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권 강호출행(江湖出行) 편 : 11화
제10장. 후계조건(後繼條件)
진산월의 이야기를 들은 임영옥의 얼굴에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오 년전의 악자화를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느 때 기뻐하고 어느 때 슬퍼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왜 갑자기 종남파를 떠나게 되었는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악자화는 진산월보다 육개월 늦게 종남파에 들어왔지만, 나이는 몇 살이 더 많았다. 서열 순으로 보면 당연히 진산월이 위였으나, 악자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호승심(好勝心)이 강하고 호불호(好不好)가 누구보다도 분명했다. 좋게 말하면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눈밖에 난 일은 두고 보지를 못하는 다소 편협한 성격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악자화는 자신보다 한참어린 진산월이 단지 몇 개월 빨리 입문(入門)했다고 해서 자신의 위에 올라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서슴없이 진산월에게 하대(下待)를 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아랫사람 부리듯 부려 먹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진산월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악자화는 자신이 맏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끔은 진산월에게도 아량을 베풀어주고는 했던 것이다. 진산월 또한 그가 자신의 연장자(年長者)임을 알고 있었고,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우려했던 순간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임장홍이 제자들을 전부 소집했다. 그때 종남파의 제자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진산월과 임영옥, 악자화, 그리고 매상과 소지산, 응계성이었다.
제자들을 모두 불러모은 임장홍은 뜻밖의 말을 했다.
“오늘은 본파의 적통(嫡統)을 이을 후계자를 선임하겠다.”
그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적통을 이을 후계자란 곧 임장홍의 뒤를 이어 장문인에 오를 인물을 뜻한다.
문파의 적통은 물론 대부분은 수제자(首弟子)에게 돌아간다. 하나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수제자의 재질이 미흡하거나, 장문인 등 문파의 어른들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른 제자들 중에서 발탁되는 경우도 곧잘 있었다.
임장홍만 해도 사형제들 중 서열은 두 번째였으나, 문파 존장(尊丈)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대사형을 제치고 장문인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비록 무공에 대한 재질은 떨어졌으나, 기울어가는 종남파의 부흥을 위해 헌신(獻身)하였고 어려운 문파 살림을 잘 이끌어갔다.
그런데 임장홍은 왜 갑자기 장문인 후계자를 임명하겠다고 한 것일까?
그것은 임장홍이 진산월과 악자화의 불편한 관계를 이미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상태로 더 방치했다가는 나중에는 치유되기 힘든 후유증이 남으리라고 예상하고 어떤 식으로든 미리 후계자 구도를 정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종남파가 비록 지금은 몰락해 가는 문파라고는 하나,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강호의 명문정파(名門正派) 중 하나였다.
그 역사는 유구했고, 과거에는 어느 문파 못지 않은 찬란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만큼 후계자를 선출하는 일은 결코 허술하게 처리될 수 없는 일이었다.
임장홍이 자신의 후임(後任) 장문인을 지명한다고 하자 모든 제자들은 아연 긴장했다.
그들은 물론 진산월이 대사형임을 알고 있었으나, 또한 악자화가 지금까지 문파의 맏형 노릇을 해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둘 중 누가 된다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고, 떨어진 사람은 누구든 심신(心身)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진산월과 악자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은 평소의 느긋한 성격대로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악자화는 붉게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비록 사부가 진산월을 가장 아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자기가 후계자로 선출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무공에 대한 재질은 진산월보다 뛰어났고, 통솔력 또한 결코 못하지 않았으며, 문파를 부흥시켜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야 말겠다는 야망과 패기(覇氣)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도 치밀했고, 아직까지 맡은 일은 단 한 번도 실수를 하거나 실패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진산월은 성격적으로 너무 유순했고, 느긋했다.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는 요리를 만드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고, 특별한 야망이나 나름대로의 포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진산월은 장문인의 자리에 별다른 집착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악자화는 임장홍이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사람이기 때문에 비록 진산월을 더 좋아할지라도 문파의 부흥을 위해서 자신을 후계자로 선택하리라고 확신했다.
