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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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5화


제16장. 흑편백검(黑鞭白劍)

곽당은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응계성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응계성은 가슴을 탕탕 치며 종이 울리듯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대종남파의 이십대 제자 응계성이 바로 본 나으리시다.”

곽당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떤 미친 놈인가 했더니 흑살조 독고황을 쓰러뜨린 응계성이란 후레자식이었구나.”

응계성의 고리눈이 부릅떠지며 거친 콧바람이 흘러나왔다.

“후레자식은 고수랍시고 사람을 함부로 깔보는 네놈이 바로 후레자식이다!”

“흐흐…. 운좋게도 독고황을 쓰러뜨렸다고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군. 곧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곽당은 천천히 응계성에게로 다가왔다. 응계성은 조금도 기가 죽거나 물러서지 않고 수중의 장검을 힘껏 움켜쥐며 성큼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장내에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갑자기 마차 안에서 운자추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 장문인,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진산월은 마차를 돌아보았다.

“말해 보시오.”

“저 두 사람의 맹렬한 기세를 보니 당장이라도 한바탕 몸을 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구료. 저들의 승패로 오늘 일을 결정한다면 우리가 서로 쓸데없는 심력을 소모할 필요도 없고 저들도 가슴속의 울화를 해소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소?”

진산월은 뜻밖의 말에 눈을 반짝 빛냈다.

“운공자의 말씀은 저들이 싸워 이기는 쪽의 뜻대로 하자는 것이오?”

“바로 그렇소. 만약 곽당이 진다면 진 장문인이 이번 일에 개입하는 것을 말리지 않을 뿐 아니라, 동중산도 순순히 인도해 주겠소. 하지만 곽당이 이긴다면…”

“우리가 순순히 물러서야 되겠군.”

운자추는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바로 그렇소. 내 제안이 어떻소?”

진산월은 운자추가 타고 있는 운룡신차의 주렴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해가 옆으로 다가와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저건 운자추의 계략입니다. 응사형의 무공으로 곽당을 당해 낼 수는 없을 겁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해는 힐끗 동중산을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운자추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이번 일이 운문세가의 개인적인 문제는 아님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파천노괴 혁련삼까지 가세한 것으로 보아 의외로 막중한 사안일수도 있는데 상대가 유리한 쪽으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진산월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말은 모두 옳다. 하지만 강호에서 활동하다 보면 때때로 알면서도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

“내게는 이번 일의 성패보다는 응계성이 더욱 중요하다.”

진산월은 비록 자세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정해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운자추의 제안은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진산월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사람들은 응계성이 곽당을 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승패와는 상관없이 그것만으로도 응계성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것이며,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문파의 장문인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데 굴욕을 느낄 것이다.

싸워서 패하는 것보다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서는 것이 응계성에게는 더욱 커다란 수치이며 치욕이 될 것이다.

정해는 고개를 수그리며 물러났다.

“제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계성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는 운룡신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운공자의 제안을 수락하겠소. 그리고 나도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말씀하시오.”

“계성이 진다면 물론 우리는 이번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 운문세가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양보하겠소.”

그 말에 종남파 인물들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운문세가의 일에 무조건 양보하겠다는 말은 결국 운문세가에 굴복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앞으로의 강호행보에 커다란 제약이 될 것이며, 자칫하면 종남파 자체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운자추 또한 그의 말이 의외였는지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만일 곽당이 진다면?”

진산월의 음성은 담담하고 차분했다.

“우리가 동중산을 데리고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힘써 주시오.”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산월이 내건 조건은 너무 일방적이었다. 주는 것에 비해 받는 것이 너무나 형편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운자추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운룡신차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은 묘한 빛을 담고 있었다.

“진 장문인도 알고 있었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중인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빛이 되었다.

그때 문득 상원건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굳혔다. 용문석굴의 구석구석에서 자신들 외에도 수많은 눈길들이 숨어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럴수가… 언제 이토록 많은 고수들이 몰려 들었단 말인가?’

비록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이십 명 이상의 고수들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들도 포함한다면 그 수는 더 불어날지도 몰랐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진산월의 요구조건이 결코 불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동중산을 노리고 몰려든 인물임이 분명했다. 만약에 응계성이 승리하여 진산월 등이 동중산을 건네 받았다면 이곳에 몰려 있는 모든 고수들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산월의 강호행에 있어 심대한 위협이 될 것이 뻔했다.

운자추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진 장문인의 제안을 수락하겠소.”

진산월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응계성을 돌아보았다.

