는…”
정해는 한 차례 가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원래 정해와 임영옥은 응계성과 독고황의 싸움이 벌어지는 도중에 진산월의 지시를 받고 이곳 후원으로 오게 되었다.
진산월은 필시 운문세가의 고수들이 몰래 그곳으로 올 것이라며, 그곳 후원에 설리총의 주인이 있으면 그를 보호해서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정해와 임영옥이 후원에 와서 샅샅이 뒤져보니 과연 후원의 밀실에 부상당한 남의소녀가 누워 있었다. 하나 그들이 채 남의소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운자개가 밀실로 뛰어 들어와 그들을 공격했다. 잠시 접전이 벌어지던 중 때마침 진산월이 나타나자 운자개는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함을 깨닫고 손을 멈추었다. 그때 운자개가 진산월을 보며 무어라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진산월은 정해와 임영옥에게 이곳에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운자개의 뒤를 따라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곧 이어 마치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어디선가 여덟 명의 황의인들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했다. 황의인들의 무공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은 임영옥이 그들을 막는 사이, 정해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남의소녀를 부축하여 후원을 빠져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정해의 설명을 듣고 난 중인들은 의혹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깊어졌다.
“아니 그 자식이 뭐라고 했길래 장문사형이 무작정 그를 따라갔단 말이냐?”
응계성이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큰 소리로 물었다. 정해는 입가에 쓴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자가 장문사형을 쳐다보며 무어라고 한 것 같은데 전음(傳音)을 사용했는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장문사형이 그놈을 따라가는걸 구경만 하고 있었단 말이냐?”
응계성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그치자 정해는 맥없이 대꾸했다.
“사형도 장문사형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장문사형이 누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입니까?”
응계성은 무어라고 한 마디 더 하려다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 두자. 너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려는 그 버릇을 못 고치면 평생 다른 사람의 비위나 맞추며 살게 될거다.”
정해는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정말 궁금해 미치겠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장문사형은 왜 앞 뒤 안가리고 그 자식을 따라갔으며…”
응계성의 시선이 이제 막 담벼락을 지나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상소홍과 그녀의 품속에 안겨 있는 남의소녀를 향했다.
“저 여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야? 왜 우리가 생판 얼굴도 모르는 여자 때문에 칼을 휘둘러야 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응계성은 옆에 서 있는 정해의 어깨를 툭 쳤다.
“야. 네가 좀 말해봐라. 넌 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이라고 할거 아니냐?”
정해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라고 사형과 다를게 있겠습니까? 짐작가는게 아주 없는건 아닙니다만…”
응계성의 인상이 다시 험악하게 변했다.
“말꼬리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저 여자는 대체 누구야?”
정해는 응계성이 일단 화가 나면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납고 거칠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움찔하여 급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도 천봉궁의 여인이 아닐지…”
그 말에 모두들 놀랐다.
“천봉궁?”
응계성도 그 말에는 호기심이 동하는지 눈을 번쩍 빛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정해는 입술에 살짝 침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설구양종의 설리총은 천봉궁에서만 볼 수 있는데, 상황으로 보아 저 여인이 바로 그 설리총의 주인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쪽의 인물이 아닐까요?”
응계성의 송충이같이 짙은 눈썹이 마구 꿈틀거렸다.
“뭐야? 겨우 그런 걸로 대단한 일이나 알고 있는 것처럼 떠들었단 말이냐?”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천봉궁의 고수들은 모두 여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재색(才色)을 겸비한 절세의 미녀들이라고 합니다. 저 여인의 외모로 보아…”
응계성은 눈을 크게 뜨고 정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오라! 이제 보니 네가 저 여자의 미색(美色)에 단단히 홀려 있었구나. 어쩐지 조금 전에도 사저는 그 놈들에게 팽개치고 혼자서만 저 여자를 품에 안고 나오더라니…”
정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사형도 참…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건 사형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아니긴… 너는 남자 아니냐?”
정해는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아니 사형… 그게 무슨 상관이…”
“남자 놈들은 모두 똑같아. 좀 반반한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보려고 안달이지. 내가 남자라서 그런건 잘 알아.”
응계성은 한쪽에 서 있는 낙일방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 일방, 저 녀석도 벌써부터 여자 꽤나 밝히고 있잖아. 너나 저 놈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야.”
낙일방이 억울하다는 듯이 양 팔을 활짝 벌렸다.
