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9화
제20장. 종남절학(終南絶學)
임영옥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말없이 모용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모용건은 무엇을 느꼈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금 전의 검초는 혹시….”
임영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건의 안면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조금 전에 그녀가 펼친 검초가 어딘지 눈에 익은 것을 알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패퇴했던 낙일방이 펼친 것과 같은 초식임을 깨달았다.
임영옥이 펼친 것은 유운검법 중의 유운축전과 유운비격이었다.
낙일방이 펼칠 때는 평범해 보였던 이 검초들이 그녀의 손에서 펼쳐지자 천하에 다시없는 절초처럼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원래 유운축전과 유운비격은 연이어 전개하기 힘든 초식들이었다.
유운축전은 빠름을 장기로 하는 초식이었고, 유운비격은 변화가 많은 초식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임영옥이 두 초식을 거푸 펼치자 빠름과 변화가 서로 절묘하게 배합되어 전혀 다른 초식처럼 보였다.
유운검법을 창시한 사람은 종남파의 오대(五代) 장문인이었던, 풍운무정검(風雲無情劍) 곽일산(郭日蒜)이었다.
곽일산은 당시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던 검의 일대귀재(一大鬼才)로, 그의 검법은 별호처럼 변화무쌍 한데다 날카롭기 그지없어 일단 그가 검을 펼치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말았다.
말년에 곽일산은 종남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은거하며 자신이 평생 수련한 검법을 모두 십팔초(十八招)의 구결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유운검법이었다.
유운검법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변화가 무궁무진하고 빠른 무공이었으나, 그만큼 익히기가 어려웠다.
구결 자체는 단순하여 쉽게 익힐 수 있었으나, 다양하게 변하는 구름처럼 수십 수백 개로 파생되는 변화를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의 후대에 이르러 유운검법이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도 그 무궁무진한 변화를 모두 터득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곽일산은 죽기 직전 제자들을 모여놓고 유운검법 십팔초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그때 제자들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수백 개의 구름덩어리들이 산정(山頂)을 온통 휘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고 한다.
“이 십팔초를 단숨에 관통할 수 있다면 능히 검(劍)으로 중원(中原)을 평정(平定)할 수 있을 것이다.”
곽일산은 이 말을 끝으로 두 번 다시 유운검법을 펼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일 후에 은거지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금의 강호에서 유운검법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종남파하면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천하삼십육검은 비단 익히기가 수월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성격이나 취향에 맞게 여러 가지로 변화하여 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대대로 종남파의 고수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무공이었다.
진산월을 비롯한 현재 종남파의 제자들도 모두 유운검법을 배우기는 했으나 누구도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한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 가장 오래 유운검법을 익힌 사람은 물론 임영옥이었다.
하나 그녀조차도 유운검법을 오성(五成) 가량 익힌 후 더 이상의 진척이 없어 유운검법의 수련을 포기한 상태였다.
도저히 그 이상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단지 오성의 유운검법만으로도 강호의 일류고수인 모용건을 가볍게 격퇴시키고 말았다.
모용건은 그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선 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의 격돌로자신이 눈앞의 여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여인은 분명 당대에 보기 힘든 절정의 여검객(女劍客)이며,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녀의 검을 당해낼 수 없음이 분명했다.
하나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조금 전에 백의 미남자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놓아둔 것은 자신에게 효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백의 미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대할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모용건은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기로에 서서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나 그의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뻔했던 것이다.
눈앞의 여인이 제아무리 상상을 뛰어넘는 검법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신목령의 위엄에 견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남에게 선보이지 않은 비장의 한 수(手)가 남아 있었다.
그는 아직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 수를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그 수를 사용한 것은 지금까지 모두 네 번이었으며, 그때마다 상대는 모두 비명(非命)에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 수는 아직 누구도 알고 있지 못하며, 말 그대로 그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최후의 구명절초(救命絶招)였다.
만약 그 수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구명절초로서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눈앞의 여인 외에도 적지 않은 수의 눈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지금의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용건은 무의식적인 듯 힐끗 백의 미남자를 돌아보았다.
백의 미남자는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기이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무얼 망설이고 있느냐며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모용건은 침중한 표정으로 흑우선을 오른손에 움켜쥔 채 천천히 임영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용건이 다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방립 아래로 두 눈을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흑수사는 영리해서 좀처럼 손해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요?”
