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10화
제21장. 수상경변(水上驚變)
심옥당은 진산월의 가슴을 향해 후려쳐가던 심화봉혈의 수법을 황급히 혈화표풍(血花飄風)으로 바꾸어 진산월의 전신을 노려갔다.
하나 그때는 이미 삼 사십 개로 늘어난 진산월의 수영(手影)이 심옥당의 앞으로 몰아쳐오고 있었다.
콰쾅!
경기가 사방으로 날리며 심옥당의 몸이 처음으로 비틀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심옥당의 얼굴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가 신목령주의 휘하에 든 이래로 남과의 싸움에서 뒤로 물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구나 절세의 절학인 낙화십팔산수를 펼쳐 절대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심옥당이 받은 충격은 처음에 소맷자락이 찢어졌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심옥당의 눈에 진산월이 다시 신형을 회전하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진산월의 양 팔이 활짝 벌려진 채로 심옥당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들었다.
심옥당은 이를 갈아붙이며 낙화십팔산수 중의 백화토예(百花吐蘂), 비화축전(飛花逐電), 도화수파(桃花隨波)를 연거푸 펼쳐냈다.
이 초식들은 비단 날카롭고 강맹할 뿐 아니라 지금처럼 연이어 시전하면 더욱 무서운 효과를 발휘하여 낙화십팔산수 중에서도 최고의 연환삼식(連環三式)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지금도 심옥당의 손이 움직인다 싶은 순간, 장내에는 온통 그의 손그림자로 휘감겨 버렸다.
파파파팍!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회전하며 달려들던 진산월의 신형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연신 휘청거리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몸이 태풍 앞의 가랑잎처럼 흔들리면서도 회전을 멈추지 않고 계속 선회하며 심옥당을 향해 다가들었다.
심옥당의 옷자락이 마구 펄럭거리며, 그의 관자놀이에 퍼런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심옥당은 지금이 승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기임을 깨닫고 전신의 내공력(內功力)을 모두 끌어올린 것이다.
진산월 또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두 팔을 풍차(風車)처럼 돌린 채 심옥당의 전면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파스스…
진산월의 소맷자락 일부가 가공할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먼지처럼 부스러져 버렸다. 이것만 보아도 지금 심옥당이 뿜어내는 연환삼식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콰쾅!
심옥당의 연환삼식이 회전해 들어오는 진산월의 몸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진산월의 몸이 멈춰지며 그의 가슴팍이 환하게 드러났다.
심옥당의 눈이 먹이를 본 맹수처럼 무섭게 번뜩거렸다.
“이제 끝장이다!”
심옥당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활짝 열려진 진산월의 가슴을 향해 벼락같은 일장(一掌)을 내뿜었다.
아니, 내뿜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멈춰졌던 진산월의 몸이 반대 방향으로 무섭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와 함께 그의 신형은 회전하는 기세 그대로 무서운 속도로 심옥당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것은 장내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상황이었다.
“엇?”
심옥당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내뻗으려던 손을 황급히 거두어 자신의 앞가슴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나 진산월의 돌진하는 기세가 그의 물러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파파팡!
마치 거대한 가죽북을 연거푸 두들기는 듯한 격타음과 함께 회전하는 진산월의 신형과 심옥당의 손이 격렬하게 허공에서 교차했다.
중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장내의 광경을 주시했으나, 두 사람의 신형이 워낙 빨라서 어찌된 상황인지 좀처럼 알아볼 수 없었다.
파아앙!
갑자기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한 사람의 신형이 허공을 훌훌 날아갔다.
그 인영은 십 여장을 날아 바닥에 내려서서 한 차례 신형을 휘청거리더니 이내 다시 허공을 박차고 날아 올라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오늘의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마치 씹어 뱉는 듯한 음성이 멀어지고 있는 인영에게서 흘러나왔다.
중인들이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에 순식간에 그 인영은 아득히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신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인들은 그때까지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황급히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격전이 벌어졌던 곳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중인들은 그의 몸에 별다른 부상이 없는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장문사형. 무사하셨군요.”