“준비는 되었느냐?”

응계성은 무언가 약간 불만이 있는 듯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힐끗 곽당을 쳐다보더니 진산월을 향해 퉁명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조건을 내걸었소?”

진산월은 그의 말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무얼 말이냐?”

“져도 내가 지고 이겨도 내가 이기는 건데 왜 저놈들에게 양보한다느니 도와달라느니 하느냔 말이오?”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그럼 너는 곽당을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응계성의 짙은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리며 얼굴에 붉은 기가 떠올랐다.

“누가 자신없다고 했소? 장문사형은 가끔가다가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 때가 있단 말이오.”

“그럼 걱정할 게 없지 않느냐? 네가 이기면 우리로서는 여러모로 편한 일이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진산월은 돌연 정색을 했다.

“계성. 만약이란 없다. 너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응계성은 몸을 움찔거렸다.
진산월은 그를 주시하며 나직하면서도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 이런 자리에서 종남파의 고수가 운문세가의 일개 마부조차도 당해내지 못한다면 본파의 강호출행(江湖出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차라리 종남으로 돌아가 무공이나 닦고 있는 게 더 낫겠지.”

응계성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낯빛이 여러 차례 변했다.

“때로는 물러설 수 없는 자리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따라서 너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응계성의 관자놀이 부근에 힘줄이 불거져 나오며 눈꼬리가 실룩거렸다.
응계성은 한 차례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돌아보다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언제 진다고 했소? 장문사형은 다 좋은데 가끔 아녀자처럼 너무 걱정이 많은 게 탈이오.”

그는 찬바람이 나도록 휑하니 몸을 돌렸다.

“나 때문에 본파의 강호행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테니 염려마시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곽당을 향해서 곧장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진산월의 옆으로 정해가 다가왔다.
정해의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가득했다.

“응사형이 곽당을 당해낼 수 있을까요?”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계성이 말했지 않느냐? 염려 말라고.”

“하지만…”

진산월의 입가에는 비록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계성은 성격이 불같고 난폭한 면이 있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자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것을 죽기보다도 싫어하지.”

“……!”

“다시 말해서 어깨에 드리워진 책임이 무거울수록 실력을 발휘하는 체질이란 말이다. 그는 잘해낼 수 있을 거다.”

정해는 그제서야 진산월이 어째서 운자추에게 무리한 조건을 내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응계성이 곽당을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분발시키기 위해 위험한 도박을 감행한 것이다.
그 점은 정해로서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진산월의 도박이 성공했을 때에 비해서 실패했을 때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도 크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정말 응사형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군.’

정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갑자기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곽당과 응계성이 불문곡직하고 서로를 향해서 덤벼들었던 것이다.

응계성은 처음부터 종남파의 절학인 천하삼십육검을 펼쳤다.
그로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곽당보다는 한 수 뒤쳐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절초를 펼치지 않으면 당해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곽당은 흑사편으로 휘감고 있던 동중산의 몸을 이미 백의 청년들에게 인계한 후였다.
한결 홀가분해진 그는 응계성이 자신을 향해 펼친 검법이 예상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것을 보면서도 입가에 음독한 미소를 그려내고 있었다.

‘흐흐…. 하룻강아지 같은 놈! 곧 나를 건드린 것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곽당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응계성이 펼쳐낸 검영(劍影) 속으로 뛰어들며 흑사편을 휘둘렀다.
원래 채찍같이 길다란 병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져 싸울수록 유리했다.
하나 곽당은 흑사편에 대해 평생을 연구했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수발(收發)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다시 말해서 거리의 길고 짧음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응계성에게로 바짝 다가가며 휘두른 그의 흑사편은 마치 독오른 독사처럼 기이하게 꿈틀거리며 응계성의 목을 휘감아가고 있었다.
응계성은 자신이 펼친 천하성진(天河星辰)의 초식을 곽당이 무풍지대처럼 간단하게 뚫고 들어오자 내심 크게 놀랐다.
그는 황급히 옆으로 두 걸음 비켜서며 곽당의 흑사편을 피하려 했다.
하나 곽당의 흑사편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어 응계성의 목을 향해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채찍으로 목을 노리는 것은 고수(高手)가 실력이 아주 떨어지는 하수(下手)에게나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채찍으로 목을 휘감는다는 것은 실력차이가 월등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곽당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목 부위만을 노리고 들어오자 응계성은 불쑥 오기가 발동했다.

‘좋다, 이놈. 한 번 해보자는 거지?’