“사형. 왜 저를 정사형하고 비교하십니까? 저는 여자라면 아주 질색입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설사 네가 아무리 여자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다.”
“예? 마음대로 안되다니요?”
“흐흐….”
응계성은 입가에 뜻모를 미소만 흘린 채 그와 상소홍을 의미 깊은 시선으로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상소홍은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가 넌지시 자신을 빗대는 것 같자 샐쭉해져서 응계성을 쏘아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에요?”
응계성은 그답지 않게 히죽 웃었다.
“아니오. 그보다 그 여자는 아직 정신을 못차렸소?”
그 말에 상소홍은 무심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남의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남의소녀의 안색은 처음보다는 한결 혈색이 돌았으나 여전히 의식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상원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이상하군. 상처를 치료했으니 정신을 차릴 때도 되었는 데…”
그는 남의소녀의 오른쪽 완맥을 잡고 잠시 맥박을 살폈다. 맥박은 가늘지만 힘차게 뛰고 있었다. 호흡도 정상이고, 몸의 온기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도 남의소녀는 도무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중인들은 다시 답답해 졌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야 일의 전후사정이라도 물어볼텐데 당사자가 아직도 혼수상태이니 의문만 쌓여갈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이유조차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중인들을 불안케 했다. 갑갑함을 참을 수 없었는지 응계성이 다시 애꿏은 정해를 붙잡고 늘어졌다.
“네가 이 여자를 처음 봤을 때에도 이랬느냐?”
정해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게…”
“너 또 말을 빙빙 돌릴 셈이냐? 정말 내가 꼭 성질을 부려야겠어?”
“아닙니다, 사형. 제가 처음 봤을 때는 비록 중상을 입긴 했지만 의식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응계성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그는 정해가 왜 망설였는지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상원건이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녀의 상세(傷勢)를 치료할 때만 해도 분명히 의식이 있었네. 그런데 상세가 워낙 깊어 내가 손을 조금 과하게 쓴 모양일세.”
응계성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계속 캐묻는 것은 곧 상원건을 추궁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응계성의 성질이 과격하다고 해도 무림의 명숙인 상원건에게 정면으로 모욕을 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상원건이 특별히 실수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지 않은가?
응계성은 자신이 공연한 말을 꺼내 상원건을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다시 정해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나저나 장문사형은 왜 아직까지 안오는거야? 혹시 장문사형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닐까?”
정해는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정말 그와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공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문사형의 무공으로 무슨 큰 일이야 당하겠습니까?”
응계성은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게 무슨 천하태평한 말이냐? 보이는 칼은 막기 쉬워도 보이지 않는 화살은 막기 어렵다는 옛 속담도 모르느냐? 강호는 워낙 궤계(詭計)가 난무하여 자칫 방심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일쑤라고 너도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더냐?”
“장문사형은 워낙 신중한 성격이라 쉽사리 남의 꼬임에 당하지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게다가 또 뭐란 말이냐?”
“아무 생각도 없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니 믿고 기다려 보는 수 밖에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응계성이 화가 나서 막 발작하려 할 때 하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해의 말이 맞다. 너는 좀 더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모두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장문사형!”
낙일방이 기쁨에 찬 소리로 외치며 달려갔다.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든 낙일방의 어깨를 두드렸다.
“녀석. 갈수록 응석만 느는구나.”
낙일방은 진산월이 무사한 것을 보자 그저 기분이 좋은지 연신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그 운자개인지 뭔지 하는 놈은요?”
“그와 잠시 이야기를 했다.”
낙일방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진산월의 대답이 자신의 예상을 너무나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럼 그는 어디 있지요?”
“운문세가로 돌아갔다.”
진산월이 너무 태평한 어조로 말하자 다들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낙일방은 워낙 궁금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다시 물었다.
“돌아가다니요? 그자가 어떻게 돌아갔습니까?”
“좋은 말로 타일렀지. 그랬더니 알아 듣고 가더군.”
진산월이 웃으면서 말했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하나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그를 추궁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그자가 무어라고 했길래 그자를 따라가신 겁니까?”
정해가 조금 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했던 질문을 던지자 모든 사람의 눈이 진산월의 입을 향했다.
그런데 진산월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 아무 말도 안했다고요?”
모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자는 아무 말 안했지. 또 설사 그자가 따라오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무엇 때문에 그자를 따라간단 말이냐?”