정해가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진산월은 힐끗 그를 돌아보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낙일방이 불게 상기된 얼굴로 다가오며 흥분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장문사형. 정말 대단했어요. 그 콧대높고 건방진 놈을 보기 좋게 물리치셨군요.”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낙일방은 원래 모용건의 손에 낭패를 당하고 쓰러져 있다가 진산월과 심옥당의 싸움이 한참 절정에 다다랐을 때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모용건에게 맥없이 당한 것이 너무도 분해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를 악물고 장내의 격전을 주시하고 있다가, 일방적으로 몰릴줄 알았던 진산월이 의외로 심옥당을 물리치자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뻐했다.
낙일방은 마치 자신이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을 반짝거리며 연신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장문사형이 조금 전에 펼친 것은 장괘장권구식이지요? 장괘장권구식에 그런 위력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낙일방은 신이 나서 계속 떠들어댔다.
“처음에 펼친 것이 조운육환(彫雲六環)과 삼환투일(三環偸日)이고, 이어서 오강감계(五剛坎桂)까지는 저도 알겠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펼친게 뭐죠? 눈에 상당히 익은 초식인데 당최 모르겠군요.”
진산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연 사람은 임영옥이었다.
“그건 천전만권(千纏萬捲)이야.”
낙일방이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천전만권이라고요? 하지만 천전만권에는 그렇게 선회하는 방식이 없잖아요.”
“그건 어떻게 응용하느냐에 달렸지. 대사형은 조금 전에 천전만권을 횡(橫)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그 말에 낙일방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나직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원래 장괘장권구식 중의 천전만권은 변화가 많고 빠른 초식이었으나 원래는 종(縱)으로 펼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산월이 회선표(廻旋飄)의 신법으로 몸을 선회시키면서 옆으로 펼치자 또 다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낙일방은 지금까지 다른건 몰라도 장괘장권구식 만큼은 자신이 종남파의 문하들 중 가장 잘 익혔다고 은근히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진산월이 순전히 장괘장권구식만으로 신목령의 고수를 물리치는 광경을 보자 자신이 익힌 것은 수박 겉햝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전만권에 회선표 신법과 횡의 변화를 가미하여 지금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난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그런데 장문사형은 대체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낙일방은 생각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몸을 툭 건드렸다.
“장문사형.”
진산월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한 차례 내저으며 빙긋 웃었다.
“녀석. 난 괜찮다. 너야 말로 다친 곳은 없었느냐?”
낙일방은 그가 부상이라도 당했나 은근히 걱정하다가 이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헤헤… 저야 원래 맞는건 이골이 났잖아요. 그런 솜방망이 같은 주먹은 아무리 맞아도 끄덕 없다구요.”
정해가 피식 웃으면서 그의 뒷통수를 가볍게 쳤다.
“조금 전만 해도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놈이 큰 소리 치기는… 그런데 그 심옥당인가 하는 자는 정말 치졸하군요. 의당 졌으면 약속을 지켜야 하거늘 그냥 내빼다니. 신목령의 고수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원래 심옥당은 진산월과의 대결에서 패하면 진산월을 살해하라고 부탁한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떠나버렸으니 정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나 의외로 진산월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정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자는 떠나기 전에 내게 전음(傳音)으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정해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그자가 누굽니까?”
진산월은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동중산은 어디에 있지?”
그 말에 중인들은 문득 생각이 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동중산은 보이지 않았다. 중인들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다가 낙일방이 한 곳을 가리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앗? 저기…”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낙일방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있는 강변에서 이십 여장 떨어진 강의 중앙에 언제 나타났는지 한 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나룻배의 중앙에 동중산이 웃으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언제 나룻배가 나타났단 말인가? 그리고 동중산은 언제 그곳으로 올라탔단 말인가?