그는 다시 옆으로 몸을 피하는 척 하다가 곽당의 흑사편이 방향을 바꿀 때 느닷없이 앞으로 곧장 쏘아져가며 천하도도(天河濤濤) 초식으로 곽당의 목을 노렸다.
이에는 이로 대항하겠다는 응계성 식(式) 대항전술이었다.
곽당은 응계성의 무공을 자신보다 몇 수 아래로 보았기 때문에 무심코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흑사편을 이동시키다가 그가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며 예리한 검초를 펼치자 움찔 놀랐다.

‘이 녀석이?’

곽당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오른손목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저만큼 가있던 흑사편의 끝이 빠르게 선회하며 응계성의 뒷통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응계성은 막 곽당을 향해 검을 내찌르고 있다가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기운이 자신의 뒤쪽으로 다가서는 느낌에 머리칼이 곤두섰다.

‘이게 뭐야?’

그는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팟!

순간 흑사편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덜미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응계성의 목부위가 살짝 갈라지며 핏물이 내비쳤다.
비록 정통으로 가격당하지는 않았으나 너무 가까운 거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살갗이 벗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응계성은 목부위가 후끈거리고 칼로 베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자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불같은 투지가 끓어올랐다.

“이놈!”

그는 벼락같은 폭갈을 터뜨리며 곽당을 향해 더욱 빠르게 돌진해 들어갔다.
곽당은 목에서 피를 흘린 응계성이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더욱 광폭한 기세로 덤벼들자 내심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하나 그는 강호에서 횡행할 때 눈도 깜박이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냉혹한 인물이었다.
응계성이 사납게 덤벼들면 덤벼들수록 곽당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며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의 흑사편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악!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바람소리가 응계성의 귓전을 쉴 새 없이 강타했다.
응계성은 곽당에게 가까이 접근하려 했으나 그의 흑사편이 워낙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바람에 도저히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천하삼십육검의 검초를 펼쳐 곽당의 흑사편에 맞서나갔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뒤로 정신없이 밀리고 있었다.

곽당은 일전에 응계성이 상대했던 독고황보다도 오히려 몇 단계 뛰어난 고수였다. 그가 흑사편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응계성의 몸은 금시라도 갈가리 찢어질 듯 위기에 처하고는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종남파의 고수들은 표정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보아도 응계성의 실력으로 곽당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강호에 처음 출도한 응계성이 이미 오랫동안 무서운 살명(殺名)을 날리고 있던 곽당을 이기리라는 기대 자체가 어쩌면 너무 무모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낙일방은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장내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연신 움찔움찔하는 것으로 보아 금시라도 격전장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쫘악!

다시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곽당의 흑사편이 응계성의 뒷등을 훑듯이 스쳐 지나가며 응계성의 등뒤 옷이 갈가리 찢겨져 맨 살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흑사편이 한 치만 더 가까이 다가왔더라면 응계성의 등은 걸레짝처럼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익…”

낙일방이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때 하나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가만히 붙잡았다. 낙일방이 고개를 돌아보니 그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진산월이었다.

“장문사형…”

낙일방은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붉게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산월은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강호의 싸움이 어떤 것인지 눈을 똑바로 뜨고 잘 지켜보아라.”

과연 진산월의 말대로 싸움은 한층 더 치열해지고 거칠어졌다. 응계성은 등뒤가 넝마조각처럼 찢겨져 나가자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한층 더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가슴속에 내재해 있던 난폭한 성질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하나 곽당은 단순히 성질을 부린다고 해서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곽당은 무공 뿐 아니라 대적(對敵) 경험에 있어 독고황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응계성의 물불을 안가리는 공격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냉정하고 침착하게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응계성은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천하삼십육검의 절초들을 펼치며 덤벼들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뒤로 조금씩 몰리고 있었다. 응계성의 전신은 이미 흐르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입과 코에서는 연신 뜨거운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머리는 절반이나 풀어헤쳐져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응계성은 이런 상태로 조금만 더 흐르면 곽당의 흑사편이 일으키는 위세에 완전히 휘말려 제대로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진다는 것도 억울하고 분했지만, 자신 때문에 종남파가 강호에 출도하자마자 남들 앞에서 모욕을 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이대로 맥없이 당할 수는…’

응계성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흑사편을 향해 곧장 정면으로 마주 달려갔다. 그것은 마치 불을 본 나방이 스스로의 몸을 불에 태우려고 달려드는 것과 같았다.

“앗?”