지금까지 맏형 노릇을 해오고 있으면서도 대사형과 둘째라는 서열상의 차이 때문에 여러 가지 걸끄러운 일들이 많았으나, 이제 자신이 후계자로 확정되기만 하면 그와 같은 모든 일들은 무난히 해소될 것이다. 심지어 악자화는 자신이 후계자가 되면 진산월을 잘 다독거려 그가 불만을 갖지 않도록 할 나름대로의 복안(腹案)도 세워놓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임장홍의 선고(宣告) 뿐이었다.
임장홍은 한동안 특유의 유심한 시선으로 제자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그가 정말로 심성이 착하며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일단 입밖으로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키고야 마는 다부진 면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임장홍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본 후에 비로소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랫동안 너희들 모두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다. 누가 더 본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렸지.”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만큼 조용해졌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임장홍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섯 명의 제자들 중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앞으로 본파(本派)를 이끌어 나갈 사람은 바로 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악자화의 낯빛은 흑색이 되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진산월에게 향한 가운데, 진산월은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평범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느니, 본파의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느니, 자신을 지명해 주어 충심으로 감사하다느니 하는 의례적인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알겠다’ 는 한 마디를 하고는 공손하게 삼배(三拜)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방을 나가는 그의 뒷등을 응시하는 악자화의 두 눈은 벌건 핏줄이 솟아올라 있었다.
그날 밤, 진산월이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그의 방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 왔다.
진산월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투로구나.”
진산월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한 번은 저를 찾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물론 악자화였다.
어찌된 일인지 악자화는 허리춤에 검(劍)을 차고 있었다.
깊은 밤중에 남의 방에 불쑥 들어온 사람이 검을 차고 있다면 누구라도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사람이 오늘 자신에 의해 크나큰 좌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앉으십시오.”
그가 방에서 유일하게 있는 의자를 가리키자 악자화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진산월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가 칭찬인지 비꼬임인지 모를 음성을 내뱉었다.
“너는 늘 여유만만하구나. 사부님은 항상 네 그 여유를 칭찬하곤 했지.”
“……”
“내가 너를 찾아온 것은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서다.”
“말씀하십시오.”
갑자기 악자화의 두 눈에서 칼날처럼 차갑고 예리한 안광이 뿜어나왔다.
“본 파는 이미 오랫동안 영화(榮華)를 잃고 쇠퇴의 길로 접어 들고 있다. 이 상태로 간다면 십 년이 지나지 않아 본파는 재기할 힘을 잃고 영원히 몰락하고 말 것이다. 이건 너도 알고 있겠지?”
그의 음성은 진지하고 묵직해서 몇 번이고 신중히 고려한 끝에 내뱉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문에 사부님의 뒤를 이어 본파를 이끌 사람은 잃었던 본파의 명예를 되찾고 본파를 부흥시킬 중대한 임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네게 묻겠다.”
악자화는 신광(神光)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의 두 눈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본파를 부흥시키고 잃어버렸던 본파의 옛 명예를 되찾아 사부의 숙원인 군림천하(君臨天下)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우리 둘 중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악자화의 음성이나 태도에는 결연한 기백이 서려 있어, 조금이라도 허튼 대답이나 거짓말을 한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 같은 살벌함이 감돌고 있었다. 진산월은 처음과 다름없는 조용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악자화를 응시하고 있다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접니다.”
순간 악자화의 눈꼬리가 세차게 떨렸다.
“뭐라구? 다시 한 번 말해봐라!”
그의 오른손은 어느 새 허리춤으로 가서 검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잡고 있었다. 진산월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짤막하게 다시 말했다.
“제가 적임자입니다.”
그 순간, 악자화는 출검(出劍)을 했다.
팟!