“하하…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아무래도 나는 종남파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오. 하하…”
동중산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연신 어깨를 들썩이며 대소를 터뜨렸다. 그가 탄 나룻배는 서너 사람이 간신히 탈 정도로 좁고 협소했는데, 한쪽 끝에는 늙은 뱃사공 한 사람이 노를 잡고 있었다. 이제 보니 동중산은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나룻배를 발견하고는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진산월과 심옥당의 싸움에 쏠린 틈을 타서 몰래 나룻배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낙일방은 물론이고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분기탱천하여 동중산을 노려보았다. 하나 동중산이 있는 나룻배와 강변은 이십 여장이 훨씬 넘게 떨어져 있어, 제아무리 신법의 고수라 할지라도 나룻배로 올라탈 수가 없었다.
“동중산… 네놈이 감히 이럴수가….”
낙일방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구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바로 동중산과 그가 지닌 물건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동중산은 중인들의 눈을 피해 몰래 혼자서만 도망쳐 버렸으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중산은 선상(船上)에 우뚝 선 채로 짐짓 포권을 해보였다.
“그럼 불초 제자는 이만 가보겠으니, 장문인을 비롯한 사문의 어른들께서는 그곳에서 편하게 쉬시기 바라오. 하하…”
그의 말은 비꼬는 빛이 역력했다. 낙일방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었다. 만약 정해가 막지 않았더라면 그는 동중산을 잡는 답시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을 것이다.
“놔요, 사형. 저런 놈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낙일방은 자신을 붙잡는 정해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정해는 낙일방의 팔을 끌어안은 채 그를 말렸다.
“참아라. 네가 아무리 자맥질에 능통하다 해도 어떻게 배를 쫓아갈 수 있겠느냐?”
낙일방은 솟구쳐 오르는 분을 눌러 참느라 준수한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는 눈물마저 글썽이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장문사형… 어떻게 이럴 수 있죠? 강호인(江湖人)들은 모두 저렇게 후안무치(厚顔無恥)한가요?”
진산월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워졌다. 심지어는 좀처럼 침착을 잃지 않고 있던 임영옥마저 가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단순히 동중산이 물건을 가지고 몰래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이토록 침울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동중산은 종남파의 제자였다. 그가 비록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그런 길을 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약식(略式)으로라도 입문(入門) 절차를 밟았으니 파문(破門) 당하기 전까지는 누가 뭐라해도 종남파의 문하인 것이다.
문하제자가 장문인과 사문의 어른들을 속이고 혼자 도망쳤다는 것은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죄를 저지른 것과 다름없었다. 다른 문파와 마찬가지로 종남파에서도 기사멸조의 죄인(罪人)은 엄벌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문규(門規)를 바로 세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동중산은 그들이 손댈 수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그를 놓친다면 종남파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동중산을 태운 배는 밤의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한데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배가 강심(江心)에 이르렀을 때, 배가 갑자기 기우뚱하며 금시라도 뒤집힐 듯 흔들렸다.
“엇?”
동중산이 깜짝 놀라 신형을 휘청거리는 순간, 노를 젓고 있던 뱃사공이 어느 새 동중산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 동작이 어찌나 민첩하고 재빠르던지 동중산은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맥없이 뱃사공의 손에 혈도를 짚혀 버렸다.
쿵!
동중산은 차가운 배의 갑판 위에 힘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뱃사공을 올려다보는 동중산의 얼굴은 그야말로 경악과 공포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요?”
뱃사공은 그를 내려다 보며 히죽 웃었다.
“조금 전에 내게 배를 태워달라고 사정했으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인가?”
그의 음성은 노인답게 부드럽고 온화했으나 말꼬리가 약간 비틀려져 있어서 왠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동중산은 표정이 더욱 창백하게 굳어지며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그는 뱃사공의 음성에서 한 명의 무서운 인물을 떠올렸던 것이다.
얼마 전 용문석굴 앞에서 잠깐 보았던 화의노인. 그 자는 혁련삼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지만 동중산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다… 당신은 변….”
동중산이 채 무어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뱃사공은 불쑥 손을 내밀어 그의 아혈(啞穴)마저 짚어 버렸다.
“자네는 말이 너무 많네. 그것은 오래 사는데 결코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지.”