모용건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소문이 잘못되었다고 해두지.”
“좋아요. 이번에는 나도 살수(殺手)를 쓰겠으니 당신은 조심하세요.”
모용건은 그건 내가 할 말이라고 하고 싶었으나, 대신 입을 굳게 다물고 예리한 안광을
번뜩이며 조금씩 신형을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슥!
그의 몸놀림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민첩했다.
얼핏 보기에는 그녀를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양 발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며 신형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산매보(散魅步)라는 것으로, 상대의 눈을 현혹하여 상대에게 접근하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끊임없이 몸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상대로 하여금 공격할 초점을 찾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 빠르게 튀어나갈 수 있어서 처음 대하는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임영옥은 여전히 수중의 장검을 가볍게 쥔 채 처음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모용건이 펼치는 산매보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모용건의 신형은 그녀의 이 장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가 먼저 출수(出手)를 했다.
팟!
검광이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그녀의 검은 어느 새 이 장의 거리를 압축해서 모용건의
목덜미를 정확히 노리고 들어왔다.
모용건은 산매보를 펼쳤는데도 그녀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부위를 정확하게
찔러오자 새삼 그녀의 검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시시한 종남파에서 어떻게 이런 여고수를 배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 망설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모용건은 좌우로 움직이던 신형을 오른쪽으로 급히 선회하며 수중의 흑우선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팟!
주위에 검은 선영이 겹겹이 나타나며 목덜미를 찔러오던 검광을 순식간에 에워싸 버렸다.
그것은 흑풍십이선 중의 흑풍료선(黑風燎煽)이라는 것으로, 얼핏 보기에는 맹렬한 공격초식
같지만 사실은 엄밀하기 그지없는 수비초식이었다.
그녀가 내찌른 검광은 곧장 일직선으로 뻗어오다 모용건이 펼쳐낸 선영에 휘감기는 듯 했다.
한데 그 순간, 검광이 갑자기 산산이 흩어지더니 전혀 다른 방향에서 돌연 새파란 검광이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헛!”
모용건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던 검광이 홀연히 사라지며 난데없이 그의 가슴팍을 향해 검광이 날아들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용건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황급히 뒤로 두 걸음 빠르게 물러나며 흑우선을 더욱 맹렬하게 흔들어댔다.
쏴쏴쏴…
마치 폭우가 내리는 듯한 기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앞에 검은 색의 장벽이 쳐졌다. 수십 개의 선영이 그의 앞을 금성철벽(金城鐵壁)처럼 막아선 것이다.
까깡!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던 검광은 검은 선영의 벽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다음 순간, 모용건은 손아귀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윽!’
그는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속으로 눌러 삼키며 산매보를 펼쳐 양쪽 어깨를 빠르게 흔들면서 앞으로 전진하려 했다. 하나 막 고개를 쳐든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흑우선에 가로막힌 줄 알았던 검광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기이하게 선회하며 그의 양미간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강호무림에서 수십 년간 활동했던 모용건으로서도 좀처럼 보지 못했던 가공할 검술이었다. 그것이 십팔초의 유운검법 중에서도 임영옥이 제일 자신하는 유운경변(流雲驚變)의 일식임을 모용건이 어찌 알겠는가? 모용건은 전력을 다해 뒤로 몸을 누으며 흑우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팟!
검광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와 함께 두건이 잘려 그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모용건은 황급히 몸을 선회시키며 일장 밖으로 물러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머리는 온통 산발되어 허리 아래까지 풀어헤쳐져 내려왔고, 얼굴은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하게 변해 있어 낭패스럽기 이를데 없는 몰골이었다. 실로 모용건으로서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장(秘藏)의 한 수를 써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날카로운 검에 머리를 잘릴 뻔했던 것이다.