중인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해에게로 쏠렸다.
정해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진산월을 향해 소리치듯 물었다.
“아니 그럼 왜 그자와 함께 갑자기 어디론가로 사라지신 겁니까?”
“그자와 함께 가지는 않았다.”
“네?”
“단지 그자와 내가 가는 방향이 같았을 뿐이지.”
정해는 평소에 똑똑하기로 이름난 인물이었으나 이때만큼은 얼굴 가득 멍청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산월은 빙그레 웃으며 느릿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자가 우리와 대치해 있을 때 갑자기 내 귀로 누군가의 전음(傳音)이 들려왔다. 난 그걸 듣고 나간 것이다.”
정해는 경악했다.
“전음이라니… 대체 누구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그보다 그 여인은 정신을 차렸느냐?”
정해는 진산월이 화제를 돌리자 내심 궁금증이 더욱 커졌으나 어쩔 수 없이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상대협께서 치료를 하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진산월은 상소홍이 안고 있는 남의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남의소녀를 응시하고 있던 진산월은 문득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는게 어떻겠소?”
그 말에 중인들은 흠칫 놀랐다.
상소홍 또한 깜짝 놀라서 황급히 남의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과연, 남의소녀의 길다란 속눈썹이 한 차례 가늘게 떨리더니 그녀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면서 살짝 눈을 뜨는 것이 아닌가?
상소홍은 놀랍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해서 우두커니 있다가 그녀가 자신의 품속에서 일어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 벌써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었군요. 그런데 왜…”
남의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당황한 표정으로 붉히고 서 있었다.
상원건은 내심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보니 그녀는 나에게 치료받은 것이 부끄러워서 일부러 계속 정신을 잃은 척하고 누워 있었던 게로군. 쯧… 하긴 그럴만도 하겠지.’
상원건의 짐작대로 남의소녀는 진즉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나, 상원건을 볼 염치가 없어 눈을 뜨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젊은 처녀의 몸으로 외간 남자에게 몸의 은밀한 부분 가까이까지 손길이 닿게 했으니 아무리 강호(江湖)의 여인(女人)이라고 해도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사실 그녀도 처음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하나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낯선 여자의 품속에 안겨 있음을 알고 몹시 부끄럽고 당황했던 데다 중인들이 서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자신을 주시하지 않자 차마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나타내지 못했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응계성이 정해를 다그치는 소리를 듣고 더욱 당황하여 아예 눈을 감은 채 계속 정신을 잃은 행세를 했던 것이다. 진산월이 그녀의 감겨진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그녀의 숨결이 고른 것을 보고 그녀가 이미 깨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언제까지고 계속 그런 상태로 있었을 것이다. 상원건은 그녀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는지라 그녀가 더 이상 무안을 느끼기 전에 먼저 너털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늦게라도 소저께서 정신을 차리셨으니 다행이구료. 내 딸 아이의 공력이 아직 미약하여 소저의 몸에 있는 나쁜 기운을 완벽하게 몸밖으로 밀어내지 못했던 것 같소.”
그는 경험많은 인물답게 은근슬쩍 그녀가 방금 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을 거라는 투로 말을 꺼냈다. 남의소녀는 한 차례 더 상소홍을 바라보더니 목부분까지 벌겋게 물들인 채 머리를 숙였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음성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듯 했으나, 음성이 또랑하고 마디가 분명해서 아주 감미롭게 들렸다. 상소홍은 엉겁결에 자신도 얼굴이 붉어져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네. 괜찮아요. 저보다 아버님이….”
남의소녀는 상원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 대협… 소녀를 살려주신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상원건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웃었다.
“허허… 은혜라니 당치 않소. 그보다 어떻게 하다 그런 부상을 입게 되었소?”
남의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입을 열었다.
“소녀는 천봉궁(天鳳宮)의 남봉(藍鳳) 엄쌍쌍(嚴雙雙)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궁을 나왔다가 평소 본궁(本宮)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악적(惡賊)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대협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온지요?”
상원건은 눈을 크게 떴다.
“이제보니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천봉팔선자(天鳳八仙子) 중의 한 분이셨구려. 말로만 듣던 팔선자의 옥용(玉容)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정말 영광이오. 나는 감숙의 상원건이라 하외다.”