종남파 문인(門人)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흑사편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매섭게 꿈틀거리며 응계성의 목덜미를 휘감아왔다. 그 순간 응계성은 왼손을 앞으로 쭉 내밀어 흑사편을 움켜잡음과 동시에 오른손의 장검으로 곽당의 목덜미를 찔러갔다.

쫘아악!

비단폭이 갈라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응계성의 왼쪽 팔뚝이 흑사편에 칭칭 감기며 시뻘건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흑사편이 팔뚝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며 그의 왼팔을 갈가리 찢어놓았던 것이다. 응계성은 눈앞이 아득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오히려 눈을 부릅뜨며 더욱 맹렬하게 곽당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내찔러 갔다.

“미친 놈! 이런 약은 수작 따위로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곽당은 눈꼬리를 꿈틀거리며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슬쩍 목을 옆으로 움직여 응계성의 검을 피하며 흑사편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피투성이로 변한 응계성의 왼팔에 감겨있던 흑사편의 끝부분이 갑자기 두 개로 갈라지며 응계성의 목을 휘감아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악독하기로 유명한 쌍두사의 초식이 다시 펼쳐진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응계성의 검이 헛되이 허공을 찌르고 지나갔을 때는 이미 흑사편의 갈라진 반대쪽 머리는 응계성의 목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응계성의 목은 흑사편에 그대로 휘감겨 버리고 말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응계성은 허공을 찌르고 지나간 검을 그대로 놓으며 검을 들었던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아오는 흑사편의 머리를 덥석 움켜잡았다.

팟!

그의 오른손이 한 마리 검은 뱀에 칭칭 감긴 듯한 형상을 이루며 금새 붉은 피를 흘려내고 있었다. 곽당은 그가 설마 양쪽 손을 희생하며 자신의 흑사편 두 조각을 모두 잡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는지 몸을 움찔했다. 그 순간 응계성은 피투성이로 변한 양쪽 손에 흑사편 두 가닥을 감은 채로 그의 가슴을 향해 뛰어들었다.

쾅!

곽당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응계성의 왼쪽 어깨가 곽당의 앞가슴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욱!”

곽당의 몸이 휘청거리며 두 눈에 경악과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하나 그가 채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응계성은 다시 양쪽 팔꿈치로 그의 겨드랑이 부분을 맹렬하게 찍어왔다. 곽당은 황급히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으나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고 왼쪽 겨드랑이를 격중당하고 말았다.

우두둑!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곽당의 허리가 앞으로 수그러졌다. 응계성의 팔꿈치가 겨드랑이에 깊숙이 꽂히는 순간 곽당은 창으로 옆구리를 관통당하는 듯한 충격에 입을 딱 벌렸다. 응계성은 다시 흑사편이 감겨 있는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피에 묻은 흑사편이 응계성의 두 팔과 곽당의 목을 함께 조이고 있었다.

“크윽!”

곽당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응계성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무릎으로 있는 힘껏 그의 아래턱을 강타해 버렸다.

쾅!

마치 쇠망치로 벽을 부수는 듯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곽당은 몸이 허공으로 반쯤 붕 떴다가 허물어지듯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미 그의 아래턱은 흐물흐물해져서 부서진 이빨과 잘려진 혓조각이 시뻘건 선혈과 함께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나 응계성은 아직도 성이 차지 않는지 다시 반대쪽 무릎으로 쓰러지는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퍽!

응계성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곽당의 목을 끌어안은 채 양쪽 무릎으로 그의 얼굴과 앞가슴을 몇 번이고 가격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그의 뒤로 다가왔다.

“됐어요, 사형. 끝났어요.”

낙일방은 그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응계성은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낙일방은 그가 훌쩍 도망가기라도 할까봐 두려운지 그의 몸을 꼬옥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사형이 이겼어요. 정말 멋지게 해치웠다구요.”

응계성의 입과 코에서는 시커먼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응계성은 그런 채로 낙일방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끝났다구? 내가 이겼다구?”

낙일방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의 등을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말 사형다운 솜씨였어요.”

응계성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양 손에 여전히 흑사편을 감은 채로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겼단 말이지? 난 지지 않았어….”