그때 다시 그녀 검이 날아들었다. 별다른 파공음도 없이 모용건의 목덜미를 곧장 찔러오는 검날의 끝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모용건은 산발한 머리를 묶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나 그의 몸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그녀의 검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검끝이 그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든 교묘하게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검끝은 언제 어느 방향으로 느닷없이 쏘아져 올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모용건은 자신이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겨둔 비장의 한 수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내느냐? 아니면 순순히 패배를 자인하고 뒤로 물러서느냐? 하나 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비장의 한 수로 과연 그녀를 패퇴시킬 수 있을지 완벽한 자신이 없었다. 만에 하나 그 수를 사용하고도 그녀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자신은 두 번 다시 강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뿐 아니라 아까운 구명절초만 세상에 공개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섰다가는 백의 미남자가 어떤 추궁을 해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그에게는 더 이상 심사숙고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흔들거리며 다가오던 그녀의 검이 갑자기 빛살처럼 빨라지며 그의 우측 관자놀이를 향해 쏘아져 왔던 것이다. 바로 그때, 장내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임영옥과 모용건의 격전에 쏠린 틈을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종남파의 고수들에게 접근하던 마의 노인이 느닷없이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쉬악!
마의 노인의 갈쿠리처럼 변한 손가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진산월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갔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의외의 일이었는지라 상원건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이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는 마의 노인의 손가락은 이미 진산월의 목에 거의 닿고 있었다.
“앗!”
누군가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절대절명의 순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진산월의 신형이 빠르게 한바퀴 선회했다. 거의 동시에 임영옥과 모용건이 싸우고 있는 곳에서 예리한 파공음과 서릿발같은 검기가 연거푸 일어났다. 중인들은 양쪽에서 벌어지는 격변에 놀라고 당황하여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지 모르는 모습들이었다.
차차창!
쾅!
“크윽!”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마찰음 소리와 요란한 폭음, 다급한 비명소리가 연거푸 터져나왔다. 세찬 경기가 바닥의 모래를 쓸어올려 장내에는 모랫가루가 자욱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잠시 후, 모래가 서서히 걷히며 드러난 광경을 보자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산월은 처음의 위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서 조금 전의 격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의 반쯤 쳐들려진 오른 손에는 하나의 주름진 손목이 붙잡혀 있었다. 그 손은 온통 쭈글쭈글하고 힘줄이 툭툭 불거져 마치 고목나무의 뿌리를 보는 것 같았다. 기이하게도 손톱과 손가락 끝이 은은한 푸른 빛을 띄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왠지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은 다름아닌 마의 노인이었다. 마의 노인은 완벽하게 성공할 줄 알았던 자신의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자신의 맥문(脈門)이 진산월의 손에 제압 당해 있자 얼굴이 흉칙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마의 노인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가 중얼거리듯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곡신조(鬼哭神爪)… 당신은 귀송자(鬼松子) 양봉(梁蜂)이었구료.”
마의 노인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귀송자 양봉은 오래 전부터 여량산(呂梁山) 일대를 주름잡으며 온갖 살인과 음행(淫行)을 저지르던 인물이었다. 그는 손속이 잔인하여 자신의 눈밖에 벗어난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닥치는대로 죽였을 뿐 아니라, 수많은 부녀자들을 강제로 겁탈하여 악명을 자자하게 떨치고 있었다. 원래 백의 미남자가 양봉에게 은밀히 전한 부탁이란 바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진산월을 암습하여 제압하라는 것이었다.
양봉은 자신의 무공이라면 유명무실한 종남파의 풋내기 장문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흔쾌히 백의 미남자의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다. 양봉은 이 일이 너무 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완벽한 기회를 포착하여 손을 썼건만, 오히려 자신이 제압당해 버렸으니 그로서는 당하고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그의 생각이 조금만 더 깊었다면 왜 신목령의 고수가 굳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한 번쯤은 경각심을 가졌을 것이다. 일단 맥문을 제압당하고 나자 전신의 기력이 산산이 흩어지고 내공을 제대로 끌어올릴 수 없어 양봉의 운명은 진산월의 손에 맡겨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진산월은 양봉은 쳐다 보지도 않고 임영옥과 모용건이 싸우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영옥과 모용건이 있는 곳은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서 있던 반경 오장 이내는 마치 폭풍이라도 만난 듯 여기저기에 움푹움푹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모용건은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임영옥은 그에게서 삼 장 쯤 떨어진 곳에 장검을 비껴든 채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손에 들려있던 흑우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인들이 안력을 돋구어 보니 흑우선을 들고 있던 모용건의 오른손은 온통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옷은 군데군데 마구 찢겨지고 혈흔(血痕)이 내비쳐 금시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임영옥의 옷도 우측 어깨와 왼쪽 옆구리 부근의 옷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다행히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절대적으로 우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원건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임영옥의 옷에 뚫린 구멍들이 암기에 의한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즉시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군. 모용건의 흑우선은 경우에 따라서는 암기(暗器)로 쓸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었구나.’