이어 뱃사공은 천천히 쓰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드러나는 얼굴은 머리가 허옇고 얼굴이 붉으스름한 인자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사람 좋게 생긴 온화한 모습이었으나, 눈빛이 서릿발처럼 날카로워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강변에 서있는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탄 배에서 강변까지의 거리는 삼십 장이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중인들은 그 먼거리에서도 번쩍이는 노인의 안광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노인의 내공이 얼마나 정심(精深)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노인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허허… 강바람이 찬데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노부를 배웅해주니 고맙기 그지 없군. 동중산은 노부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려 보낼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모르는 사람이 그의 말을 들었다면 점잖은 노문사(老文士)가 젊은 유생(儒生)들을 다독거리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중인들은 돌연한 사태에 놀라고 당황하여 망연자실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배에 타고 있는 노인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결코 동중산에게 호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강호에서 경험이 풍부한 상원건조차도 미처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도 상대의 얼굴을 정확히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노인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상원건은 그에게서 동중산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마음이 다급해졌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노인이 탄 배를 쫒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그치지 않으며 배를 반대편 강변으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그때 진산월이 갑자기 빙긋 웃으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되었다. 저자까지 갔으니 안심이구나.”
상원건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떠올랐다. 안심이라니… 도대체 진산월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중인들은 멍하니 진산월을 바라보았으나, 진산월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그치지 않고 있었다. 낙일방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산월을 향해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장문사형.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이제 안심이라니… 왜 그런 말씀을 하는거죠?”
진산월은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저 자가 동중산을 데리고 떠난 이상 앞으로는 우리에게 별 탈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안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낙일방은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장문사형! 그걸 말이라고…”
그는 더 입을 열었다가는 자신의 입에서 무슨 험악한 소리가 나올지 몰라 아예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짙은 경악의 빛이 서려 있었다. 놀라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원건은 동중산이 귀찮은 존재이기는 했지만 설마 진산월이 이렇듯 노골적으로 말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와중에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자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런데 이자는 왜 이런 말을 굳이 입밖에 내는 것일까?’
동중산이 종남파에 들어오겠다고 할 때 중인들의 탐탁치 않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선뜻 받아들인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동중산이 떠나갔다고 기뻐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진산월을 지켜보았던 상원건으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진산월은 계속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낙일방은 그런 진산월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무심코 강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어? 저 자는 왜 아직 가지 않았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중인들의 얼굴에도 일제히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이미 반대쪽 강변에 도착해 있을 줄 알았던 배가 그들에게서 불과 칠 팔장 떨어진 거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배 위에는 예의 노인이 우뚝 선 채 형형한 안광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했는데도 노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진산월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자네가 한 말은 무슨 뜻인가?”
진산월은 그가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직도 떠나지 않았단 말이오?”
노인은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신광(神光)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눈쌀을 살짝 찌푸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눈에 괴이쩍은 빛이 번뜩거리며 지나갔다.
“당당한 일파(一派)의 장문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실망이로군.”
진산월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오.”
노인은 그의 속마음을 궤뚫어 보려는 듯 여전히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하나 진산월의 얼굴에는 조금 귀찮아 하는 빛만 떠올라 있을 뿐,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노인은 한 차례 머뭇거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판위에 쓰러져 있는 동중산에게로 다가갔다. 이어 재빠른 손길로 그의 품속을 뒤지는 것이었다.
곧, 노인은 동중산의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 물체를 손에 든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중산의 품에서 나온 물건은 다름아닌 평범한 돌맹이였던 것이다. 노인은 돌맹이를 만져보다가 다시 동중산의 품속을 뒤졌다. 하나 동중산의 품속에는 돌맹이 외에 다른 물건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어디에 있나?”
진산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엇이 말이오?”
“조금 전에 동중산에게서 받은 물건이 어디에 있느냔 말일세.”
진산월의 손가락이 노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돌맹이로 향했다.
“지금 귀하가 들고 있지 않소?”
노인의 표정이 한층 더 냉엄하게 굳어졌다.
“지금 노부를 놀리는건가?”
“나는 노인장을 처음 보는데 어찌 놀릴 수 있겠소? 동중산이 내게 준 것은 그 돌맹이였고, 나는 그것을 동중산에게 보관하라고 다시 건네준 것 뿐이오.”