진산월이 눈앞에서 검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차가운 장검 하나가 그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악자화의 검은 정말 빨랐다. 그것은 악자화와 함께 지내오며 줄곧 그를 지켜보았던 진산월이 그동안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설사 알고 있다 해도 피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악자화의 장검 끝은 진산월의 목덜미에서 종이 한 장 차이로 멈춰 서 있어, 그가 조금이라도 손에 힘을 준다면 진산월의 목은 그대로 잘려지고 말 것 같았다. 악자화는 그런 자세로 검을 겨눈 채 진산월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다시 물었다.
“네가 적임자라구?”
그 말을 내뱉을 때의 악자화의 눈빛은 기이한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악자화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악자화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며 그의 검이 한 치쯤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 바람에 검끝이 진산월의 목을 살짝 뚫고 들어왔다. 금새 시뻘건 핏줄기가 진산월의 목에서 뿜어나왔다. 그 핏줄기는 검신(劍身)을 타고 한 방울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악자화는 자신의 검을 타고 흐르는 핏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여전히 진산월의 눈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조금 전의 내 일검(一劍)을 피할 자신이 있느냐?”
진산월은 솔직하게 말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내 일검도 받아내지 못하는 실력으로 감히 본파의 장문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악자화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악자화는 평소에 말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좀처럼 흥분하는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리지도 않았다. 하나 지금의 이 모습이야말로 악자화가 진정으로 분노했을 때의 모습이라는 것을 진산월은 잘 알고 있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와 검신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도 담담하여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떨어지는 핏방울을 응시하고 있던 진산월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 문파를 이끌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단순히 무공의 고하(高下)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공 이전에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지요.”
“그게 무엇이냐?”
“신뢰(信賴)입니다.”
악자화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신뢰?”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믿고 따라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악자화의 눈에서 다시 번뜩이는 빛이 일렁거렸다.
“네 말인즉 너는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냐?”
“그 반대지요.”
“반대라구?”
“저는 다른 사람을 믿고 있지만, 당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신뢰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진산월은 악자화를 똑바로 쳐다보며 반문했다.
“당신은 문파에 중대한 일이 닥쳤을 때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길 수 있습니까?”
“……!”
“피치 못할 사정으로 문파를 비우게 되었을 때 과연 안심하고 다른 누구에게 문파의 안위를 부탁할 수 있습니까?”
악자화의 낮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다시 말했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이 저에 못지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하지 못합니다.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
“한 문파를 이끈다는 것은 자기 자신뿐 아니고 문파의 모든 제자들을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상호 간에 완벽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독불장군은 결코 그 일을 해낼 수 없다는 말이지요. 또한…”
진산월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목덜미를 찌르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순간적인 격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검에 제자의 피를 묻히는 사람은 더더욱 장문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악자화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진 채였지만, 그의 입 꼬리는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악자화는 부인하려 했지만 진산월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악자화는 자신의 재질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현재 종남파에 있는 모든 제자들 중 자신을 능가하는 무공과 실력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생각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소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문파의 맏형 노릇을 자처하게 된 것도 단순히 나이가 가장 많기 때문이 아니라 종남파를 제대로 이끌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자부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겨우 그런 사소한 일로 문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가 날라가 버린다는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악자화의 눈빛에 다시 스산한 살기가 번뜩거렸다. 진산월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부득이한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무공을 익히거나 펼칠 수 없는 몸이 된다면…? 그때는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순간적으로 악자화는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하나 그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멈춰요, 악사형!”
외침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방안으로 불쑥 뛰어들어왔던 것이다. 뛰어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임영옥이었다. 임영옥을 본 악자화는 오히려 냉정을 되찾은 듯 예전의 침착하고 용의주도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임영옥은 악자화의 검이 진산월의 목에 꽂혀 있고, 진산월의 상반신이 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자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악사형…”
그녀는 갑자기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악사형도 알고 있잖아요.”
“…..!”
“이건 악사형답지 못한 일이에요.”
악자화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나답지 못한 일이라구?”