“그래요. 사형은…”

응계성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서서히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팔이 너무 아프군…”

낙일방은 황급히 그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 응계성은 정신을 잃으면서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난 지지 않았어. 난 지지 않아… 절대로 지지 않아…”

그의 몸은 곧 축 늘어져 버렸다. 낙일방은 아직도 곽당의 목을 휘감고 있는 응계성의 팔을 풀고 그의 팔에 가겨 있는 흑사편을 벗겨냈다. 흑사편이 풀어지며 드러나는 응계성의 팔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의 양쪽 팔은 넝마조각이나 다름없었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흑사편을 맨 손으로 움켜잡은 바람에 피부가 갈가리 찢겨졌을 뿐 아니라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곽당같은 고수를 쓰러뜨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상원건이 황급히 다가와 응계성의 양쪽 소매를 뜯은 후 상처에 금창약(金瘡藥)을 꺼내 바르기 시작했다. 응계성은 기절한 와중에도 상처에 금창약이 닿자 고통스러운지 몸을 비틀며 신음을 토해냈다.

“으음….”

상원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산월의 말대로 응계성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하나 그의 방법은 너무도 무모한 것이었다. 응계성은 병기로의 싸움은 도저히 곽당에게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양 팔을 희생하여 육박전을 전개한 것이다. 곽당이 비록 강호에 오랫동안 명성을 날린 고수라고 하나 흑사편이 아닌 맨손으로 남과 접근전을 펼쳐본 경험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응계성의 팔꿈치와 무릎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 것이다. 상원건이 힐끗 돌아보니 곽당의 모습은 응계성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곽당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목을 제압 당한 상태에서 아래턱과 앞가슴을 응계성의 무릎에 거푸 가격 당해 턱이 부서지고 가슴뼈가 함몰된 상태였다. 운문세가의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이 황급히 그의 상처를 지혈하고 뼈를 맞추고 있었으나, 설사 살아난다 해도 결코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장내에는 일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승리를 거둔 종남파의 고수들도 응계성의 부상 때문에 무거운 표정들이었고, 운문세가 측에서는 침통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진산월은 응계성의 상세를 살피고 있는 상원건을 향해 물었다.

“계성의 팔은 어떻습니까?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상원건은 응계성의 팔을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그를 올려보며 히죽 웃었다.

“세상에 이토록 무모하고 난폭한 싸움은 아직 본 적이 없었소. 진장문인의 사제는 정말 거친 사람이오. 하지만 운이 좋게도 팔의 신경은 상하지 않았소. 피육(皮肉)이 갈라지고 뼈에 금이 갔지만, 잘만 치료한다면 다시 예전처럼 검을 잡을 수 있을 거요.”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그는 그 말만을 내뱉고는 몸을 돌려 버렸다. 상소홍은 그의 모습이 너무나 매정한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쳇. 자기 때문에 사제가 저 꼴이 되었는데 기껏 한다는 말이 저 말 뿐이야?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정말 못된 사람이군.’

하나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장내에서 응계성의 상세(傷勢)를 가장 염려하는 사람이 바로 진산월이며, 그의 마음이 지금 얼마나 초조하고 가슴 아픈지를… 단지 진산월은 그런 마음을 겉으로 내색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며, 문파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응계성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각오를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운룡신차를 향해 다가갔다.

“이번 내기는 우리가 이긴 것 같구료.”

운룡신차에서는 한 동안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천하의 운자추도 사태가 이런 결말을 맞게 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음이 분명했다. 한참 후에 흘러나온 운자추의 음성은 다소 냉랭한 빛을 담고 있었다.

“과연 종남파가 십 여년만에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다 싶었는데 그 이유가 있었군.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강호의 일을 처리한다면 얼마 못 가 종남파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을 거요.”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의 방식이 있소. 굳이 귀하가 염려해 줄 필요는 없는 거요.”

“물론 그렇겠지. 아무튼 오늘 일은 당신이 이겼소.”

“그럼 동중산을 내주시오.”

운자추는 짤막하게 소리쳤다.

“소일(少日). 그를 그들에게 넘겨주어라.”

그러자 백의 청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청년이 허리를 조아리고는 동중산을 끌고 왔다. 동중산은 혈도가 짚힌 채로 눈알만 떼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진산월이 정해에게 눈짓을 하자 정해는 앞으로 다가와서 백의 청년의 손에서 동중산을 건네 받았다. 백의 청년은 분노와 살기가 범벅된 눈으로 진산월과 정해를 쏘아보다가 동중산을 휙 던지듯 정해에게 넘겨주고는 휑하니 몸을 돌려 운룡신차로 돌아가 버렸다. 정해는 동중산을 옆구리에 끼고 진산월에게로 다가와서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 자를 어떻게 할까요?”