상원건의 짐작대로 조금 전에 모용건은 자신이 비장하고 있던 한 수를 사용했던 것이다. 마의 노인이 진산월을 기습하자 임영옥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모용건은 그녀에게로 돌진하며 흑우선의 끝에 달려 있는 수술을 잡아 뽑았다.
순간, 스물 두 개의 깃털로 이루어져 있던 흑우선은 스물 두 개의 암기로 변해 임영옥의 전신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용건이 비장하고 있던 흑우천지망(黑羽天地網)의 암수였다.
스물 두 개의 깃털 끝에는 작고 날카로운 금강석(金剛石)이 박혀 있었다. 이 금강석과 깃털 사이사이에 연결해 놓은 철심이 서로 조화하여 흑우를 무시무시한 암기로 만들어 놓았다.
스물 두 개의 흑우는 은밀하게 내장되어 있는 용수철 장치를 통해 발사되기 때문에, 일단 발사하면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무서운 속도로 상대의 전신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 흑우천지망의 가공할 공격을 받아낸 사람은 없었다.
하나 그 신화는 이제 깨어지고 말았다. 임영옥은 찰나의 순간에 수중의 검을 질풍처럼 휘둘러 사십팔검(四十八劍)을 쏟아냈다.
자신의 앞에 엄밀한 검기의 벽(壁)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무서운 위세로 날아오던 흑우는 그 검기의 벽에 가로막혀 대부분이 튕겨나가고, 단지 두 개의 흑우만이 그녀의 옷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내뻗은 그녀의 일검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모용건의 오른손을 꿰뚫어 버렸던 것이다.
설명은 길지만,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진 것은 그야말로 숨 한 번 내쉴만한 짧은 순간이었다.
모용건은 자신이 비장의 절초로 생각했던 흑우천지망이 너무도 맥없이 격퇴당하고 오히려 오른손을 못 쓰게 되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손등에 구멍이 뚫린 손에서 계속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지혈(止血)할 생각도 없는지 그저 멍하니 임영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거지….? 어떻게…”
그는 입속으로 이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임영옥은 천천히 수중의 장검을 거두었다.
“당신이 처음부터 그 수를 썼으면 어쩌면 내가 막을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뜸을 들였어요.”
“……!”
“나는 당신이 일방적으로 몰리면서도 흑우선을 계속 나에게 고정시키고 있는 것을 보고 필시 당신에게 다른 암수(暗手)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거에요.”
모용건의 신형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알아차렸다. 그는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흑우천지망을 썼어야 했다. 하나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과, 그 수법을 써도 그녀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주저했고, 그것이 결국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강호에서 명성을 떨쳐온 흑수사 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백의 미남자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잘 구경했소. 과연 당신들 두 사람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백의 미남자는 천천히 진산월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진산월은 여전히 양봉의 맥문을 쥔 채 담담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당신이 나섰어야 했소.”
백의 미남자는 의외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당신들 두 사람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소. 일전에 운문세가의 팔염라가 여고수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는 말을 들었소. 난 그 소문의 진위(眞僞)를 확인하고 싶었지. 또 당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도 궁금했었소.”
“그럼 이제 궁금한 점이 모두 풀렸소?”
백의 미남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사매의 실력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소. 그녀의 검법은 비록 여자로서는 탁월한 것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소.”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나는 어떻소?”
백의 미남자는 한 차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잘 모르겠소. 나는 솔직히 모용건과 당신 사매의 싸움보다는 양봉의 기습이 당신에게 통할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었는데, 당신이 너무 수월하게 그의 기습을 막아내어 오히려 어리둥절한 느낌이오.”
“그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오. 나는 처음부터 줄곧 양봉과 당신의 움직임만을 주시하고 있었소.”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사매와 모용건의 승패(勝敗)가 어떻게 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오?”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한 몸은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담담한 말이었으나, 상원건은 그 말을 듣자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러한 말은 결코 단순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전적인 신뢰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백의 미남자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였다.
“흐흐… 과연 듣던 대로군. 당신들 두 사람의 사이가 제법 뜨겁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녀의 실력으로는 나를 당해내지 못할 거요.”