악자화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던 미소는 어느 새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검광이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조금 전만 해도 진산월의 목을 찌르고 있던 검이 어느 새 거두어졌다. 악자화는 검을 검집에 꽂으며 냉랭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종남파가 나를 반기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종남파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
임영옥은 아직도 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진산월을 도와주려다 악자화의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미간에 한 줄기 걱정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악사형…”
그녀의 음성은 그윽한 매력이 있었다. 입속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을 듣자 악자화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아련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삼 년간, 자신을 친오빠처럼 따랐던 그녀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길지 않은 세월이었으나 그녀와 함께 지냈던 순간들은 결코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어찌 그녀와의 기억 뿐이겠는가? 항상 부드러운 얼굴로 자신을 맞아주던 임장홍과 큰형처럼 자신을 따라주었던 어린 사제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결코 만족스런 세월은 아니었으나, 조금은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나 악자화는 이내 차갑게 웃었다. 그는 진산월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사실 종남파는 내가 평생을 투자하기에는 너무 좁았어. 너 정도에게나 어울리는 무대지.”
진산월은 상처를 지혈(止血)하고 몸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았다. 그런 다음 조용히 악자화를 응시했다.
“떠나시렵니까?”
“두 말하면 잔소리지. 내가 네 밑에 있을 사람으로 보이느냐?”
악자화는 돌연 정색을 했다.
“나는 멀리서 너를 지켜볼 것이다. 나를 버리고 너를 선택한 사부의 결정이 얼마나 틀린 것인지를 분명하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
“잊지 마라. 종남파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종남파를 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그 말을 끝으로 악자화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멀어져가는 악자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산월과 임영옥의 얼굴표정은 어두웠다. 악자화는 누가 무어라 해도 종남파의 기둥이 될 수 있는 좋은 인재(人才)였다. 종남파의 부활을 위해서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해 왔다. 그러나 한 산에 두 명의 주인은 있을 수 없는 법. 머리를 숙이고 진산월의 밑에 있기에는 그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했다. 그가 떠남으로 해서 진산월은 명실상부한 종남파의 후계자가 되었고, 임장홍의 죽음 이후에 종남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그리고 실로 오 년만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임영옥은 이런 전후사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악자화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림받았다는 느낌, 믿었던 사람에게 당했다는 배신감, 손상된 자존심, 깨어진 희망, 분노와 좌절, 그리고 빚을 갚고야 말겠다는 복수심까지… 아마도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악자화는 종남파의 가장 큰 적(敵)이 될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그를 향해 서슴없이 검을 뽑을 수 있을 것인가? 임영옥의 그린 듯 고운 미간에 한 줄기 수심(愁心)의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옥수(玉手)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너무 걱정하지마. 모든게 잘 될거야.”
그녀는 그에게 손을 맡긴 채로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사형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 일에는 순리(順理)라는 게 있어. 우리가 정도(正道)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모든 일이 순리대로 풀리게 될거야.”
“사형은 매사에 너무 낙천적이에요.”
진산월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게 내 유일한 장기인걸. 사매도 알잖아. 목구멍에 칼이 들어와도 내가 걱정하는 건 먹을 거 뿐이라는걸 말이야.”
그 말에 임영옥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그때도 그랬죠. 그때도 사형은…”
당시 악자화가 떠나간 직후, 임영옥은 진산월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했다. 그 상처는 단지 한 치쯤 찢겨 검봉(劒鋒)이 살짝 인후혈을 찌른 것에 불과했지만, 목의 경동맥 부근이 검날에 스쳐 상당히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에 진산월의 표정을 살폈다. 진산월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를 지켜보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진산월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더니 이내 멋적은 듯 피식 웃었다.
“별거 아냐.”
“말해 봐요. 악사형이 갑자기 떠나게 되어서 걱정스러운가요? 아니면 몸에 달리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요?”
임영옥이 꼬치꼬치 물었으나 진산월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게 아니야.”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요?”
“그가 왜 하필 목을 찔렀을까 생각하고 있었지. 다른 곳도 많은데…”
“다른 곳이라면 찔려도 좋다는 말이에요?”