노인의 표정이 다시 한 차례 변했다. 갑자기 그의 신형이 희끗거린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십 장을 날아 모래사장 위에 내려섰다. 그런데도 그가 탔던 배는 전혀 흔들리지도 않고 있었다. 실로 경인(驚人)할 신법(身法)이 아닐 수 없었다. 노인은 다시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삽시간에 진산월에게서 불과 사 오장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당도해 있었다.
“다시 묻겠네. 동중산이 동굴에서 꺼내 자네에게 건네준 진짜 물건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나직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한 기운이 담겨 있어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고 있었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바짝 긴장하여 황급히 진산월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하나 진산월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한 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용문에 온 기념으로 동중산에게 모양이 괜찮은 돌맹이 하나를 구해 오라고 했던 거요. 그래서 동중산이 돌맹이를 구해 왔고, 나는 그것을 동중산에게 다시 건네 주었는데 왜 내 말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노인의 눈빛은 독사(毒蛇)의 그것처럼 끈적끈적한 살기를 품은 채 진산월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우두둑….
노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돌맹이가 가루로 변해 바닥에 부수수 떨어졌다. 손바닥에 돌맹이를 쥐고 가루로 만드는 것은 공력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노인의 내공이 절정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감탄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심후한 내공이오.”
그 말을 듣자 노인의 눈쌀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만큼 살짝 찌푸려졌다. 겉으로는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진산월이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해 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 문득 의구심이 떠올랐다.
‘내가 이 놈의 의병지계(疑兵之計)에 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원래 노인은 애초에 동중산이 품속에 문제의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중산이 비록 용문을 내려오면서 몇가지 기이한 행동을 하기는 했으나, 평소 동중산의 성격으로 보아 그토록 중요한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을리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동중산을 납치해서 끌고 가는데도 펄펄 뛰어야할 진산월이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웃고 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불쑥 의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일부러 강의 반대편으로 배를 모는 척 하며 사실은 공력을 잔뜩 끌어올려 진산월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진산월의 입에서 동중산이 없어져 안심했다는 말이 나오자 솟구쳐 오르는 의구심과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다시 배를 몰아온 것이다. 그가 선뜻 배에서 뭍으로 뛰어내려 온 것도 물건이 이미 진산월의 수중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행동이 성급했다는 후회감이 밀려 들었다.
하나 그렇다면 동중산의 품에서 나온 돌맹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런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미리 그런 수작을 부린 것이란 말인가?’
노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깨닫고 진산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 진산월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도무지 그 속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어찌해야 할 지 망설였다.
이대로 물러섰다가 만에 하나 진산월이 진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속인 것이라면 낭패스런 일이 아닐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를 욱박질러도 그가 정말로 물건의 행방을 모르고 있다면 자신은 헛수고를 하는 격이 아닌가? 더구나 조금 전에 보여준 진산월과 종남파 고수들의 무공으로 보아 자신이 쉽사리 그들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산월과 임영옥의 무공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하나 노인의 망설임은 짧았다. 노인은 이내 별빛처럼 차갑고 냉정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자네의 심기(心機)는 제법 대단하군. 오늘은 내가 한 수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진산월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눈빛을 받았다.
“심기를 쓴 건 내가 아니라 귀하요.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동중산에게 돌맹이를 맡긴 것밖에는 없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자네는 나에게 다른 용무가 있나?”
진산월은 슬쩍 노인이 타고 왔던 배를 쳐다보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귀하의 배에 본문의 제자 한 사람이 신세를 지고 있는 모양인데, 이왕 신세 지는 김에 우리도 함께 신세를 졌으면 좋겠소.”
노인은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이어 그는 두 눈에 괴이한 신광(神光)을 뿜어내며 한동안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별 일이 없으면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가 막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진산월이 그를 불렀다.
“잠깐.”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진산월은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비단주머니 하나를 꺼내 노인에게 던져 주었다. 노인은 영문을 몰라 무심결에 비단주머니를 받았다.
“이게 무언가?”
진산월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배삯이니 받아 두시오.”