그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거렸다. 금시라도 임영옥을 향해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그때 진산월이 불쑥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백의 미남자는 원래 임영옥을 먼저 제거한 후 진산월을 향해 손을 쓰려 했다. 그런데 진산월이 때 아니게 자신의 이름을 물어오자 순간적으로 몸이 멈칫거렸다. 진산월이 입을 연 시기가 아주 교묘해서 그가 막 몸의 진기를 끌어올리는 순간에 그 맥을 끊었던 것이다.
백의 미남자의 신형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허공으로 솟구칠 듯 하다가 안정되었다. 상원건은 내심 백의 미남자의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기의 발동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고도의 훈련과 정심(精深)한 공력(功力)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의 미남자는 다소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는 심옥당(沈玉堂)이오.”
“좋은 이름이군. 심옥당, 당신은 굳이 번거롭게 심력(心力)을 소모할 필요가 없소.”
백의 미남자, 심옥당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굳이 우리들을 모두 쓰러뜨리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당신은 오직 나 하나만을 상대하면 되는 거요.”
그 말에 심옥당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심옥당은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하나 진산월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어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눈이 날카로운 백의 미남자로서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도전(挑戰)하는 거요?”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내 신분으로 일개 령(令)의 수하에 불과한 당신에게 도전할 수 있겠소? 내 말은 그저 당신과 나의 싸움으로 이번 일을 종결 짓자는 것이오.”
심옥당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사실 진산월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종남파가 유명무실한 존재라 해도 일파(一派)의 존주(尊主)인 진산월에게 도전이라는 말은 맞지가 않았다. 하나 그렇더라도 신목령의 칠호사자인 심옥당을 일개 수하로 비유한 것은 자존심 강한 심옥당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심옥당은 마음이 냉정하여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지금은 진산월의 얼굴을 짓뭉개 주고 싶은 야릇한 충동에 빠졌다. 그는 진산월처럼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닌 자를 경멸해 왔다.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여유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이 심옥당의 생각이었다. 그의 음성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냉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내가 이긴다면?”
진산월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당신의 목적은 동중산이 지닌 물건을 입수함과 아울러 나를 제거하려는게 아니오?”
“그렇소.”
“그러니 당신이 이긴다면 내 목과 동중산의 물건을 함께 내놓겠소.”
종남파 고수들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했다. 그들은 진산월이 쓸데없는 자신감이나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호를 위진(威震)시키고 있는 신목령의 고수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진산월의 지금 말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심옥당도 진산월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안광을 예리하게 번뜩이며 다시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대신 내가 이긴다면…”
심옥당은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물론 내 목을 주겠소.”
진산월은 의외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당신과 별다른 원한도 없는데 당신의 목을 가져다 무엇하겠소?”
“그렇다면…”
“내가 이기면 당신은 그저 당신에게 나를 제거하라고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만 알려주면 되는거요.”
심옥당의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그걸로 되겠소?”
“지금의 나에게는 당신의 목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오.”
심옥당의 눈빛이 다시 변했다. 진산월의 말은 자신을 깔보는 것 같기도 했고, 그 속에 또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 진산월의 의중이야 어찌 되었건 심옥당은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진산월은 자신을 죽이라고 부탁한 사람이 누구인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결코 심옥당을 이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옥당은 갑자기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하하… 당신의 제안은 무척 마음에 드는군. 나는 당신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하겠소.”
진산월은 손을 내밀어 양봉의 마혈(痲穴)을 제압하고는 앞으로 두 걸음 걸어나왔다.
“그럼 이제 시작해 봅시다.”
심옥당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당신은 듣던 것보다 호쾌한 면이 있군. 그래서 말인데…”
그의 음성이 갑자기 가늘어졌다.
“당신을 결코 쉽게 죽이지는 않겠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진산월의 코앞으로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정말 번갯불과도 같아서 중인들이 눈앞에서 무언가 희끗한 것이 번뜩였다고 느낀 순간, 심옥당의 몸은 이미 진산월에게서 다섯 자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달해 있었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때까지도 심옥당은 손을 내뻗거나 어떠한 공세도 취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옥당은 그저 눈부신 속도로 진산월을 향해 다가서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아직 공격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진산월로서도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막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부딛히려는 순간, 심옥당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아!”