남의소녀의 정체를 알고 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남의소녀가 천봉궁의 인물이리라는 것은 정해가 이미 예상한 바 있었지만, 그녀가 천봉궁에서도 특이한 위치에 있는 팔대선자(八大仙子)중의 하나라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천봉궁은 강호상에서는 신비로 점철된 문파였다. 강호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들의 문하는 비록 많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재색(才色)을 겸비하고 무공이 높은 여인들이어서 모든 무림인들에게 호기심과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천봉팔선자라 불리우는 여덟 명의 여인들은 그 미모와 무공이 실로 놀라워서 강호상(江湖上)에 그 명성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상원건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나자 의구심이 더욱 짙어졌다.
“소저를 습격한 사람은 대체 누구요?”
엄쌍쌍은 한결 마음이 가라앉은 듯 음성 또한 조금전보다 훨씬 더 침착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오히려 나직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상대협께선 혹시 강호무림에 모든 마인(魔人)들을 굴복시키는 하나의 영(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마인들을 굴복시키는 영?”
무심코 뇌까리던 상원건의 안색이 갑자기 흙빛으로 변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그의 음성은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가늘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소… 소저께서 말씀하신 것은 혹시 그 만마(萬魔)를 굴복시킨다는 신목령(神木令)이 아니오?”
엄쌍쌍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바로 그 신목령이에요.”
신목령! 대체 신목령이 무엇이기에 항상 침착하고 냉정을 잃지 않던 상원건이 이토록 놀라는 것일까?
신목령은 하나의 작고 거무틱틱한 나무로 만든 소검(小劍)이었다. 크기는 어른의 손바닥만 했는데, 겉에 단정한 자세로 앉은 백발노인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특이한 곳이 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하나 이 평범한 목검(木劍)이 강호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적어도 마도(魔道)에 몸을 담고 있는 무림인들에게 신목령은 절대적인 권위와 복종의 상징이었다. 마도인(魔道人)들에게 있어 신목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저를 공격한 사람은 바로 그 신목령의 고수입니다.”
엄쌍쌍의 말에 상원건은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신목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도의 우상(偶像)으로 군림해 오고 있었다. 대체 천봉궁이 무슨 일로 신목령의 비위를 거슬렸단 말인가? 엄쌍쌍은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진산월 일행은 비록 강호에는 처음 출도(出道)하는 것이었지만 신목령에 대한 소문은 그들도 익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내심 궁금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으나 엄쌍쌍이 자세한 내막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눈치이자 꼬치꼬치 캐묻지는 못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육매(六妹). 이곳에 있었구나.”
갑자기 그들 뒤에서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중인들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에게서 오장여 떨어진 곳에 각기 짙은 황의와 청의 경장을 입은 두 명의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두 여인 모두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하나같이 보는 사람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 정도로 뛰어난 미녀들이었다. 황의를 입은 여인은 갸름한 얼굴에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여 이지적인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청의경장의 여인은 키가 훌쩍 크고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두 여인을 보자 엄쌍쌍은 굳었던 얼굴을 활짝 펴며 반색을 했다.
“두 분 언니. 오셨군요.”
그녀는 놀란 사슴이 뛰는 듯한 동작으로 두 여인을 향해 달려갔다. 황의여인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엄쌍쌍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의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입가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육매. 많이 다쳤느냐?”
“괜찮아요. 혈라인 한 대를 맞기는 했지만…”
그 말에 황의여인은 물론이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던 청의경장 여인마저 얼굴이 홱 변했다.
“혈라인이라고? 그렇다면 설마 혈수존자(血手尊子) 오욕백(吳浴魄)이 너를 공격했단 말이냐?”
“오욕백 본인은 아니었고 신목령의 고수 중 한 사람이었어요.”
황의여인은 다시 한 번 유심히 엄쌍쌍의 안색을 살피고는 그녀의 상태가 위태롭지 않다는 걸 알았는지 그제서야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어쩐지… 오욕백 본인이었다면 네가 무사히 살아있을 리가 없지.”
혈수존자 오욕백은 삼십 년 전에 천하를 풍미했던 일대의 고수였다. 혈라인은 그의 독문무공(獨門武功)으로, 당년에 오욕백이 이 혈라인을 전개하면 반경 오 장 이내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특히 혈라인은 내가(內家)의 호신강기(護身?氣)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어, 절정에 이르면 인간의 몸뚱아리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고 까지 알려져 있는 마공절학(魔功絶學)이었다. 황의여인은 걱정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얼굴로 엄쌍쌍의 손을 잡았다.