노인의 얼굴에 한 차례 붉은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노인은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이어 그는 휑하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멀어져가는 그의 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녹의미소녀가 서 있었다. 녹의 미소녀는 멍하니 노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가 진산월의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흔들리는 두 갈래로 땋은 머리와 유난히 반짝거리는 두 눈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낭자는 천봉궁에서 왔소?”
그가 불쑥 묻자 녹의 미소녀의 어깨가 다시 한 차례 움찔 거렸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도발적인 자세로 양 손을 가느다란 허리춤에 척 올려 놓았다.
“그래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죠?”
“낭자와 심옥당과의 대화로 짐작해 보았을 뿐이오.”
그녀는 여전히 쌀쌀맞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눈치가 빠르군요. 그런데 본 낭자에게 무슨 볼 일이 있나요?”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에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낙일방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우리가 너를 찾아왔냐? 네가 우리를 찾아왔지.’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나는 물론 낭자에게 볼 일이 없소. 낭자도 우리에게 별다른 용건이 없을테니 우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녹의 미소녀는 그가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용건이 없다니…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그럼 낭자는 우리에게 다른 용건이 있단 말이오?”
그녀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게 무엇이오?”
“그건…”
갑자기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천봉팔선자 중의 막내로, 옥봉(玉鳳) 누산산(婁珊珊)이라 했다. 그녀는 평소에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남봉 엄쌍쌍과 특히 친했는데, 얼마전에 엄쌍쌍에게 모종의 부탁을 받고 진산월 일행의 뒤를 따라왔던 것이다. 하나 그 부탁이 무엇인지는 그녀의 입으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엄쌍쌍이 비밀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누산산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일행 중 제일 뒤에 서 있는 낙일방에게로 향했다. 낙일방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고 있다가 그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산산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생긴건 멀쩡한데 멍청하기 짝이 없군. 엄언니는 저런 멍청이가 뭐가 좋다고…’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갑자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뭐긴 뭐에요? 동중산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훔쳐간 물건 때문이지.”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낭자도 그 물건을 노리고 왔단 말이오?”
누산산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성난 표정을 지었다.
“물건을 노리다니… 그건 원래 본궁(本宮)의 물건이란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모든 사람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사실 그들 중 동중산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것이 무림의 많은 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으로 보아 절학(絶學)을 얻을 수 있는 무림의 기보(奇寶)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천봉궁의 물건이라니… 중인들로서는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누산산은 쌀쌀맞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설마 당당한 명문세가라는 종남파에서 남의 물건을 슬쩍할 생각은 아니겠죠?”
낙일방은 아까부터 그녀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에 기분이 언짢아 있다가 이 말을 듣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그게 천봉궁의 물건인지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누산산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표독스런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뭐라고요? 이 불한당 같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에요?”
낙일방은 그녀가 자신을 불한당이라고 하자 화가 치밀어 무어라고 대꾸하려다 그녀의 살기등등한 표정을 보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 없는 마두(魔頭)라 해도 두려워할 낙일방이 아니었으나, 상대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버릇없고 깜찍한 소녀이고 보면 무작정 그녀와 말싸움을 할 생각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 풀 기가 꺾인 음성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제길…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그럼 아무나 그 물건이 자기 것이라고 달라고 하면 무조건 내줘야 한단 말인가?”
누산산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이 기생 오라비 같은 작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그녀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 하마터면 ‘엄언니만 아니었으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다’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낙일방은 누산산이 금새 날카로운 손톱을 앞세우며 달려들 것 같아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슬쩍 정해의 뒤로 물러났다. 낙일방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누산산 같은 버릇없고 사나운 여자와 싸우는 일이었다. 낙일방은 천하에서 사매인 방취아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운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누산산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표정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한 채 암팡진 눈으로 계속 낙일방을 노려보았다.