“그게 말이야. 목에 난 상처가 아물 때 까지는 음식을 제대로 못먹을 것 같아서… 다른 곳을 다치는게 더 나을 뻔 했어.”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사형은 정말…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진산월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나도 그런건 아는데… 그가 떠난 걱정 보다는 앞으로 상처가 나을 때까지 먹고 싶은 걸 못 먹게 되는 걱정이 먼저 드는 걸 어떡해.”
그녀는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흔들며 조용히 웃었다.
“사형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죽느냐 사느냐 보다는 식량 걱정부터 먼저 할 거에요.”
당시를 생각하며 두 사람은 빙그레 웃었다. 임영옥은 진산월의 손을 꼬옥 잡은 채 고운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진산월은 편안하고 느긋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에 느껴지는 그녀의 따스한 손길을 음미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녀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사형…”
그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다음에 악사형을 만나게 되면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진산월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는 아직도 악사형을 기다리고 있다고.”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전하지.”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일렁이는 촛불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춤추듯 흔들거렸다. 진산월은 멍하니 그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걸 바라고 있을거야.”
낙수(洛水)의 푸른 물살은 마치 비취(翡翠)와 같았다. 낙수는 원래 섬서성(陝西省)의 동쪽에 있는 진령(秦嶺)에서 발원하여 하남성을 지나 황하(黃河)로 합류하는 큰 강이다. 그 물살은 도도하고 깨끗했으며, 무수한 역사와 전설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낙수의 여신(女神)은 복비(宓妃)이다. 그녀는 삼황오제의 하나인 복희씨(伏羲氏)의 딸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런데 우연히 낙수를 건너다가 빠져죽어 낙수의 여신으로 화했다고 한다. 그뒤로 사람들은 그녀를 낙빈(洛嬪)이라고 불렀다. 낙빈의 전설처럼 낙수의 강변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진산월 일행이 낙수 강가에 도달한 것은 해가 중천에 떠오를 정오무렵이었다. 계절은 이미 가을을 지나고 있어 한낮임에도 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불어오는 강바람이 오슬한 한기를 전해줄 정도였다. 강가에 늘어진 수양버들이 강바람에 흔들리며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진산월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변에 나란히 서서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눈앞에 펼쳐진 푸른 강물의 흐름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종남산 근처에서만 살아와서 이렇게 큰 강을 자주 볼 수는 없었다.
한동안 묵묵히 낙수를 응시하고 있던 일행 중 응계성이 문득 낙일방의 어깨를 툭 쳤다.
“야. 넌 여기가 처음이지?”
낙일방은 히죽 웃었다.
“처음은요. 예전에 몇 번이나 왔었는데요.”
응계성은 다시 정해를 쳐다보았다.
“넌?”
정해는 총기있는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처음입니다.”
응계성의 입가에 활짝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너도 처음이구나.”
“응사형도 그럼 처음이세요?”
“그렇다. 제기랄… 우라지게도 넓구나.”
그 말에 낙일방이 싱글벙글하며 끼어들었다.
“이걸 보고 넓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장강(長江)은 이것보다 몇 배는 더 넓고 큰데요.”
응계성은 못마땅한 듯 그를 흘겨 보았다.
“그럼 너는 장강도 보았단 말이냐?”
“그럼요. 그 광경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정말 바다처럼 거대하고 광활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장강을 보지 않고서는 아직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응계성이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은 내가 하는 말에 사사건건 잘난 척이야. 네가 나보다 세상물 좀 더 먹었다 이거지? 그래, 어디 얼마나 더 먹었나 뱃속 좀 들여다 보자.”
응계성이 갈구리같이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잡으려 하자 낙일방이 어마 뜨거라 머리를 감싸안고 진산월의 뒤로 몸을 숨겼다.
“아… 아닙니다, 응사형. 전 아무 것도 몰라요.”
“뭐? 장강을 못 본 사람은 세상을 헛 산거라고? 확 혓바닥을 뽑아 버릴테다!”
“그거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그냥 사람들이 떠든 소리라구요.”