“비록 오욕백이 직접 손을 쓰지 않았더라도 혈라인은 워낙 악독한 무공이라 네 상세(傷勢)가 적지 않았을텐데… 정말 괜찮겠니?”
엄쌍쌍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서 있는 상원건을 살짝 가리켰다.
“다행히 저 분 대협께서 치료해 주셔서 위급한 상태는 넘긴 것 같아요.”
그 말에 황의여인의 시선이 상원건과 진산월 일행에게로 향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한 줄기 혜성처럼 차갑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상원건과 그의 등뒤에 있는 상소홍, 그리고 낙일방과 정해 등을 거쳐 진산월에게 잠깐 고정되었다. 그러다 이내 그녀의 시선은 다시 움직여 상원건을 향했다.
“저 분이 너를 구했단 말이지?”
“예.”
잠시 두 여인은 서로 무어라고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그러다 이내 황의여인은 상원건의 앞으로 다가와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제 동생을 도와주셔서 무어라고 감사드려야 할 지 모르겠군요. 대협께선 혹시 감숙의 이름난 명협(名俠)이신 비룡객 상대협이 아니신지요?”
상원건은 빙긋 웃으며 포권을 했다.
“허허… 명협이라니 당치 않소.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너무 과분한 칭찬은 받기 어렵구료. 그보다 소저께선….”
“저는 금교교(琴巧巧)라고 합니다.”
황의여인의 말에 상원건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아! 이제 보니 천봉팔선자 중의 셋째이신 영봉(靈鳳) 금소저이셨구료.”
천봉팔선자는 첫째인 백봉(白鳳) 정소소(鄭素素)부터 막내인 옥봉(玉鳳) 누산산(婁珊珊)까지 여덟 명이 하나같이 재색을 겸비한 일대기녀(一代奇女)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봉(靈鳳) 금교교는 가장 영리하고 재주가 많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상원건은 금교교와 함께 나타났던 청의여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저 여인도 천봉팔선자 중의 일인(一人)이겠군.’
그의 짐작대로 청의여인은 천봉팔선자 중에서 둘째이며 그들 중 성격이 가장 차갑고 싸늘하다는 취봉(翠鳳) 두청청(杜靑靑)이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고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만나보기를 원한다는 천봉팔선자 중의 세 사람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운이 좋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금교교는 상원건의 뒤에 서 있는 진산월 등을 돌아보았다.
“다른 분들은 일행이십니까?”
그 말에 상원건은 퍼뜩 정신이 든 듯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인사하시오. 이 분들은 종남에서 나온 분들이시오.”
금교교의 눈빛이 유달리 반짝거렸다.
“종남이라면… 섬서성의 종남파 말입니까?”
누구나가 이렇게 물었다. 종남의 문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섬서성에 있는 종남파냐고 다시 한 번 묻고는 하는 것이다. 모두들 입맛이 쓸 수 밖에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담담하게 웃으며 포권을 했다.
“종남의 진산월입니다.”
금교교는 별로 미안해 하거나 꺼려하는 빛 없이 머리를 조금 숙였다.
“금교교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강호무림에 나타나지 않던 종남의 고수들을 이곳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 뜻밖이기는 했으나, 그들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상원건의 일행이 아니었다면 한 번 훑어보고는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종남파는 강호상(江湖上)에서 잊혀져가는 이름이 되고 있었다. 임영옥과 정해 등 다른 사람들은 속으로야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나 낙일방 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얼굴이 불게 상기된 채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었다. 정해가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의 손목을 살짝 잡지 않았다면 그는 참지 못하고 무어라고 쏘아붙이고 말았을 것이다. 낙일방은 정말 억울하고 분했다. 더욱 화가 솟구친 것은 금교교가 진산월에게만 목을 까닥거려 인사를 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자기 일행에게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제길… 빌어먹을….’
낙일방은 속으로 이 소리만을 뇌까리고 있었다. 금교교는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엄쌍쌍에게 무어라고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때 이제껏 말이 없던 두청청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자.”
그녀의 음성은 차갑고 싸늘한 외모 만큼이나 냉랭한 것이었다. 이어 음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의 신형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금교교는 다시 상원건을 향해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상대협께서 저희 육매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주신 것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라도 저희 천봉궁에 들려주신다면 반드시 이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상원건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은혜라니 별 말씀을. 사실 나보다는 이 분들의 힘이 더 컸소이다.”