“내가 할 일 없어서 야밤에 이 먼 곳까지 와서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아요? 대체 천봉팔선자를 어떻게 보고 그따위 소리를…”
낙일방은 더 대꾸할 생각이 없는지 그냥 한 차례 어깨만 으쓱거렸다. 한데 그녀는 그런 모습에 더욱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불만이 있으면 뒤로 숨지 말고 어디 한 번 덤벼보시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고 혓바닥을 뽑아버릴 테니…”
남에게 이런 말을 듣고도 참는다면 낙일방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여자라고 해도 말이다. 과연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며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금시라도 그녀를 향해 뛰쳐나갈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때 때마침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물건이 정말 천봉궁의 것이오?”
막 몸을 날리려던 낙일방의 몸이 주춤거렸다. 누산산은 낙일방이 달려들면 본때를 보여주어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가 진산월이 불쑥 입을 여는 바람에 낙일방이 달려들지 않자 심통이 났는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정말 당신네 종남파 사람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남의 말은 지독히도 안 믿는군요. 당신은 그 물건이 무언지 알기나 해요?”
아마도 코웃음을 치는 것은 그녀의 오래된 습관인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누산산은 진산월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 코를 움찔거리다가 다시 붉은 입술을 빠르게 나불거렸다.
“그럼 당신들은 동중산이 가진 물건이 뭔지도 모르면서 지금까지 이 고생을 했단 말이에요?”
“문하제자를 지키기 위한 것이니 고생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소.”
그녀는 진산월의 태연한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한 장문인이로군요. 당신은 정말 동중산이 종남파가 좋아서 가입한 줄 아세요?”
“그가 본파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그럼 뭐가 중요한 거죠?”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스스로의 의사로 본파에 들어왔으며, 본파에서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거요. 누가 뭐라든 그는 본파의 제자이니 장문인인 나로서는 그를 지켜주는 게 당연한 일이오.”
누산산은 일시지간 말문이 막힌 듯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코끝을 귀엽게 찡긋거렸다.
“말은 제법 그럴 듯하군요. 하지만 당신들은 언제고 동중산 때문에 큰 코 다칠 일이 있을 거에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래야지.”
“흥. 아무튼 본 낭자가 분명히 말하건데, 그 봉황금시(鳳凰金翅)는 누가 뭐래도 본 궁의 물건이에요. 그러니 순순히 그것을 내놓으세요.”
“봉황금시? 그게 그 물건의 이름이오?”
누산산은 여전히 허리에 손을 올려놓은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요. 이름만 봐도 본 궁의 물건인지 알 수 있잖아요.”
“이름에 ‘봉(鳳)’ 자가 들었다고 무조건 천봉궁의 물건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소?”
누산산은 발을 탕 굴렀다.
“아무튼 그건 원래 본 궁의 물건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어서 물건을 내게 넘겨요.”
“그게 천봉궁의 물건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알려주면 동중산을 타일러서 물건을 내놓도록 하겠소.”
누산산의 아미가 하늘 끝까지 치켜올라갔다.
“증거라니… 내가 말했잖아요? 당신은 설마 내 말을 못 믿는단 말인가요?”
그녀의 말은 무례하기조차 했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내가 낭자의 말을 믿고 못 믿는다는 문제가 아니오. 동중산이 납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지.”
“흥! 그 두더지 같은 작자가 납득을 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 물건이 원래 누구 것이었든 지금의 소유자는 동중산이오. 그러니 그가 순순히 납득을 하고 물건을 내놓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그에게 강요할 수 없는 일이오.”
누산산은 마치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벌컥 성을 냈다.
“당신이 정말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인 줄 몰랐어요. 왜 자꾸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는 거에요?”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진산월도 이번에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누산산은 그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숨결이 거칠어지며 두 눈에서 표독스런 빛이 흘러나왔다.
“좋아요. 정 물건을 내놓지 않겠다면 내가 실력으로 빼앗아 가겠어요.”
그녀는 금시라도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산매. 또 쓸데없는 일을 벌이려 하는구나.”
누산산은 막 양 손에 공력을 주입시킨 채 진산월을 향해 몸을 날리려다 그 음성을 듣자 반색을 하며 몸을 휙 돌렸다.
휙!
중인들의 눈앞에 무언가 희끗한 인영이 어른거리는 순간, 장내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황의를 입은 훤칠한 키의 미녀가 우뚝 서 있었다.