상원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심옥당의 신형은 어느 새 진산월의 머리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 속도가 너무도 빨라서 중인들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진산월의 머리 위로 올라선 심옥당의 오른 손이 가볍게 흔들거렸다.
파파팍!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한 날카로운 장영(掌影)이 진산월에게로 쏘아져 내렸다. 원래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의 공격은 장공(掌功)보다는 지법(指法)이나 금나수(擒拿手)가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나 심옥당이 진산월의 위에서 장력을 날리자 그 효과가 배가(倍加)되어 진산월은 어느 곳에라도 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남아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딛히는 것 뿐이었다.
진산월은 오른 손을 크게 휘둘러 반원을 그렸다.
쾅!
폭음이 터지며 백사장의 모랫가루가 사방으로 세차게 휘날렸다. 중인들은 진산월이 신형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았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 있던 심옥당이 더욱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떨어지며 진산월을 향해 덮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앗?”
중인들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경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들의 눈에는 진산월이 도저히 심옥당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금시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뒤로 물러나는 와중에 중심을 잡으려는 듯 양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심옥당은 진산월이 마구잡이로 두 팔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자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떠올리며 떨어지는 기세 그대로 오른손을 빠르게 세 번 흔들었다.
파파팡!
그의 손에서 세 줄기 장력(掌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가 펼친 것은 삼첩장(三疊掌)이라는 것으로, 일장(一掌)보다 이장(二掌)이 빠르고 이장보다 삼장(三掌)이 더 빨라져서 종내에는 세 개의 장력이 함께 합쳐져 마치 세 사람이 동시에 손을 쓴 듯한 위력을 발휘하는 상승절학(上乘絶學)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듯 펼쳐지는 삼첩장의 위세는 가히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허공을 휘적거리던 진산월의 손이 삼첩장의 장영(掌影)에 휘감겨 버렸다. 순간,
타타타탁!
마치 폭죽이 터지는 듯한 세찬 음향이 연거푸 터져나오며 경기가 마구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진산월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시 연거푸 서너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심옥당은 조금 전까지만해도 진산월이 서 있던 자리에 우뚝 내려선 채 전혀 신형의 흔들림이 없었다. 누가 보아도 진산월의 열세가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하나 의외로 뒤로 물러난 진산월의 얼굴은 태연한 반면, 심옥당은 표정이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심옥당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진산월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진산월은 한 차례 더 몸을 휘청거린 다음에야 간신히 신형을 안정시키고는 심옥당을 향해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대단한 무공이오.”
심옥당의 눈에 괴이한 빛이 번쩍거렸다. 그는 한동안 묵묵히 서 있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 쓴 수법은 무엇이오?”
“별로 내세울 만한 게 아니오.”
“그것도 종남파의 무공이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본파의 무공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소?”
심옥당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상원건은 심옥당이 분명 우세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보기에 진산월의 무공은 별다른 것이 없었고,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것이 신통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몰린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지금 심옥당은 마치 자신이 손해를 본 것처럼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심옥당은 무의식적인 듯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왼쪽 소맷자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상원건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안력을 돋구어 보았다.
“음…”
그의 입술을 뚫고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심옥당의 왼쪽 소맷자락은 너덜너덜하게 찢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심옥당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대체 심옥당의 소매가 언제 찢겨졌단 말인가? 그것은 남보다 눈이 빠르다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던 상원건으로서도 전혀 짐작치 못한 일이었다.
심옥당은 비록 진산월을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게 했으나, 소맷자락이 찢겨 우세를 점했다고 말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자존심 강한 심옥당으로서는 오히려 자신이 패한 것과 같은 치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옥당은 차갑게 굳은 눈으로 진산월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누구라해도 그가 지금 강한 살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무형(無形)의 기운은 주위의 공기를 싸늘하게 식게 할 정도로 살인적인 것이었다.
갑자기 심옥당은 어깨를 흔들면서 빠르게 진산월의 정면으로 다가섰다. 그의 몸은 여전히 빨랐으나 처음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상원건은 금새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 심옥당이 진산월에게 덤벼들었을 때는 별다른 자세를 취하지 않았었다. 한데 지금 심옥당은 양 손을 반쯤 들어올려 한시라도 장력을 날릴 수 있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그 기세 또한 처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진산월에게 의외의 낭패를 당한 후 전력을 기울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산월도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성큼 한 걸음을 내딛으며 오른 주먹을 세차게 앞으로 내뻗었다.