진산월은 묵묵히 동중산을 쳐다보았다. 동중산은 그때까지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 채 눈치를 살피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산월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동중산은 그를 향해 웃어 보이려 했으나 혈도가 짚혀 얼굴 표정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었다. 그때 진산월이 갑자기 그를 향해 불쑥 손을 내뻗었다. 동중산은 그가 자신을 해치려는 줄 알고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막혔던 혈도가 풀리며 자신의 몸이 자유스럽게 된 것을 깨닫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좀처럼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우두커니 있다가 정해가 자신의 몸을 놓자 그제서야 바닥에 내려서며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정말 고맙소…”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제 그만 가보시오.”

그 말에 종남파의 문인들은 물론이고 운문세가의 고수들도 모두 깜짝 놀란 표정들이었다. 동중산도 뜻밖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하나 진산월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응계성이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쟁취한 동중산을 진산월이 의외로 순순히 놓아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동중산은 진산월의 의중(意中)을 파악하려는 듯 한 동안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가도 되겠소?”

“물론이오. 우리는 당신과 어떠한 은원(恩怨)도 없으니 당신을 잡아둘 이유가 없지 않소?”

말이야 바른 말이었다. 하나 동중산은 자꾸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강호를 살아온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데, 이럴 때 일수록 무언가 함정이 있거나 자신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은밀한 계략이 숨어 있기 일쑤였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다른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동중산은 몸을 돌려 떠나려다 다시 진산월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거요?”

진산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 늙은 쥐처럼 의심이 많구료. 안심하고 가보시오. 후회를 해도 그건 내 일이니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소.”

동중산은 자신을 늙은 쥐로 비유하는 진산월의 말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미혹에 빠져든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미 그에게서 몸을 돌려 운룡신차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운자추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그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쫏기고 있었는지 아시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하오.”

“그런데도 그를 순순히 보내주었단 말이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그가 자신의 자유의사와는 상관없이 남에게 억압당하고 있었다는 것 뿐이오. 만약 그가 남의 물건을 강탈해 갔거나 무림에 해악(害惡)이 되는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모르지만, 단순히 몸에 기진이보(奇珍異寶)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것은 강호의 도의(道義)에 어긋나는 것이오.”

운자추는 냉랭하게 웃었다.

“과연 나보살 다운 말이로군.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기진이보가 아니오. 그리고 그가 원주인이었던 것도 아니었소. 당신이 애초부터 물건에 욕심이 없었다면 이런 식으로 일에 끼어든 것은 너무도 경솔한 일이었소.”

진산월도 자신들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진산월의 잘못이 아니라 낙일방의 성급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산월은 이제 와서 굳이 그 점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진산월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곳의 풍광(風光)은 몹시 마음에 들어서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구경하고 싶지만, 주위에 눈들이 많아서 거추장스럽구료. 운공자께서 저들을 잘 타일러 주리라 믿소.”

그 말에 중인들은 퍼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과연 용문석굴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많은 고수들의 숨결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수는 조금 전보다 오히려 늘어난 것 같았다. 게다가 이미 떠난 줄 알았던 혁련삼 마저 한쪽에서 날카로운 안광을 뿌리며 그들 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혁련삼의 옆에는 머리가 허옇고 얼굴이 붉은 화의 노인(華衣老人)이 우뚝 서 있었다. 화의 노인의 인상은 온화한 학자(學者)의 모습이었으나, 때때로 번뜩이는 눈빛이 흉악하기 이를데 없는 것으로 보아 겉모습과는 달리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소근거리면서 연신 진산월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해는 그들이 왜 자신들 쪽을 쳐다보는 걸까 하고 궁금해서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동중산이 아직도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며 진산월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니 당신은 왜 가지 않았소?”

정해가 불쑥 묻자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동중산에게로 향했다. 동중산의 얼굴에는 한 차례 쓰디쓴 웃음이 떠올랐다.

“이걸 일컬어 늑대 입을 나와서 호랑이 품속으로 뛰어든다고 하는거요.”

“그게 무슨 말이오?”

“이 주위에는 이미 고수들이 잔뜩 몰려있어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소. 그러니 내가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그들이 굶주린 늑대 떼처럼 몰려들 것이 뻔한데 어찌 떠날 수 있겠소?”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혁련삼은 절대로 동중산을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혁련삼의 일행인 듯한 화의 노인마저 가세했으니 그가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무작정 이곳에 눌러 있을 수만도 없었다. 진산월이야 그에게 별다른 욕심이 없다고 해도 운자추는 그를 노리고 있었으니 언제 마음이 변해 그를 다시 빼앗으려 할 지 몰랐다. 동중산으로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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