금교교는 그의 말을 들었을텐데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허공으로 이장여 솟구쳐 오르던 그녀는 문득 엄쌍쌍이 몸을 날릴 생각을 하지 않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육매. 왜 그러고 있는게냐?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도록 하자.”
엄쌍쌍은 미안함과 송구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진산월 일행과 상원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소근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뵈면….”
상원건이 괜찮다는 듯 빙긋 웃으며 어서 가보라고 손짓을 하자 그제서야 엄쌍쌍은 얼굴을 붉히며 두 여인이 몸을 움직인 곳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몇 번 몸을 날리지도 않아 세 여인의 모습은 중인들의 시야에서 아득히 멀리로 사라져갔다.
“정말 뛰어난 신법이군. 저게 바로 그 유명한 천봉궁의 비봉능운신법(飛鳳凌雲身法)인가?”
상원건은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탄어린 음성을 토해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뒤에서 성난 외침이 흘러나왔다.
“제기랄… 빌어먹을!”
상원건은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다가 낙일방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씩씩거리고 있는 광경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자네 왜 그러는가?”
낙일방은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 지 두 눈을 빨갛게 충혈시킨 채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런 제기랄. 무림의 여자들은 모두 저렇게 도도하고 안하무인입니까? 사람을 구해주어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는커녕 힐끔 한 번 쳐다보고 가버리다니…”
그제서야 상원건은 사정을 짐작하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억울할 만도 하겠지. 강호무림의 인심(人心)이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처음 겪었을테니…’
금교교가 그나마 상원건에게 예의를 차린 것은 그가 강호상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 중 두청청은 떠날 때까지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 않는가? 그렇다고 그녀들이 은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강호에서 그녀들의 신분으로 아무에게나 쉽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굽신거릴 수 없었을 뿐이다. 하나 낙일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누구라도 이런 대접을 받게 된다면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상원건이 슬쩍 둘러보니 낙일방 뿐만 아니라 응계성의 얼굴도 욹으락붉으락해져 있었다. 정해도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고, 임영옥은 눌러쓴 방갓 아래로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단지 진산월만이 입가에 빙글빙글 미소를 지은 채 붉게 물든 낙일방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상원건은 진산월이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진산월은 한동안 이를 갈며 씩씩거리고 있는 낙일방을 쳐다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녀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한게 아니니까 말이다.”
낙일방은 아직도 분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저도 그런건 압니다. 하지만 장문사형, 그렇다고 이런 무시를 당할 줄은 정말 몰랐단 말입니다.”
“예쁜 여자들이 너를 쳐다보지도 않고 떠나가서 서운했단 말이냐?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라. 다른 여자들은 몰라도 엄쌍쌍은 떠날 때까지 계속 너를 힐끔거리고 있었으니까.”
낙일방의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장문사형도 참… 저는 지금 농담하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
진산월은 여전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속에는 엄격한 그 무언가가 담겨져 있었다.
“나도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엄쌍쌍은 확실히 우리들 중 너를 제일 유심히 보았지. 하지만 네가 문제 삼는게 그런 게 아니라면 더더욱 억울해 할 필요가 없다.”
낙일방은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진산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억울한 것은 그녀들이 우리같이 대단한 사람들을 몰라 봤기 때문이냐, 아니면 저런 미인들을 사귀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냐?”
“……..!”
“그녀들이 우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네 생각보다 대단한 인물들이 아니니 억울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녀들을 사귀지 못한게 불만이라면 다음에 그녀들을 만났을 때 네 의향을 밝히면 된다.”
진산월은 문득 정색을 했다.
“남이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네가 진정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면 네가 원하지 않아도 남들이 먼저 너를 인정해 줄 것이다.”
낙일방은 한동안 우두커니 진산월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습니다. 장문사형.”
“그럼 됐다. 아무튼 이번 일로 우리는 한 가지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은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보다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강호에 나와서 싸워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겠지? 어떠냐?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
그 말에 낙일방을 비롯한 중인들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하던 얼굴을 활짝 펴며 밝게 웃었다.
“나쁠 리가 있겠습니까? 전 아주 신나던데요.”
그 표정이 어찌나 실감나 보이던지 진산월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