그것은 장괘장권구식 중에서도 빠르고 날카롭기로 유명한 천성탈두 일식이었다. 심옥당의 양손이 앞뒤로 선회하며 폭풍같은 십이장(十二掌)을 연거푸 뿜어내었다.
콰콰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이 거푸 터져나오며 주위 사방이 온통 휘날리는 모랫가루와 세찬 경기에 휩쓸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맹렬하게 손속을 주고 받았다. 심옥당은 진산월을 단숨에 물리치려는 듯 처음부터 기기묘묘한 절초들을 쉬지 않고 펼쳐냈다.
쉬이익..!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장내에는 마치 귀신의 흐느낌 같은 괴이한 호곡성과 함께 시퍼런 장영이 줄기줄기 뿜어나왔다.
그가 펼치고 있는 것은 낙화십팔산수(落花十八散手)라는 것으로, 이십 년전에 강북에서 가장 유명한 풍류남아였던 낙화수사(落花秀士) 조옥린(趙玉麟)의 성명절기였다.
당시 조옥린은 옥(玉)을 깎아 놓은 듯한 수려한 용모와 세련된 화술, 그리고 산화영신법(散花影身法)과 이 낙화십팔산수로 강북 무림을 질풍처럼 휩쓸고 다녔었다.
그 유명한 낙화십팔산수가 준수한 용모의 심옥당의 손에 의해 펼쳐지자 마치 석년의 낙화수사 조옥린이 다시 사람들 눈앞에 재현(再現)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진산월의 주위는 온통 심옥당의 손그림자에 뒤덮혀 그의 모습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진산월은 장괘장권구식으로 맞섰으나 신형을 제대로 안정시키지 못할 정도로 뒤로 밀리고 있었다.
장괘장권구식이 비록 종남파의 절기라고는 하나 낙화십팔산수의 맹렬한 위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파팡!
다시 심옥당의 장력과 진산월의 주먹이 허공에서 빠르게 십여번 격돌했다. 심옥당은 한 차례 신형을 휘청거린 반면, 진산월은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심옥당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더욱 신속하게 진산월을 향해 접근하며 양손을 질풍처럼 내질렀다. 낙화십팔산수의 절초들이 마치 구슬다발처럼 줄기줄기 뿜어나왔다. 진산월은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계속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심옥당의 두 눈이 횃불처럼 번뜩였다.
돌연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한 바퀴 회전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머리를 밑으로, 발을 위로 둔 형상이 되었다. 그와 함께 그의 두 손이 더욱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파팡!
몸을 거꾸로 회전시키며 위에서 아래로 퍼부어지는 심옥당의 공세는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응비회(神鷹飛廻)라는 신법이었다. 원래 신응비회는 회전력과 반탄력을 이용하여 공세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효능이 있으나,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으면 펼칠 수가 없어서 지금과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의 접근전에서는 좀처럼 사용하기 힘든 무공이었다.
하나 진산월이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간격이 벌어지자 심옥당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응비회를 펼친 것이다.
진산월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허공에 떠있던 심옥당의 신형은 진산월과 격돌한 탄력을 이용해 다시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더욱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쉬아악!
매섭기 그지없는 경력이 무서운 기세로 진산월의 가슴을 압박해 들어갔다. 낙화십팔산수 중에서도 절초로 손꼽히는 심화봉혈(心花逢血)의 수법이었다.
이 초식은 상대의 심장 부근에 집중적으로 막중한 압력을 가해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살인적인 공세를 당해 누가 보기에도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종남파 고수들은 물론이고 좀처럼 침착을 잃지 않던 상원건의 안색조차 핼쓱하게 변했다. 진산월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광경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금시라도 쓰러질 듯 하던 진산월의 신형이 갑자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주위에 수많은 손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두 개뿐인 그의 팔이 마치 수 십개로 불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심옥당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원래 심화봉혈은 인체의 심장만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수법이기 때문에 그 위력이 막강한 반면에 공격범위는 극도로 좁아지게 된다.
따라서 정확히 상대의 심장 부위를 가격하지 않으면 그 본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심옥당은 진산월이 전혀 반격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신있게 심화봉혈의 수법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진산월이 몸을 선회하는 바람에 그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심화봉혈의 수법은 자연히 그 효능을 상실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