“이리 못와?”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고 있을 때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방은 고향이 호남이니 당연히 장강을 보았겠지. 어린 나이에 혼자 세상을 떠도느라 고생 깨나 했을게다.”
그 말에 응계성은 입을 다물었다. 낙일방이 열 두 살 때 고향을 떠나 강남 일대를 떠돌아 다닌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응계성은 비교적 번듯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직 혼자서 세상을 떠돈 적이 없었다. 그가 고집이 세고 화를 잘 참지 못하는 것도 어려서부터 너무 주위의 떠받듬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에 비해 낙일방은 어려서부터 일찍 집을 뛰쳐나와 많은 고초를 겪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 혼자서 떠돌이로 지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조금 멋적은 표정으로 쳐들었던 주먹을 내리는 응계성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은 나도 아직 장강을 보지 못했다.”
그 말에 응계성은 물론이고 정해와 낙일방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장문사형도 그러셨군요. 역시 장문사형하고 나는 통하는게 있단 말씀이야.”
응계성이 큰 소리로 웃으며 거들먹거리자 낙일방은 진산월의 뒤에서 나직히 투덜거렸다.
‘쳇… 자기 비위에 맞을 때만 저런 소리를 한다니까.’
하나 그 말을 입밖으로 냈다가는 응계성의 주먹에 머리통이 벌집이 될 것이 뻔한지라 낙일방은 속으로만 씹어 삼켰다. 그때 응계성의 더욱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강호를 주유(週遊)하면 장강은 지겹도록 볼테니 걱정 없습니다. 하긴 일방, 저 녀석은 아직 북경(北京)의 번화가도 구경 못한 풋내기 중의 풋내기일 뿐이지요.”
응계성의 고향은 북경에서 멀지 않은 방산(房山)이었다. 강남 일대와 하남성 만을 들락거린 낙일방이 머나먼 하북의 북경까지 가보았을 리가 없었다.
낙일방의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질 때 진산월이 낙수 강의 반대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산(山)이 무엇이냐?”
낙일방은 진산월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낙수를 건너 멀리 떨어진 곳에 하나의 푸른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낙일방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건 금보산(金寶山)입니다.”
“금보산?”
“예. 웅이산(熊耳山)의 산자락에 있는 산이지요. 저 금보산을 끼고 옆으로 돌아가면 흥화현(興華縣)이 나오는데, 거기서 부터는 다시 평지이니 말을 달릴 수 있을 겁니다.”
응계성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거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냐?”
“아직 멀었어요. 흥화현에서 이틀 쯤 달린 후 다시 이수(伊水)를 건너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하루를 더 가야 숭산(嵩山)이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어요.”
“제기랄. 뭐가 그렇게 멀지?”
“이건 약과에요. 제가 예전에 강남에서 종남산까지 올 때는 꼬박 육개월이 걸렸는걸요.”
응계성이 다시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네가 세상을 더 많이 안다구?”
“그게 아니라…”
“이놈아. 나도 하북성에서 종남산으로 삼 개월 넘게 걸려 온 사람이야. 너 혼자 세상을 다 아는 척 하지 말란 말이야.”
낙일방의 얼굴이 다시 우거지상이 되었다.
“아이구… 알았어요, 응사형.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나만 들볶으려 하세요?”
응계성은 짐짓 큰 소리를 쳤다.
“네가 자꾸 여기저기에서 사고만 치고 다니니까 하는 소리다. 길 좀 안다고 까불지 말고 길 안내나 잘해.”
“그게 무슨 사고입니까? 그때 운문세가 놈들이 나쁜 짓을 했다는건 응사형도 알잖아요.”
“이놈아. 우리가 지금 남들 일에 끼어들 때냐? 아무튼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의 머리털을 몽땅 뽑아버리고 말겠다.”
낙일방은 억울한 표정이 가득 했으나 응계성이 진짜로 성질을 부릴 까봐 감히 무어라고 입을 열지는 못했다.
하나 낙일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에 사고를 일으킨 사람은 다름아닌 응계성, 자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